تسجيل الدخول로비의 반짝이는 대리석을 밟으며 걸어가던 연수는, 번쩍이는 빛의 잔상 속에서 묘한 데자뷔를 느꼈다. 사방이 거울처럼 매끄럽게 닦인 사옥의 풍경은, 그녀의 기억을 가장 깊은 곳, 아주 오래전의 겨울로 미끄러뜨렸다.
여덟 살의 하연수. 그때의 그녀는 지금처럼 위축되거나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있지 않은, 말 그대로 온실 속의 화초 같은 아이였다. 그날, 연수는 사각거리는 감촉이 낯설었던 크림색 레이스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유난히 딸을 아꼈던 어머니가 백화점을 몇 바퀴나 돌며 직접 골라준 최고급 드레스였다. 허리춤에는 커다란 실크 리본이 사랑스럽게 묶여 있었고, 에나멜 소재의 반짝이는 구두는 아이가 한 걸음씩 뗄 때마다 조용히 존재감을 드러냈다. 장소는 서울의 한 최고급 호텔 대연회장.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정재계 인사들이 모이는 사교 파티였다.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샹들리에는 마치 밤하늘의 은하수를 그대로 쏟아부은 것처럼 찬란하게 빛났고, 길게 늘어선 테이블 위에는 눈이 부신 은빛 식기와 생화 장식이 만발해 있었다. 어른들은 숨이 막힐 정도로 진한 향수 내음과 샴페인 향이 섞인 공기 속에서, 서로의 부와 권력을 탐색하는 계산적인 웃음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 화려한 세계의 중심에서, 어린 연수는 철저히 혼자였다. “우리 연수, 엄마 아빠가 저기 회장님께 인사만 드리고 금방 올게. 착하지? 여기서 얌전히 맛있는 거 먹고 있어.” 어머니의 다정한 손길이 머리를 쓰다듬고 멀어지면, 연수는 약속이라도 한 듯 연회장 가장 구석에 위치한 커다란 통유리창가로 향했다. 그곳이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연회장 중앙에는 연수와 비슷한 나이대의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화려한 아동 정장과 드레스를 차려입은 그들은, 어른들의 세계를 고스란히 복제한 것처럼 끼리끼리 무리를 짓고 있었다. “너네 집 이번에 교외에 새 별장 샀다며? 수영장도 있어?” “당연하지. 우리 아빠는 이번에 독일제 외제차로 바꿨단 말이야. 너희 집 차는 뭔데?” 어린아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대화치고는 지나치게 세속적이고 차가웠다. 그 틈에 끼지 못한, 혹은 끼고 싶지 않았던 연수는 차라리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는 쪽을 택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서울의 밤 풍경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빌딩들의 인공적인 불빛이 한강 물결 위로 부서져 내렸고, 끝없이 이어지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는 어둠 속에서 긴 별똥별 궤적처럼 도로를 수놓았다. ‘저렇게 빛나는 곳에는…… 진짜 별이 살고 있을까?’ 연수는 작은 손을 뻗어 차가운 유리창에 가만히 대어 보았다. 지독한 냉기가 손끝을 타고 심장까지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연회장 안은 히터 소리와 사람들의 열기로 후끈거렸지만, 이상하게도 어린 연수의 마음은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으로 늘 추웠다. 가식적인 웃음소리와 장난감 자랑뿐인 공간에서, 여덟 살의 소녀는 섬처럼 고립되어 있었다. 눈을 깜빡이면 눈물이 툭 떨어질 것만 같아, 연수는 애써 창틀만 바라보았다. 화려함 속에 가려진 지독한 외로움이 어린 어깨를 짓누르던 그때였다. 기척도 없이, 누군가 조용히 그녀의 뒤로 다가와 그림자를 드리웠다.갤러리 지하 수장고에는 오래된 종이와 먼지가 뒤섞인 냄새가 가득했다. 벽면을 따라 놓인 철제 선반에는 수십 년 동안 보관된 전시 도록과 후원 명단, 행사 기록들이 연도별로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천장에 달린 형광등은 간헐적으로 희미한 소리를 냈고, 외부의 빛이 들지 않는 공간은 낮인지 밤인지조차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고요했다. 진혁은 그곳에서 며칠째 오래된 기록들과 씨름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 펼쳐진 것은 지민이 우연히 발견한 이십 년 전 지역 문화사업 자료였다. 태성그룹 문화재단. 정우 산업. 두 회사가 공동 후원사로 이름을 올린 도심 문화 재생 행사. 처음에는 단순한 지역 상생 프로젝트로 보였다. 