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강서희의 목소리에 한지음이 시큰둥한 얼굴로 물었다.강서희는 새로 한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비웃음을 지었다.“대체 네가 무슨 수를 써서 우리 엄마까지 구워삶았는지 궁금해서 와봤어.”한지음에 대해 진영숙의 태도가 갑자기 바뀐 것에 대해서 강서희는 매우 경계하고 있었다.‘한지음 네가 뭔데 엄마 사랑을 차지해? 세강의 모든 건 다 내 거야!’‘엄마랑 오빠 다 내 거라고!’처음에는 한지음이 일만 성사되면 돈 받고 조용히 떠날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너무 쉽게 생각한 것 같았다.한지음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난 아무것도 한 게 없어.”“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강서희의 두 눈이 싸늘하게 빛났다.강이한의 옆에 빌붙고자 하는 인간은 그게 누구라도 용납할 수 없었다.그녀는 한지음의 초라한 모습을 보며 비웃음을 머금었다. 예전에는 그렇게 잘난 척하길래 다른 여자들과는 뭔가 다른 게 있는 줄 알았다.하지만 지금 보면 어떻게든 강의한의 옆을 차지하려는 다른 여자들과 하나도 다를 게 없었다.“네 임무는 끝났어. 이제 돈 받고 해외로 나가. 그쪽에 도착하면 약속했던 대로 돈은 바로 입금해 줄 테니까.”이제 한지음을 보낼 때였다.계속 여기 남아 있으면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불안했다.강서희는 어떻게든 이 여자를 멀리 보내버려야 안심할 것 같았다.한지음이 그녀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우리 사이의 거래는 끝났지만 약속했던 것 중에 네가 날 해외로 보낸다는 조항은 없었던 것 같은데?”“그럼 지금 추가하면 되지.”강서희가 오만하게 말했다.한지음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난 이제 필요 없는걸?”두 여자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강서희는 한지음을 빤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 여자는 그녀가 상대한 모든 여자들보다 더 악랄하고 교활한 것 같았다.“그럼 모든 사실을 오빠한테 알리는 수밖에!”강서희가 협박하듯 말했다.그녀와 한지음의 거래에서 한지음이 어떤 역할을 담당했고 유영에게 무슨
“이래도 날 해외로 보낼 거야?”한지음이 웃으며 물었다.앞은 보이지 않지만 화가 나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강서희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강서희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한지음을 바라보고 있었다.세강의 오너 일가가 그 동안 유영에게 한 갑질은 한지음이 한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강서희는 진짜 무서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보게 되었다.“너 단단히 미쳤구나!”그 말을 남기고 강서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실을 나가버렸다.도망치듯 재빨리 사라지는 발걸음 소리로 한지음은 그녀의 분노와 요동치는 감정을 느꼈다.발걸음 소리가 멀어져 가자 한지음의 입가에 비열한 웃음이 지어졌다.흉측한 상처까지 더해져서 그녀의 얼굴은 섬뜩하게 일그러져 있었다.강서희는 무슨 정신으로 한지음의 병실에서 도망쳤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까 한지음의 상처를 더듬었던 손이었다.“욱!”아까 보았던 한지음의 모습이 떠오르자 그녀는 심한 구역질을 하며 베란다로 달려갔다.‘쟤 정말 미쳤어!’유영에게는 볼 수 없었던 잔인함이 한지음에게는 있었다. 이런 여자라면 강이한의 옆에서 떼어내기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게다가 지금은 진영숙도 한지음을 애지중지 딸처럼 아끼고 있었다.강서희의 두 눈이 불안감에 요동쳤다.이어지는 며칠 간, 사람들은 각자 바쁜 일상을 보냈다.강이한은 동교 개발지 옆 상권 개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게다가 준비 시간도 길지 않아서 더욱 문제였다.유영도 마찬가지였다. 강이한이 나타나서 방해하지 않으니 준비 공작은 차근차근 실현되었다.3일째 되는 날 아침.그녀는 차를 끌고 현장으로 갔다. 지난 번 사고 이후로 그녀는 차를 벤츠로 바꾸었다. 포르쉐는 정비소에 수리를 맡겼으니 수리가 다 되려면 시간이 좀 걸릴 터였다.다행히 조민정이 빠른 시간에 차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차에서 내린 유영은 마침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강이한과 마주쳤다.남자의 시선이 그녀의 새로 산 벤츠에 닿았다.순
유영은 이제 그와 이야기를 길게 하고 싶지 않았다.차라리 그럴 바에야 디자인 도면 하나 더 그리는 게 나았다.예전에 강이한만 쫓아다니던 그녀와는 완전히 상반된 태조였다.이번 입찰 경쟁은 지난번과 조금 달랐다.지난번에는 단순히 디자인 도면만 보고 심사위원들의 투표로 결정되었다면 이번에는 입찰에 참여한 회사 대표가 나와 앞으로의 사업 방향과 비전을 제시하는 프리젠테이션을 해야했다.대기실.유영은 서재욱과 마주 앉았다. 서재욱이 따뜻한 커피를 그녀에게 건넸다.“추운데 몸이라도 좀 녹여요.”“감사합니다.”강이한은 옆 대기실에 자리했다.그는 지나가면서 여자와 서재욱이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이를 갈았다.서재욱이 어떤 사람인가?겉으로는 부정적인 스캔들이 한 번도 난 적 없지만 사실 그는 이 업계에서 바람둥이로 유명했다.유영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인간과 저렇게 가깝게 지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지금의 강이한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할 경지에 이르렀다.그녀가 다른 남자와 같이 있는 모습만 봐도 둘이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대표님? 대표님!”조형욱이 뒤에서 조심스럽게 강이한을 불렀다.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 보니 유영과 서재욱은 이미 자리를 뜨고 없었다.“아까 저기 있던 인간들 어디 갔어?”“이미 들어가셨습니다.”조형욱이 말했다.