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국진은 이유영이 하루라도 빨리 파리로 돌아오길 바랬다. 그녀를 위해 이미 많은 것을 준비해 둔 상태였다. 지금 당장은 그가 대신 그룹을 이끌어가고 있지만, 결국 이 자리는 이유영이 물려받아야 할 자리! 하루라도 빨리 직접 이 자리에서 일해봐야 더 많은 것을 볼 시야와 능력이 생길 터였다.정국진과의 통화를 마친 이유영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분명 감사해야 할 일이었지만, 지금의 그녀가 그 자리의 무게를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웠다. 이유영은 정유라와 일단 얘기를 나눠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통화음이 계속 울렸으나 정유라는 무슨 일로 바쁜지 한참이 지나서야 연락을 받았다.전화 너머 정유라다운 당당하고 씩씩한 목소리가 들렸다.“소식 들었어, 언니라면 아주 잘할 거야!”이유영의 얼굴이 어두워졌다.“내가 이 작은 몸으로 제대로 할 수 있을까?”정유라는 이유영과 반대로 짧은 단발에 큰 키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둘이 함께 있으면 자매가 아니라 남매로 오해받기도 했다. “작은 고추가 맵다고…. 여기서 이 비유가 적절한진 모르겠지만, 언니는 잘할 거야! 자신을 믿어!”정유라는 이유영의 작은 체구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 말고 이유영은 그녀만의 장점들이 많았으니까!반면 이유영은 절망했다.‘아, 내 청춘, 내 여행, 내 그림들…!’한편 강이한 쪽에선….강이한은 원래 병원으로 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무서운 속도로 퍼지는 이슈로 인해 곧바로 회사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은, 이유영이 이미 떠난 사무실만이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이유영, 그는 좀 전에 그녀가 들고 왔던 USB를 떠올리며 싸늘한 분위기를 풍겼다.이때 그의 핸드폰에 이유영의 이름이 떠올랐다. 한참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전화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울렸다. 안 그래도 나빴던 그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결국 그는 전화를 받았다.“강이한!”전화 너머 이유영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이한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네 짓이야?”“맞아!”“하…
폭풍우가 몰아치듯 강이한의 세계는 이번 일로 완전이 쑥대밭이 되었다.돌이켜보면 이 모든 것이 한지음, 그녀의 납치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그와 이유영의 관계가 금이 가다 못해 와장창 깨져버렸었다.물론 전에도 이유영과 사소한 마찰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지음의 납치 사건이 있은 후로 강이한은 과도하게 그녀의 편을 들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이유영이 질투에 눈멀어 더 많은 사건 사고를 일으키기 시작한 거라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뒤에서 이런 사실이 숨어 있을 줄!그의 머릿속에 한지음과 왕 주치의 사이에 오간 송금 명세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한지음이 여유롭게, 아주 멀쩡한 몸으로 병원을 돌아다니는 모습도 함께 떠올랐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부정하고 싶었지만,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에 강이한은 머릿속이 아주 복잡해졌다.저녁이 되었다. 이유영은 퇴근하기 위해 주차장으로 내려갔다.그녀의 회사는 바로 강이한의 옆 건물에 있었다. 두 건물은 지하 주차장을 공용으로 쓰고 있었으므로 둘은 쉽게 이곳에서 마주칠 수 있었다. 또각또각-이유영은 경쾌한 발걸음 소리를 내며 자신의 차를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그곳엔 미리 온 불청객이 있었다. 다름 아닌 강이한이 등을 이유영 차에 기댄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바닥에 담배꽁초가 수북이 널려 있는 것을 보아 꽤 긴 시간 그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남자는 상당히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마저도 강이한의 잘생김 때문에 퇴폐미만 더 증가시킬 뿐이었다. 하이힐 소리를 들은 강이한이 고개를 돌려 이유영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말없이 피던 담배를 바닥에 던져 비벼 꺼버렸다. 그의 모습을 발견한 이유영도 자리에 멈춰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둘은 서로 마주 보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은 채 침묵이 지속되었다.하지만 결국 참다못한 이유영이 먼저 말했다.“거기 내 찬데, 좀 비켜줄래?”“나랑 얘기 좀 해.”“이혼까지 한 마당에, 얘기는 무
강이한은 태어났을 때부터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랐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항상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자비가 없었다.마찬가지로 그의 가족, 친척들 또한 각자 자신의 몫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강씨 노부인의 칠순 잔치만 봐도 그들의 사이가 어떤지 알 수 있었다. 친척들 중 많은 이들이 얼굴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강이한의 입에서 박연준의 복잡한 가족사가 나오자, 이유영은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 고고하기만 보였던 박연준 또한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랐으리라.