강이한은 엄마를 바라보며 실망감이 커져만 갔다.언제부터 엄마가 이렇게까지 냉철하게 변했을까? 그가 어렸을 때는 종종 복지센터로 가서 자원봉사도 했었던 사람이었다.강서희는 보육원에 봉사하러 갔다가 입양한 아이였다. 비록 양녀로 들였지만 진영숙은 친딸처럼 그녀를 아껴주었다.“왜 이렇게 변했나요?”한참이 지난 뒤, 강이한이 실망한 어투로 물었다.갑자기 달라진 아들의 태도에 진영숙이 당황했다.분노에 이성을 잃어서 말이 좀 심했던 건데 갑자기 정신이 확 들었다.진영숙은 눈을 질끈 감고 분노를 억눌렀다.그리고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이한아, 나도 그 아이의 처지가 안타깝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걸 다 네가 떠안을 필요는 없어. 안 그래?”평생 옆에 끼고 살 게 아니면 차라리 관심을 주지 않는 게 나았다.세강의 이미지를 생각해서라도 장님을 며느리로 들일 수는 없었다.강이한은 말없이 모친을 빤히 바라만 보았다.진영숙이 계속해서 말했다.“너 잊었어? 나랑 네 아버지가 여기까지 오려고 얼마나 힘들었는지?”세강은 전대 회장이 돌아가고 방계 가족들과 치열한 경영권 다툼을 겪었다. 집안 싸움에 회사가 공중분해 될뻔한 것을 겨우 살려냈다.강이한이 그만큼 능력이 뛰어났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그때 진영숙은 다른 가문들과 암암리에 정략결혼을 약속해서 세강의 입지를 다졌다. 그때부터 그녀는 정략결혼이 가져다 주는 이득에 맛을 들였다.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는 것도 좋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가문에 도움이 된다면 더 좋은 일이 아닌가.그래서 강이한이 유영을 데리고 왔을 때 그토록 그녀를 싫어하고 배척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한지음의 존재는 더 받아들일 수 없었다.엄마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강이한의 표정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세강이 여기까지 오는데 풍파가 적었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초기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여기까지 왔고 그가 그룹 경영을 맡으면서 비로소 입지를 튼튼히 다질 수 있었다.“이한아, 엄마도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사람은 멀리
강이한에게는 유영에게조차 말하지 않은 과거가 있었다.그가 가장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었다.그는 피비린내가 진동하던 그때를 평생 잊을 수 없었다.강이한은 한지음이 예뻐서, 그녀에게 반해서 잘해준 게 아니었다. 한지음이 세강에 입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아픈 과거와 연관이 있었다.그때 강이한의 할아버지가 돌아가고 방계 친척들의 물밑 공격이 시작되었다.진영숙도 그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전대 회장이 세상을 뜨고 회사의 주주들과 지분을 보유한 방계 친척들은 합세해서 세강을 차지하려고 했다.그들은 어린 강이한을 납치하고 강이한의 아버지에게 경영권에서 물러나라고 협박했다.강이한은 가까스로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한 소년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그 사고가 있은 후, 가족들은 소년의 가족을 찾아가서 보상을 해주려 했지만 강이한에게서 그 아이가 고아라는 말을 들었다.강이한은 침통한 얼굴로 진영숙에게 말했다.“한지음 걔는… 지석이 동생이에요.”진영숙의 눈빛이 심하게 요동쳤다.“너 뭐라고 했어?”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강이한을 바라보며 다급히 물었다.강이한은 침통한 얼굴로 대답했다.“저도 우연히 알았어요.”“그때는 걔가 고아라고 했잖아.”“동생이 있는데 행방불명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계속 그 아이를 찾고 있었어요.”강이한은 일부러 그 사실을 가족에게 숨겼던 것이다.진영숙은 손발이 떨려왔다.지금 강이한이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건 모두 한지석 덕분이었다.그래서 모든 걸 잊어도 세강의 사람이라면 한지석은 잊을 수 없었다.그런데 한지음이 그의 동생이었다니!“지석이 동생이라고? 확실해?”진영숙이 확실치 않은 얼굴로 다시 물었다.한지음에 대한 진영숙의 생각이 바뀌고 있을 때, 유영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에 몰두했다.점심을 조민정과 대충 때우고 업무에 열중하는데 문 비서에게서 연락이 왔다. 박연준이 식사를 같이 하자는 요청이었다.유영은 그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그래서 모든 일정을 미루고 박연준과
유영은 당황한 얼굴로 상대를 바라보았다.한참이 지난 뒤에야 그녀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그 사람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에요?”둘의 관계를 생각해 봤을 때 절대 좋은 말이 나올 수 없는 관계였다.“꼭 그렇지만은 않아요.”박연준이 말했다.최근 유영과 강이한의 이혼설은 청하시 사람들의 관심사였다.그들의 이혼을 바라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그런데 강이한에 대해 좋게 말한 사람이 그의 오랜 라이벌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그렇게 비교해 보니 강이한이 더 속 좁은 인간으로 보였다.“저와 그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을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정말 되돌릴 여지가 있었더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죠.”유영이 아픈 표정으로 말했다.박연준은 표정을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남자의 눈동자에 유영의 슬픈 얼굴이 담겼다.강이한과 이혼 싸움을 하면서 그녀는 항상 강압적이고 당당한 태도를 유지했다.그런데 모든 가면을 벗어 던진 그녀에게서는 형용할 수 없는 아픔이 느껴졌다.