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조유리 씨, 다른 사람한테도 이렇게 신경 많이 쓰세요?”
그 말에 유리는 순간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휙 돌리며
“손님 관리 열심히 하는 게 잘못인가요?” 하고 받아쳤다.
이현은 피식 웃었다.
“잘못은 아닌데요, 굳이 그렇게 변명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유리는 국자로 찌개를 휘젓다 턱 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 와중에도 심장이 자꾸만 빨리 뛰는 게 더 화가 났다.
문득 식당 문이 열리고,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울렸다.
조은별이었다.
완벽한 정장 차림, 미소를 얹은 얼굴,
그러나 그 안에서 번뜩이는 눈빛은 누구보다 예리했다.
“회장님, 여기 계셨군요. 이렇게 자주 나오시니까 다들 걱정하시던데요.”
이현은 고개를 살짝 들어 은별을 바라봤다.
“비서님, 그쪽 업무에 제 사생활은 포함 안 돼요.”
유리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뭐가 그렇게 가슴을 찌른 건지, 스스로도 잘 알 수 없었지만.
음식이 나가고, 은별은 웃음을 지으며 유리 쪽으로 다가왔다.
“사장님, 요리 정말 맛있다고 회장님이 늘 칭찬하시더라고요.”
유리는 어색하게 웃으며
“아… 네, 감사합니다…”
하고 대답했지만, 은별의 말투에는 알 수 없는 가시가 박혀 있었다.
식사가 끝난 뒤, 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유리 쪽을 바라보았다.
“내일도 올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피하지 마세요.”
유리는 그 말에 당황해
“누가 피한다고 그래요! 진상님 마음대로 말하지 마세요!”
하고 소리쳤지만, 이현은 짧게 웃으며 식당을 나섰다.
문 닫을 시간이 되고, 유리는 간판 불을 끄려고 문 밖으로 나섰다가 골목 끝에 서 있는 이현을 발견했다.
“안 가셨어요?”
이현은 잠깐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냥… 조유리 씨 퇴근하는 얼굴 보고 가려고요.”
유리는 황급히 등을 돌리며
“진짜… 왜 저래, 정말…”
작게 중얼거렸다.
그 모습 뒤에서, 이현은 주머니에 찔러 넣었던 손을 꺼내
코트를 한 번 털어 올렸다. 그리고는 혼잣말처럼 낮게, 그러나 웃음을 담아 말했다.
“선 긋는 건 본인인데, 왜 이렇게 신경 쓰이게 하실까요.”
다음 날, 유리는 평소보다 더 일찍 가게 문을 열었다.
주방 안은 여전히 낯익은 냄비 소리와 채소 써는 소리로 채워졌지만,
그녀의 마음은 낯익지 않은 두근거림으로 가득했다.
‘진상님, 오늘도 오겠지… 아니, 올까 봐 신경 쓰지 말자. 근데… 안 오면 좀… 이상할 것 같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칼질을 하던 손끝에 힘이 조금씩 들어갔다.
그러다 문득, 주방 창가로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순간적으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조유리 씨, 이 정도면 전속 요리사 계약서라도 써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익숙한, 그러나 여전히 심장을 찌르는 목소리.
이현은 오늘도 줄 맨 앞에 서서, 팔짱을 낀 채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유리는 당황해서 주방문을 밀치고 나갔다.
“진상님, 저희 가게 줄 서야 한다니까요. 뭐 줄 선다고 직원들까지 대동하더니, 오늘은 혼자에요?”
“혼자 오면 더 불편하실까 봐요. 나름 배려한 건데요.”
유리는 황당해서 눈썹을 찌푸렸고, 뒤에서 마춘배 아저씨가 또 툭 던졌다.
“유리야, 얼굴 빨개졌다~”
“안 빨개졌어요!!”
유리는 소리치고는 재빨리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주방 안에서도 웃음소리가 멈추질 않았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이현은 여전히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괴고 있었다.
“요즘 잘 안 웃으시던데요, 저 보니까 표정 좀 풀리시던데.”
유리는 수저를 닦던 손을 멈추며 고개를 휙 돌렸다.
“진상님, 오해 마세요. 손님 상대하다 보면 자연스러운 미소 같은 건 기본이에요.”
“근데 저 말고 다른 손님들한테는 안 그러시던데요.”
이현은 짧게 웃었다. 유리는 뺨이 붉게 물드는 걸 느끼며 물수건을 테이블에 툭 올려놓았다.
저녁 늦게, 문득 가게 문이 열리더니 은별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도 잘 계시네요, 회장님.”
은별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유리는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 오늘은 또 뭘 드시러 오셨어요?”
“저요? 그냥 궁금해서요.”