“그렇다 한들 이게 너와 무슨 상관이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이유영은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주차장엔 둘뿐이었고, 그녀가 의도했든 안 했든 강이한의 통화내용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받은 연락은 병원이었다. 한지음이 이토록 집요하게 나올 줄은 그녀도 예상치 못했다. 빠져나올 구멍 하나 없이 모두 막았는데도 불구하고 한지음은 여전히 뻔뻔하게 굴고 있었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 유영은 이제 한지음이 어떻게 나오든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우린 이미 이혼한 사이야. 우리가 왜 이렇게 됐는지 너도 잘 알잖아!”“….”그래, 이젠 강이한도 알아버렸다. 이 모든 것이 한지음의 계략이었다는 것을!그러나 강이한은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이유영이 말을 이어가기 전에 먼저 질문을 던졌다.“오늘 네가 날 찾아온 목적, 나에게 먼저 그 자료들을 넘기려고 했던 거 아냐?”“….”“힘들게 그 자료들을 모은 이유, 너도 지난 우리 10년동안 함께 했던 세월에 미련이 있었던 거잖아, 그지?”한지음의 본 보습을 알아차리게 함으로서 강이한이 사과하도록 만드는 것, 그러기 위해 그녀가 애쓴 것이 아닌지 강이한은 묻고 있었다.그의 질문에 내재되어 있는 뜻을 알아차린 이유영이 고개를 돌려 강이한을 바라보았다.그녀는 비꼬는 표정으로 말했다.“착각도 유분수지.”“이유영!”“난 그저 네가 해야 했을 일을 대신 해준 것뿐이야! 너에게 뭔가 기회를 주려고 그런 것이
”정말 끝냈나 보군요.”그 말과 함께 박연준은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우아하게 스테이크를 한 조각 썰어 입에 넣었다.“오늘 뉴스 헤드라인 보셨어요?”유영이 물었다.하지만 곧이어 이러한 질문을 했다는 것을 후회했다. 바쁜 박연준이 이런 것에 관심 가질 시간이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그렇다면 어떻게 생각하세요?”“유영 씨가 벌인 일이죠?”질문이었지만, 이미 답을 확신하는 듯한 말투였다.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어지간히도 그 남자가 미웠나 보네요?”박연준이 말한 남자는 다름 아닌 강이한이었다.만약 유영이 강이한을 증오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이렇게 공개적으로 퍼뜨릴 수 없는 자료들이었다. 유영은 절대로 바보가 아니었고 이 일이 강씨 집안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예상 못 했을 리도 없었다.그러나 강씨 가문은 절대로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이유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가 얼마나 그 남자를 증오하는지, 아무도 모를 거예요.”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그 자료들을 공개했는지, 어떤 세월을 겪어왔는지 오직 그녀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럴 것 같네요. 하지만 덕분에 한가지 깨달은 것이 있어요.”박연준이 말했다.“뭐를요?”“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아무리 온화해 보이는 여자라도 절대로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을요!”이유영은 그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이 웃음의 뜻은 무엇일까? 박연준은 확신할 수 없었다. 한때 그녀는 청하시에서 가장 지적이고 온화하기로 유명했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으로 인해 그녀의 이미지는 완전히 달라졌다.박연준 또한 그녀에 대한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이 여자… 절대로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될 상대야.’박연준의 말대로 아무리 순하고 착해 보이는 여자라도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랬다가는 어떤 후폭풍으로 닥쳐올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한편 강이한은 병원에서 계속 연락이 오
눈을 질끈 감으니, 그의 머릿속엔 온통 이유영뿐이었다.그는 지금 이유영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저릿하게 아프고 숨이 막혔다. 한편 이유영과 박연준은 식사 후, 순정동으로 향했다.두 사람이 함께 레스토랑을 나가는 모습이 파파라치에게 찍혀 빠르게 인터넷에 뿌려졌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비난하지 않았다. 그들은 둘이 연인이나 그런 관계가 아닌 어딘가 먼 친척관계이겠거니 추측했다.왜냐면 박연준은 이성을 고르는 기준이 매우 까다롭기로 유명했고 이유영은 그의 옆에 서면 연인보다는 어린 동생 같은 분위기를 풍겼기 때문이다.그러나 강이한은 달랐다. 이 소식을 접한 강이한은 매우 신경이 쓰였다.“내일 데리러 올게요.”차에서 내리는 이유영을 보며 박연준이 말했다.둘은 지금 자신들의 만남이 크게 이슈되고 있는 줄 모르고 있었다.이유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답했다.안 그래도 차를 가지고 오지 않은 터라 집이 먼 조민정보고 데리러 오라고 하는 것보단 효율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이유영이 돌아서려던 순간, 뒤에서 박연준의 목소리가 들렸다.“잠깐만요!”“무슨 일이에요?”이유영이 멈칫하며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강이한을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박연준이 살짝 망설임이 느껴지는 태도로 입을 달싹거리고 있었다.“왜 그러세요?”이유영이 재차 물었다.망설이다니, 박연준답지 않은 모습이었다.그는 평소에 보지 못한 매우 깊으면서도 알 수 없는 열기가 느껴지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유영은 그런 그의 표정에 살짝 당황했다.“박 대표님?”“정 대표님와… 무슨 사이인가요?”박연준은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결국엔 물었다.이유영은 협력 관계가 된 이상 언젠가 이런 질문을 받게 될 거라 예상은 했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 좀 늦은 감이 있었다. 아무리 업무를 같이 하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평소의 박연준이었다면 이런 사생활까지 묻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그녀한테는 그럴 수 없었다.이유영은 잠시 망설였지만 결
