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파리의 오후, 햇살은 강하지 않았지만 따뜻하게 가슴을 데워주는 빛이었다.잔잔한 구름이 하늘을 부드럽게 가리고 있었고,길 위로는 바람이 아닌 ‘공기’ 그 자체가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그날, 유리는 민우와 함께 센 강변을 따라 산책을 하기로 했다.이유는 없었다. 식사 약속도 아니었고, 누군가 먼저 제안한 것도 아니었다.그저 오늘은 같은 방향으로 같은 속도로 조용히 걸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두 사람 사이에 동시에 닿은 듯했다.만남은 여느 때처럼 담백했다.유리는 베이지색 코트를 걸쳤고, 민우는 짙은 그레이의 머플러를 느슨하게 감고 있었다.둘 사이엔 유난스러운 인사가 없었지만,
파리의 골목은 언제나 예기치 못한 감정을 마주하게 만든다.그날도 유리는 그저 평범한 산책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익숙한 풍경과 익숙하지 않은 냄새가 조용히 섞여 있는 좁은 골목.그 길 끝에서 오래전 잊었다고 믿었던 한 간판이 불쑥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Café Orée』너와 나의 경계, 그 안에서 잠시 쉬어가는 곳.카페의 이름은 변하지 않았고, 작은 테이블들과 옛 간판,창가에 놓인 자그마한 화분들마저 기억 속 그대로였다.유리는 아무 말 없이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곳은 예전에 이현과 자주 오던 카페였다.시끄럽지도 조용하지
파리의 저녁은 햇살이 천천히 수그러드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조금씩 느려진다.거리의 그림자들은 길게 늘어나고, 가로등 불빛은 창문을 물들일 듯 부드럽게 번져간다.그 날도 그랬다. 유리는 부엌에 서서 천천히 물을 데우고 있었다.창가에는 지난번 식사 이후 조금 시들어가던 꽃이 아직 그대로였고,테이블 위의 식탁보는 오늘 아침 새로 다려놓은 채 고요하게 펴져 있었다.문득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이번엔 조금 더 가볍게. 조금 더 나답게.”그리고 그것은 어떤 다짐이라기보다,그녀가 이미 준비되어 있음을
이현은 그날 아침, 호텔의 창가에 앉아 있었다.창문을 반쯤 열어둔 채 묵은 와인처럼 무거운 공기를 들이마시며,테이블 위 노트 한 권과 펜을 천천히 꺼냈다.이틀 전부터 쓰려 했던 편지였다.그는 수없이 첫 문장을 떠올렸고, 그보다 더 많이 지웠다.“유리 씨, 잘 지내요?”그는 그 문장을 처음에 썼다가 금세 지워버렸다.‘잘 지내요’라는 말은 이미 그가 묻지 않아도 답을 알고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유리는 잘 지내고 있었다.그것이 그에게는 무겁고, 서글프고, 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그는 다시 펜을 들었다.유리 씨, 이 도시는 여전히 아름다워요.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그 풍경 안에 당신이 없는 것이 가장 선명하게 다가와요.그는 고개를 살짝 떨궜다.그 문장은 감정을 묘사하기보다 그리움을 드러내는 문장이었고,그리움은 지금의 이현에게 허락되지 않은 종류의 감정 같았다.유리는 그를 떠났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그것은 결과였고, 선택이었고, 시간이 만든 아주 명확한 결론이었다.그는 다시 펜을 들어 천천히 적어 내려갔다.우리는 많은 것들을 제대로 끝맺지 못했죠.나는 당신의 눈동자에서 마지막 마음을 읽을 수 없었고,당신은 내 침묵 속에서 어떤 확신도 찾지 못했을 거예요.그래서 아마, 끝까지 조심스러웠던 거겠죠.끝까지 외면했고, 끝까지 머뭇거렸고, 결국, 당신의 등을 잡지 못했어요.그는 문장을 멈추고, 오래도록 그 구절만 바라보았다.‘당신의 등을 잡지 못했다.’그 말은 지금까지 스스로에게 하지 못한 고백이었다.그는 그녀를 믿지 못했고, 믿고 싶으면서도계속해서 과거와 타인의 그림자에 유리를 가둬두었다.그 모든 시간이 그녀를 지치게 했고, 결국엔 떠나게 만들었다.그는 알고 있었다. 유리가 떠난 이유는 단지 어떤 여자의 귀환 때문이 아니었다.진짜 이유는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그 오랜 시간 동안이었다.그는 다음 문장을 조심스레 이어갔다.유리 씨, 나는 당신의 식탁이 왜 그토록 따뜻했는지를 이제야
