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식당 안은 평소보다 훨씬 시끄러웠다.
단골손님들은 슬쩍 눈치를 주고받으며 수군거렸고,
어떤 아줌마는 “저기 사장님 남친이세요?”라며 장난을 쳤다.
유리는 “아니라고요!!”라고 소리를 지르며 국자를 들었다가,
아줌마들이 깔깔 웃는 소리에 입술을 꾹 다물고 물만 내렸다.
“유리 씨 인기 많네. 장사 잘하겠다.”
이현이 팔짱을 풀며 한마디를 툭 던졌다.
유리는 국자로 찌개를 저으며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아 진짜… 저 인간은 왜 저러지…”
저녁 무렵, 문득 식당 안에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문틈 사이로 들어선 한 여자의 실루엣,
반듯한 정장, 날카로운 구두 소리,
그리고 새하얀 셔츠에 완벽히 말아 올린 머리. 은별이었다.
“여기가 그렇게 맛있다면서요?”
은별은 유리에게 다가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회장님이 매일같이 오실 만큼.”
유리는 순간 당황해
“아, 아뇨… 저, 그냥 손님이 좀 많아서…” 라고 더듬거렸다.
은별은 잠깐 눈웃음을 지으며,
“그럼 회장님은 오늘도 특별 대접 받으시는 거겠네요?”
하고는 살짝 비꼬듯 말했다.
그 미소 속에 번지는 싸늘함은 유리가 처음 겪어보는 종류의 감정이었다.
조용히 지켜보던 이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은별 쪽으로 다가왔다.
“뭐 하세요, 비서님. 여긴 내 사생활이니까 신경 꺼요.”
그 말에 유리는 움찔했고, 은별은 미소를 유지한 채 살짝 고개를 숙였다.
“회장님, 걱정돼서요. 이런 데까지 매일 나오시는 걸 보면.”
이현은 짧게 웃었다.
“내가 어디서 밥을 먹든 그건 내 사정이죠.”
유리는 괜히 국자로 냄비 뚜껑을 툭툭 두드리며 소리를 내더니,
“여기, 진상님, 음식 나왔어요. 시끄럽게 굴지 말고 먹기나 하세요.”
하고 말했다.
이현은 테이블로 돌아와 앉으면서 유리 쪽을 힐끔 바라봤다.
“귀엽네, 질투하는 거?”
“누가 질투요?! 미쳤나 진짜…”
유리는 얼굴까지 붉히며 등을 돌렸지만,
그 발끝은 조금 더 분주히 움직이고, 손끝은 괜히 그릇을 닦아대며 안절부절 못했다.
그날 밤, 식당 문을 닫고 정리하던 유리는 골목 끝에 서 있는 이현을 발견했다.
“진상님, 안 갔어요?”
“언제 퇴근하나 보고 있었죠.”
“왜요. 잠복근무라도 하세요?”
유리는 못 이긴 척 웃으며 물었고, 이현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말했다.
“너 오늘… 좀 귀여웠어요.”
유리는 한참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가
“아 진짜… 미쳤나…”
작게 중얼거리며 황급히 문을 잠갔다.
그 등 뒤에서, 이현은 피식 웃으며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입에 물었다가 불도 붙이지 않은 채,
그냥 한참 동안 골목 어귀를 바라보고 섰다.
유리는 눈가에 힘을 주며 주방 안을 쓸고 또 쓸었다.
사실 바닥은 이미 반짝였지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이 복잡한 기류를 주체할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다.
한동안은 줄까지 서가며 찾아오던 이현이 며칠째 모습을 보이지 않자,
유리는 안도하면서도 이상하게 불안했다.
‘진상님… 설마 진짜 이제 안 오는 거야? 아니, 그게 뭐라고 신경 쓰고 있어, 최유리.’
그러던 그날 저녁, 골목 끝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유리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고, 검은 슈트 차림에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성큼성큼 다가오는 이현이 보이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며칠 안 왔다고, 표정이 많이 서운해 보이시네요.”
이현은 문 앞에 서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유리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쓸던 빗자루를 더 세게 밀었다.
“서운하긴요. 진상님 안 오시니까 장사 편해서 좋았죠.”
“아, 네. 그럼 오늘부터 다시 불편하게 해드리겠습니다.”
툭툭 튀어나오는 그의 말은 언제나 짧고 직설적이지만,
어디 하나 반말을 쓰지 않으면서도 사람 속을 긁는 재주가 있었다.
식당 안은 또 다시 웅성거림으로 채워졌다.
