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도쿄의 회의실은 언제나처럼 정돈되어 있었다.반듯하게 나열된 서류들, 적막을 가르는 키보드 소리,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들 사이에서 이현은 유독 자주 고개를 돌렸다.프레젠테이션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그의 집중은 자꾸만 어긋났다.“정리된 자료는 메일로 다시 공유드릴게요.”동료의 말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며 이현은 애써 평정을 유지했다.하지만 그가 계속해서 테이블 아래로 시선을 내리는 건,꺼진 휴대폰 화면을 몇 번이고 확인했기 때문이었다.거기엔 여전히, 유리의 이름 옆에 작은 점 하나조차 없었다.그녀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그 침묵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무언의 의사표현’처럼 느껴졌다.회의를 마친 후, 이현은 조용히 호텔로 돌아왔다.짐을 정리하지도 않은 채 소파에 몸을 던지듯 앉은 그는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았다.천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치 지금의 유리처럼.그는 메시지를 열었다. 어제, 그제, 그 전날. 자신이 보냈던 짧은 안부들과그녀의 ‘읽지 않음’ 상태를 하나하나 짚어보듯 바라봤다.‘무슨 일이 있는 걸까.’‘아니면… 일부러 그런 걸까.’스스로를 위로하려는 쪽과 의심으로 향하려는 쪽이 내면에서 충돌하고 있었다.그리고 그 충돌 끝에 그는 아주 조용히 입을 열었다.“…돌아가야겠다.”파리, 같은 시각. 유리는 오래전부터 즐겨 찾던 작은 서점에 있었다.프랑스어 원서들과 여러 나라의 여행기,그리고 낡은 표지의 소설들 사이에서 그녀는 가볍게 손끝을 움직이며 책장을 넘겼다.하지만 집중은 쉽지 않았다.‘잘 자요.’이현의 마지막 메시지가 머릿속을 계속해서 맴돌았다.그는 매일 다정하게, 그녀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그리고 자신은 그 손을 외면하고 있었다.왜일까.그녀는 자문했다. 왜 그토록 익숙했던 사람의 말이 이토록 낯설게 느껴지는 걸까.서점의 주인이 차를 내어주겠냐고 묻자 유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창밖에선 해가 느릿하게 지고 있었다.그리고 그
그들은 잠시 말이 없었다.테이블 위에 김이 오르는 찻잔, 두 사람 사이의 침묵, 그리고 그 침묵에 섞인 미세한 망설임.유리는 스스로에게 물었다.‘지금 이 상황을 정말 아무 감정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그건 단순한 커피 한 잔이었고, 그는 더 다가오지 않았지만문제는 그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그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었다.그날 밤, 유리는 조용히 창가에 앉아 이현의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리고 밤 10시 12분. 도착한 메시지는 짧았다.‘오늘은 어땠어요?’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대답을 하기엔 너무 많은 감정이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결국, 그녀는 아무런 답장 없이 휴대폰을 뒤집어두었다.도쿄의 이른 아침, 이현은 호텔 커튼 사이로 새어드는 희끄무레한 햇빛에 눈을 떴다.창밖은 이미 활기찬 도시의 박동으로 움직이고 있었지만,그의 마음은 아직 파리의 어느 고요한 창가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그는 습관처럼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메시지는 없었다.어젯밤 보낸 단정한 안부에도 유리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평소 같았으면,‘바쁘겠지’‘시간이 안 맞았겠지’그렇게 넘겼을 것이다.하지만 이번엔 달랐다.그녀의 침묵은 어딘가 의도적인 것처럼 느껴졌다.그리고 그 의도는 어떤 이유도 설명하지 않았기에 더 무거웠다.회의 시간 내내 이현의 시선은 종종 멍하니 창밖으로 빠져나갔다.파리의 겨울 하늘, 그곳에서 유리가 지금 뭘 하고 있을지 그는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혼자 아침을 차려 먹을까.아니면 어제처럼 산책을 나갔을까.그도 아니라면, 어쩌면 그냥 창가에 앉아 커튼 너머의 거리를 바라보며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도.그 상상은 이상하게도 그녀가 더 이상 '혼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으로 이상하게 이어졌다.어디서부터 시작된 상상인지 모른다.하지만 그 상상 속엔 언젠가 봤던 누군가의 그림자가 스치듯 떠올랐다.요리 수업에서 잠깐 마주쳤던 남자.인사도 나눈 적 없지만, 유리가 유독 부드러운 얼굴로 대