당시 성장하던 기업들이 문화행사와 장학사업을 함께 후원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자료를 살필수록 이상한 공백이 눈에 들어왔다. 후원 내역과 행사 일정은 남아 있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해 보이는 공동 협약서의 원본은 사라져 있었다. 협약식 사진이 붙어 있어야 할 자리에도 오래된 접착 흔적만 남아 있었다. 누군가 일부러 사진과 원본만 골라 떼어낸 것처럼 보였다. 진혁은 파일을 덮었다가 다시 펼쳤다. 행사 날짜는 하정우 산업이 부도 처리되기 불과 몇 달 전이었다. 그 무렵 정우 산업은 새로운 친환경 건축 기술을 개발해 대규모 도시개발 사업에 참여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회사가 왜 갑작스럽게 무너졌을까!. 그리고 태성그룹은 그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던 것일까!. 진혁은 확인되지 않은 추측으로 연수를 흔들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먼저 당시 행사를 담당했던 사람들을 찾았다. 오래전 퇴직한 직원들의 이름을
저녁 식사가 준비되기 전, 세 사람은 거실로 돌아왔다. 차를 새로 내오던 김미진은 잠시 망설이다 진경의 이야기를 꺼냈다. “며칠 전에 진경이가 다녀갔다.” 태성의 표정이 곧바로 굳었다. “여기까지 찾아왔습니까?” “그래.” “무슨 말을 했죠?” “자신은 억울하다고 하더구나.” 김미진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너와 회사를 지키려다 최유나에게 이용당한 것뿐이라고.” 태성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말을 믿으신 건 아니겠죠?” “예전의 나라면 믿었을지도 모르지.” 김미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그녀의 시선이 연수에게 향했다. “진경이는 끝까지 자신의 잘못보다 연수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것들만 이야기하더구나.” “태성이도, 회사의 자리도, 심지어 내 마음까지.” 연수는 조용히 김미진의 말을 들었다. 진경에게 받은 상처는 컸지만 이상하게도 통쾌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한 사람이 자신의 욕심을 놓지 못해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떨어지는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진경 부사장님이 많이 힘드실 것 같아요.” 태성이 연수를 바라봤다. “당신은 아직도 그 사람을 걱정합니까?” “걱정한다기보다는…….” 연수는 말을 고르다 조용히 덧붙였다. “이제라도 멈추셨으면 좋겠어요.” 김미진의 눈빛에 복잡한 감정이 떠올랐다. 진경은 끝까지 연수를 미워했는데, 정작 연수는 진경이 더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 차이가 너무도 분명했다.
서재 안에는 오래된 책과 짙은 나무 향이 가득했다. 벽면을 채운 책장과 묵직한 가구들은 오랜 시간 한 사람의 흔적을 품고 있는 듯했다. 김미진은 서재 한쪽에 놓인 유리 장식장 앞으로 연수를 데려갔다. 그녀는 아래쪽 서랍을 열고 오래된 가죽 케이스 하나를 꺼냈다. 짙은 갈색 표면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김미진은 잠시 케이스를 바라보다 연수에게 내밀었다. “열어보렴.” 연수는 조심스럽게 케이스를 받아 들었다. 뚜껑을 열자 클래식한 디자인의 검은 만년필이 모습을 드러냈다. 금색 장식에는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오랫동안 정성스럽게 관리된 듯 은은한 광택이 살아 있었다. “아주 오래된 펜이네요.” “태성이 아버지가 젊었을 때부터 사용하던 만년필이란다.” 연수의 눈이 조금 커졌다. “강 회장님께서요?” “그래.” 김미진은 만년필을 바라보며 옛 기억을 떠올렸다. “회사 규모가 지금처럼 크지 않았을 때도 중요한 계약을 앞두면 꼭 이 펜을 꺼내 들곤 했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밤새 고민하다가도 마지막에는 이 펜으로 서명했지.” “태성이도 어릴 때부터 그 모습을 많이 봤단다.” 김미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래서인지 태성이도 중요한 결정을 앞두면 한동안 이 펜을 빌려 쓰곤 했어.” 연수는 만년필을 바라봤다. 태성이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내렸을 수많은 결정이 떠올랐다. 차갑고 단호해 보이는 그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고민을 품고 이 펜을 손에 쥔 적이 있었을 것이다. 연수는 케이스를 다시 김미진에게 건네려 했다.