유영이 서재욱에게 어떤 방안을 제시했는지 궁금했다.강이한은 짜증스럽게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그렇게 한 시간이 지나갔다.안에서 뭘 그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는지 프리젠테이션을 한 시간이나 진행하다니!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그 모습이 강이한의 신경을 건드렸다.“대표님.”“가자!”강이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조형욱은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유영을 지나치는 순간, 그는 걸음을 멈추고 곁눈질로 그녀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유영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태평한 표정으로 갈 길을 갔다.반면 그녀의 옆에서 걷고 있던 서재욱이 웃음을 터뜨
서재욱의 말처럼 박연준은 철저한 효율주의자였다. 그는 절대 친한 지인이나 협력사 사장을 위해 누군가를 추천해 주지 않았다. 그들 사이의 의뢰나 계약이 끝나면 그걸로 끝이었다.게다가 더 놀라운 건 오로라 스튜디오 같은 시설 디자인 작업실에서 올라온 작업물을 박연준이 직접 심사하고 그녀의 실력을 인정해서 절친인 서재욱까지 연결해 주었다는 점이었다.이번 입찰 경쟁은 소리 없는 전쟁이나 다름없었다.강이한에게는 이번 프로젝트가 매우 중요했다. 세강 전체가 신경을 도사리고 입찰 결과를 지켜보았다.유영은 자신감이 넘쳤다. 그녀는 최선을 다했고 이제 결과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이번 의뢰 때문에 3일간 밤을 새워 일해서 그런지 화장으로 가린다고 했지만 안색은 창백했다.하지만 결과는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서원이 이번 입찰 경쟁의 승리자가 된 것이다.그 순간 현장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강이한이 부들부들 떨며 지켜보는 가운데, 서재욱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유영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수고했어요.”“대표님도 수고 많으셨어요.”유영도 작은 손을 내밀어 예의 바르게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누군가가 다가와서 그녀의 팔목을 가로챘다.갑작스러운 공격에 유영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강이한이었다.그녀의 앞으로 다가온 남자는 눈을 부릅뜨고 분노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유영은 그에게서 위험한 기운을 느끼고 다급히 말했다.“강이한, 이거 놔.”하지만 이성을 잃은 강이한에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그는 유영을 질질 끌고 주차장으로 가서 억지로 차에 밀어넣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유영이 반대쪽 문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운전기사가 빠르게 문을 잠갔다.그들이 나올 때부터 운전기사도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고개를 돌리자 남자가 씩씩거리며 차에 오르고 있었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꽉 잡아 뒷좌석에 고정했다.남자의 실성한 모습에 유영이 당황했다.“왜 이러는 거야?”유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유영은 남자의 매서운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물었다.“또 나를 병원에 끌고 가려고?”“그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네!”강이한이 음산한 얼굴로 말했다.유영의 얼굴이 순간 하얗게 질렸다.강이한이 무표정한 얼굴로 운전기사에게 말했다.“병원으로 바로 가.”“강이한!”겁에 질린 유영이 소리쳤다.진심이야?진짜 나를 병원에 끌고 가려고?이번 생에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사람은 바뀌지 않았다.지난 생에도 싫다는 그녀를 구슬려서 억지로 수술대에 올린 사람이었다.지난 생에 겪었던 화면들이 유영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내 몸에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우리 이제 남남이잖아. 못할 건 또 뭐 있어?”유영은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한지음을 위해 굳이 이렇게까지 한다고?그는 거침없이 우리는 남남이라고 말하고 있었다.유영은 지난 생의 강이한이 눈앞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때의 그 역시 이렇듯 잔인한 사람이었다.유일하게 지난 생과 달라진 점이라면 둘이 이혼했다는 사실이었다. 차가 서서히 출발하자 강이한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는 그녀를 놓아주었다.그리고 곧장 병원 의료진에게 전화를 걸었다.“기증자 찾았으니 지금 당장 수술 준비하세요. 지금 가고 있어요.”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말투에 유영의 마음도 깊은 곳으로 가라앉고 있었다.비록 지난 생에 한번 경험한 일이지만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더 이상 침착함을 유지할 수 없었다.강이한이 시계를 보며 말을 이었다.“20분 뒤면 도착하겠네요. 일단 환자 상태 체크하고 도착하면 바로 수술 들어갈 수 있게 조치하세요.”유영은 그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귀에는 더 이상 그가 뭐라고 말하는지 들리지 않았다.남자의 두 눈에는 잔인함이 가득했다.전화를 끊은 강이한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유영을 힐끗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눈빛에 동요나 다른 감정은 없었다.유영은 온몸에 오한이 돌았다.그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수술한다고?”“이유영 네가 지음이한테 빚진 거야.”남
