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각 진영숙은 강서희와 함께 강주를 방문했다. 한지음은 며칠 전보다 더 야위어 있었고 얼굴색도 창백했다.하지만 진영숙은 더 이상 그녀에게 측은지심을 느끼지 않았다. 전에 한지음에게 느꼈던 고마운 마음은 이번 일을 계기로 완전히 사라졌다.그들이 도착하자 간병인은 긴장한 얼굴로 차를 내왔다.한지음은 불안에 떠는 간병인의 기분을 느끼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자리 좀 비켜주세요.”“네, 아가씨.”간병인은 감격스러운 얼굴로 한지음을 힐끗 보고는 도망치듯이 주방으로 달려갔다.거실에 세 사람만 남게 되자 진영숙은 험악한 표정을 드러냈다.그녀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음침한 목소리로 물었다.“네가 했니?”질문이라기보다는 확신이었다.진영숙은 처음에 한지음이 유영의 이복동생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이건 절대 언론에 공개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유영이 그만큼 한지음을 증오했기 때문이었다.유영이 강이한과 이혼하게 된 것도 한지음 때문인데 이 관계까지 언론에 드러나면 세강에도 타격이 컸다. 현재도 모두가 세강의 가정사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체면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진영숙이었기에 이번 일이 더욱 화가 났다.“아줌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사실 한지음은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그녀와 강서희는 한때는 동맹이었지만 기껏해야 강서희에게서 강이한의 동향을 듣는 일에 불과했다.강이한이 유영과 함께 있는 시간에 일부러 전화를 걸어 유영을 자극한 게 다였다.진영숙은 찻잔을 테이블에 탁 하고 내려놓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한지음, 한때는 네 상황이 가련해서 내가 많이 봐주려고 했어.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두고만 볼 수 없어!”한지음에 대한 일말의 연민의 감정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그만큼 실망이 컸다.강서희가 옆에서 진영숙을 말렸다.“엄마, 화 풀어. 어쩌면 뭔가 오해가 있었을 수도 있잖아.”“오해는 무슨 오해!”오해라는 소리에 진영숙은 더 화가 났다.전에 유영과 강이한이 이혼한다
“내가 할 말은 여기까지야. 알아들었으면 앞으로 얌전히 지내. 그러면 지금처럼 안락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을 테니까.”말을 마친 진영숙은 더 이상 얼굴도 보기 싫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강서희는 먼저 밖으로 나간 진영숙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지음을 보며 말했다.“엄마가 오늘 기분이 좀 안 좋아서 그래. 이유영이 요즘 나락 갔거든.”그 말이 한지음에게는 가장 큰 위로였다.그녀는 유영을 증오했고 유영의 괴로움이 그녀의 위로였다.“아직 부족해!”“배준석이 돌아왔어. 약혼녀가 납치당했다는 소식 듣고 너 수술하는 날 수술 포기하고 달려나간 주치의 말이야. 지금 모든 증거가 유영을 향하고 있어. 네가 뭘 해야 하는지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지?”강서희의 말에 한지음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유영이 뭘 하든 이 일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이다.말을 마친 강서희도 서둘러 나가버렸다.홀로 남은 한지음은 멍하니 앉아 주변의 암흑을 피부로 느꼈다.이런 숨막히는 암흑을 체감할수록 유영이 더 증오스러울 뿐이었다.간병인이 주방에서 나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그 사모님도 참… 어떻게 말을 그렇게 심하게 할 수가 있죠?”간병인은 한지음을 착하고 온화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전에는 앞을 못 보는 장님이라 만만하다고 생각했는데 같이 오랜 시간을 지내다 보니 점차 한지음의 힘든 처지를 공감하게 되었다.그래서 간병인들은 진심으로 한지음을 따랐다.한지음은 간병인의 손등을 다독이며 부드럽게 말했다.“재벌가 사람들은 출신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죠.”“가장 중요한 건 인품 아닌가요? 그 언니라는 사람은….”“그만해요!”한지음은 싸늘한 목소리로 간병인의 말을 끊었다.유영을 감싸는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냥 유영을 언니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유영이 그녀를 거부하는 것 만큼 그녀 역시 유영이 증오스러웠다.어릴 때 겪은 모든 고난을 생각하면 유영의 사지를 찢어 죽여도 부족했다.분명 같은 아버지를 가졌는데
박연준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난 유영 씨가 다른 얘기를 할 줄 알았어요.”유영은 가까스로 미소를 지었다.“너무 걱정하지 말고 나 믿어요.”걱정스러운 그녀의 얼굴을 보며 박연준이 말했다.이번에 강이한은 절대 유영을 봐주지 않을 것이다.모든 증거가 유영을 향하고 있었고 결국 강이한은 눈에 보이는 것을 믿게 될 것이다.두 사람 사이에 신뢰는 이미 완전히 무너졌기에 더욱 그랬다.유영은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애꿎은 술만 들이켰다.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강이한이 얼마나 잔인한 사람인지, 그의 손에 대체 얼마나 많은 로열 글로벌 관련 약점을 쥐고 있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정 회장님도 대비를 해뒀을 거예요.”“그래야겠죠.”유영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그렇게 해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그와 10년을 함께 했기에 그가 무언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녀를 붙잡아두기 위해 정국진을 공격한 일만 놓고 봐도 그랬다.이제 한지음이 실명한 원인이 유영이라고 굳게 믿고 있을 테니 그때보다 더 거센 공격이 시작될 것이다.“유영 씨.”“네.”“출국하는 거에 대해 고민해 봤어요?”처음 나온 얘기가 아니었다.박연준은 혼란스러운 이 도시에 계속 머물기보다 밖으로 나가는 게 안전할 거라고 판단했다.“그럼 동교 프로젝트는 어떡해요?”“기초를 잘 다졌으니 앞으로는 직원들에게 맡기면 돼요.”박연준이 말했다.그는 유영이 이곳을 떠났다가 일이 다 조용히 해결된 뒤에 돌아오기를 바랐다.유영은 눈을 질끈 감고 고민했다.머릿속에 핏발이 선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던 강이한이 떠오르자 결국 그녀는 침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곧 새해도 돌아오니 파리로 날아가서 외삼촌과 함께 명절을 같이 보내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었다. 어차피 기사에서 어떻게 떠들어대든 무시하면 결국 지나갈 것이다.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수록 하이에나들에게 먹이를 던져주는
