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겨버렸어, 상대방이 너무 교활해.” 소은지가 말했다. “...”‘그래서 이 사흘 동안 박연준을 보지 못한 이유가, 박연준이 요즘 바빠서였구나.’이 삼일 동안 강이한도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엔데스 명우는 정말 무서운 사람이다! 지금 그 문서를 완전히 뒤엎어버리고, 모든 사람들이 박연준과 강이한 쪽을 주시하게 만들어 두 사람은 더욱 방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소은지도 지금 상황에 참여하고 있으니, 그 문서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유영아, 후회할 거야?” 소은지가 물었다. “...”‘후회?’ 그녀는 소은지가 이 질문을 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강이한과 그녀는 10년을 함께했다. 그리고 박연준은 그녀에게 매우 특별한 존재였던 사람이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누가 이렇게까지 하고 싶었겠는가? 이유영은 아니었다! “소은지, 너는 이해하지 못해.” “아니, 나는 이해해! 너의 이 감정이 어떤지 나는 잘 알고 있어, 그래서 걱정되는 거야!” 소은지가 무겁게 말했다. “...”‘전후 관계를 말하는 건가?’ 소은지는 이유영과 강이한 사이의 시작을 잘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소은지는 이 감정을 좋게 보지 않았다. 부유한 가문 사이의 신분 차별과 어릴 적 자란 환경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소은지는 이혼 변호사로서 이런 헤어짐을 너무 많이 보아왔다. 처음에는 뜨겁게 사랑했지만, 헤어질 때는 미친 듯이 싸웠다. 하지만 이유영과 강이한같은 상황은 드물었다. 이런 복잡한 관계는 너무 얽히고설킨 것이다.“그만하자, 더 이상 말하지 말자!” 이유영은 한숨을 쉬며 전화를 끊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후회할까? 후회한다.강이한과의 시작을 후회했다. 소은지와의 통화를 막 끊자마자 진동이 울렸다. 화면을 보니, 장혜주의 번호였다! 이유영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응.”“유영 님.” “소식이 있어?” 전에 강이한과 박연준 사
장혜주의 전화를 끊은 후이유영은 온몸이 오싹해졌다. 박연준과 강이한의 사람들이 다 방해하고 있다고? 두 사람 모두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고 싶어 하는 걸까? 왜 그런 걸까? 강이한은 그렇다고 쳐도 박연준까지? 그들이 이러할수록 이유영은 더욱 알고 싶어졌다. ‘과연 이 모든 일의 진실은 무엇일까...?’밤이 되자 박연준이 10시가 넘어서야 돌아왔다. 그는 술에 취해 있었고, 이유영은 흰색 잠옷을 입고 계단에 서 있었다.박연준은 그녀를 보자마자 입가에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그의 습관처럼 되어버린 것이었고, 이유영에게는... 그저 불쾌한 가면일 뿐이었다.“유영아, 이쪽으로 와줄래?” 박연준이 손짓을 했다.이유영은 기분 좋지 않은 얼굴로 그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박연준은 그녀가 계단에서 움직이지 않자 비틀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곳에 서 있지 말고, 나에게 와.” 그의 말투는 아주 부드러웠다. 마치 연인 사이처럼 말이다.하지만 그 부드러움은 이유영에겐 독이 든 술처럼 느껴졌다. 박연준은 결국 그녀 앞에 서서 그녀의 가늘고 여린 허리를 끌어안았다.“살이 빠졌네.”“왜 방해한 거야?” 이유영이 차갑게 물었다.장혜주의 전화를 받은 이후, 이유영의 머릿속은 그동안의 수많은 장면들로 가득 찼다. 모든 장면은 아주 아름다웠다. 하지만 결국 현실은 이렇게 고통스러웠다.강이한이 한지음에게 했던 일들을 떠올리며, 그가 처음 자신에게 했던 일들을 생각해 보니 그때 강이한은 그녀를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바보 같았는데,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된 걸까, 생각했다. 박연준은... 모든 일들이 그렇게 그럴듯하게 진행되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매 순간이 다소 기묘한 우연처럼 느껴졌다. 물론, 그 우연들이 박연준의 이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는 모든 것이 의도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었다.이유영을 안고 있는 박연준은 분명 술에 취해 있었지만, 이유영이 그 질문을 던졌을 때 순간 굳어버렸다.그래서 저도 모르게 이유영을 안는 힘이 더욱 강해졌다.
