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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다정함이 상처가 될 때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08-23 13:55:22
“…네. 기억나요. 예전에 저 잼 바르고 빵 먹는 거 정말 좋아했어요.”

“지금은요?”

그가 묻자, 그녀는 망설였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그때의 나랑 지금의 나는… 좀 다른 사람 같아서요.”

그 말에 이현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녀는 눈을 피하지 않고 천천히 병을 내려놓았다.

그 말은 단순한 잼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의 자신과 그가 사랑했던 유리가 같은 사람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내비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두 사람은 함께 식사를 했지만 말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현은 자꾸 그녀의 손끝을 바라보았고, 유리는 그런 그를 애써 모른 척했다.

식사 중,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요즘, 유리 씨… 무슨 고민 있어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생각이 좀 많아서요.”

“그 생각… 혹시, 나 때문이에요?”

그의 물음에 유리는 고개를 숙였다.

“아니요. 아니에요… 정말.”

그러나 그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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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250. 당신 마음이 혼자 반응하지 않도록

    그날 오후, 유리는 식당의 의자 배치를 정리하고 있었다.주방은 잠시 불을 꺼둔 채, 햇살만이 테이블 위를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갔다.문득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한 통의 메시지. 이현이었다.-오늘은 저녁 약속이 생겼어요. 끝나면 연락할게요.짧고 단정한 문장이었다. 이상할 건 없었다.서로의 일상에 조금씩 익숙해져 가는 요즘이었고,연락의 공백에도 조급함은 없었다.하지만 그날 따라, 그 문장 어딘가가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저녁 무렵. 유리는 오랜만에 혼자 외출했다.재래시장 골목 끝에 있는 작은 찻집. 예전에 가끔 혼자 들렀던 곳이었다.그곳은 아직 그대로였다. 창문 옆 자리에 앉자 가게 주인이 다가와 익숙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오랜만이에요. 여전히 홍차, 맞죠?”유리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오늘은 그 맛이 생각났어요.”따뜻한 찻잔이 놓이고, 그녀는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았다.길 건너, 우산을 든 연인들이 지나가고, 가게 안엔 잔잔한 클래식이 흐르고 있었다.그 평범한 풍경 속에서 유리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우린, 서로를 기다리는 데에 익숙해지긴 했지만 그만큼… 서로를 잊는 데에도 익숙해지고 있는 건 아닐까.’그 생각은 마치 오래된 찻잔의 균열처럼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조용히 퍼져나가는 감정이었다.밤이 깊어갈 무렵, 식당 문이 조용히 열렸다.비도 그쳤고, 공기는 한결 맑아져 있었다.이현이었다.그는 식당 안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유리는 주방에 있었고, 이현의 발소리에 고개를 들었다.“늦었죠.”그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응. 많이.”유리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이현은 식탁 앞에 앉아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유리를 바라봤다.그 침묵 속에서, 유리는 먼저 입을 열었다.“저녁 약속, 어땠어요?”“업무였어요. 식사 자리였고…그냥, 필요한 이야기들만 했어요.”유리는 국을 데우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런 자리가 당신한텐 익숙하죠.”“네. 그런데… 이상하게 익숙하다는 게 오늘은 좀 싫더라고요.”유리는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249. 평범한 하루라는 기적