“정말 생각보다 더 뻔뻔한 인간이었네. 바깥이 이렇게 시끄러운데도 여기서 데이트를 즐길 여유까지 있다니.”배준석이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그는 원래 항상 밝은 사람이었고 누구에게도 악담을 퍼부은 적이 없었다.하지만 지금 유영을 보고 있으면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그녀의 목에 칼을 꽂고 싶었다.유영은 미간을 확 찌푸리고 배준석을 노려보았다.그녀가 뭐라고 하려는데 박연준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그의 그런 행위에 자극 받은 배준석이 차갑게 코웃음쳤다.“하, 역시 믿는 구석이 있는 여자는 다르네.”“배준석, 사건의 진범이 밝혀지지 않았는데 지금 이렇게 인신공격을 퍼붓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안 그래?”“박연준, 저 여자는 이한이 형 전처야. 둘이 이렇게 붙어 다니는 거 집에서 알아?”배준석은 가소롭다는 듯이 박연준을 노려보며 말했다.유영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그녀가 뭐라고 해명하려고 했지만 배준석은 그럴 기회를 주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예쁘면 뭐해. 그래 봐야 이혼녀잖아. 안 그래?”유영의 얼굴이 음침하게 굳었다.“배준석 씨, 마음은 이해하겠지만 내가 이렇게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건 범인이 내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나한테 찾아와서 화풀이할 이유가 없다고요.”“무죄라. 이유영, 결국 정국진 믿고 그러는 거잖아? 모든 증거가 밝혀졌을 때도 그렇게 고고할 수 있는지 지켜보겠어!”유영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하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사람과 더 이상 실랑이를 벌여도 소용없었기에 박연준의 손을 잡아끌었다.배준석이 다가와서 그녀의 앞을 막았다.“그런 짓을 했으면 당당히 인정을 해야지. 욕 좀 했다고 벌써 화를 내는 거야?”“경찰에 신고했다면서요. 나한테 행패를 부려서 얻는 게 뭐죠? 정신 좀 차려요. 아직 조사가 끝나지도 않았다고요.”유영도 차갑게 받아치며 루이스에게 눈짓했다.루이스가 앞으로 나섰다.유영은 박연준의 팔을 잡고 뒤돌아섰다. 배준석이 따라가려 했지만 루이스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이번에는 아가씨
그녀가 전에 분실한 카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한지음 납치와 배준석 약혼녀의 납치 모두 그 카드로 출금한 내역이 있었다.강서희는 그녀에게 죄명을 뒤집어씌우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던 것이다.다행히도 지현우가 카드의 행방을 알아냈다.“나한테 보내줘요.”“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알겠어요.”전화를 끊은 유영은 서둘러 메일에 접속했다.박연준이 물었다.“무슨 일이에요?”“강서희와 관련된 단서를 잡은 것 같아요.”그녀는 핸드폰을 박연준에게 보여주었다.메일에는 납치범들에게 입금한 날짜와 강서희가 같은 날 은행에 출입한 시간이 쓰여 있었다.그녀는 일부러 본가와 멀리 떨어진 은행으로 가서 입금했다.다행히 정국진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집요하게 행방을 추적해서 겨우 알아낼 수 있었다.강서희 본인도 아마 정국진의 사람들이 이 일을 추적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일이 이렇게 쉽게 해결될 줄 알았으면 사설 탐정이 아니라 정국진의 인력을 동원할걸, 유영은 후회했다.안타깝게도 그때는 외삼촌을 걱정시키기 싫어서 주저했던 것이 사건을 지체하는 원인이 되었다.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 증거들을 신속히 공개하는 게 우선이었다.박연준에게서 핸드폰을 받은 그녀는 당장 강이한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그런데 이때, 휴대폰 화면에 기사 알람이 었다.‘천문학적 가격으로 판매되는 보석의 원가는 단돈 5천원?’너무 터무니없는 기사라 그녀는 무시하려고 했다.하지만 기사의 제목에 커다랗게 뜬 크리스탈 가든이라는 문구가 그녀의 이목을 끓었다.기사를 확인하자마자 지현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대표님, 당장 회사로 돌아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지현우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기사가 크리스탈 가든을 저격한 것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었다.유영은 눈을 질끈 감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알았어요. 곧 갈게요.”전화를 끊자 현기증이 몰려왔다.박연준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또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유영은 착잡한 시선으로 박연준을 바라