강이한의 본가.본가에 도착한 강이한, 그곳엔 이미 큰 할아버지와 둘째는 물론 강성과 강산도 있었다. 그나마 셋째 할아버지 집안사람들만 외국에 있던 탓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그가 도착하기 전 어떤 얘기들이 오갔는지는 몰라도 노부인과 진영숙은 이미 표정이 좋지 않았다. 옆에 있던 강서희도 물론 얼굴이 억울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이제야 납시셨군!”둘째 할아버지가 멸시가 가득 담긴 표정으로 그의 조카손자인 강이한에게 말을 걸었다.강이한은 그런 그의 태도에 눈길만 줄 뿐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갑자기 왜들 모이셨어요?”이런 모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항상 강씨 가문에 좋지 않은 일, 하지만 그들에겐 득이 될 수 있는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이들은 득달같이 찾아왔었다.둘째 할아버지는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때 그의 옆에 있던 강성이 냉소가 담긴 말투로 답했다.“몰라서 물어? 집안 돌아가는 꼴을 봐라! 해외에 있어도 소문이 들려와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요즘 강이한의 사생활로 청하시가 떠들썩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소문이 해외까지 퍼질 정도는 아니었다. 언제까지나 이건 강씨 가문 내부의 일이었으니까. 그러니 해외까지 소문이 퍼진 것이 아니라 강성이 청하시를, 더 정확히는 강이한을 주시하고 있기 때문에 알 수 있는 소식이었다.강이한이 더욱 차가워진 눈빛으로 강성을 바라봤다. 이때 진영숙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이게 무슨 대수라고, 이 정도는 재벌이라면 가끔 있는 일이잖아! 이게 뭐 사업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고!”“만약 영향을 미쳤다면? 그럼 어떻게 하려고 했어!”큰 할아버지가 매섭게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겨우 이 정도밖에 생각을 못 하다니, 한심하군.’그러고는 노부인을 바라보며 질책하듯 말했다.“막내야, 넌 도대체 며느리 교육을 어떻게 한 거야?”“이익…!”강이한의 눈빛이 점점 더 싸늘해졌다.누가 봐도 나이들이 지긋한 늙은이들이었지만, 강이한은 알고 있었다. 이들은 죽어 관에 들어갈
강이한의 할아버지는 자기 직계가족 외에 그 어떤 누구에게도 기회를 주지 않았다.강이한이 강서희를 바라보며 말했다.“당장 경호원 불러!”그의 말투는 차분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달랐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들을 쫓아낼 기세였다. 큰 할아버지와 둘째 할아버지의 눈이 서로 맞닿았다.“너희들 그만해. 말 가려서 못 해? 가족끼리 이게 무슨 짓이야!!”큰 할아버지가 강성과 강산에게 눈치 주며 말했다.삼 년을 못 봤을 뿐인데, 강이한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란! 그들도 알고 있었다. 지금 이렇게 소란을 피울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을. 큰 할아버지가 말을 이었다.“이번 프로젝트는 물 건너갔으니, 가능한 한 빨리 새 프로젝트에 도입해야 해. 동교 옆에도 좋은 땅 있으니 새로운 프로젝트 시작할 수 있을 거야.”동교 신도시 옆에 있는 땅, 강이한도 그곳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을 노리는 건 그뿐이 아니었다. “이번엔 놓치면 안 돼. 회사가 얼마나 큰 손실을 볼지… 아무리 강씨 가문의 재산 규모라도 감당할 수 없을 거야!”“알았으니까, 가세요! 강서희, 손님 나가신다!”강이한은 그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을 올랐다.반면 지시를 강서희는 매우 난감했다.“큰 할아버지, 작은 할아버지,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강서희가 매우 조심스레 말했다. 강이한이 자신들을 무시해 버리자, 큰 할아버지와, 둘째 할아버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들은 분풀이하듯 강서희에게 태클을 걸었다. “아주 잘 키웠어, 정말 친자식이랑 다를 바가 없네!”이 말은 진영숙을 비꼬는 말이기도 했다. 진영숙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만약 노부인이 그녀의 손목을 잡지 않았다면 집안의 어르신이고 뭐고 그대로 들이받을 뻔했다.‘늙은이들이 나이를 거꾸로 먹었나!’과거 그녀가 다쳐서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이 얼마나 그녀를 비웃었던가! 어떤 이들은 차마 입에도 담지 못할 욕까지 했었다!사실 진영숙은 강서
강이한의 서재.진영숙은 서재에 들어오자마자 진한 담배 냄새를 맡았다.“그 여자랑은 어떻게 됐어?”진영숙의 말한 ‘여자’는 다름 아닌 이유영이었다.오늘 친척들이 들이닥치며 한바탕 소란이 있고 난 뒤, 그녀는 이유영이 더 괘씸하게 느껴졌다. 진작에 능력이 있었으면서 왜 강씨 집안에 있을 땐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건지, 이건 고의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집안이 안 좋으면 재주라도 부려야 하는 거 아닌가?“그 여자? 무슨 소리예요?”진영숙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강이한이 되물었다.“그 여자 말이다, 그 여자! 이유영!”“저희 이혼했어요. 이제 만족하세요?”그의 답을 들은 진영숙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그래, 잘했어. 너랑 어울리지 않은 여자였어. 그 여자랑 결혼한 후로 되는 일이 없었잖아.”“….”“이혼하기 전에도 회사에 입힌 손해만 봐.”말하면 할수록 진영숙은 참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영은 절대로 며느리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여자였다.강이한의 눈이 차가워졌다.그는 더 이상 이유영에 대해 진영숙과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유경원 쪽에서도 저번 잔칫상 사건 뒤로 자꾸만 약혼을 미루고 있고! 