병원!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온 배준석은 신속히 한지음에게 일련의 검사를 진행했다.소식을 접한 한지음은 가장 먼저 조형욱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리고 조형욱으로부터 강이한이 유영을 끌고 병원으로 오고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한지음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피어났다.유영, 이제 이 어둠은 네 거야!유영의 처참한 미래를 상상하니 벌써부터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당연하게도 유영이 원해서 왔을 리는 없었다. 하고 싶은 게 많고 자존감 높은 그녀가 스스로 이런 선택을 했을 리 없었다.하지만 이건 한지음이 원하던 결과였다.사랑하는 남자의 강요로 다른 여자에게 시망막을 빼앗기는 기분은 대체 어떤 기분일까?한지음은 지금 당장 울부짖는 유영의 비명소리를 듣고 싶었다.병원 입구.유영은 남자에 의해 강제로 끌려 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강이한, 꼭 이렇게 해야겠어?”결국 여기까지 온 건가?그녀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강이한이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마음속 한구석에서 제발 이러지 말라고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하지만 결국 한지음의 처참한 흉터를 떠올리고 생각을 바꾸었다.그 잔인한 모습들이 결국은 그의 이성을 집어삼켰다.“걱정 마. 나중에 내가 꼭 당신에게 맞는 시망막을 찾아줄게.”“수술 끝나면 내가 항상 옆에 있을 거야. 내가 직접 당신을 간호할게. 아프지 않을 거야.”남자의 목소리는 내용과는 전혀 다르게 싸늘하기만 했다.유영의 두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죽어버려!”그녀는 남자의 준수한 얼굴을 똑바로 노려보며 주먹을 휘둘렀다.하지만 남자는 가볍게 그 손목을 가로채고 잡아당겨 품에 안은 뒤, 그대로 그녀를 질질 끌고 병원 안으로 향했다.유영이 발버둥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그녀는 다급한 마음에 입구에 있는 쓰레기통을 집어 강이한의 머리에 엎었다.안에서 쓰레기가 쏟아지며 남자의 온몸에 오물이 묻었다.분위기가 순식간에 냉각되었고 뭇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향했다
그녀가 눈물을 훔쳤다.그 모습은 완벽한 피해자의 모습이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소녀가 재벌가에 시집 가서 갖은 고생을 하고 결국 재벌 남편에게 버려진 모습 그 자체였다.누군가가 벌써 핸드폰을 꺼냈다.강이한은 모이는 사람들을 둘러보고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 그는 당장 이 자리에서 이 여자를 찢어 죽이고 싶었다.유영은 다가오는 사람들을 힐끗 보고는 울며 말했다.“강이한, 우리 이혼했잖아. 세강의 안주인 자리도 그 여자한테 양보했어. 그런데 또 뭐가 부족하대?”“내 말을 안 믿어도 돼. 하지만 그 여자가 시력을 잃은 시점이 언제인지, 조금만 신경 써서 알아보면 알게 될 거야. 아직 검진도 안 했지?”강이한이 입을 열었다.“닥쳐, 이유영!”“대표님!”멀지 않은 곳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조형욱이 다가와서 강이한을 말렸다.유영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강이한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이게 날 건드린 대가야, 강이한!’그녀는 이번 기회에 남자에게 제대로 된 교훈을 주고 싶었다.강이한은 분노를 꾹 참으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었지만 사납게 일그러진 표정까지는 감출 수 없었다.그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노려보는 가운데, 유영은 도망치듯 병원 반대방향으로 뛰었다.원래 저런 여자였나?오스카 연기상을 줘도 될 만큼, 완벽한 연기였다.유영이 입구에서 오열하는 모습은 순식간에 인터넷에 퍼졌다. ‘한지음의 욕심은 어디까지인가? 강이한은 어찌하여 현모양처에게 이렇게까지 하는가?’ 등 온갖 타이틀이 인터넷 기사를 타고 돌아다녔다.“하하! 너무 고소해!”그 시각, 유영의 사무실에서 기사를 확인한 소은지는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게다가 달랑 기사만 올라온 게 아니라 동영상까지 첨부되어 있었다.영상 속 유영의 모습은 누가 봐도 버림받고 힘들어하는 피해자의 모습이었다.유영이 친구를 흘겨보며 말했다.“그만 웃어. 그거 보고 웃은지 벌써 10분 됐어.”“부족해. 강이한 그 표정 봤어? 너무 웃기잖아!”강이한이 누군가!청하시에서 이 정도
“강이한은 지금 혈압 올라 죽으려 하겠지?”“아마도?”아까 병원에서 봤던 울긋불긋한 얼굴만 생각해도 그가 얼마나 화가 많이 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 우선 해야 할 것은 한지음을 실드 치는 일이겠지.”지난번에 앞장서서 유영을 비난했던 언론사 기자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렸다. 아마 한지음 쪽에서 뒤를 밟힐까 봐 처리한 것 같았다.하지만 그들 중에는 한지음에게 불만을 품은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굳이 유영이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나서서 불을 지필 사람들은 많고도 많았다.그들은 강이한을 공격하진 못해도 한지음은 마음대로 공격할 수 있었다.게다가 한지음이 전에 했던 일들이 유영에 의해 전부 가짜라는 게 까발려지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한지음 쪽 입장을 믿지 않게 되었다.“너는 괜찮아?”소은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유영에게 물었다.강이한이 한지음을 감싸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이었다.한지음이 나타난 뒤로 강이한은 한 번도 유영의 편에 서서 문제를 해결해 준 적 없었다.유영은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어? 아마 한동안은 조용할 거야. 내가 바라던 바고.”