굳이 누가 얘기해 주지 않아도 강이한과 관련되어 있는 게 분명했다.“그게….”이번에 그녀는 더 이상 지난 번처럼 일을 숨기지 않았다. 이미 일이 이 지경까지 진행되었는데 숨긴다고 숨겨지지도 않았다.그녀의 설명을 들은 정국진은 긴 한숨을 내쉬더니 근엄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너 미친 짓인 건 알고 이러는 거야?”“외삼촌….”“당장 다 내려놓고 파리로 돌아와!”“하지만 회사는….”“내가 사람 보내서 처리할게!”정국진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같은 남자로서 강이한이 미친 사람처럼 유영을 물어뜯기 시작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그래서 화가 나고 자존심도 상할 테지만 정국진은 일단 이유영부터 빼돌리기로 했다.그와 강이한 사이에 쌓인 원한은 나중에 천천히 갚아도 늦지 않았다.“그럼 지금 회사로 갈까요?”“손에 맡은 업무 인수인계 작업만 마무리하고 내일 아침 가장 빠른 항공편으로 들어와.”“알겠어요.”머리가 어지럽고 마음이 혼란스러웠지만 이럴수록 외삼촌의 지시를 따르기로 했다.차는 어느새 회사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리려는데 손목에서 강력한 힘이 그녀를 잡았다.고개를 돌리자 박연준이 진지하면서도 자상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무슨 일 있나요?”그가 뭐라고 대답하려던 찰나,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유영을 힐끗 보고는 식지손가락을 입가로 가져가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상대가 뭐라고 했는지 박연준의 얼굴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그녀를 잡고 있던 손도 어느새 힘을 뺀 상태였다.박연준이 말했다.“알겠어, 지금 갈게.”전화를 끊은 그는 유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무슨 일 있어요?”그녀의 등 뒤에서도 저도 모르게 식은땀이 돋고 있었다.가장 두려운 건 모든 일이 같이 터지는 것이었다.그렇다는 건 상대가 이 날을 위해 수많은 이벤트를 준비했다는 말이기도 했다.“동교 쪽에 문제가 좀 생겨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무슨 일인데 그래요?”유영은 순간 머리가 어지럽고 숨이 막혀왔다.박연준이 말했다
회사를 나온 유영은 핸드폰으로 계속해서 강이한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루이스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뒤따라왔다.걸음을 멈춘 유영이 말했다.“따라오지 마세요.”“하지만 회장님께서는 아가씨의 신변 안전을 위해 한시도 떨어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루이스가 사무적인 어투로 말했다.유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강이한은 그녀에 대한 모든 증오를 크리스탈 가든에 쏟아 붓고 있었다. 현재는 오밤중에 감찰 기관까지 동원한 상황.이 일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녀 역시 쉽게 출국할 후 없을지도 모른다.계속해서 그와 연락을 시도했지만 강이한은 받지 않았다.결국 그녀는 차에 올라 루이스에게 말했다.“홍문동으로 가요.”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홍문동을 향해 차를 몰았다.사실 강이한이 홍문동에 꼭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없었다.하지만 지금으로서는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보고 싶었다.다행히도 홍문동에 도착하자 대기하고 있던 집사가 그녀를 맞아주었다.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집사의 눈빛에서 강이한이 집에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이유영 씨.”그녀가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집사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유영은 집사를 똑바로 노려보며 물었다.“이게 뭐 하는 짓이죠?”“대표님 께서 유영 씨는 들여보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유영의 두 눈이 매섭게 빛났다.이제 방문마저 금지했다는 말인가!유영은 루이스에게 눈짓했다. 눈짓을 알아들은 루이스가 달려와서 집사를 밀어내자 뒤에 대기하고 있던 경비원들이 그들을 에워쌌다.하지만 루이스의 도움으로 유영은 그들을 따돌릴 수 있었다.집사가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이럴수록 대표님의 화만 자극할 뿐이에요!”하지만 유영은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었다.이번 사건은 지난 번보다 더 심각했다.강이한은 손에 확실한 근거가 있지 않은 이상 절대 모험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안으로 들어가자 강이한이 음침한 표정을 하고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재떨이에는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강이한!”유영은 완전히 인내심을 잃어버렸다.그녀는 온몸에 싸늘한 기운을 풍기며 그에게로 한발 한발 다가갔다.“나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고?”동교 개발 지역에서 인명 사고가 났다는 얘기가 틀림없었다.유영은 그의 잔인함에 눈앞이 아찔해졌다.이건 정상인이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수단이었다.그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이런 짓까지 버렸다고 생각하니 숨이 막혀왔다.지난 생이든 이번 생이든 한지음이 납치를 당한 그 순간부터 그는 완전히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이번에도 그는 외부의 적을 쳐내는 수단으로 그녀를 벼랑으로 내몰고 있었다.이건 이미 잔인함의 정도를 벗어난 행위었다.이 순간에야 유영은 강이한이 완전히 자신을 내려놓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전에 느꼈던 실망의 감정과는 다르게 이제는 그녀를 완전히 적으로 상대하겠다는 그의 의지가 보였다.그는 이미 그녀를 적으로 간주하고 벼랑에서 그녀를 떨어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부족하다면 더 있어.”“내가 한 거 아니야!”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남자는 분노에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유영도 치미는 분노를 참으며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주웠다.