이탈리아 피렌체. 석양이 내려앉은 아르노 강변의 벤치 위에 이현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유리한 조각처럼 맑고 차가운 공기 속에서그의 눈빛은 멀리, 아주 멀리 붉게 물든 하늘 끝을 향해 있었다.사람들은 저마다의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고,관광객들의 웃음소리와 음악 소리가 강바람에 실려 흘러갔다.그 풍경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이현에게 조금도 닿지 않았다.그의 주머니 속, 가볍고 얇은 기기의 화면 한쪽에 사진 한 장이 떠 있었다.지인이 우연히 보낸 메시지 안에 덤처럼 첨부되어 있던 사진.그 속엔 유리의 부엌으로 보이는 공간이 있었고,그녀가 만든 듯한 파스타 한 접시와
파리의 아침은 어느새 봄의 기운을 조금씩 머금고 있었다.햇살은 아직 차가웠지만, 햇빛이 닿는 창턱 위에는 작은 생기 같은 것이 살금살금 고개를 들고 있었다.유리는 창문을 반쯤 열고 따뜻한 물에 녹차 티백을 담갔다.물 위로 퍼져나가는 연한 녹빛이 그녀의 감정을 천천히 따라 흐르고 있었다.그날은 별다를 것 없는 하루였다.어쩌면 너무 평범해서 기억조차 남지 않을 하루였을지도 모른다.그러나 오후 3시 27분,민우에게서 도착한 짧은 메시지 하나가 그 평범했던 하루의 결을 바꾸었다.“오늘은 햇살이 좋네요. 유리 씨 창문에도 잘 들어가고 있나요?”아무런 꾸밈도 없고, 아무 의도도 보이지 않는 말.
파리의 아침은 희미한 빛으로 시작되었다.하늘은 짙은 회색을 품고 있었지만, 그 속엔 햇살이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늘진 창가에 앉아 있던 유리는 몇 날 며칠을 그렇게 실내에 머물다 오랜만에 천천히 겉옷을 챙겨 입었다.오늘은 밖으로 나가보자고 마음먹은 날이었다.특별한 이유는 없었다.그저 냉장고 안의 채소가 다 떨어졌고,따뜻한 바게트 하나쯤 갓 구운 걸로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하지만 유리는 알고 있었다.그 단순한 이유 속에 자신이 조심스럽게 세상에 닿아보려는 마음을 담았다는 것을.마르셰 시장은 생각보다 활기찼다.
비가 올 듯한 파리의 아침. 유리는 천천히 커튼을 걷고 창문을 살짝 열었다. 창밖의 공기는 습기를 머금고 있었고, 돌바닥을 밟는 사람들의 걸음도 어딘지 모르게 조용했다.오랜만의 일상이었다. 그녀는 다시 이곳에 있었다.그동안의 시간들이 꿈처럼 느껴질 만큼,이 아침은 평범했고 또 낯익었다.하지만 달라진 것이 있었다.그녀의 마음은 예전보다 조용했고,그 조용함은 상처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를 아끼려는 결심 때문이었다.냉장고를 열었다. 몇 가지 야채들과 어제 사온 닭고기, 그리고 토마토 페이스트가 눈에 들어왔다.유리는 무언가 오래도록 부드럽게 끓이는 요리를 하고 싶었다.시간이 걸려도 괜찮은 것. 급하
기차가 파리 북역에 도착했을 때, 플랫폼을 스치는 바람은 며칠 전보다 훨씬 차가웠다.도시의 공기는 여전히 바쁘고 무심했지만 그 안에서 유리는 이상하리만큼 평온한 숨을 쉬고 있었다.손에 든 가방은 가벼웠지만, 마음 안엔 무언가가 조금 더 단단히 들어찬 기분이었다.민우와의 여행이 끝난 지금, 그녀는 여전히 혼자였고 그 혼자라는 말은 예전처럼 외롭지 않았다.택시를 타지 않고 유리는 천천히 걷기로 했다.몇 정거장쯤 되는 거리를 낯선 이방인의 발걸음처럼 천천히, 그리고 아주 조용하게.이 거리, 이 골목, 예전엔 그 모든 곳이 이현과의 기억으로 묶여 있었지만지금은 그마저도 부드럽게 바래진 감정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작은 마을의 저녁은 생각보다 더 조용하고, 생각보다 더 깊었다.하루 종일 비추던 햇살이 서서히 사그라지며 하늘에는 바다색에 가까운 남청빛이 번져 있었고,민우와 유리는 언덕 아래 작은 길가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바람은 차가웠지만, 서로의 어깨 사이엔 서서히 다가온 온기가 있었다.말없이 앉아 있는 시간이 이제는 익숙해졌고,서로의 숨소리만으로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조용한 평화가 두 사람 사이에 감돌고 있었다.민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내일이면… 돌아가네요.”유리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생각보다 빨리 지나갔어요. 여긴 시간도 공기도… 다 다르게 흘러가는 것 같아요.”그녀의 말에 민우는 작은 웃음을 보였다.“유리 씨 덕분에 더 조용히 흐른 것 같아요. 그 조용함이… 저한텐 고맙고요.”그 말은 어떤 기대도 없었지만, 유리는 그 안에 조용히 담긴 감정의 결을 느낄 수 있었다.