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
스물일곱의 겨울은 잔인할 만큼 시렸다.
하연수는 목덜미를 파고드는 칼바람을 막으려 회색 울 코트의 깃을 턱 끝까지 바짝 끌어올렸다. 매서운 빌딩풍이 날카로운 바늘처럼 뺨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얇게 바른 립스틱 위로 겨울 공기가 닿아 입술이 감각 없이 굳어갔다. 입을 열면 금방이라도 하얀 입김과 함께 나약한 소리가 새어 나올 것만 같아 연수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오늘 그녀의 차림새는 단정하다 못해 엄숙했다. 면접을 위해 큰맘 먹고 구입했던 짙은 네이비색 정장 재킷에 구김 하나 없는 흰 블라우스. 대학 시절 내내 아르바이트를 뛰며 신어 앞코가 살짝 닳아버린 검은 구두는 오늘 아침, 구두약으로 몇 번이고 깨끗하게 닦아낸 상태였다. 품에 안은 서류 가방 안에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긴장감 속에서 수백 번도 더 확인한 입사 증빙 서류들이 들어 있었다. 대한민국의 심장이라 불리는 서울 한복판. 눈앞에는 업계 최고이자 대학생들의 드림 컴퍼니로 꼽히는 광고·기획사, ‘태성 기획’의 사옥이 거대한 얼음 성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유리 외벽은 차가운 겨울 햇살을 서슬 퍼렇게 반사하고 있었고, 회전문 너머로 언뜻 보이는 로비는 마치 다른 차원의 세계처럼 번쩍이며 사람을 압도했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어.’ 연수는 심장 언저리를 지그시 누르며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가 바람에 흩날렸다. 화려하게 꾸밀 줄 몰라 그저 깨끗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이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녀의 맑고 투명한 피부와 동양적인 이목구비를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 연수의 머릿속에는 제 외모에 대한 자각 따윈 없었다. 오직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본능만이 가득했다. 갑작스러운 집안의 몰락, 매일 밤 이어지던 어머니의 마른 한숨, 한때 당당했던 아버지의 구부정한 등 언저리. 새벽편의점 알바와 과외를 전전하며 밤새 불을 밝히던 고시원의 쪽방까지. 그 지독했던 가난의 기억들이 거대한 그림자가 되어 그녀의 등 뒤를 바짝 쫓고 있었다. 오직 독기와 책임감 하나로 최고 명문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이 악물고 버텨내 얻어낸 결실이 바로 이 문 너머에 있었다. 회문을 통과해 로비에 들어서자, 완벽하게 통제된 온기가 전신을 감싸 안았다. 대리석 바닥 위로 연수의 구두 소리가 또각또각, 이질적으로 울려 퍼졌다. 주위를 둘러보자 세련된 명품 코트를 걸치고 고가의 가방을 든 채 당당하게 걸어 다니는 사원들이 보였다. 그들의 여유로운 미소는 연수를 순간적으로 위축되게 만들었다. 자기도 모르게 낡은 가방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괜찮아, 연수야. 넌 배경이 아니라 실력으로 이 자릴 증명했어.’ 그녀는 눈을 감았다 뜨며 고개를 바짝 치켜들었다. 눈동자가 단단하게 빛났다. 태성 기획 신입 사원 하연수. 이제부터 그녀의 이름 앞에는 ‘망한 집 딸’이라거나 ‘흙수저’라는 라벨은 붙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믿었다. 아니, 그렇게 믿어야만 이 화려한 빌딩 숲에서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신을 가다듬고 안내 데스크로 향하려던 그때였다. 로비 전체가 순간적으로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사방으로 분주하게 움직이던 직원들이 일제히 걸음을 멈추고 한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로비 전용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185센티미터가 훌쩍 넘는 압도적인 피지컬. 테일러드 수트가 맞춤옷처럼 딱 떨어지는 단단하고 넓은 어깨. 조각상처럼 수려한 이목구비에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냉랭한 분위기. 태성 그룹의 젊은 구원투수이자, 상류층 라인에서 최고의 신랑감으로 꼽히는 강태성 CEO였다. 그는 주변의 시선에는 손톱만큼의 관심도 없다는 듯, 비서가 건네는 서류를 차갑게 훑어 내리며 걸어왔다. 얼음 가시를 두른 듯한 그 오만한 아우라에 연수는 숨을 멈추고 그 자리에 박박 굳어버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빠른 걸음으로 로비를 가로지르던 태성의 시선이 허공을 돌다 돌연 멈춰 섰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낡은 코트를 입고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채 서 있는 한 여자. 태성의 차가운 눈동자가 연수의 얼굴을 포착한 순간, 그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완벽하게 절제되어 있던 그의 얼굴에 균열이 일어난 것은 찰나였다. 비현실적으로 맑고 깨끗한 눈망울.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단번에 심장을 관통하는 그 익숙한 실루엣. 태성의 시선이 연수의 입술과 눈매에 박혔다. 평소 그 어떤 미녀 앞에서도 미동조차 하지 않던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너야?’ 하지만 연수는 그저 압도적인 상사의 기운에 짓눌려 고개를 숙였을 뿐이었다.