무소식이 무관심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그녀는 왠지 조금 서운했다.그리고 그 서운함은 자신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감정이었다.넷째 날. 유리는 아침 산책을 나갔다.라탱 지구의 좁은 골목길. 혼자 걷는 그 길 위에서그녀는 또 다른 익숙한 얼굴을 마주쳤다.카페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던 그 남자.요리 수업에서 만났던, 그리고 마지막 인사를 하고 떠났다고 믿었던 사람.그는 유리를 보더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어… 안녕하세요?”“여기서 뵐 줄은 몰랐네요.”유리도 당황했지만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려 애썼다. 그는 작은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잠깐, 같이 커피라도 하실래요? 전 지금 막 시킨 참이라…”유리는 고개를 저을까 하다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조용히 앉았다.그 순간, 그녀는 스스로에게이건 단지 커피 한 잔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었다.그들은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그저 파리의 겨울, 햇살과 안개 사이에서묘하게 따뜻한 시간을 공유했다.그리고 그 대화의 마지막, 그는 조심스레 말했다.“혼자 남은 시간이 길면사람은… 작은 친절에도 마음이 열리게 되죠.”유리는 그 말이 자신을 겨냥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그건 그가 지나온 감정의 고백이었고,그 순간 유리는 그의 말 속에서 자신의 오늘을 보았다.그날 밤, 이현에게 메시지가 도착했다.‘오늘 하루는 어땠어요?’단순한 문장이었지만 유리는 한참을 망설였다.답장을 보내기까지 십 분, 이십 분이 걸렸다.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적었다.‘조용했어요.혼자서, 많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었어요.’이현은 짧게 답했다.‘내일은 더 조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그 말은 어딘가 외로움이 스며 있는 다정함이었다.그리고 유리는 그 다정함이 자신에게 여전히 필요한 온도라는 걸 조금 늦게 깨달았다.그날 밤, 유리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하루가 비어 있는 것이 어쩌면 사랑의 부재보다 더 무서울 수도 있다.’‘그 빈 하루 속에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들어올 때, 마음은 어느 쪽으로든 흔
“본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잠깐, 도쿄에 들어오라는 연락이.”“출장이에요?”“응. 일주일 정도. 아마 미팅과 회의가 이어질 거라서, 급히 가야 할 것 같아요.”그 말은 단순한 출장의 언급이 아니었다.유리는 그 말의 너머에 또 다른 제안이나 결정이 있음을 감지하고 있었다.그래서 더 묻지 않았다.그냥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언제 가요?”“모레.”그 짧은 대답은 모든 것을 압축하고 있었다.그날 밤, 두 사람은 같은 소파에 앉아 있었지만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TV에서는 무채색 뉴스 화면이 흘러나왔지만 아무도 그것에 집중하지 않았다.유리는 담요를 무릎 위로 끌어올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현 씨.”“응.”“거기서… 더 오래 있으라고 하면,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그 질문은 지금 이 공간을 무너뜨리려는 것이 아니라,그 공간의 모서리를 미리 만져보려는 손끝 같았다.이현은 잠시 정지된 듯한 시선을 보였다가 답했다.“솔직히 말해도 돼요?”“응.”“나… 조금, 마음이 기울고 있어요.”그 말은 이현이라는 사람의 책임감과그가 품고 있는 야망이 그동안 어떻게 눌려 있었는지를 은근히 드러내는 말이었다.