박연준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그러네요. 둘이 오래 사귀고 결혼했다는 말은 들었어요.”10년의 사랑, 그건 전국민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그들이 헤어지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사랑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람들도 있었다.10년을 함께한 커플마저 마지막이 이토록 진흙탕 싸움인데 세상에 과연 변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게 존재할까?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유영은 묵묵히 고기를 입안에 넣고 잘근잘근 씹었다.입맛이 썼다.“그래요. 10년을 함께했죠.”그녀는 다시 지난 생 같은 고통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불 타서 죽어갈 때 그 절망적인 감정은 지금도 생생하다.그 경험이 없었더라면 아마 지금처럼 단호하게 이혼을 주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매정해 보일지라도 그녀에게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아무도 그녀의 선택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식사가 끝난 뒤, 둘은 함께 동교 개발 현장으로 갔다. 늦은 시간임에도 현장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지난번에 이 남자 때문에 직장을 잃을 뻔한 걸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렸다.그 로펌은 그녀가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찾은 직장이었고 지금까지 성징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녀의 노력과 피땀이 작용했다.만약 정말 피치 못할 사정으로 로펌을 나오게 된다면 지금까지 해왔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과 같았다.소은지는 처음부터 이 재벌가 도련님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자신의 이득만을 쫓으며 서민의 생계를 아무렇지 않게 짓밟는 이들을 보면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그들이 사는 세상에는 평등과 존중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더 혐오스러웠다.강이한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그는 바로 핸드폰을 꺼내 조형욱에게 전화를 걸었다.“네, 대표님.”“이유영 지금 어디 사는지 당장 알아봐.”남자의 싸늘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조형욱에게 전해졌다.홍문동을 나간 뒤로 줄곧 소은지의 오피스텔에 같이 사는 줄로만 알았는데 또 어디로 갔는지 궁금했다.그는 저도 모르게 해외 기사를 떠올렸다.소은지네 집에서 나갔다면 지금은 어디로 갔을까?생각할수록 의심만 깊어졌다.잠시 후, 조형욱에게서 답장이 왔다. 유영이 순정동에 산다는 소식이었다.보고를 들은 순간 강이한의 분노가 폭발했다.“지금 순정동이라고 했어?”“네, 옮긴지 좀 된 것 같아요.”조형욱이 말했다.순정동 땅이 얼마나 비싼지, 강이한은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그곳에 저택을 구매하기 위해 수많은 인맥을 동원했는데도 구매하지 못한 땅이었다.그런데 유영이 순정동으로 이사했다니!대체 그 집 주인이 누굴까?“그 집 누구 명의로 되어 있어?”강이한이 이를 으드득 갈며 물었다.순정동 집주인의 신상은 여태 공개된 적 없었다.그래서 아무리 능력 좋은 조형욱이라고 해도 단기간에 알아내는 건 불가능했다.“당장 그것부터 조사해!”강이한이 차갑게 명령했다.전화를 끊은 강이한의 주변으로 싸늘한 냉기가 스멀스멀 풍겼다.대체 무슨 재주로 순정동에 들어갔을까?그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그의 두 눈이
순정동.강이한의 차는 대문 앞에서 멈추었다. 청하시 최고급 별장 단지답게 경비도 삼엄하고 눈이 가는 곳마다 휘황찬란했다. 순정동 설계도면이 공개됐을 때, 수많은 재벌들이 구매하려고 줄을 섰었다.하지만 넓은 면적에 비해 지어진 별장은 고작 세 채에 불과했다.박연준의 차가 뒤늦게 대문으로 들어왔다.강이한은 차창을 통해 유영의 얼굴을 보았다.순간 그의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이 시간까지 박연준과 같이 있었던 걸까?그리고 이때, 그의 핸드폰이 진동했다.조형욱이었다.“말해!”“대표님, 순정동 주민의 개인정보는 워낙 꽁꽁 숨겨져 있어서 조사가 쉽지 않았어요. 다른 두 명은 알아낼 수도 없고 현재 확인된 입주민 중에 박연준 대표님이 있네요.”이로써 강이한의 추측이 확실해졌다.이 시간에 같이 돌아온 것 자체가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핸드폰을 잡은 그의 손이 하얗게 질렸다.“일단 알았어.”말을 마친 그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강이한은 바로 유영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여자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같이 돌아왔다는 건 같은 집에 산다는 의미일까?해외에 있는 남자는 그녀에게 포르쉐를 사주고 지금은 박연준과 같이 생활한다니!이게 어떻게 가능했던 걸까?사실 박연준의 저택은 단지 맨 안쪽에 있었고 유영의 저택은 중간 위치에 있었다.유영이 장난치듯 말했다.“우리가 이웃사촌일 줄은 몰랐네요.”비록 이웃이라고는 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입주민 간에 서로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들어가요.”박연준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유영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내일 출근할 때 같이 갈래요?”박연준이 차에서 내리는 유영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유영도 살짝 당황하며 걸음을 멈추었다.박연준과 같이 출퇴근하면 아주 편할 것 같지만 귀찮은 일들이 생길 위험성이 따르기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비서가 데리러 오기로 했어요.”“그래요.”박연준도 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차에서 내린 유영은 박연준