단골손님들이 슬쩍 눈치를 주며 웃고, 마춘배 아저씨는
“유리야, 오늘 또 그 양반 오셨네?” 하고 농담을 던졌다.
유리는 붉어진 귀를 감추듯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주방 안으로 몸을 숨겼다.
저녁이 깊어가고, 식당 안이 한산해질 무렵.
이현은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괴며 유리를 빤히 바라봤다.
아직 어둠이 완전히 걷히지 않은 새벽.이현은 식당에 먼저 나와 주방 불도 켜지 않은 채 혼자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손에는 작은 크림색 편지지 한 장.그는 천천히 조심스레 펜을 들었다.유리 씨에게 오늘 당신이 조리대 앞에 서기 전, 이 글을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당신이 국을 끓이기 전, 내가 먼저 마음을 데워주고 싶어서요.요즘 당신을 보고 있으면 국물보다 더 따뜻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요.말없이 사람 마음을 풀어주고,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손을 내밀 줄 아는 사람.그런 당신 옆에 있는 내가 요즘은 그냥 고맙습니다.오늘도 당신의 하루가 너무 바빠서 내 마음을 듣지 못할까 봐이렇게 먼저 써둡니다.당신의, 매일 고맙고 매일 사랑하는 이현 드림.편지를 다 쓰고 난 이현은 살짝 접어 조리대 아래 수건함 옆에 작은 자석으로 붙여두었다.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 고요한 아침의 틈에서가장 먼저 유리에게 닿는 건 따뜻한 말 한 장이었으면 했기 때문이다.유리는 조금 늦게 식당에 도착했다.문을 열자 주방엔 조명이 켜지지 않았고,조용한 공기 안에 어느새 데워지고 있던 냄비 속 물소리만 작게 들려왔다.잠시 후 그녀는 조리대 앞에 섰고, 작은 편지 한 장을 발견했다.그 편지를 손에 쥔 순간, 그녀의 숨이 잠시 멈췄다.그리고 한 줄, 한 문장 읽을수록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들이 가슴 안에서 천천히 녹아내렸다.조리대 위로 햇빛이 조심스레 들어오기 시작했다.유리는 그대로 편지 옆에 국자 하나를 내려놓고, 천천히 냄비 뚜껑을 열었다.물을 붓고, 된장을 풀고, 대파를 송송 썰어 넣으며 이현이 앉아 있을 테이블 쪽으로 가끔씩 눈길을 보냈다.국이 끓고, 그 향이 퍼지기 시작하자 유리는 조용히 말했다.“편지, 잘 받았어요.”이현은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내 글씨, 너무 진지하지 않았어요?”“진지해서 좋았어요. 당신 말투가 아니라, 당신 마음 그 자체 같아서.”“글이니까 오래 데워지잖아요. 말은 날아가지만 글은 천천히 스며드니까.”점심
이른 오후, 식당 문이 조용히 열렸다.남루하지만 단정한 옷차림,살짝 구부정한 어깨의 중년 남성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혹시… 여기 아직 된장국 하나 나올까요?”유리는 조리대에서 고개를 들었다.“안녕하세요. 혹시 전에… 자주 오셨던…”“맞아요. 예전 작은 가게에서 일하실 때. 거기서 국 먹고 나면 이상하게도 하루가 차분해졌었죠.”이현은 뒷정리를 멈추고 유리 쪽을 바라봤다.그녀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오랜만이에요. 그땐 조리대도 좁고, 밥솥도 하나뿐이었는데…”“근데 국은 항상 따뜻했어요. 그게 지금도… 생각나더라고요.”유리는 조용히 냄비를 꺼냈다. 된장, 무채, 들기름. 이건 지금의 유리가 아니라,예전 그 시절의 유리가 자주 끓이던 조합이었다.이현은 그녀의 움직임을 가만히 지켜보았다.무를 자르는 칼 끝의 리듬, 냄비 안의 온도를 손등으로 느끼는 버릇,국이 끓기 전 살짝 뚜껑을 열어놓는 습관까지.그건 어쩌면 이현이 지금 사랑하고 있는 유리를 만들어준 시간의 결이었다.손님은 국을 한 숟갈 뜨며 천천히 말했다.“그때도 참 조용했어요. 근데 이상하게…그 조용함이, 먹는 사람 마음까지 가만히 하더라고요.”유리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그 시절의 자신이 누군가에게 그랬다는 것.