그는 여전히 유리에게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대신 그녀가 스스로 다가올 수 있을 때까지 그 자리에 머무는 사람이었다.그건 이현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이현은 사랑하는 방식이 강했고, 그 강함은 어느 순간 유리를 아프게 했다.하지만 민우는, 그녀가 흔들릴 수 있는 공간을 비워두는 사람이었다.유리는 무릎 위에 손을 모은 채 낮게 말했다.“…저, 그동안 계속 생각했어요. 이 여행이 끝나면 다시 혼자일 수도 있다는 거요.”민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처음엔 그게 익숙했어요. 그게 제 자리라고 믿었고…그게 저를 지켜주는 방식이라고 생각했거든요.”그녀의 말에 민우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대신, 그녀가 끝까지 말할 수 있도록 묵묵히 기다렸다.“그런데 민우 씨랑 있는 이 며칠 동안…그 조용함이 꼭 외로움은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함께 있어도 숨이 편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고요.”유리는 조용히 그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그의 눈은 여전히 조용한 물처럼 고요했고,그 고요함 안에서 자신이 조금씩 풀어지고 있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그게 사
새벽 공기를 뚫고 부엌 창문 틈으로 겨우 스며드는 첫 햇살에, 유리는 눈을 찡그리며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손끝에 아직 따뜻함이 채 가시지 않은 빗자루의 감촉이 남아 있었고, 어젯밤 그 황당한 남자의 얼굴이 자꾸 머릿속을 떠올랐다.‘미친놈인가…’스스로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렸지만, 그때 느꼈던 묘한 울렁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단순히 분노에서였을까? 아니면, 낯선 사람의 강렬한 눈빛이, 생각보다 오래 가슴 한가운데 남아 있었던 걸까.유리는 스스로를 향해 얼굴을 찌푸리며 부엌으로 향했다.익숙한 동작으로 칼을 쥐
S그룹 본사 최상층 회장실, 그 문 앞 복도에는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셰프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흰 셰프복에 단정한 모자, 은빛이 번쩍이는 조리도구, 완벽히 플레이팅된 요리가 놓인 쟁반을 양손으로 받쳐 든 모습은 그 자체로 일종의 퍼레이드 같았다.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과 초조함이 엉켜 있었고, 뺨에는 굳은 미소가 어색하게 걸려 있었다.복도를 채운 공기는 마치 숨조차 삼키기 두려운 듯 묵직했고, 안쪽에서 새어나오는 소리, 포크와 나이프가 접시 위를 긁는 미묘한 소리와 낮고 단호한 남자의 목소리는 그 공기를 더욱 팽
밤공기가 차갑게 식어가는데도,유리는 어딘가 온몸이 달아오른 듯 잠시 가게 문 앞에 멈춰 서서바람에 흔들리는 간판 소리를 들으며 혼자 속삭였다.“…나… 이러면 안 되는데.”유리는 오늘따라 평소보다 더 분주히 움직였다.주방 안을 바삐 오가며 냄비 뚜껑을 열어보고, 칼을 쥔 손끝을 재촉했지만,그럴수록 마음 한편은 더 조급하게 요동치는 느낌이었다.주방 창가로 스며드는 한 줄기 햇살에 눈이 시리도록 부딪힐 때마다,그 골목 어귀로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그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오늘은 안 올 거야. 그럴 리 없지. 근데,
이현은 문 안으로 들어서며 느긋하게 웃었다.유리는 순간 칼을 내려놓고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쥘 뻔했다.“진상님… 진짜 왜 이렇게 매일 와요. 그만 좀 와요.”“싫은데요?”이현은 짧게 웃으며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보고 싶어서 왔는데요.”조유리는 입술을 꾹 깨물고, 뒤돌아서 주방으로 들어갔다.그런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뺨이 빨갛게 달아오른 걸 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꾹 눌렀다.‘조유리, 이러지 마… 진짜, 정신 차려…’그날 저녁, 은별은 가게 문턱을 조용히 넘었다.“회장님, 식사 시간이 이렇게 중요하셨나요?”은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