흥, 누가 아쉬워한다고!”저번 생일 잔치 이후로 유경원 쪽과는 완전히 연락이 끊겼다. 하지만 진영숙은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자기 아들, 강이한한테 어울리기엔 좀 부족한 면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유영과 이혼까지 한 마당에 강이한은 더 이상 꿀릴 것이 없었다! 그녀의 아들은 최고의 신랑감이었으니까 얼마든지 더 좋은 신붓감을 얻을 수 있으리라!“참, 요즘 회사 일에 좀 더 신경 써야 할 것 같아. 동교 신도시 부지 옆에 있는 땅, 이번이야말로 절대로 빼앗겨서는 안 돼!”강이한이 본가로 돌아오기 전, 친척들에게 받은 수모를 떠올린 진영숙은 아주 진절머리가 난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번에 또 실수하게 된다면 그들을 하이에나처럼 회사를 삼키기 위해 달려들 것이다.다음 날, 강이한은 본가에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낸 뒤
공기가 얼어붙었다.“쾅!”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박연준이 탁자를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박연준의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가서 유영이를 백산 별장으로 데려가.”이유영은 미친 게 분명했다.‘감히 엔데스 셋째 도련님 같은 인물과 술집에 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건가?’정국진이라면 이유영이 엔데스 신우와 가까워지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특히 지금처럼 민감한 시기엔 더욱 반대가 심할 것이다. 박연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고 남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문기원이 급히 박연준을 따라나섰다.“네!”위험한 박연준의 모습에 용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대답했다.강이한이 각막을 이유영에게 이식해 주려고 할 때 왜 박연준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되는 듯했다.지금 이유영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그녀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과거의 그녀는 마치 강이한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는 천사 같았다. 하지만 혼란을 겪은 이후 그녀는 변했다.거만하고 방탕하게 아무하고도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지금 박연준이 생각했을 때, 이유영은 더 이상 고상하고 단정한 명문가의 며느리가 아니라 그저 자유롭게 떠도는 바람 같은 여자였다.최근 그녀는 서재욱과 엔데스 신우와 모호하기 짝이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서주에서.박연준이 차에 타기 전, 문기원이 그를 붙들었다.“선생님, 선생님!”“비켜.”“오늘 정말 중요한 회의입니다.”문기원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은 서주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기에 이유영을 생각하면 문기원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정말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박연준 곁에 있는 문기원조차 그녀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박연준이 돌아서기를 기다렸다.박연준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눈을 감은 순간, 그의 눈빛 속 날카로움은 잠시 가려졌지만 몸 전체에서 풍겨 나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은 고민에 휩싸일 때마다 이런 방식을 택했다.하지만 결국 이런 방식은 오히려 고민에 잠긴 마음을 더욱 괴롭힐 뿐이었다.한번 마음에 깊이 새겨진 근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죄송합니다만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그녀의 몸은 항상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예전에 건강이 좋지 않기도 했고 어렵게 다시 찾은 시력인 만큼 그녀는 술과 더욱 멀리하게 되었다.하지만 오늘 진영숙이 백산 별장에서 벌인 일을 생각하니 이유영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 감정을 억눌렀다. 그녀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회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인 건지 알 수 없었다.남자는 그 말을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깜빡했네요.”남자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괜찮아요.”“...”“이제 가도 될까요?”“술을 마시지 않아도 즐길 수 있잖아요.”“...”하지만 이유영은 이런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특히 많이 노출된 옷을 입은 여자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반항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그녀를 향락의 세계로 이끌었다....한편 박연준은 서주에서 중요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용준의 전화를 받은 그의 가슴이 쿵쾅거렸다.“그쪽은 괜찮아?”진영숙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이유영이 인정사정없을 거라는 걸 박연준도 알고 있었다.과거 강이한 곁에 있을 때의 이유영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녀는 적어도 강이한에게 만큼은 너무 몰아붙이지 않았었다.그래서 진영숙이 아무리 이유영을 괴롭혀도 그녀는 어떻게든 참고 견뎠다.지금은 성격이 점점 더 나빠졌다고 해야 할까? 아예 참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용준은 진영숙의 현재 상황을 박연준에게 설명했고 이미 좋지 않았던 박연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회의 끝나고 바로 갈게. 일단 진정시켜.”박연준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일이 있었는데 과연 내가 진정시킬 수 있을까?’“네!”“유영이는