지금 생각해 보면 유영과 결혼할 때도 가족들의 반대에 이렇게 강하게 밀어붙였던 것 같았다.“이유영!”수화기 너머로 남자의 실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유영이 무심하게 물었다.“무슨 일이야?”“당장 나와!”유영은 한숨이 나왔다.“나 지금 순정동 대문 앞이야.”유영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다.마치 바람난 마누라를 잡으러 온 남편의 말투였다.귀찮아질 것 같아서 거처를 숨기려 한 건데 결국 이렇게 되어 버렸다.유영은 이 남자가 외삼촌과 자신의 관계까지 밝혀내기 전에 이 관계를 끝내고 싶었다.“안 나오면 너랑 박연준 내일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나갈 거야!”유영이 말이 없자 남자의 성난 고함이 들려왔다.“그건 또 무슨 소리야?”여기서 왜 박연준이 나오지?전에는 소은지의 커리어로 협박하더니 이제는 대상을 바꿔 박연준이었다.“무슨 소리인지 몰라? 둘이 같이 들어가는 거 내가 다 봤어. 이유영, 당신 이렇게 헤픈 여자였어?”말할수록 강이한은 더욱 분노가 치밀었다.수화기 너머로 라이터가 딸깍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긴 숨소리가 들려왔다.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양이었다.얼마나 짜증이 났으면 저럴까 싶었지만 짜증 나는 건 유영도 마찬가지였다.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지금 나갈게.”왜 강이한이 이토록 이성을 잃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 그녀가 박연준의 차를 타고 돌아오는 모습을 본 것 같았다.순정동 입구.강이한에게서는 싸늘하고 음울한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10년을 사랑했던 여자였고 자신이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던 사람이었다.하지만 지금은 전혀 모르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 같았다.10년 동안이나 그의 옆에서 연기를 했던 걸까?이게 그녀의 본모습일까?유영은 그와 멀리 떨어져서 차에 앉은 남자에게 말했다.“할 얘기 있으면 해.”“나한테 해명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니야?”강이한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그는 여자의 당당한 태도에 또 한번 화가 치밀었다.“우리 곧 이혼할 사이야. 내가 뭘 해명해
“나랑 같이 살 때는 다 죽어갈 것처럼 하더니, 박연준한테 가면 인생이 편해질 것 같아?”유영은 착잡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는 세강의 며느리로 살면서 불행했던 그녀의 삶마저 그녀의 탓으로 돌리는 걸까?시어머니가 자신을 이유 없이 싫어하는 것도 내 탓이라는 걸까?그의 가족들이 그들의 아이를 죽였는데 그것도 내 탓인 걸까?강서희가 볼 때마다 시비를 걸어댄 것도 내가 먼저 잘못해서 그랬다는 걸까?이 남자 옆에서 자존심을 굽혀가며 살아온 세월들이 갑자기 허무해졌다.겉보기에는 항상 유영을 지켜주려 했지만 사실 마음 속으로는 자신의 가족들 편에 서서 유영을 평가했던 게 아닐까?진영숙이 유영을 외부인 취급했지만 어쩌면 강이한도 한 번도 그녀를 진짜 가족으로 대하지 않았을 수 있었다.“난… 당신이 사는 세상에 적응하려고 최선을 다했어. 결국… 돌아오는 건 이런 거구나.”유영이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여자의 작은 얼굴에는 실망감과 싸늘함만 가득했다.강이한의 분노와 여자의 얼굴이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난 당신과 살면서 한 번도 스스로 결정을 내려본 적 없어. 그때는 모두를 위해 내가 양보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유영이 계속해서 말했다.그녀가 바보라서 계속 양보만 한 게 아니었다.자신을 위해 사는 삶이 어떤 건지 그때는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뭘 원하는지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그녀가 차갑게 뒤돌아섰다.등 뒤에서 남자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래. 바라는 대로 해줄게.”유영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덤덤히 대답했다.“고마워. 내일 법원 앞에서 봐.”결국 여기까지 와버렸다.이제는 마무리를 지을 때였다.지난 생의 아픔을 다시 경험하기 싫어서 먼저 이별을 택했지만 그가 알겠다고 하는 순간, 가장 아픈 건 그의 입에서 이별의 말을 듣는 순간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그들의 10년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아주 잔인한 조건과 함께.강이한이 말했다.“망막 기증해 줘.”유영은
언제부터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인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분노에 그의 준수한 얼굴이 험하게 일그러졌다.그에게서는 진한 살기마저 풍겼다.“내일 아침 아홉 시, 법원 앞에서 만나.”그 말을 끝으로 유영은 홀연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강이한은 고집스러운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남자의 두 눈에 진한 아픔이 서렸다.그녀에 대한 실망감과 배신감이 뒤섞여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바람을 피운 것도 모자라 이 남자 저 남자 만나고 다니면서도 그에게서는 멀어지려고 하는 그녀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그는 치미는 분노를 담배로 달랬다.다음 날.법원 앞에 도착한 강이한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는 유영을 보았다. 