분명히, 이 일에 대해 박연준은 이유영에게 제대로 된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 문기원이 이전에 분석한 것처럼 되었다.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것은 강이한이다.“...”‘박연준의 사람을 철수시킨다고? 그러니까 이 일은 박연준에게...’돌아서서 박연준의 뒷모습을 바라보자 술에 취한 박연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유영아, 뭐가 밝혀지든 잊지 마, 너는 내 약혼자야.” 이유영은 그 자리에서 멈춰 서 있었다. 그의 말에 대해 아무 반응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만 볼 뿐이었다....이유영은 박연준에게서 만족스러운 답을 얻지 못했지만 서주에 대해 점점 더 궁금해졌다. 그리고 점점 더 소름이 끼쳤다! ‘강이한, 그래!’박연준은 이유영 앞에서 꽤 취한 것처럼 보였지만 바로 침실로 돌아가지 않았다.서재.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여러 번 피웠지만 마음속의 답답함은 가라앉지 않는다.“강이한이 너무 조급한 것 같습니다.” 문기원이 찡그린 얼굴로 박연준에게 말했다. 이제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린 이상, 이유영은 뒤에서 일어나는 일을 반드시 밝혀낼 것이다. “괜찮아, 어차피 언젠가 알게 될 거야.” 술에 취한 목소리 속에 약간의 후회가 섞여 있었다. 문기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연준 님.”“문기원.” “예.” “우리는 처음부터 그녀를 서주에 끌어들일 생각을 하지 말았어야 해.” 박연준이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 깊은 목소리에서 문기원은 그의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연준 님은 지금과 같은 상황이 올 줄 몰랐겠죠.” ‘지금 같은 상황?’ 박연준이 웃었다! 그의 눈빛 속에서는 씁쓸함이 느껴졌다. 그때는 어땠을까? 지금은 또 어떤 걸까!? 그러니 결국 이 사람이 어떤 계획을 세우든, 가능한 한 사람과 연관되거나 직접 접촉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지금처럼 변한 이유영의 모습은 예전의 그녀와 완전히 반대였다. 그녀의 끈기와 고집은 남자도 감탄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지금 가
“여진우의 사람들이 뭘 알아낸 거야.”강이한의 말투는 꽤 불쾌했다.문기원이 말한 것처럼 지금 가장 골치가 아픈 건 강이한이니까. 여진우의 사람들 실력은 인정해 줘야 했다.사실 강이한이나 박연준이나 다 여진우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그래서 지금 여진우의 사람이 무언가를 알아내서 바로 이유영에게 얘기한다면... 게다가 지금은 박연준의 사람까지 철수한 상태가 아닌가.“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모님께서도 아마 이한 님과 박연준이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여진우의 사람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그 말을 들은 강이한은 바로 차가운 표정을 드러냈다.“그러니까, 무조건 알고 있을 거라는 거네.”“네.”이시욱이 머리를 끄덕였다.확인해 보지 않는다고 해도 분명 그러할 것이다.“...”강이한은 또 담배 몇 모금을 빨아들였다.지금 서재에는 온통 담배 연기뿐이어서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지금 이유영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야.”여진우의 사람 중 누가 있냐는 뜻이었다.강이한과 박연준 모두 여진우의 사람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많으니까 말이다.이시욱이 대답했다.“장혜주입니다.”“...”장혜주.그 이름을 들으니 머리가 아팠다.이건 여진우의 사람들 중 가장 철옹성 같은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여진우를 위해 장혜주에게 다가갔다가 화를 입었다.여진우가 장혜주를 이유영에게 붙여주다니. 이유영을 보호해 주려는 건지 아니면 박연준과 강이한에게 보복하려는 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아, 그리고 하나 더 있습니다.”강이한이 입을 열기도 전에 이시욱은 무언가를 떠올리고 진지하게 얘기했다.지금 강이한에게 있어서 골치 아픈 건 이유영의 일 뿐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사람도 있었다.이유영처럼 중요한 사람이었다.“말해.”그 말투에는 어느새 짜증이 약간 묻어났다.“병원에서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수술은 잘 성공했다고 합니다. 괜찮으면 다음 주에 퇴원해도 된다고 합니다.”이온유의 수술이 성공했다.