오늘 있었던 일로 하여 강이한도 유영이 만만히 당하기만 하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아무런 준비도 없었던 상황에서 당한 거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강이한도 참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것 같았다.그리고 유영의 예상은 맞았다.기사를 접한 강이한은 치미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그의 사무실에는 배준석도 같이 있었다.배준석은 무시무시한 기에 눌려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있었다.“조 비서!”지옥사자를 연상케 하는 싸늘한 목소리가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이번 유영의 행보는 완전히 그가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조형욱이 다가와서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예, 대표님.”“이유영에게 의뢰를 맡긴 회사들에 전달해. 당장 계약을 중지하지 않으면 우리 세강을 적으로 돌린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고!”강성건설과 서원그룹이 널 먹여살릴 수
“박연준, 네가 강이한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고 또 이제는 강이한 어머니까지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난 여태 몰랐네.”그 말은 날 선 조롱처럼 들렸다.동시에, 과거 강이한과 박연준의 사이가 이유영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되새기게 했다.그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의 냉정한 말에 박연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다른 일 있어서 먼저 끊을게.”이유여은 박연준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사랑이란 그저 우스운 감정에 불과했다.차는 천천히 백산 별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지혁 씨.”“네.”“지혁 씨는 사랑해 본 적 있어요?”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불쑥 물었다.예전의 이유영은 사랑이란 존재를 믿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군가를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토록 반짝이던 사랑이란 단어 뒤편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었는지 이젠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의 말을 들은 지혁은 묵묵히 앞을 응시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핸들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이유영은 굳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쾅!”그 순간,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함께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이유영은 아픈 이마를 짚고 있었고 지혁은 차에서 내려 사고 처리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차 문이 열렸다.“아가씨.”지혁이 이유영 앞에 공손하게 나타났다.“무슨 일이에요?”“셋째 도련님 차입니다.”“...”그 말을 듣고 그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자꾸 나타나는 셋째 도련님의 존재에 우연한 사고인지 아니면 이미 계획된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어떻게 된 거예요?”“셋째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이유영은 이 전설 속의 셋째 도련님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특히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밖에서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유영은 몰랐다. 그 아이가 결국 진영숙이 데려온 의사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은.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아!”분노가 치밀수록 이유영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진영숙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녀는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놔, 놔 이 미친년아! 악!”“짝!”이유영의 손바닥이 진영숙의 뺨을 후려쳤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말릴 용기를 잃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다시 한번 움찔하고 말았다.이유영의 행동에 소리 내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숨을 삼켰다. 진영숙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결국 이유영은 진영숙을 놓아주며 말했다.“주제 파악하라는 의미에서 그랬어요. 당신은 할머니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에요.”그렇다. 진영숙은 할머니가 될 자격이 없었기에 이유영도 그녀를 아무 감정 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진영숙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머릿속이 멍해진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그 사이 이유영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저년이 감히...”감히 뭐라고?예전엔 강이한 곁에서 순한 토끼처럼 보호받더니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유영이 밖으로 나왔을 때,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를 감쌌다.