그녀는 오늘 깔끔한 오피스룩에 머리를 위로 올린 모습이었다.그는 그제야 그녀가 자신을 떠나도 잘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것을 이루기까지 그녀가 한 일들이 혐오스러웠지만.강이한이 차에서 내려 다가오자 유영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들어가자.”평온하고 담담한 말투였다.강이한은 어두운 표정으로 과거에 사랑했던 그녀를 바라보았다.평생 지켜주고 싶던 여자인데 결국 여기까지 와버렸다.그는 길게 심호흡하며 감정을 갈무리했다.“이유영 나를 떠나서 얼마나 잘 사는지 두고 보겠어. 나중에 후회하며 나를 찾지나 마.”강이한이 분개한 얼굴로 말했다.박연준, 정국진 모두 좋은 남자라고 볼 수는 없었다.그녀가 스스로 불구덩이에 뛰어들겠다면 말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심연을 마주한 순간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유영은 담담한 얼굴로 그를 힐끗 바라보고는 비웃듯 말했다.“그런 날은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그 사람들이 장님이 된 널 영원히 지켜줄 것 같아?”유영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조금이라도 남았던 그 미련조차 남자의 한 마디에 깡그리 사라졌다.유영은 덤덤한 얼굴로 안으로 들어갔다.조금의 주저도, 미련도 없는 모습에 강이한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이혼 서류를 접수하는 절차는 단숨
위험할 거라는 그의 말을 듣고 이유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엔데스 신우를 바라보았다.“신우 씨가 정씨 가문을 이용하려고만 하지 않았어도...”이유영의 말끝이 흐려졌다.차는 이미 백산 별장에 도착해 있었고 이유영은 조용히 차 문을 열고 내렸다.하지만 곧장 들어가지 않고 등진 채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그 순간 지우고 싶던 기억들이 밀려왔다.강이한과 함께했던 너무나 찬란하고 아팠던 순간들 말이다.한지음 이후로 그녀가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지워지지 않는 추억들이었다.숨을 크게 들이쉬며 가슴속의 무거움을 억눌렀다. 이 밤하늘 속 별빛조차 오늘은 감당하기 힘들었다.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워져 있었다.“제가 얼마나 위험한지 이미 알고 있다면 저한테서 멀리 떨어져 계세요.”“...”그는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유영은 이미 저 멀리 별장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작은 체구에 하이힐을 신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인형 같았지만 그녀의 등에는 증오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엔데스 신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이내 눈빛이 변했다.복잡했던 감정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건 날카롭고 위험한 기운이었다.“민성아.”“네, 도련님.”“예전 강씨 집안에 있을 때 교양 있고 품위 있었다는 사실, 확실해?”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다.지금의 이유영은 '교양'이나 '품위'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자료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조사 결과대로라면 그녀의 내면에는 아마 맹수가 숨어 있는 거라고 신우는 생각했다.겉모습은 순진해 보였지만 박연준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조사 결과를 도무지 믿기 어려웠다.“후회돼.”“뭐가요?”운전석의 윤민성이 놀라서 물었다.그가 생각한 셋째 도련님의 사전에는 '후회'라는 단어가 없었다.그렇기에 후회된다는 그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곧 엔데스 신우는 짧게 덧붙였다.“로한에게 서둘러 진행하라고 해. 난
이유영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빼내려 했다.“놔줘요.”그러자 엔데스 신우가 조용히 말했다.“늦었어요. 제가 바래다줄게요.”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오늘 그의 차에 타면 어디로 향하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이유영은 급히 대답했다.“혼자 갈 수 있어요.”예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그 시절에도 그녀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지금은 더욱 그럴 필요가 없었다.하지만 남자는 손에 힘을 더 주며 이유영을 자연스럽게 차에 태웠다.“제가 말했잖아요...”“늦었어요. 여자 혼자 집에 가게 하는 건 신사의 예의가 아니죠.”“엔데스 가문에 신사가 있다고 생각하세요?”이유영은 날카롭게 받아쳤다.엔데스 가문에 대한 반감은 소은지 때문이었을 것이다.지금 눈앞의 엔데스 신우까지 더해져 이유영의 마음속 엔데스 가문 남자들은 모두 막무가내로 보였다.특히 그녀가 직접 마주한 적은 없지만 다섯째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엔데스 예준의 강렬한 기운은 단번에 각인되었다.“제 차가 싫다면 택시를 불러드릴게요. 그럼 좀 안심이 되겠어요?”남자는 그녀의 마음을 꿰뚫는 듯 말했다.“...”그런 굴욕적인 제안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혼자 갈 수 있어요.”시력은 되찾은 그녀는 지금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이 어디든 갈 수 있었다.결국 그녀는 남자의 차에 올랐다.차가 출발하자 남자는 조용히 서류를 꺼내 펼쳤다.좁은 공간에 정적이 흘렀고 백산 별장이 가까워질 즈음, 이유영은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엔데스 신우가 옆자리에서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박연준 씨랑 아직 이혼 안 했어요?”“...”엔데스 신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꼭 그 사람과 이혼해야 할까요?”“아직 마음이 있는 모양이네요.”그 말투엔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스며 있었다.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순 없었지만 아직 마음이 있냐는 그의 말을 들은 이유영은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