“너...”“유영아, 네가 밥을 잘 먹었으면 해서 난 엄청 애를 썼어.”그의 말투는 여전히 온화했다.이유영의 분노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하지만 이유영은 여전히 불쾌했다.“먹어, 응?”박연준은 부드럽게 말하면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네가 먹던 걸 내가 왜 먹어.”이유영은 그릇을 옆으로 비켜두었다.그 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이유영을 바라보는 고용인들의 시선에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지금 주인님을 거절한 거야?’그 눈빛에 이유영은 골치가 아팠다.그녀는 박연준에게 얘기했다.“오해할 만한 행동하지 마. 우리가 그렇게 친밀한 사이는 아니잖아.”말을 마친 후, 숟가락을 내려놓은 후 일어났다.화가 난 이유영의 모습을 본 박연준은 낮은 소리로 웃었다.박연준은 일부러 이른 짓을 한 거다.요즘 이유영이 너무 심심해 보여서 가끔 이렇게 장난을 치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아침 식사가 끝난 후.박연준은 또 나갔다.이유영은 본인 때문에 서주가 시끄러워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오전에 문기원이 돌아왔다.그는 예쁘장한 선물함을 들고 와서 얘기했다.“아가씨, 이건 연준 님께서 드리는 겁니다. 저녁에 같이 연회에 참석하자고 하시네요.”“안 가요.”이유영은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거절했다. 그녀는 이런 연회에 참가하고 싶은 생각이 눈곱만치도 없었다.빠른 거절에 문기원이 약간 멍해졌다.이윽고 표정을 풀더니 웃으면서 얘기했다.“왜 여기에 왔는지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말 나온 김에 얘기하자면, 이온유 씨는 일주일 뒤 퇴원합니다. 그분이 이온유 씨를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하고 있더군요.”“당신...!”이유영은 이를 꽉 깨물고 문기원을 쳐다보았다.“오늘 밤의 연회는 연준 님에게 중요한 연회입니다. 잘 준비해 주세요.”말을 마친 문기원은 이유영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나갔다.이유영은 그 선물함을 쳐다보았다.문기원은 이온유의 일을 얘기하면서 귀띔해 준 것이다. 이온유 때문에, 이유영이 서주에 온 것이니까.그리고
자동차 안.이유영은 결국 나와서 강이한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여유롭게 손톱을 갈고 있었다.마치 예전으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강이한의 곁에 있으면서, 이유영은 항상 여유로웠으니까.“그 소식은 엔데스 현우가 알려준 거야?”결국 강이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 말투에서 강이한이 많이 참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소식? 무슨 소식?’아마도 서류의 일일 것이다. 전에 전기봉을 엔데스 명우에게 팔아넘겼는데, 지금은...? 이유영이 박연준에게나 강이한에게나 다 잔인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강이한은 이유영을 쳐다보았다.“그래.”이유영은 빠르게 대답했다.그녀는 하던 일을 멈추고 강이한을 쳐다보았다.밝은 표정의 이유영을 보고 강이한은 표정이 굳었다.“너, 무슨 깡으로 인정하는 거야.”“인정해야지.”이유영은 담담하게 얘기했다.어두운 그의 표정을 보면서 이유영이 얘기했다.“내가 얘기했었지?”“...”“난 솔직한 사람이라 안 할 건 안 하고 한 건 인정한다고. 10년이나 봐 왔는데 아직도 모르겠어?”“...”그 질문에 강이한은 숨통이 옥죄어오는 것만 같았다.이유영은 모든 힘을 다해서 보복하고 있었다. 지금도 이렇게 그녀에 대한 강이한의 오해를 얘기하고 있지 않은가.그래, 이유영은 이런 방법으로 강이한에게 경고하는 것이다.전에는 한지음을 위해서, 저번 생이든 이번 생이든 한지음을 위해서 항상 이유영을 짓밟지 않았던가.강이한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이유영이 입꼬리를 올리면서 웃었다.“왜? 이번에도 내가 부인하길 바라? 아니면, 내가 부인하면 믿을 거야?”‘믿는다고? 모든 일을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믿는다는 거지?’이유영의 말에 강이한의 세계는 순식간에 혼란스러워졌다.“지금은 속이 시원해졌어?”일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유영이 서류를 찢어버린 덕에 강이한과 박연준은 골치 아픈 일만 많아졌다.“...”‘속 시원하냐고?’그 말을 들은 이유영은 또 웃음을 터뜨렸다. 그저 그들에게 골치 아픈 일을 조금
이때 강이한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또 다른 할 말 있어? 없으면 갈게. 난 바빠서.”말을 마친 이유영이 차 문을 열고 내리려고 했다.발 하나를 바닥에 내려놓는 순간, 손목에서 힘이 느껴졌다.이유영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왜?”“여진우의 사람더러 멈추라고 해.”결국 강이한은 말을 내뱉고 말았다.이유영이 이런 태도로 서주에 나타나 강이한과 박연준에게만 골치 아픈 일이 생긴 것이 아니었다.더욱 많은 일들이 있었다.예를 들면 박연준이 이유영을 이용한 일이라거나, 강이한이 이유영에게 접근하지 못한 원인이라거나...하지만 이런 상황이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이유영은 순진한 소녀가 아니었다. 그러니 강이한이 그녀에게 한눈에 반했다는 말을 믿을 리가 없었다. 캠퍼스의 무궁화나무 아래서 강이한의 시선을 사로잡았다면 모르겠으나...하지만 이 뒤의 일은 그 무궁화와 관련된 것이 아닐 수도 있다.“그럼 네가 직접 알려줄래?”이유영이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다.그 미소는 부드러워 보였지만 강이한에게는 두려움을 안겨다 주었다.그녀의 눈빛은 이토록 집요했다.게다가 여진우의 사람이니 이 일을 무조건 조사해 낼 것이다.그해의 일에 대해서... 그분은 그 일이 좋지 않다고 느껴 신분과 존재를 모두 지워버렸다. 하지만 그걸 아는 사람은 적지 않았다.물론 서주에서 그 얘기를 다시 꺼내는 사람은 없지만 일어났던 일은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이유영은 강이한이 손목을 더욱 세게 잡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이 뒤에 아무 사건도 없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유영아!”이유영이 손목을 빼낸 순간, 강이한이 이유영을 또다시 불러세웠다.“말하지 않을 거면 시간 낭비하지 마.”“서주에 남을 거면 내 곁으로 와. 박연준은 좋은 사람이 아니야. 네가 지금 하는 일, 너한테 위험해.”강이한이 또박또박 얘기했다.“걱정해 줘서 고마워.”“나한테 복수하려고?”이유영이 발을 내디딘 순간, 강이한이 다시 물었다.“...”“내 곁으로 오면 네가 뭘 하든지 말리