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시선 속에서, 두 사람의 운명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오후 세 시.해외 투자사와의 최종 화상회의가 열리는 대회의실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회의실 정면의 대형 화면에는 투자사 대표와 주요 관계자들의 얼굴이 나타났다. 태성 기획의 임원들과 기획1팀 직원들도 굳은 표정으로 자리를 채웠다.강태성은 회의실 가장 뒤쪽에 앉아 있었다.그는 연수에게 발표를 맡기면서 단 한마디의 조언도 하지 않았다.도와줄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이 자리는 연수가 자신의 힘으로 되찾아야 할 자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태성의 시선이 단상 앞에 선 연수에게 머물렀다.연수는 단정한 회색 정장에 흰색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화려한 장식은 없었지만 곧게 편 어깨와 흔들리지 않는 눈빛만으로도 회의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며칠 전 조사실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던 여자는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지금 단상 위에 선 사람은 자신의 프로젝트와 이름을 지키기 위해 돌아온 하연수 PM이었다.“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연수의 맑은 목소리가 회의실 안에 울렸다.그녀는 진경이 밀어붙였던 수정안을 무작정 비판하지 않았다.대신 수정안과 원안을 장기 수익성, 거주 만족도, 상권 안정성의 관점에서 비교했다.“기존 수정안은 초기 분양률과 상업시설 임대 수익을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연수는 화면에 수정안의 예상 수익률을 띄웠다.“하지만 공공시설과 친환경 설비가 축소될 경우, 5년 이후 거주민 이탈률이 급격히 증가할 가능성이 있습니다.”다음 화면에는 현장조사 결과와 장기 거주율 예측치가 나타났다.“주거 인구가 감소하면 상업시설 이용률도 함께 떨어집니다. 초기 수익을 높이기 위한 선택이 장기적으로는 더 큰 손실을 만들 수 있습
기획1팀 사무실의 컴퓨터 전원이 켜졌다.익숙한 부팅음이 고요한 사무실 안에 울려 퍼졌다. 며칠 전까지는 매일 아침 아무렇지 않게 들었던 소리였지만, 오늘 연수에게는 잃어버렸던 일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신호처럼 들렸다.연수는 천천히 자신의 책상을 둘러보았다.작은 화분도, 지민이 선물해 준 머그잔도, 밤샘 작업을 할 때 사용하던 업무용 안경도 떠나던 날 그대로 놓여 있었다.누군가 매일 닦아준 듯 책상에는 먼지 하나 내려앉아 있지 않았다.키보드 옆에는 기획1팀 직원들의 이름이 적힌 하얀 봉투가 놓여 있었다.연수는 봉투를 손에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지금 그 안에 담긴 사과를 확인하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주변에 서 있던 팀원들은 누구도 쉽게 말을 걸지 못했다. 연수가 상자를 들고 떠나던 날 시선을 피했던 사람도,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믿고 그녀를 의심했던 사람도 모두 어색한 얼굴로 서 있었다.한 직원이 황급히 탕비실에서 커피를 가져왔다.“하 대리님, 커피 드세요. 평소에 드시던 걸로 준비했습니다.”다른 직원은 연수의 의자를 닦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오늘은 그냥 쉬셔도 됩니다. 업무는 저희가 정리하겠습니다.”“필요한 자료가 있으면 말씀만 해주세요. 제가 전부 가져다드릴게요.”지나칠 정도로 조심스러운 태도였다.연수를 반기는 마음보다 죄책감과 미안함이 앞서고 있었다.연수는 자신을 둘러싼 팀원들을 천천히 바라보았다.화를 낼 수도 있었다.자신을 외면했던 이유를 한 명씩 물으며, 받은 상처만큼 사과를 요구할 수도 있었다.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다시 한 팀으로 일할 수 없었다.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이진경이 빠져나간 회의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남았다. 며칠 전까지 연수를 의심했던 이사들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하나둘 시선을 내렸다. 화면에는 여전히 조작된 접속 기록과 복원된 원본 자료가 나란히 떠 있었다. 똑같은 하연수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지만, 하나는 누군가가 만든 거짓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거짓을 무너뜨린 진실이었다. 태성은 연수의 옆에 나란히 섰다. “외부 포렌식 결과와 최유나 대리의 자백을 종합한 결과, 하연수 대리가 사건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회의실 안에 단단하게 울렸다. “회사는 즉시 대기 발령과 출입 제한 조치를 해제하겠습니다.” 감사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연수를 바라보며 깊이 허리를 숙였다. “하연수 대리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부끄러움이 묻어 있었다. “불완전한 자료만으로 성급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조사 과정에서 방어권을 충분히 보장하지 못한 점도 인정합니다.” “큰 상처를 드려 죄송합니다.” 다른 이사들 역시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우리도 너무 성급했습니다.” “미안합니다, 하 대리.” 