공기가 얼어붙었다.“쾅!”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박연준이 탁자를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박연준의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가서 유영이를 백산 별장으로 데려가.”이유영은 미친 게 분명했다.‘감히 엔데스 셋째 도련님 같은 인물과 술집에 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건가?’정국진이라면 이유영이 엔데스 신우와 가까워지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특히 지금처럼 민감한 시기엔 더욱 반대가 심할 것이다. 박연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고 남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문기원이 급히 박연준을 따라나섰다.“네!”위험한 박연준의 모습에 용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대답했다.강이한이 각막을 이유영에게 이식해 주려고 할 때 왜 박연준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되는 듯했다.지금 이유영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그녀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과거의 그녀는 마치 강이한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는 천사 같았다. 하지만 혼란을 겪은 이후 그녀는 변했다.거만하고 방탕하게 아무하고도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지금 박연준이 생각했을 때, 이유영은 더 이상 고상하고 단정한 명문가의 며느리가 아니라 그저 자유롭게 떠도는 바람 같은 여자였다.최근 그녀는 서재욱과 엔데스 신우와 모호하기 짝이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서주에서.박연준이 차에 타기 전, 문기원이 그를 붙들었다.“선생님, 선생님!”“비켜.”“오늘 정말 중요한 회의입니다.”문기원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은 서주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기에 이유영을 생각하면 문기원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정말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박연준 곁에 있는 문기원조차 그녀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박연준이 돌아서기를 기다렸다.박연준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눈을 감은 순간, 그의 눈빛 속 날카로움은 잠시 가려졌지만 몸 전체에서 풍겨 나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은 고민에 휩싸일 때마다 이런 방식을 택했다.하지만 결국 이런 방식은 오히려 고민에 잠긴 마음을 더욱 괴롭힐 뿐이었다.한번 마음에 깊이 새겨진 근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죄송합니다만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그녀의 몸은 항상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예전에 건강이 좋지 않기도 했고 어렵게 다시 찾은 시력인 만큼 그녀는 술과 더욱 멀리하게 되었다.하지만 오늘 진영숙이 백산 별장에서 벌인 일을 생각하니 이유영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 감정을 억눌렀다. 그녀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회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인 건지 알 수 없었다.남자는 그 말을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깜빡했네요.”남자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괜찮아요.”“...”“이제 가도 될까요?”“술을 마시지 않아도 즐길 수 있잖아요.”“...”하지만 이유영은 이런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특히 많이 노출된 옷을 입은 여자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반항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그녀를 향락의 세계로 이끌었다....한편 박연준은 서주에서 중요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용준의 전화를 받은 그의 가슴이 쿵쾅거렸다.“그쪽은 괜찮아?”진영숙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이유영이 인정사정없을 거라는 걸 박연준도 알고 있었다.과거 강이한 곁에 있을 때의 이유영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녀는 적어도 강이한에게 만큼은 너무 몰아붙이지 않았었다.그래서 진영숙이 아무리 이유영을 괴롭혀도 그녀는 어떻게든 참고 견뎠다.지금은 성격이 점점 더 나빠졌다고 해야 할까? 아예 참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용준은 진영숙의 현재 상황을 박연준에게 설명했고 이미 좋지 않았던 박연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회의 끝나고 바로 갈게. 일단 진정시켜.”박연준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일이 있었는데 과연 내가 진정시킬 수 있을까?’“네!”“유영이는