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탓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이상하게, 마음 깊은 곳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그러면… 난 어떻게 돼요?”유리가 묻자 이현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그 시선은 ‘당신을 데려가고 싶다’는 말과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동시에 담고 있었다.유리는 그 눈빛이 어쩌면 대답보다 더 정직하다고 느꼈다.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날 밤, 유리는 혼자 안방 침대에 앉아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불빛을 바라보았다.이현의 옷장에서 출장 준비를 위해 꺼낸 셔츠들이 조용히 정리되어 있었고,그 정돈된 풍경 속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혼자가 되는 파리’를 상상해보았다.그리고 그 상상은 뜻밖에도 너무 쉽게, 자연스럽게 그녀의 머릿속에 그려졌다.그건 두려움이 아니라 서늘한
파리의 겨울 햇살은 유난히 느릿하게 기울었다.오전과 오후의 경계가 흐려지는 시간, 유리는 부엌에 서서 국물의 간을 보며숟가락 끝에 얹힌 뜨거운 그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입술에 닿게 했다.싱거웠다. 하지만 다시 간을 맞추진 않았다.그날은, 그냥 그렇게 먹기로 했다.식탁을 차리는 동안 이현은 아무 말 없이 유리의 옆에 있었다.그녀가 손을 뻗으면 조용히 그릇을 건넸고, 접시를 내리면 묵묵히 젓가락을 맞췄다.두 사람은 어느새 함께 요리하는 호흡에 익숙해져 있었지만,그 익숙함은 사랑의 언어가 아니라 ‘조심’으로 이뤄진 합이기도 했다.식탁 위엔 버섯 크림 파스타와 그 위에 소복이 얹힌 파르메산 치즈,그리고 가지 토마토 구이와 바게트가 올려졌다.파리는 언제나 식욕을 깨우는 도시였고, 유리는 그 도시의 리듬에 맞춰 자연스럽게 요리를 올렸다.그런데 그날의 식탁은 음식보다 ‘말’이 더 필요해 보였다.조용히 숟가락을 들던 이현이 작은 숨을 토하듯 말을 꺼냈다.“유리 씨.”그 짧은 호명이 그녀의 손끝을 멈추게 했다.“혹시… 당신 마음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그 말은 기다려온 대화의 문이었다.그동안 서로가 말하지 않았던 것, 말할 수 없었던 것들. 그 한마디에 담겨 있었다.유리는 천천히 포크를 내려놓았다.그리고 물컵을 두 손으로 감싸 안으며 낮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대답했다.“…그걸 나도 요즘 매일 물어요.”그녀의 눈동자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지만,그 시선은 아주 먼 곳을 보고 있었다.“내 마음이 지금 어디 있는지, 당신 곁에 있는 건 맞는지…아니면 그냥 여기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는 건 아닌지.”그녀는 말을 이었다.“사랑이라는 감정이 처음엔 아주 선명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감정이 무게로만 남아 있는 느낌이 들어요.”이현은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듣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당신 마음이 내 곁에 있다는 걸 매일 확인하고 싶었어요.그게 불안이라도 상관없었어요. 당신이 내 옆에만 있어준다면.”그의 고백은 처음으로 내
두 사람은 섬 중앙 작은 골목 어귀에 있는 조용한 카페에 들어섰다.따뜻한 커피와 아몬드가 박힌 조각 케이크가 나왔고,그들은 서로의 손에 닿지 않는 컵과 컵 사이의 공간을 두고 마주 앉았다.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 정적은 어제까지의 침묵과는 달랐다.이젠 누군가 먼저 말할 수 있다는,그리고 그 말을 받아줄 용기가 생겼다는 기류가 작게, 그러나 분명히 흐르고 있었다.이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요즘 당신, 전보다 많이 생각이 깊어졌어요.”유리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그게 좋은 건가요?” “좋다고 말하기엔… 마음이 복잡해졌다는 뜻 같아서요.”그녀는 살며시 웃었다. 그 웃음은 얇았지만, 속에 담긴 감정은 진짜였다.“맞아요. 예전엔 그저 내가 다 감당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이제는… 내가 감당한 만큼 당신도 상처받는다는 걸 알게 됐어요.”