그 기억이 이렇게 오래 남아 있었다는 게 묘하게 울컥했다.“그때는… 혼자였거든요. 조용하게라도 버티지 않으면 주방이 너무 넓게 느껴졌어요.”손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지금은 혼자 아니네요. 조금 전부터 계속 당신만 바라보는 사람 있잖아요.”이현은 그 말에 조용히 유리를 향해 웃었다.“맞아요. 지금은 국도, 주방도, 그녀도 혼자가 아니에요.”손님이 식사를 마치고 나서며 말했다.“오늘 국… 예전보다 더 부드러워졌네요. 이유는 말 안 해도 알 것 같아요.”“감사합니다. 오늘 그 말… 조금 오래 기억할 것 같아요.”문이 닫히고, 식당 안엔 다시 두 사람만 남았다.유리는 조용히 냄비 뚜껑을 닫으며 입을 열었다.“그 사람 말 듣는데 그 시절
오전 10시, 식당 문은 평소처럼 열리지 않았다.주방 조명도 꺼져 있었고, 문 옆엔 작은 메모 하나가 붙어 있었다.오늘 하루, 국 대신 서로의 손을 데우는 시간으로 쉽니다.유리는 평소보다 늦게 눈을 떴다.이현이 조용히 건넨 따뜻한 차 한 잔,그리고 그 옆에 놓인 작은 쪽지.“오늘은 국 대신, 당신과 점심을 먹고 싶어요.”“무슨 날이에요?”이현은 대답 대신 유리의 가방을 챙겨 들었다.“아무 날 아니에요. 그래서 더 같이 있고 싶은 날이에요.”도심으로 향하는 길. 버스 안, 유리는 이현의 어깨에 살짝 기댔다.“이런 시간, 너무 오랜만이에요.”“당신이 식당 시작하고 나서 평일 낮에 나오는 건 처음이죠?”“응. 햇빛이 이렇게 부드럽게 떨어지는 줄 몰랐어요.”이현은 그녀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당신 손등엔 항상 국물이 닿아 있었잖아요. 오늘은 햇살이 닿게 하고 싶었어요.”도착한 곳은 둘이 처음 함께 밥을 먹었던 작은 골목 식당 거리였다.그때의 국, 그때의 테이블,그리고 서로를 조심스럽게 바라보던 그날의 공기가 살짝 겹쳐지는 느낌.“여기… 우리가 처음 같이 밥 먹은 식당이네요.”“응. 그날 당신이 국을 반쯤 남기고 몰래 쪽지 접어 넣었잖아요.”“기억해요?”“다음에 내가 끓여드릴게요. 그 쪽지, 아직 내 수첩 안에 있어요.”오늘 점심은 다른 식당에서가 아니라,근처 공원 벤치에서 이현이 싸온 도시락으로 준비됐다.연근조림, 달걀장, 그리고 유자가 살짝 스민 무생채.그리고 따뜻하게 보온병에 담긴 맑은 미역국.“내가 끓였어요. 조금 싱거워도 괜찮아요?”“당신이 국을 끓이면 내가 무조건 다 먹죠.”한 숟갈을 떠넣은 유리는 입 안 가득 퍼지는 맛에 가볍게 눈을 감았다.“…진짜 괜찮아요. 조용하고, 고맙고, 당신 마음 맛이에요.”식사를 마친 후, 둘은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바람은 천천히 나뭇가지 사이를 지나고, 햇빛은 유리의 머리카락에 작은 윤기를 남겼다.이현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가끔 당신이 조금 멀어 보일 때
점심 장사가 끝나갈 무렵. 식당 문이 조용히 열렸다.낯선 얼굴. 그러나 이현은 단번에 그를 알아보았다.“서연…?”그녀는 짧게 웃었다.“와, 진짜 너네 식당 맞구나.지나가다 간판 보고, 혹시 하고 들어왔어.”유리는 조리대 쪽에서 그 낯선 목소리에작게 눈을 돌렸다.이현은 곧바로 유리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유리 씨, 이쪽은 예전 회사 다닐 때 같이 일하던 친구예요. 서연 씨.”“안녕하세요.”유리는 짧게 인사했고, 서연은 반가운 듯 고개를 숙였다.“여기 정말 예쁘다. 생각보다 훨씬 따뜻하고, 뭐랄까… 누군가 오래 머물고 싶은 공간이야.”“그게 유리 씨 덕분이에요.”이현의 말에 유리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자리에 앉으시겠어요? 점심 메뉴는 끝났지만 국 하나는 따로 끓일 수 있어요.”유리는 부엌으로 들어가며 손끝에 조용히 힘을 줬다.예상하지 못한 방문, 익숙하지 않은 이름.그 모든 감정이 국물처럼 천천히 끓기 시작했다.그녀는 차돌과 배추를 손질하며 스스로에게 말했다.이 국은 당신을 위한 것도 그녀를 위한 것도 아니다.이 국은… 지금의 나를, 지금의 우리를 위한 온도다.식탁에 국을 놓고 돌아서는 순간, 유리는 들었다.서연이 이현에게 조용히 말하는 소리를.“예전엔… 네가 이렇게 조용한 사람인지 몰랐어.”“지금은 내가 말을 덜 해도 마음이 먼저 전해지는 사람이 옆에 있으니까.”