    비가 내렸다.그리 거세지 않은, 봄비처럼 가벼운 빗방울이 천천히 유리창을 두드리고 있었다.유리는 아침부터 식당에 나와 반찬 몇 가지를 만들고 있었다.조용한 클래식 라디오 방송이 흐르고, 주방의 조명이 따뜻하게 공간을 덮었다.앞치마를 조이고, 작은 국솥에 다시마와 멸치를 올린 그녀는 창밖을 한 번 바라봤다.빗물이 흘러내리는 유리창 너머로, 가로등 불빛이 흐리게 퍼지고 있었다.오늘 같은 날은 무언가를 기다리게 만든다.아무 약속이 없어도,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은 예감.말보다 조용한 존재감 같은 것.점심시간이 막 끝날 무렵. 문이 조용히 열렸다.그 익숙한 문종 소리. 유리는 고개를 들었다.서이현이었다.회색 트렌치코트, 젖은 머리카락 끝, 손엔 작은 비닐 우산.그는 여전히 말없이 그 공간에 들어섰다.“혼자예요?”유리가 먼저 물었다.“네. 오늘은… 그냥 조용한 밥이 먹고 싶어서요.”그의 말에 유리는 웃지도, 놀라지도 않았다.그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따뜻한 국부터 줄게요. 그게 오늘엔 어울릴 것 같아서.”식사는 조용히 이어졌다.이현은 국을 한 숟갈 떠서 천천히 넘기고, 가끔 시선으로 유리의 움직임을 좇았다.그녀는 늘 같은 손길로 밥을 푸고, 반찬을 올리고, 가끔 라디오의 멜로디에 맞춰 몸을 가볍게 움직였다.이현은 그런 유리를 바라보며 문득 혼잣말처럼 말했다.“여긴… 오면 마음이 느려져요.”유리는 반찬 접시를 정리하다가 고개를 들었다.“느려지는 게 싫진 않아요?”“아니요. 요즘은 느린 게 더 필요한 시간이라서요.”잠시 침묵이 흘렀고, 비의 소리가 식당 안을 채웠다.이현은 국물을 천천히 마시고,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당신은 어제 어땠어요?”유리는 묻지 않아도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낯설 줄 알았는데… 그리 낯설지 않았어요.”“내 세상이요?”“응. 그 안에도, 내가 놓을 자리가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걸 초대한 사람이 당신이어서 가능했던 것 같고요.”이현은 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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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은 책상 위 노트를 덮고 잠시 눈을 감았다.오전 회의가 길어지고, 브리핑이 이어졌지만 머릿속엔 다른 풍경이 자리하고 있었다.기억 속, 식당 한가운데 놓인 작은 테이블.국물 위로 피어오르던 수증기.그리고 그 건너편, 조심스레 웃던 유리의 얼굴.그건 어쩌면 그의 하루 중 가장 ‘느린 장면’이었고, 그래서 가장 오래 남는 장면이기도 했다.그는 곧장 메신저 창을 열었다.혹시 이번 주 금요일, 저녁 시간 괜찮을까요?당신 음식이 필요한 자리가 있어서요.문장을 한참 바라보다가, 짧은 한 줄을 더 붙였다.일이지만, 마음은 초대예요.유리는 그 문자를 받자 한동안 손에 쥔 채 가만히 있었다.‘당신 음식이 필요한 자리’‘일이지만, 마음은 초대’그 말은 낯설고, 그래서 더 조심스럽게 읽혔다.이현의 세상은 늘 정제된 자리였다.지분, 비율, 입장과 전략이 교차하는 세계.그곳은 유리의 감각과는 다른 속도로 움직였다.하지만 그 속에 ‘음식’이라는 이유로 자신이 초대받는다는 건,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그녀는 짧게 답장을 썼다.메뉴는 제가 정해도 되죠?당신 스타일로 말고, 제 방식으로.그리고 잠시 후, 이현의 답장이 왔다.당신 방식이면, 그걸로 충분해요.금요일 저녁. 행사는 한 갤러리 공간에서 열렸다.S그룹이 후원하는 문화 프로젝트. 초청 인사는 많지 않았지만, 하나같이 낯설고 익숙한 이름들이 섞여 있었다.유리는 식재료 박스를 하나씩 옮기며 간이 주방을 정리했다.검은색 앞치마, 머리를 높이 묶은 단정한 모습.그녀는 사람들 틈에서 눈에 띄지 않게 움직였다.그 공간 어딘가에 이현이 있었다.행사 총괄자로, 공식 인사로. 그러나 그의 시선은 자꾸만 주방 쪽으로 향했다.두 사람은 행사 내내 단 한 번도 직접 마주보지 않았다.대신, 서로의 시야 끝에서 조용히 존재를 확인하는 식이었다.첫 번째 플레이트는 작은 달걀찜 위에 얹은 감태와 깨.두 번째는 유자가 살짝 배인 무쌈 안에 가늘게 채 썬 소고기 조림.사람들은 조용히 먹고, 입 안에서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247. 당신 밥을 먹고 싶어서요