해가 기울 무렵, 식탁은 완성되었다.꽃은 제 위치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그녀가 고른 조명은 너무 밝지도, 너무 어둡지도 않은 부드러운 빛으로 식탁 위를 감싸고 있었다.유리는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묶었다가 다시 풀었다.그러곤 거울 앞에서 조용히 웃었다.오늘의 자신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사람이 아니라,그저 자신의 온도로 누군가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저녁 7시가 조금 넘어 문 앞에 벨이 울렸다.그 짧은 소리에도 유리는 가슴이 살짝 뛰는 걸 느꼈다.문을 열자, 민우는 손에 작은 종이봉투를 들고 서 있었다.“이거&hellip
이탈리아 피렌체. 석양이 내려앉은 아르노 강변의 벤치 위에 이현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유리한 조각처럼 맑고 차가운 공기 속에서그의 눈빛은 멀리, 아주 멀리 붉게 물든 하늘 끝을 향해 있었다.사람들은 저마다의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고,관광객들의 웃음소리와 음악 소리가 강바람에 실려 흘러갔다.그 풍경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이현에게 조금도 닿지 않았다.그의 주머니 속, 가볍고 얇은 기기의 화면 한쪽에 사진 한 장이 떠 있었다.지인이 우연히 보낸 메시지 안에 덤처럼 첨부되어 있던 사진.그 속엔 유리의 부엌으로 보이는 공간이 있었고,그녀가 만든 듯한 파스타 한 접시와
식당 안은 평소보다 훨씬 시끄러웠다.단골손님들은 슬쩍 눈치를 주고받으며 수군거렸고,어떤 아줌마는 “저기 사장님 남친이세요?”라며 장난을 쳤다.유리는 “아니라고요!!”라고 소리를 지르며 국자를 들었다가,아줌마들이 깔깔 웃는 소리에 입술을 꾹 다물고 물만 내렸다.“유리 씨 인기 많네. 장사 잘하겠다.”이현이 팔짱을 풀며 한마디를 툭 던졌다.유리는 국자로 찌개를 저으며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아 진짜… 저 인간은 왜 저러지…”저녁 무렵, 문득 식당 안에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다.문틈 사이로 들어선 한 여자의 실루엣
아침 공기가 아직 서늘한데도 유리의 이마엔 땀방울이 맺혔다.주방에서 채소 써는 소리가 경쾌하게 퍼져나가지만, 그녀의 마음은 어쩐지 분주하고 어지러웠다.칼끝으로 리듬을 타는 손놀림은 점점 빨라졌고, 심장이 그것보다 먼저 뛰고 있다는 걸 그녀는 누구보다 잘 느끼고 있었다.‘설마 오늘은 안 오겠지. 아니, 저 진상님도 적당히 해야지… 설마 또?’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골목 바깥에서 웅성거림이 몰려들었다.평소보다 훨씬 큰 소음에 유리는 머리를 홱 돌려 주방 창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그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새벽 공기를 뚫고 부엌 창문 틈으로 겨우 스며드는 첫 햇살에, 유리는 눈을 찡그리며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손끝에 아직 따뜻함이 채 가시지 않은 빗자루의 감촉이 남아 있었고, 어젯밤 그 황당한 남자의 얼굴이 자꾸 머릿속을 떠올랐다.‘미친놈인가…’스스로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렸지만, 그때 느꼈던 묘한 울렁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단순히 분노에서였을까? 아니면, 낯선 사람의 강렬한 눈빛이, 생각보다 오래 가슴 한가운데 남아 있었던 걸까.유리는 스스로를 향해 얼굴을 찌푸리며 부엌으로 향했다.익숙한 동작으로 칼을 쥐
S그룹 본사 최상층 회장실, 그 문 앞 복도에는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셰프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흰 셰프복에 단정한 모자, 은빛이 번쩍이는 조리도구, 완벽히 플레이팅된 요리가 놓인 쟁반을 양손으로 받쳐 든 모습은 그 자체로 일종의 퍼레이드 같았다.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과 초조함이 엉켜 있었고, 뺨에는 굳은 미소가 어색하게 걸려 있었다.복도를 채운 공기는 마치 숨조차 삼키기 두려운 듯 묵직했고, 안쪽에서 새어나오는 소리, 포크와 나이프가 접시 위를 긁는 미묘한 소리와 낮고 단호한 남자의 목소리는 그 공기를 더욱 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