‘못 한다고?’못하는 게 아니라 하기 싫은 거다. 한지음은 강이한에게 얼마나 중요한가. 이온유는 강이한에게 얼마나 중요한가! 이렇게 중요한 사람을 어떻게 쉽게 내어주겠는가이유영은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유영아, 꼭 그래야겠어?”이온유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이온유가 그의 곁에 있을 때부터, 이유영은 더욱 끈질겨졌다. 이온유는 그저 아이일 뿐인데 말이다.이유영은 이온유에 대한 증오가 아주 깊었다. 하지만 이온유가 이유영을 얼마나 의지하는지 아는 강이한은 순간 가슴이 저렸다.이유영은 강이한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들어갔다.그녀와 이온유의 사이가 어떤지는 이미 강이한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니 지금도 대답을 못 하는 것이겠지....점심.박연준은 돌아오지 않았다.식탁 앞에 앉은 이유영은 고용인이 가져온, 백산 별장에서 자주 마시던 국을 마셨다. 식탁 위에는 이유영을 위한 음식들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이건 뭐지? 아삭아삭한 게 맛있네.”이유영은 오랜만에 입맛에 맞는 음식을 먹게 되었다.자세히 보니 점심의 음식들은 이유영이 처음 먹는 음식 같았다. 다만 맛을 내려고 신중을 가한 것이 보였다.“연꽃 뿌리입니다. 입에 맞는가요?”“음, 맛이 괜찮네. 이렇게 먹을 수도 있는 거구나.”이유영이 자세히 들여다보자 그제야 연근처럼 구멍이 보이는 듯했다.“주인님께서 보시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고용인이 웃으면서 얘기했다.이유영이 마음에 들어 하자 그들은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이유영은 밖에서 내리는 비를 보면서 얘기했다.“이런 날씨에 이런 것이 자라다니, 의외네.”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연꽃은 날이 좋은 곳에서만 자란다. 게다가 더운 곳에서 잘 자란다.연근은 아무 곳에서나 잘 자라지만 연근은 날이 좋은 곳에서만 자라는데...“이건 모두 청하에서 가져온 겁니다.”“...”‘청하?’그 애기를 들은 이유영은 놀라서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박연준은 돌아와서 이유영이 점심을 잘 먹었다는 말을 듣자 표정이 부드러워졌다.“오
공기가 얼어붙었다.“쾅!”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박연준이 탁자를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박연준의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가서 유영이를 백산 별장으로 데려가.”이유영은 미친 게 분명했다.‘감히 엔데스 셋째 도련님 같은 인물과 술집에 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건가?’정국진이라면 이유영이 엔데스 신우와 가까워지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특히 지금처럼 민감한 시기엔 더욱 반대가 심할 것이다. 박연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고 남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문기원이 급히 박연준을 따라나섰다.“네!”위험한 박연준의 모습에 용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대답했다.강이한이 각막을 이유영에게 이식해 주려고 할 때 왜 박연준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되는 듯했다.지금 이유영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그녀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과거의 그녀는 마치 강이한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는 천사 같았다. 하지만 혼란을 겪은 이후 그녀는 변했다.거만하고 방탕하게 아무하고도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지금 박연준이 생각했을 때, 이유영은 더 이상 고상하고 단정한 명문가의 며느리가 아니라 그저 자유롭게 떠도는 바람 같은 여자였다.최근 그녀는 서재욱과 엔데스 신우와 모호하기 짝이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서주에서.박연준이 차에 타기 전, 문기원이 그를 붙들었다.“선생님, 선생님!”“비켜.”“오늘 정말 중요한 회의입니다.”문기원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은 서주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기에 이유영을 생각하면 문기원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정말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박연준 곁에 있는 문기원조차 그녀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박연준이 돌아서기를 기다렸다.박연준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눈을 감은 순간, 그의 눈빛 속 날카로움은 잠시 가려졌지만 몸 전체에서 풍겨 나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은 고민에 휩싸일 때마다 이런 방식을 택했다.하지만 결국 이런 방식은 오히려 고민에 잠긴 마음을 더욱 괴롭힐 뿐이었다.한번 마음에 깊이 새겨진 근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죄송합니다만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그녀의 몸은 항상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예전에 건강이 좋지 않기도 했고 어렵게 다시 찾은 시력인 만큼 그녀는 술과 더욱 멀리하게 되었다.하지만 오늘 진영숙이 백산 별장에서 벌인 일을 생각하니 이유영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 감정을 억눌렀다. 그녀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회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인 건지 알 수 없었다.남자는 그 말을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깜빡했네요.”남자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괜찮아요.”“...”“이제 가도 될까요?”“술을 마시지 않아도 즐길 수 있잖아요.”“...”하지만 이유영은 이런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특히 많이 노출된 옷을 입은 여자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반항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그녀를 향락의 세계로 이끌었다....