    봄기운이 가볍게 깃든 오전.햇살은 식당 유리창을 조용히 통과했고,바닥 타일 위에 비친 빛무리는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유리는 주방에서 된장을 풀며 작은 냄비를 앞에 두고 있었다.국물이 끓는 동안, 그녀는 고개를 살짝 들어 벽시계를 바라봤다.11시 48분.점심 영업을 시작하기 직전,손님이 하나둘씩 들어오기 전의 가장 고요한 시간.그때, 문이 열렸다. 가볍게 울리는 문종 소리에 유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곳엔 이현이 서 있었다.셔츠에 회색 재킷, 손에는 작은 종이봉투 하나.익숙한 듯, 그러나 여전히 조심스러운 표정이었다.“자리, 있어요?”유리는 짧게 웃었다.“혼자 오셨어요?”“네. 오늘은… 혼자 먹고 싶어서요. 당신 밥을.”그 말에 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가 자리를 가리켰다.“창가가 따뜻해요. 거기 앉으세요.”이현은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그의 시선은 식당 안을 천천히 훑었다.정돈된 테이블, 항상 같은 자리에 놓인 수저통,그리고 주방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유리의 옆모습.그 공간은 유리 그 자체였다.유리는 쟁반 위에 된장국, 밥, 두 가지 반찬을 담아 그의 앞에 조용히 놓았다.“오늘은 애호박이 아주 달아요.”“애호박… 기억하고 있네요.”“당신, 민트보다 애호박 좋아하잖아요.”이현은 그 말에 작게 웃었다.“기억해줘서 고마워요.”“애호박 정도는… 잊을 수 없죠. 파리에서도 한 입 먹고, 혼자 감탄했잖아요.”“기억나요. 그땐… 당신이 웃는 걸 보느라 맛을 잘 느끼지도 못했어요.”잠시 침묵이 흘렀고, 그 틈에 유리는 물컵을 놓으며 말했다.“오늘은, 맛을 천천히 음미하세요. 내 표정 말고.”그 말에 둘 다 짧게 웃었다.식사를 마치는 동안 이현은 말이 거의 없었다.숟가락을 들고, 천천히 국을 마시고, 그저 조용히 식사를 이어갔다. 그걸 지켜보던 유리는 무심한 듯, 그러나 다정하게 물었다.“괜찮아요? 맛은?”이현은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오늘처럼 천천히 밥 먹은 적, 언제였는지 모르겠어요.”“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246. 안부라는 이름의 마음

    그날 저녁, 이현은 퇴근을 조금 늦췄다.서울의 밤은 여전히 바빴고,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불빛과 사람들은 그의 마음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흘렀다.차 안 라디오에선 재즈가 잔잔히 흐르고 있었고, 이현은 손에 든 휴대폰을 잠시 내려다보다 문자함을 열었다.“맛있는 하루는 말보다 국물에서 시작돼요.”유리가 보냈던 그 한 줄.그 문장은 다 읽고도 몇 번이나 다시 보게 만드는 온기를 품고 있었다.그는 생각했다. 말보다 국물. 그게 유리다운 방식이었다.말은 때로 너무 빨랐고, 상처도 빨랐지만 국물은 늘 천천히 다가와 속을 데워주고, 끝내 안심시키는 맛이었다.집에 도착한 그는 주방으로 향했다.오랜만에 마트에서 장을 보고 조금은 어설프게 재료를 다듬었다.애호박, 두부, 다시마, 그리고 멸치 몇 마리.그는 다시 유리의 말을 떠올리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국을 끓였다.보글보글 끓는 냄비 앞에서 잠시 눈을 감았다.‘그 사람은 지금,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을까.’그는 그 생각 하나로 오늘 하루가 조금 덜 지치는 듯 느껴졌다.다음 날, 유리는 이른 아침부터 식당에 나왔다.식탁을 정리하고, 창문을 닦으며 라디오를 켰다.그날 방송은 사연을 읽어주는 프로그램이었다.익숙한 진행자의 목소리가 공기 중에 맴돌았다.“다음 사연입니다. 익명을 요청하신 분의 사연이에요.”‘그 사람은 말이 많지 않아요. 대신 따뜻한 국을 끓여 보내는 사람입니다.그걸로 괜찮다고, 그걸로 충분하다고 조용히 말하는 사람.’유리는 잠시 손을 멈췄다.그리고 무심히 닦고 있던 유리창 너머로 하늘을 바라보았다.진한 파랑 사이, 햇살이 스며드는 흐림.그는 그런 날씨를 좋아했다.똑부러지지 않고, 애매하지만 묘하게 맑은 날씨.방송은 계속 이어졌다.“그 사람은 가끔 안부 대신 레시피를 보내요. 그게, 그 사람의 방식인 걸 이제야 알게 됐습니다.”유리는 그 말에 작게 웃었다.“안부 대신 레시피…”무심히 중얼거리다 자신도 모르게 펜을 들어 노트에 적었다.오늘의 국물: 멸치 육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245. 그 자리를 지키는 건 결국 진심이니까요