“박연준, 네가 강이한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고 또 이제는 강이한 어머니까지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난 여태 몰랐네.”그 말은 날 선 조롱처럼 들렸다.동시에, 과거 강이한과 박연준의 사이가 이유영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되새기게 했다.그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의 냉정한 말에 박연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다른 일 있어서 먼저 끊을게.”이유여은 박연준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사랑이란 그저 우스운 감정에 불과했다.차는 천천히 백산 별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지혁 씨.”“네.”“지혁 씨는 사랑해 본 적 있어요?”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불쑥 물었다.예전의 이유영은 사랑이란 존재를 믿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군가를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토록 반짝이던 사랑이란 단어 뒤편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었는지 이젠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의 말을 들은 지혁은 묵묵히 앞을 응시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핸들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이유영은 굳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쾅!”그 순간,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함께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이유영은 아픈 이마를 짚고 있었고 지혁은 차에서 내려 사고 처리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차 문이 열렸다.“아가씨.”지혁이 이유영 앞에 공손하게 나타났다.“무슨 일이에요?”“셋째 도련님 차입니다.”“...”그 말을 듣고 그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자꾸 나타나는 셋째 도련님의 존재에 우연한 사고인지 아니면 이미 계획된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어떻게 된 거예요?”“셋째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이유영은 이 전설 속의 셋째 도련님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특히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밖에서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유영은 몰랐다. 그 아이가 결국 진영숙이 데려온 의사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은.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아!”분노가 치밀수록 이유영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진영숙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녀는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놔, 놔 이 미친년아! 악!”“짝!”이유영의 손바닥이 진영숙의 뺨을 후려쳤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말릴 용기를 잃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다시 한번 움찔하고 말았다.이유영의 행동에 소리 내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숨을 삼켰다. 진영숙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결국 이유영은 진영숙을 놓아주며 말했다.“주제 파악하라는 의미에서 그랬어요. 당신은 할머니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에요.”그렇다. 진영숙은 할머니가 될 자격이 없었기에 이유영도 그녀를 아무 감정 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진영숙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머릿속이 멍해진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그 사이 이유영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저년이 감히...”감히 뭐라고?예전엔 강이한 곁에서 순한 토끼처럼 보호받더니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유영이 밖으로 나왔을 때,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를 감쌌다.그 순간, 가슴속의 억눌린 감정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지혁은 이유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용준을 밀쳐내고 앞으로 다가왔다.“아가씨.”“가요.”용준은 여전히 당당한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유영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받은 이유영의 모습은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여보세요.”“어디야?”“풍산.”“유영아...”