그 순간, 가슴속의 억눌린 감정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지혁은 이유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용준을 밀쳐내고 앞으로 다가왔다.“아가씨.”“가요.”용준은 여전히 당당한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유영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받은 이유영의 모습은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여보세요.”“어디야?”“풍산.”“유영아...”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박연준은 지금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어떤 태도로 맞서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강씨 집안에서 강이한이 곁에 없는 동안에는 진영숙의 말에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홍문동으로 이사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숙이 찾아오면 이유영은 그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그녀의 말에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대체 언제부터일까?’아마 강이한과의 이혼을 결심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즈음부터 이유영은 진영숙의 말에 더 이상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그땐 고작 진영숙의 지시를 어기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한참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낸 진영숙이 이유영을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이빨을 드러낸 짐승 같은 기세가 실려 있었다.이유영은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내는 진영숙이 가소로웠다.이유영은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들고 망설임도 없이 진영숙의 얼굴에 뿌렸다.“앗!”진영숙은 비명을 질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손을 댄다는 건 이런 거예요.”이유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진영숙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퍽!”손에 들고 있던 잔이 손끝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예전의 풍산 사람들이 기억하던 이유영은 언제나 조용하고 온순한 여인이었다. 누가 감히 지금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분노로 찬 이유영은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진영숙 역시 이유영을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예전에도 이유영에게 자주 화가 났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진영숙은 분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유영은 격하게 숨을 들이마신 진영숙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시 백산 별장에 가거나 우리 가족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땐 당신 진짜 가만 안 둬.”그 마지막 한마디는 징벌처럼 무겁고 섬뜩할 만큼 냉정했다.월이는 이유영의 세상 전부이자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힘들게 월이를 낳으면서 강씨 가문은 이 아이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
끊임없이 박연준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던 강이한의 모습을 이유영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두 사람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이였다.늘 서로를 원수처럼 대했고 그 모습을 본 이유영도 두 사람 사이에 과거의 악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악연이 한 여자 때문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 여자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은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모든 게 이토록 명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영만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그 7년 동안 강이한은 얼마나 다정했던가?그 친절함 속에 실은 다른 여인을 향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이유영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박연준은 강이한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었다.이건 과거의 이유영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다시 실감하고 있었다.“어쨌든 강이한 씨의 어머니잖아요.”조금 전 용준이 한 말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듣는 듯했다.“형님이 돌아오신 후에 처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용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공손함 속에는 이유영을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이유영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진영숙이 월이를 데려가려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분노는 가슴 깊이 타오르고 있었다.