“박연준, 네가 강이한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고 또 이제는 강이한 어머니까지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난 여태 몰랐네.”그 말은 날 선 조롱처럼 들렸다.동시에, 과거 강이한과 박연준의 사이가 이유영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되새기게 했다.그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의 냉정한 말에 박연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다른 일 있어서 먼저 끊을게.”이유여은 박연준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사랑이란 그저 우스운 감정에 불과했다.차는 천천히 백산 별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지혁 씨.”“네.”“지혁 씨는 사랑해 본 적 있어요?”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불쑥 물었다.예전의 이유영은 사랑이란 존재를 믿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군가를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토록 반짝이던 사랑이란 단어 뒤편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었는지 이젠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의 말을 들은 지혁은 묵묵히 앞을 응시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핸들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이유영은 굳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쾅!”그 순간,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함께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이유영은 아픈 이마를 짚고 있었고 지혁은 차에서 내려 사고 처리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차 문이 열렸다.“아가씨.”지혁이 이유영 앞에 공손하게 나타났다.“무슨 일이에요?”“셋째 도련님 차입니다.”“...”그 말을 듣고 그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자꾸 나타나는 셋째 도련님의 존재에 우연한 사고인지 아니면 이미 계획된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어떻게 된 거예요?”“셋째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이유영은 이 전설 속의 셋째 도련님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특히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밖에서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유영은 몰랐다. 그 아이가 결국 진영숙이 데려온 의사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은.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아!”분노가 치밀수록 이유영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진영숙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녀는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놔, 놔 이 미친년아! 악!”“짝!”이유영의 손바닥이 진영숙의 뺨을 후려쳤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말릴 용기를 잃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다시 한번 움찔하고 말았다.이유영의 행동에 소리 내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숨을 삼켰다. 진영숙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결국 이유영은 진영숙을 놓아주며 말했다.“주제 파악하라는 의미에서 그랬어요. 당신은 할머니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에요.”그렇다. 진영숙은 할머니가 될 자격이 없었기에 이유영도 그녀를 아무 감정 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진영숙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머릿속이 멍해진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그 사이 이유영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저년이 감히...”감히 뭐라고?예전엔 강이한 곁에서 순한 토끼처럼 보호받더니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유영이 밖으로 나왔을 때,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를 감쌌다.그 순간, 가슴속의 억눌린 감정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지혁은 이유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용준을 밀쳐내고 앞으로 다가왔다.“아가씨.”“가요.”용준은 여전히 당당한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유영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받은 이유영의 모습은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여보세요.”“어디야?”“풍산.”“유영아...”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박연준은 지금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어떤 태도로 맞서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강씨 집안에서 강이한이 곁에 없는 동안에는 진영숙의 말에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홍문동으로 이사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숙이 찾아오면 이유영은 그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그녀의 말에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대체 언제부터일까?’