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박연준은 지금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어떤 태도로 맞서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강씨 집안에서 강이한이 곁에 없는 동안에는 진영숙의 말에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홍문동으로 이사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숙이 찾아오면 이유영은 그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그녀의 말에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대체 언제부터일까?’아마 강이한과의 이혼을 결심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즈음부터 이유영은 진영숙의 말에 더 이상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그땐 고작 진영숙의 지시를 어기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한참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낸 진영숙이 이유영을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이빨을 드러낸 짐승 같은 기세가 실려 있었다.이유영은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내는 진영숙이 가소로웠다.이유영은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들고 망설임도 없이 진영숙의 얼굴에 뿌렸다.“앗!”진영숙은 비명을 질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손을 댄다는 건 이런 거예요.”이유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진영숙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퍽!”손에 들고 있던 잔이 손끝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예전의 풍산 사람들이 기억하던 이유영은 언제나 조용하고 온순한 여인이었다. 누가 감히 지금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분노로 찬 이유영은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진영숙 역시 이유영을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예전에도 이유영에게 자주 화가 났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진영숙은 분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유영은 격하게 숨을 들이마신 진영숙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시 백산 별장에 가거나 우리 가족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땐 당신 진짜 가만 안 둬.”그 마지막 한마디는 징벌처럼 무겁고 섬뜩할 만큼 냉정했다.월이는 이유영의 세상 전부이자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힘들게 월이를 낳으면서 강씨 가문은 이 아이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
끊임없이 박연준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던 강이한의 모습을 이유영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두 사람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이였다.늘 서로를 원수처럼 대했고 그 모습을 본 이유영도 두 사람 사이에 과거의 악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악연이 한 여자 때문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 여자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은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모든 게 이토록 명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영만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그 7년 동안 강이한은 얼마나 다정했던가?그 친절함 속에 실은 다른 여인을 향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이유영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박연준은 강이한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었다.이건 과거의 이유영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다시 실감하고 있었다.“어쨌든 강이한 씨의 어머니잖아요.”조금 전 용준이 한 말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듣는 듯했다.“형님이 돌아오신 후에 처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용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공손함 속에는 이유영을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이유영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진영숙이 월이를 데려가려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분노는 가슴 깊이 타오르고 있었다.“지혁 씨.”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지혁을 불렀다.지혁은 그녀의 뒤에 있다가 곧장 앞으로 나섰다.“네, 아가씨.”“전 들어가야겠어요.”이유영이 내뱉은 짧은 문장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용준은 지금까지 이유영의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냉혹함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네!”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 분위기는 마치 폭발할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어지럽게 엉킨 현장을 냉정히 바라보며 우아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용준은 지혁을 막으려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