“지혁 씨.”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지혁을 불렀다.지혁은 그녀의 뒤에 있다가 곧장 앞으로 나섰다.“네, 아가씨.”“전 들어가야겠어요.”이유영이 내뱉은 짧은 문장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용준은 지금까지 이유영의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냉혹함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네!”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 분위기는 마치 폭발할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어지럽게 엉킨 현장을 냉정히 바라보며 우아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용준은 지혁을 막으려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
임소미는 혈압이 치솟았고 화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내 말이 틀렸나요?”“틀렸냐고? 제대로 된 일을 한 적은 있고? 당신만 제대로 된 선택을 했더라면 유영이와 강이한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임소미는 참았던 감정을 폭발시키며 격렬히 외쳤다.진영숙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임소미의 말이 맞았다. 진영숙은 두 사람 관계에서 많은 잘못을 했다.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달라졌다.강이한은 사라졌고 강서희도 여전히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남은 건 오직 월이 뿐이었다.오늘 이곳에 와서 월이를 보게 된 순간, 월이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자리 잡았다.“사람 불러!”임소미가 크게 외치자 집사들과 도우미들이 급히 달려왔다.“이 여자를 당장 내쫓아!”“당신이 감히 그럴 수 있을까?”“뭐라고?”임소미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이 여자는 지금 도대체 뭐 하려는 걸까?’조금 전 아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을 보며 아이에게 조금의 정이라도 남아 있는 줄 알았다.하지만 모든 것은 착각에 불과했다.결국 그녀는 후회라는 감정을 모르는 인간이었다.진영숙이 오늘 여기 온 것도, 월이에게 다정하게 굴었던 것도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한 마지막 발악이었다.그녀의 말은 그저 그럴싸한 포장일 뿐 사실은 월이를 자신의 곁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그리고 뻔뻔하게도 무례하기까지 했다.진영숙은 임소미의 눈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따뜻함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매서운 날카로움뿐이었다.그녀는 침착하게 말했다.“우리 아들이 왜 서주를 떠났는지 내가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임소미, 당신들은 정말 단 한치의 양심 가책도 못 느꼈어?”왜 강이한이 서주를 떠났는지 시간대와 상황을 조합해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추측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특히 떠나기 전, 시윤이 건넨 말이 결정적이었다. 이유영이 용성시에서 수술을 받았던 그 시기에 강이한은 서주에
강이한은 그렇게 어둠 속에서 절망의 고통을 몸소 겪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괴로워도 수술을 받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한때 이유영이 어둠 속에서 얼마나 무섭고 무력했는지를 그는 이제서야 조금씩 체감하고 있었다....파리에서 진영숙은 다시 백산 별장을 찾았다. 여전히 강이한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고 시윤은 강이한이 이정과 신시욱을 데리고 떠났다고 말했다.그 두 사람의 능력을 생각하면 강이한이 스스로 나타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그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진영숙은 어머니로서 절망에 가까운 마음으로 그를 수소문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그리고 알면 알수록 그녀의 마음은 점점 더 불편해졌다.“정말이지, 당신은...”백산 별정까지 찾아온 진영숙의 뻔뻔함에 임소미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굳은 표정으로 응수했다.진영숙은 한때 유능한 여성이었고 그런 그녀에게 감히 저런 얼굴을 하는 사람은 없었기에 그녀에겐 익숙하지 않은 대우였다.“저는 아무것도 없어요. 저 좀 봐주세요.”그녀의 목소리에는 전에는 없던 고통이 서려 있었다.그렇다. 지금의 진영숙에겐 주변에 기댈 친척도 함께할 가족도 없었다. 그녀의 앞에 있는 건 손녀인 월이 뿐이었다.오늘도 그녀는 월이를 위해 여러 장난감을 준비해 왔지만 임소미는 그 모든 행동이 불쾌하게만 느껴졌다.“당신도 어머니였잖아요. 제 마음이 얼마나 불편한지 알잖아요.”임소미는 차가운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봐준다고? 당신이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이유영이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 진영숙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심지어 뱃속의 아이조차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이토록 헌신적인 할머니 행세를 하니 임소미는 화가 났다.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극으로밖에 안 보였다.진영숙의 눈엔 고통이 어렸다.“저는 정말 생각하지 못했어요.”임소미의 말에 그녀는 도무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아무리 자존심 강한 진영숙이라 해도 진실을 알게 된 지금, 과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