그리고 메일을 열어 자신이 수집한 증거들을 그의 앞으로 내밀며 소리쳤다.“똑바로 봐. 배준석 약혼녀를 납치한 진짜 범인이 누군지! 그리고 대체 누가 한지음을 납치해서 장님으로 만들었는지!”유영은 직접적으로 강서희가 했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이 여자가 남긴 증거를 찾느라 동분서주하던 지난 날이 눈앞에 스치는 것 같았다.강이한은 그녀가 내민 핸드폰을 받지 않았다.그는 담담히 휴대폰 화면을 살폈다. 그 안에는 강서희가 은행을 출입하는 화면이 담겨 있었다.그는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도망갈 곳이 없으니까 서희한테 죄를 뒤집어씌우련고?”다정하게 강서희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그 모습을 보자 유영은 눈앞이 캄캄했다.마치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간 것처럼 어지러웠다.그녀가 해명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항상 아니라고 말해도 믿
공기가 얼어붙었다.“쾅!”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박연준이 탁자를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박연준의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가서 유영이를 백산 별장으로 데려가.”이유영은 미친 게 분명했다.‘감히 엔데스 셋째 도련님 같은 인물과 술집에 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건가?’정국진이라면 이유영이 엔데스 신우와 가까워지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특히 지금처럼 민감한 시기엔 더욱 반대가 심할 것이다. 박연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고 남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문기원이 급히 박연준을 따라나섰다.“네!”위험한 박연준의 모습에 용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대답했다.강이한이 각막을 이유영에게 이식해 주려고 할 때 왜 박연준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되는 듯했다.지금 이유영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그녀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과거의 그녀는 마치 강이한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는 천사 같았다. 하지만 혼란을 겪은 이후 그녀는 변했다.거만하고 방탕하게 아무하고도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지금 박연준이 생각했을 때, 이유영은 더 이상 고상하고 단정한 명문가의 며느리가 아니라 그저 자유롭게 떠도는 바람 같은 여자였다.최근 그녀는 서재욱과 엔데스 신우와 모호하기 짝이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서주에서.박연준이 차에 타기 전, 문기원이 그를 붙들었다.“선생님, 선생님!”“비켜.”“오늘 정말 중요한 회의입니다.”문기원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은 서주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기에 이유영을 생각하면 문기원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정말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박연준 곁에 있는 문기원조차 그녀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박연준이 돌아서기를 기다렸다.박연준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눈을 감은 순간, 그의 눈빛 속 날카로움은 잠시 가려졌지만 몸 전체에서 풍겨 나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은 고민에 휩싸일 때마다 이런 방식을 택했다.하지만 결국 이런 방식은 오히려 고민에 잠긴 마음을 더욱 괴롭힐 뿐이었다.한번 마음에 깊이 새겨진 근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죄송합니다만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그녀의 몸은 항상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예전에 건강이 좋지 않기도 했고 어렵게 다시 찾은 시력인 만큼 그녀는 술과 더욱 멀리하게 되었다.하지만 오늘 진영숙이 백산 별장에서 벌인 일을 생각하니 이유영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 감정을 억눌렀다. 그녀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회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인 건지 알 수 없었다.남자는 그 말을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깜빡했네요.”남자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괜찮아요.”“...”“이제 가도 될까요?”“술을 마시지 않아도 즐길 수 있잖아요.”“...”하지만 이유영은 이런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특히 많이 노출된 옷을 입은 여자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반항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그녀를 향락의 세계로 이끌었다....한편 박연준은 서주에서 중요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용준의 전화를 받은 그의 가슴이 쿵쾅거렸다.“그쪽은 괜찮아?”진영숙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이유영이 인정사정없을 거라는 걸 박연준도 알고 있었다.과거 강이한 곁에 있을 때의 이유영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녀는 적어도 강이한에게 만큼은 너무 몰아붙이지 않았었다.그래서 진영숙이 아무리 이유영을 괴롭혀도 그녀는 어떻게든 참고 견뎠다.지금은 성격이 점점 더 나빠졌다고 해야 할까? 아예 참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용준은 진영숙의 현재 상황을 박연준에게 설명했고 이미 좋지 않았던 박연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회의 끝나고 바로 갈게. 일단 진정시켜.”박연준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일이 있었는데 과연 내가 진정시킬 수 있을까?’“네!”“유영이는