평창동 저택으로 향하는 길은 여전히 고요하고 깊었다. 높은 담장과 오래된 나무들이 이어진 언덕길을 바라보며 연수는 처음 이곳에 왔던 날을 떠올렸다. 육중한 대문 앞에서 한참이나 숨을 고르던 자신. 태성의 어머니에게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몰라 긴장했던 순간. 정갈하게 차려진 식탁 앞에서 자신의 가정환경과 부모님의 과거를 설명해야 했던 시간까지. 그때의 평창동 저택은 연수에게 쉽게 들어갈 수 없는 거대한 성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김미진이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평소처럼 정중하고 기품 있는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부드러운 온기가 담겨 있었다. “승진했다는 소식을 들었어. 직접 얼굴을 보고 축하해주고 싶구나.” 짧은 초대였지만 연수의 마음은 오래도록 흔들렸다. 자신을 확인하고 시험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만으로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 세단이 저택 앞에 멈췄다. 태성이 함께 가겠다고 했지만, 연수는 이번만큼은 혼자 들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김미진이 자신을 초대한 이유가 태성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대문이 열리고 연수가 정원을 지나 현관으로 향했다. 이전과 같은 길이었지만 발걸음은 훨씬 가벼웠다. 현관문이 열리자 따뜻한 차 향기와 함께 김미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려한 외출복 대신 부드러운 베이지색 니트와 짙은색 스커트를 입은 편안한 모습이었다. 늘 단정하게 올려 묶었던 머리도 자연스럽게 내려와 있었다. 그녀는 연수를 발견하자 먼저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렴, 연수야.” 이전까지는 언제나 ‘연
갤러리 안쪽 자료실은 바깥 전시 공간과 달리 조용하고 어두웠다. 벽면을 가득 채운 선반에는 오래된 전시 도록과 후원 기업 명단, 과거 지역 문화 행사 관련 자료들이 연도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지민은 가장 높은 선반에서 두꺼운 파일 하나를 꺼내 들었다. 표지에는 먼지가 얇게 내려앉아 있었다. “이건 내가 갤러리 맡기 전 자료 같은데.” 지민은 손바닥으로 표지의 먼지를 털어냈다. 파일 앞면에는 흐릿한 글씨로 적힌 제목이 보였다. 지역 기업 공동 문화사업 자료. “연수야, 네 새 프로젝트가 도시재생 사업이라며?” “네.” “그럼 이런 옛날 자료가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연수는 옆 선반에서 다른 전시 도록을 꺼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역의 역사를 알아야 하니까 참고는 될 것 같아요.” 지민은 바닥 가까이에 놓인 작은 테이블 위로 파일을 옮겼다. 두꺼운 서류철 안에는 십오 년에서 이십 년 전 사이에 진행됐던 전시와 공연, 장학사업 기록들이 담겨 있었다. 지민은 페이지를 한 장씩 넘겼다. 기업 대표들의 축사. 행사 포스터. 후원 금액과 참여 기업 명단.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기록들이 이어졌다. 그러다 후원사 명단을 살피던 지민의 손이 멈췄다. “연수야.” “네?” 지민은 서류 속 회사명을 다시 확인했다. 정우 산업.
지민이 운영하는 갤러리는 평소보다 한층 따뜻하고 활기찬 분위기로 가득했다. 정식 전시가 없는 휴관일이었지만, 갤러리 한쪽 벽에는 생화로 만든 작은 장식이 놓여 있었고 천장에서는 은은한 조명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잔잔한 재즈 음악과 함께 테이블 위에는 지민이 직접 고른 와인과 간단한 음식들이 정갈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오늘은 하연수의 승진과 정식 PM 임명을 축하하기 위해 지민이 마련한 작은 파티였다. 초대된 사람은 단 세 명뿐이었다. 연수의 곁을 든든하게 지켜준 진혁. 이제는 연수의 일상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온 태성.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인 연수였다. “언니, 이걸 다 준비한 거예요?” 연수는 갤러리 중앙에 놓인 꽃 장식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테이블 한쪽에는 작은 카드도 세워져 있었다. 우리 하연수 PM님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합니다. 연수는 카드에 적힌 문장을 읽다가 입가에 환한 미소를 띠었다. “우리 연수 승진 파티인데 이 정도는 해야지.” 지민은 당연하다는 듯 연수의 팔짱을 꼈다. “솔직히 더 크게 하고 싶었어. 현수막도 걸고, 사람들 불러서 연수가 얼마나 대단한지 다 자랑하고 싶었는데.” “언니, 그랬으면 저 그냥 돌아갔을 거예요.” “그러니까 참았잖아.” 지민은 억울하다는 듯 입술을 내밀었다. “내가 얼마나 절제했는지 알아줘야 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혁이 웃으며 샴페인 잔을 들어 올렸다. “지민이가 이 정도로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