그 말에 이현의 시선이 깊어졌다.“그래서일까요. 당신 말 한 마디에 내가 더 조심스러워졌어요.”“서로가 서로를 자꾸 조심하게 되면… 함께 있는 게 더 어렵지 않을까요?”유리가 물었다.이현은 그 말에 쉽게 답하지 못했다.대신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말했다.“그래도 나는 그 어려움을 감수하고 싶어요. 당신이니까.”그 말은 짧았지만 단단했다.그 순간, 유리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마치 겨우 붙들고 있던 감정의 실이 조금 느슨해지는 듯한 순간이었다.카페에서 나와 걷는 길.그녀의 손이 작게, 그러나 분명히 이현의 손등에 스쳤다.이현은 그 손을 붙잡지 않았다.대신 천천히 걸음을 멈춰 유리를 바라보았다.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 침묵 안엔 '이제 괜찮다'는 메시지가 부드럽게 담겨 있었다.그래서 이현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지금은 서로가 서로에게 다시 손을 내미는 연습을 하는 시간이었다.유리는 이른 아침, 부엌 한가운데 멈춰 선 채 오래된 유리병 하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작은 잼병. 뚜껑은 여전히 닫혀 있었고,안쪽에 흐르는 꿀과 잼은 시간이 지난 탓인지 가장자리에 미세
밤공기가 차갑게 식어가는데도,유리는 어딘가 온몸이 달아오른 듯 잠시 가게 문 앞에 멈춰 서서바람에 흔들리는 간판 소리를 들으며 혼자 속삭였다.“…나… 이러면 안 되는데.”유리는 오늘따라 평소보다 더 분주히 움직였다.주방 안을 바삐 오가며 냄비 뚜껑을 열어보고, 칼을 쥔 손끝을 재촉했지만,그럴수록 마음 한편은 더 조급하게 요동치는 느낌이었다.주방 창가로 스며드는 한 줄기 햇살에 눈이 시리도록 부딪힐 때마다,그 골목 어귀로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그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오늘은 안 올 거야. 그럴 리 없지. 근데,
이현은 문 안으로 들어서며 느긋하게 웃었다.유리는 순간 칼을 내려놓고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쥘 뻔했다.“진상님… 진짜 왜 이렇게 매일 와요. 그만 좀 와요.”“싫은데요?”이현은 짧게 웃으며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보고 싶어서 왔는데요.”조유리는 입술을 꾹 깨물고, 뒤돌아서 주방으로 들어갔다.그런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뺨이 빨갛게 달아오른 걸 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꾹 눌렀다.‘조유리, 이러지 마… 진짜, 정신 차려…’그날 저녁, 은별은 가게 문턱을 조용히 넘었다.“회장님, 식사 시간이 이렇게 중요하셨나요?”은별
은별의 미소 속엔 알 수 없는 날카로움이 숨겨져 있었다.“회장님이 뭐가 그리 맛있다고 매일 이곳에 오시는지.”이현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비서님, 일은 일이고, 제 사생활은 좀 놔두시죠.” 라고 말했다.유리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그들의 말 속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기류가 한순간 식당 안 공기를 차갑게 만들었다.가게 정리 중, 유리는 문을 닫으려다 또 골목 끝에 서 있는 이현을 발견했다.“진상님, 진짜… 오늘은 왜 안 가세요.”이현은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며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그냥… 보고 가려고요.”유리는 한숨을
“조유리 씨, 다른 사람한테도 이렇게 신경 많이 쓰세요?”그 말에 유리는 순간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휙 돌리며“손님 관리 열심히 하는 게 잘못인가요?” 하고 받아쳤다.이현은 피식 웃었다.“잘못은 아닌데요, 굳이 그렇게 변명하실 필요는 없잖아요.”유리는 국자로 찌개를 휘젓다 턱 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그 와중에도 심장이 자꾸만 빨리 뛰는 게 더 화가 났다.문득 식당 문이 열리고,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울렸다.조은별이었다.완벽한 정장 차림, 미소를 얹은 얼굴,그러나 그 안에서 번뜩이는 눈빛은 누구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