“박연준, 네가 강이한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고 또 이제는 강이한 어머니까지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난 여태 몰랐네.”그 말은 날 선 조롱처럼 들렸다.동시에, 과거 강이한과 박연준의 사이가 이유영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되새기게 했다.그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의 냉정한 말에 박연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다른 일 있어서 먼저 끊을게.”이유여은 박연준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사랑이란 그저 우스운 감정에 불과했다.차는 천천히 백산 별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지혁 씨.”“네.”“지혁 씨는 사랑해 본 적 있어요?”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불쑥 물었다.예전의 이유영은 사랑이란 존재를 믿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군가를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토록 반짝이던 사랑이란 단어 뒤편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었는지 이젠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의 말을 들은 지혁은 묵묵히 앞을 응시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핸들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이유영은 굳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쾅!”그 순간,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함께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이유영은 아픈 이마를 짚고 있었고 지혁은 차에서 내려 사고 처리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차 문이 열렸다.“아가씨.”지혁이 이유영 앞에 공손하게 나타났다.“무슨 일이에요?”“셋째 도련님 차입니다.”“...”그 말을 듣고 그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자꾸 나타나는 셋째 도련님의 존재에 우연한 사고인지 아니면 이미 계획된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어떻게 된 거예요?”“셋째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이유영은 이 전설 속의 셋째 도련님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특히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밖에서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유영은 몰랐다. 그 아이가 결국 진영숙이 데려온 의사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은.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아!”분노가 치밀수록 이유영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진영숙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녀는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놔, 놔 이 미친년아! 악!”“짝!”이유영의 손바닥이 진영숙의 뺨을 후려쳤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말릴 용기를 잃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다시 한번 움찔하고 말았다.이유영의 행동에 소리 내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숨을 삼켰다. 진영숙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결국 이유영은 진영숙을 놓아주며 말했다.“주제 파악하라는 의미에서 그랬어요. 당신은 할머니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에요.”그렇다. 진영숙은 할머니가 될 자격이 없었기에 이유영도 그녀를 아무 감정 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진영숙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머릿속이 멍해진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그 사이 이유영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저년이 감히...”감히 뭐라고?예전엔 강이한 곁에서 순한 토끼처럼 보호받더니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유영이 밖으로 나왔을 때,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를 감쌌다.그 순간, 가슴속의 억눌린 감정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지혁은 이유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용준을 밀쳐내고 앞으로 다가왔다.“아가씨.”“가요.”용준은 여전히 당당한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유영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받은 이유영의 모습은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여보세요.”“어디야?”“풍산.”“유영아...”