한편 박연준은 서주에서 중요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용준의 전화를 받은 그의 가슴이 쿵쾅거렸다.“그쪽은 괜찮아?”진영숙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이유영이 인정사정없을 거라는 걸 박연준도 알고 있었다.과거 강이한 곁에 있을 때의 이유영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녀는 적어도 강이한에게 만큼은 너무 몰아붙이지 않았었다.그래서 진영숙이 아무리 이유영을 괴롭혀도 그녀는 어떻게든 참고 견뎠다.지금은 성격이 점점 더 나빠졌다고 해야 할까? 아예 참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용준은 진영숙의 현재 상황을 박연준에게 설명했고 이미 좋지 않았던 박연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회의 끝나고 바로 갈게. 일단 진정시켜.”박연준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일이 있었는데 과연 내가 진정시킬 수 있을까?’“네!”“유영이는
“박연준, 네가 강이한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고 또 이제는 강이한 어머니까지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난 여태 몰랐네.”그 말은 날 선 조롱처럼 들렸다.동시에, 과거 강이한과 박연준의 사이가 이유영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되새기게 했다.그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의 냉정한 말에 박연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다른 일 있어서 먼저 끊을게.”이유여은 박연준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사랑이란 그저 우스운 감정에 불과했다.차는 천천히 백산 별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지혁 씨.”“네.”“지혁 씨는 사랑해 본 적 있어요?”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불쑥 물었다.예전의 이유영은 사랑이란 존재를 믿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군가를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토록 반짝이던 사랑이란 단어 뒤편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었는지 이젠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의 말을 들은 지혁은 묵묵히 앞을 응시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핸들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이유영은 굳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쾅!”그 순간,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함께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이유영은 아픈 이마를 짚고 있었고 지혁은 차에서 내려 사고 처리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차 문이 열렸다.“아가씨.”지혁이 이유영 앞에 공손하게 나타났다.“무슨 일이에요?”“셋째 도련님 차입니다.”“...”그 말을 듣고 그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자꾸 나타나는 셋째 도련님의 존재에 우연한 사고인지 아니면 이미 계획된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어떻게 된 거예요?”“셋째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이유영은 이 전설 속의 셋째 도련님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특히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밖에서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유영은 몰랐다. 그 아이가 결국 진영숙이 데려온 의사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은.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아!”분노가 치밀수록 이유영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진영숙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녀는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놔, 놔 이 미친년아! 악!”“짝!”이유영의 손바닥이 진영숙의 뺨을 후려쳤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말릴 용기를 잃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다시 한번 움찔하고 말았다.이유영의 행동에 소리 내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숨을 삼켰다. 진영숙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결국 이유영은 진영숙을 놓아주며 말했다.“주제 파악하라는 의미에서 그랬어요. 당신은 할머니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에요.”그렇다. 진영숙은 할머니가 될 자격이 없었기에 이유영도 그녀를 아무 감정 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진영숙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머릿속이 멍해진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그 사이 이유영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저년이 감히...”감히 뭐라고?예전엔 강이한 곁에서 순한 토끼처럼 보호받더니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유영이 밖으로 나왔을 때,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를 감쌌다.그 순간, 가슴속의 억눌린 감정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지혁은 이유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용준을 밀쳐내고 앞으로 다가왔다.“아가씨.”“가요.”용준은 여전히 당당한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유영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받은 이유영의 모습은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여보세요.”