그 순간, 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작은 숨을 삼켰다.서연이 식사를 마치고 일어설 때, 이현은 문까지 배웅을 했다.“고마워, 들러줘서.”“이현아.”“응?”“지금 네 얼굴 보니까 알겠더라. 네가 지금, 참 잘 있는 거 같아서… 괜히 안심돼.”“응, 나 지금 잘 있어. 잘 지내.”서연은 그 말에 작게 웃고 돌아섰다.문이 닫히고, 유리는 조용히 수건을 접으며 말했다.“차돌은 너무 익히면 질겨지니까 오늘은 덜 끓였어요.”이현은 그녀의 손에서 수건을 받으며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오늘, 괜찮았어요?”유리는
토요일 아침. 식당 문을 열기 전,유리의 휴대폰에 짧은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엄마]오늘 근처 볼 일 있어서 점심 때 들를게.유리는 한참 동안 화면을 바라보다 깊은 숨을 내쉬었다.그 기척을 느낀 이현이 다가왔다.“무슨 일 있어요?”유리는 휴대폰을 보여주며 담담히 말했다.“엄마가 점심 먹고 간대요. 예고도 없이.”“그래요? 그럼 오늘은 조금 더 국물을 깊게 끓여야겠네요.”“내가 조심스러워지는 날에는 당신 국물이 항상 진해져요.”그날 점심 메뉴는 차돌된장국과 표고조림, 애호박전.평소보다 한 톤 낮은 유리의 움직임에 이현은 말없이 조리대를 정리하고 주방의 손을 줄였다.그리고 유리의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얹었다.“오늘, 내가 옆에 더 조용히 있을게요. 말보다…”“국물처럼, 조용하게?”“당신이 그걸 좋아하잖아요.”낮 12시를 조금 넘긴 시간. 식당 문이 열리고 유리의 어머니가 들어섰다.단정한 트렌치코트에 손엔 꽃 한 송이 대신 작은 밀짚 장바구니가 들려 있었다.“오랜만이네.”유리는 부드럽게 웃었다.“여기 자주 오진 않잖아요.”“오늘은 근처 일 보고 나니 뭔가 먹고 싶더라. 너 밥은 잘 먹고 다니냐?”“매일, 국도 꼭 챙겨 먹고 있어요.”그 말에 어머니는 유리 너머 조리대에 서 있는 이현을 바라봤다.“이현 씨 맞죠?”“네, 어머님. 오랜만에 뵙습니다.”짧은 인사 후, 세 사람은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국을 떠넣던 어머니가 말했다.“이 국… 예전 너 어릴 때 먹던 된장 맛이랑은 다르네.”유리는 조심스럽게 웃었다.“그땐 단지 배를 채우려고 먹었다면 지금은 마음도 같이 데우고 싶어서요.”이현이 조용히 말했다.“유리 씨 국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리듬이 있어요. 그건 하루 이틀 배운 게 아니죠.”어머니는 숟가락을 잠시 놓고 유리를 바라봤다.“너, 이현 씨랑 살면서 많이 부드러워졌네.”“그런가요?”“말 안 해도 알아. 국물만 봐도 안다니까.”식사가 끝나고, 어머니는 빈 그릇을 정리하며 유리에게 물었다.“너
비가 조금씩 내리던 오후. 식당 문이 조용히 열렸다.들어선 사람은 낯익은 얼굴이었다.“안녕하세요…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 예전에 감기 걸렸을 때 된장국 한 그릇 먹고 울 뻔했던 사람입니다.”유리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오랜만이에요. 그날 기억나요. 말없이 국 다 비우고 가셨죠.”이현도 조리대 너머에서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그날 이후로 두 번쯤 더 오셨던 것 같은데…”“그땐 말도 잘 못 붙였죠. 근데 오늘은 이 집 분위기가 그때랑 좀 달라졌네요.”손님은 창가 쪽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똑같은 식탁인데 두 사람이 같이 만들어낸 온도가 전보다 더 단단해진 느낌이에요.”유리는 조용히 부엌으로 들어가 오늘의 된장국을 끓이기 시작했다.국자를 돌리는 손끝에서 문득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그날. 조리대 앞에서 긴장된 손끝으로 된장 양을 조절하던 자신.주방에 익숙하지 않았던 이현이 작은 실수로 냄비를 엎질렀던 날.그리고 그걸 함께 다시 끓이면서 처음으로 나란히 땀 흘렸던 기억.그때는 국 하나도 서로를 조심스럽게 배려해야 했던 시간이었다.지금은 국 하나에도 서로의 습관이 배어 있었다.