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박연준은 지금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어떤 태도로 맞서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강씨 집안에서 강이한이 곁에 없는 동안에는 진영숙의 말에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홍문동으로 이사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숙이 찾아오면 이유영은 그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그녀의 말에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대체 언제부터일까?’아마 강이한과의 이혼을 결심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즈음부터 이유영은 진영숙의 말에 더 이상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그땐 고작 진영숙의 지시를 어기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한참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낸 진영숙이 이유영을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이빨을 드러낸 짐승 같은 기세가 실려 있었다.이유영은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내는 진영숙이 가소로웠다.이유영은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들고 망설임도 없이 진영숙의 얼굴에 뿌렸다.“앗!”진영숙은 비명을 질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손을 댄다는 건 이런 거예요.”이유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진영숙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퍽!”손에 들고 있던 잔이 손끝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예전의 풍산 사람들이 기억하던 이유영은 언제나 조용하고 온순한 여인이었다. 누가 감히 지금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분노로 찬 이유영은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진영숙 역시 이유영을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예전에도 이유영에게 자주 화가 났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진영숙은 분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유영은 격하게 숨을 들이마신 진영숙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시 백산 별장에 가거나 우리 가족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땐 당신 진짜 가만 안 둬.”그 마지막 한마디는 징벌처럼 무겁고 섬뜩할 만큼 냉정했다.월이는 이유영의 세상 전부이자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힘들게 월이를 낳으면서 강씨 가문은 이 아이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
끊임없이 박연준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던 강이한의 모습을 이유영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두 사람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이였다.늘 서로를 원수처럼 대했고 그 모습을 본 이유영도 두 사람 사이에 과거의 악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악연이 한 여자 때문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 여자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은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모든 게 이토록 명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영만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그 7년 동안 강이한은 얼마나 다정했던가?그 친절함 속에 실은 다른 여인을 향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이유영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박연준은 강이한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었다.이건 과거의 이유영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다시 실감하고 있었다.“어쨌든 강이한 씨의 어머니잖아요.”조금 전 용준이 한 말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듣는 듯했다.“형님이 돌아오신 후에 처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용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공손함 속에는 이유영을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이유영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진영숙이 월이를 데려가려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분노는 가슴 깊이 타오르고 있었다.“지혁 씨.”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지혁을 불렀다.지혁은 그녀의 뒤에 있다가 곧장 앞으로 나섰다.“네, 아가씨.”“전 들어가야겠어요.”이유영이 내뱉은 짧은 문장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용준은 지금까지 이유영의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냉혹함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네!”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 분위기는 마치 폭발할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어지럽게 엉킨 현장을 냉정히 바라보며 우아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용준은 지혁을 막으려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