    저녁 무렵. 비가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창밖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이 간판을 적시고, 행인들의 우산 끝이 바닥을 부드럽게 두드렸다.조은별은 그 비를 맞지 않기 위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하지만 그녀의 구두는 늘 그렇듯 단정했고, 우산 아래의 표정은 흐트러짐이 없었다.그녀는 익숙한 빌딩 앞으로 걸음을 멈췄다.‘마당한식당’.그 이름은 네온사인으로 밝게 켜져 있었고, 조용히 불이 켜진 창 너머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움직였다.조유리. 그 이름은 은별의 마음속에서 한 번도 직접 부르지 못한 채긴 시간 응어리처럼 남아 있었다.그녀는 그 가게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대신 빗소리 속에서 조용히 그 내부를 바라보았다.그날 낮, 이현은 회의 중 그녀를 부르지 않았다.예전 같았으면 당연히 자리에 앉아 있었을 회의실,지금은 다른 비서가 메모를 정리하고 있었고,보고서는 그녀 손을 거치지 않은 채 곧장 이현의 데스크로 전달됐다.은별은 문득 깨달았다.‘나는 지금, 이 사람의 그림자에서도 멀어지고 있구나.’그녀는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속에선 익숙했던 구조가 하나둘씩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비 오는 식당 앞에서 그녀는 한참 동안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유리는 가게 안에서 조용히 식재료를 정리하고 있었다.손끝이 능숙하게 움직이고, 가끔 라디오 소리에 웃는 모습도 보였다.그녀는 유리를 한 번도 직접 만난 적이 없었다.하지만 유리의 이름을 모를 리 없었다.이현의 시선이 처음으로 달라진 시점부터, 그 이름은 그녀의 일상 어딘가에서 자꾸 맴돌았다.‘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지?’그 질문을 은별은 수없이 되뇌었고, 수없이 부정했다.‘그냥 잠깐 스쳐 지나갈 사람일 거야.’‘진심 따위는 오래가지 않아.’‘곧 돌아올 거야. 원래 자리로.’하지만 지금 유리는 자신의 공간에서 편안한 얼굴로 삶을 이어가고 있었고, 이현은 그런 유리의 곁을 선택한 것 같았다.은별은 조용히 식당 유리문에 시선을 고정했다.잠시 후, 유리가 문 옆에 놓인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4. 뒤돌아선 발끝

    식당 안은 평소보다 훨씬 시끄러웠다.단골손님들은 슬쩍 눈치를 주고받으며 수군거렸고,어떤 아줌마는 “저기 사장님 남친이세요?”라며 장난을 쳤다.유리는 “아니라고요!!”라고 소리를 지르며 국자를 들었다가,아줌마들이 깔깔 웃는 소리에 입술을 꾹 다물고 물만 내렸다.“유리 씨 인기 많네. 장사 잘하겠다.”이현이 팔짱을 풀며 한마디를 툭 던졌다.유리는 국자로 찌개를 저으며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아 진짜… 저 인간은 왜 저러지…”저녁 무렵, 문득 식당 안에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다.문틈 사이로 들어선 한 여자의 실루엣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3. 선 긋는 건 너였는데

    아침 공기가 아직 서늘한데도 유리의 이마엔 땀방울이 맺혔다.주방에서 채소 써는 소리가 경쾌하게 퍼져나가지만, 그녀의 마음은 어쩐지 분주하고 어지러웠다.칼끝으로 리듬을 타는 손놀림은 점점 빨라졌고, 심장이 그것보다 먼저 뛰고 있다는 걸 그녀는 누구보다 잘 느끼고 있었다.‘설마 오늘은 안 오겠지. 아니, 저 진상님도 적당히 해야지… 설마 또?’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골목 바깥에서 웅성거림이 몰려들었다.평소보다 훨씬 큰 소음에 유리는 머리를 홱 돌려 주방 창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그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2. 설명 없는 떨림

    새벽 공기를 뚫고 부엌 창문 틈으로 겨우 스며드는 첫 햇살에, 유리는 눈을 찡그리며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손끝에 아직 따뜻함이 채 가시지 않은 빗자루의 감촉이 남아 있었고, 어젯밤 그 황당한 남자의 얼굴이 자꾸 머릿속을 떠올랐다.‘미친놈인가…’스스로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렸지만, 그때 느꼈던 묘한 울렁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단순히 분노에서였을까? 아니면, 낯선 사람의 강렬한 눈빛이, 생각보다 오래 가슴 한가운데 남아 있었던 걸까.유리는 스스로를 향해 얼굴을 찌푸리며 부엌으로 향했다.익숙한 동작으로 칼을 쥐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1. 미친놈인가?

    S그룹 본사 최상층 회장실, 그 문 앞 복도에는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셰프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흰 셰프복에 단정한 모자, 은빛이 번쩍이는 조리도구, 완벽히 플레이팅된 요리가 놓인 쟁반을 양손으로 받쳐 든 모습은 그 자체로 일종의 퍼레이드 같았다.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과 초조함이 엉켜 있었고, 뺨에는 굳은 미소가 어색하게 걸려 있었다.복도를 채운 공기는 마치 숨조차 삼키기 두려운 듯 묵직했고, 안쪽에서 새어나오는 소리, 포크와 나이프가 접시 위를 긁는 미묘한 소리와 낮고 단호한 남자의 목소리는 그 공기를 더욱 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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