“어디야?”“풍산.”“유영아...”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박연준은 지금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어떤 태도로 맞서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강씨 집안에서 강이한이 곁에 없는 동안에는 진영숙의 말에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홍문동으로 이사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숙이 찾아오면 이유영은 그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그녀의 말에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대체 언제부터일까?’아마 강이한과의 이혼을 결심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즈음부터 이유영은 진영숙의 말에 더 이상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그땐 고작 진영숙의 지시를 어기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한참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낸 진영숙이 이유영을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이빨을 드러낸 짐승 같은 기세가 실려 있었다.이유영은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내는 진영숙이 가소로웠다.이유영은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들고 망설임도 없이 진영숙의 얼굴에 뿌렸다.“앗!”진영숙은 비명을 질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손을 댄다는 건 이런 거예요.”이유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진영숙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퍽!”손에 들고 있던 잔이 손끝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예전의 풍산 사람들이 기억하던 이유영은 언제나 조용하고 온순한 여인이었다. 누가 감히 지금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분노로 찬 이유영은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진영숙 역시 이유영을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예전에도 이유영에게 자주 화가 났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진영숙은 분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유영은 격하게 숨을 들이마신 진영숙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시 백산 별장에 가거나 우리 가족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땐 당신 진짜 가만 안 둬.”그 마지막 한마디는 징벌처럼 무겁고 섬뜩할 만큼 냉정했다.월이는 이유영의 세상 전부이자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힘들게 월이를 낳으면서 강씨 가문은 이 아이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
끊임없이 박연준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던 강이한의 모습을 이유영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두 사람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이였다.늘 서로를 원수처럼 대했고 그 모습을 본 이유영도 두 사람 사이에 과거의 악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악연이 한 여자 때문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 여자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은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모든 게 이토록 명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영만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그 7년 동안 강이한은 얼마나 다정했던가?그 친절함 속에 실은 다른 여인을 향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이유영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박연준은 강이한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었다.이건 과거의 이유영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다시 실감하고 있었다.“어쨌든 강이한 씨의 어머니잖아요.”조금 전 용준이 한 말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듣는 듯했다.“형님이 돌아오신 후에 처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용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공손함 속에는 이유영을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이유영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진영숙이 월이를 데려가려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분노는 가슴 깊이 타오르고 있었다.“지혁 씨.”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지혁을 불렀다.지혁은 그녀의 뒤에 있다가 곧장 앞으로 나섰다.“네, 아가씨.”“전 들어가야겠어요.”이유영이 내뱉은 짧은 문장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용준은 지금까지 이유영의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냉혹함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네!”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 분위기는 마치 폭발할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어지럽게 엉킨 현장을 냉정히 바라보며 우아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용준은 지혁을 막으려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