아마 강이한과의 이혼을 결심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즈음부터 이유영은 진영숙의 말에 더 이상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그땐 고작 진영숙의 지시를 어기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한참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낸 진영숙이 이유영을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이빨을 드러낸 짐승 같은 기세가 실려 있었다.이유영은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내는 진영숙이 가소로웠다.이유영은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들고 망설임도 없이 진영숙의 얼굴에 뿌렸다.“앗!”진영숙은 비명을 질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손을 댄다는 건 이런 거예요.”이유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진영숙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퍽!”손에 들고 있던 잔이 손끝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예전의 풍산 사람들이 기억하던 이유영은 언제나 조용하고 온순한 여인이었다. 누가 감히 지금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분노로 찬 이유영은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진영숙 역시 이유영을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예전에도 이유영에게 자주 화가 났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진영숙은 분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유영은 격하게 숨을 들이마신 진영숙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시 백산 별장에 가거나 우리 가족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땐 당신 진짜 가만 안 둬.”그 마지막 한마디는 징벌처럼 무겁고 섬뜩할 만큼 냉정했다.월이는 이유영의 세상 전부이자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힘들게 월이를 낳으면서 강씨 가문은 이 아이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
끊임없이 박연준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던 강이한의 모습을 이유영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두 사람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이였다.늘 서로를 원수처럼 대했고 그 모습을 본 이유영도 두 사람 사이에 과거의 악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악연이 한 여자 때문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 여자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은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모든 게 이토록 명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영만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그 7년 동안 강이한은 얼마나 다정했던가?그 친절함 속에 실은 다른 여인을 향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이유영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박연준은 강이한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었다.이건 과거의 이유영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다시 실감하고 있었다.“어쨌든 강이한 씨의 어머니잖아요.”조금 전 용준이 한 말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듣는 듯했다.“형님이 돌아오신 후에 처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용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공손함 속에는 이유영을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이유영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진영숙이 월이를 데려가려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분노는 가슴 깊이 타오르고 있었다.“지혁 씨.”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지혁을 불렀다.지혁은 그녀의 뒤에 있다가 곧장 앞으로 나섰다.“네, 아가씨.”“전 들어가야겠어요.”이유영이 내뱉은 짧은 문장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용준은 지금까지 이유영의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냉혹함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네!”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 분위기는 마치 폭발할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어지럽게 엉킨 현장을 냉정히 바라보며 우아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용준은 지혁을 막으려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