그날 손님은 국 한 숟갈을 뜨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여전히 조용한 맛이네요. 그리고… 조금 더 깊어졌어요.”이현이 대답했다.“그건, 같이 사는 사람이 생겼기 때문이에요.”“같이 산다는 게 국 맛을 바꾸기도 하나요?”유리는 웃으며 말했다.“같이 살면, 국에 넣는 마음이 달라지죠.혼자일 땐 따뜻하면 그만이었지만 이젠… 조금 더 오래 머무를 맛을 생각하게 되니까요.”손님이 떠난 뒤, 이현은 식당 불을 하나씩 끄며 말했다.“그때 당신이 처음 국 끓이는 모습, 기억나요.”“나도 기억해요. 당신이 어색하게 도마 닦다가 행주를 물에 빠뜨렸던 거.”“근데 그 어색했던 우리가 이제는 같이 국을 끓이고, 같이 온도를 맞추고, 같이 사는 사람들이 되었네요.”유리는 조용히 그 말끝을 받아주었다.“처음엔 조심스러워서 숨도 얕게 쉬던 사람이었는데…
밤공기가 차갑게 식어가는데도,유리는 어딘가 온몸이 달아오른 듯 잠시 가게 문 앞에 멈춰 서서바람에 흔들리는 간판 소리를 들으며 혼자 속삭였다.“…나… 이러면 안 되는데.”유리는 오늘따라 평소보다 더 분주히 움직였다.주방 안을 바삐 오가며 냄비 뚜껑을 열어보고, 칼을 쥔 손끝을 재촉했지만,그럴수록 마음 한편은 더 조급하게 요동치는 느낌이었다.주방 창가로 스며드는 한 줄기 햇살에 눈이 시리도록 부딪힐 때마다,그 골목 어귀로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그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오늘은 안 올 거야. 그럴 리 없지. 근데,
이현은 문 안으로 들어서며 느긋하게 웃었다.유리는 순간 칼을 내려놓고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쥘 뻔했다.“진상님… 진짜 왜 이렇게 매일 와요. 그만 좀 와요.”“싫은데요?”이현은 짧게 웃으며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보고 싶어서 왔는데요.”조유리는 입술을 꾹 깨물고, 뒤돌아서 주방으로 들어갔다.그런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뺨이 빨갛게 달아오른 걸 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꾹 눌렀다.‘조유리, 이러지 마… 진짜, 정신 차려…’그날 저녁, 은별은 가게 문턱을 조용히 넘었다.“회장님, 식사 시간이 이렇게 중요하셨나요?”은별
은별의 미소 속엔 알 수 없는 날카로움이 숨겨져 있었다.“회장님이 뭐가 그리 맛있다고 매일 이곳에 오시는지.”이현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비서님, 일은 일이고, 제 사생활은 좀 놔두시죠.” 라고 말했다.유리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그들의 말 속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기류가 한순간 식당 안 공기를 차갑게 만들었다.가게 정리 중, 유리는 문을 닫으려다 또 골목 끝에 서 있는 이현을 발견했다.“진상님, 진짜… 오늘은 왜 안 가세요.”이현은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며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그냥… 보고 가려고요.”유리는 한숨을
“조유리 씨, 다른 사람한테도 이렇게 신경 많이 쓰세요?”그 말에 유리는 순간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휙 돌리며“손님 관리 열심히 하는 게 잘못인가요?” 하고 받아쳤다.이현은 피식 웃었다.“잘못은 아닌데요, 굳이 그렇게 변명하실 필요는 없잖아요.”유리는 국자로 찌개를 휘젓다 턱 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그 와중에도 심장이 자꾸만 빨리 뛰는 게 더 화가 났다.문득 식당 문이 열리고,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울렸다.조은별이었다.완벽한 정장 차림, 미소를 얹은 얼굴,그러나 그 안에서 번뜩이는 눈빛은 누구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