연수는 한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사과받는 순간을 상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혼자 집에 앉아 밤새 자료를 검토할 때는 자신을 의심했던 사람들이 진실을 알게 되면 어떤 얼굴을 할지 떠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그들이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자 통쾌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태성 기획 본사로 향하는 검은 세단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출근 시간의 서울 거리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연수는 무릎 위에 놓인 두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태성이 내밀었던 손의 온기가 아직 손끝에 남아 있었다. 자신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지난 며칠 동안 가슴을 짓눌렀던 고독은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회사 건물이 가까워질수록 심장은 다시 무겁게 뛰기 시작했다. 자신을 보며 수군거리던 동료들. 범죄자를 대하듯 시선을 피하던 사람들. 상자 하나를 품에 안고 쫓겨나듯 회전문을 빠져나왔던 순간. 그 모든 기억이 너무도 선명했다. 옆자리에 앉은 태성이 연수의 굳어진 손을 바라보았다. “두렵습니까?” 연수는 잠시 망설이다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요.” “돌아가지 않아도 됩니다.” 연수가 고개를 들었다. “증거는 내가 공개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직접 그 사람들 앞에 설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연수를 약하게 보는 말이 아니었다. 다시 상처받지 않아도 된다는 배려였다. 연수는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태성 기획의 거대한 사옥이 아침 햇살 아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처음 이곳에 입사하던 날, 연수는 이 건물을 바라보며 자신의 힘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지금 물러난다면, 자신은 영원히 누군가가 만든 누명
밤새 내리던 어둠이 조금씩 걷히고 있었다. 연수의 작은 집 안에는 식탁 위 스탠드 불빛만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책상과 바닥에는 사건 당일의 동선을 정리한 종이와 프로젝트 자료가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연수는 결국 식탁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었다. 한 손에는 마지막까지 놓지 못한 펜이 들려 있었고, 다른 손 아래에는 최유나의 이름이 작게 적힌 메모가 깔려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배신했을 가능성을 깨달았지만, 연수는 아직 유나를 범인이라고 단정하지 않았다. 의심만으로 사람의 인생을 판단하는 일이 얼마나 잔인한지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조용한 골목 안으로 검은 세단 한 대가 들어왔다. 차가 연수의 집 앞에 멈춰 선 뒤에도 강태성은 한동안 내리지 못했다. 차량 콘솔 위에는 은색 USB와 최유나의 자백 내용을 정리한 서류가 놓여 있었다. 최유나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연수의 노트북에 원격 접속 프로그램을 설치한 일. 가방에서 USB를 훔친 일. 연수의 계정으로 조작된 송금 기록을 만든 일. 그리고 그 모든 계획의 뒤에 이진경이 있었다는 사실까지.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은 아니었다. USB 속 자료와 진술을 외부 포렌식 기관에서 검증해야 했고, 이사회를 설득할 객관적인 증거도 더 확보해야 했다. 지금 성급하게 움직이면 진경에게 반격할 기회를 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태성은 더 이상 연수를 홀로 두고 기다릴 수 없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버림받았다고 오해한 채 홀로 진실을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아팠다.
이진경과의 통화가 끊어진 뒤에도 최유나는 한동안 휴대전화를 귀에서 떼지 못했다. 어두운 지하 주차장에는 통화 종료를 알리는 기계음만 공허하게 반복되고 있었다. 남은 일은 당신이 알아서 해결해. 진경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팀장 자리도, 승진도, 끝까지 자신을 지켜주겠다는 약속도 모두 거짓이었다. 자신은 처음부터 진경이 계획한 범죄를 대신 실행하고, 일이 잘못되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쓸 사람이었다. 유나는 힘없이 차 문에 기대었다. 조금 전 강태성이 했던 말이 다시 귓가를 울렸다. 누군가 당신에게 계속 거짓말을 하라고 요구한다면, 그 사람은 당신을 지키는 게 아닙니다. 그때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부정할 수 없었다. 태성의 말이 옳았다. 진경은 단 한 번도 자신을 동료나 사람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연수를 밀어낼 수단으로 이용했고, 이제 쓸모가 사라지자 아무렇지 않게 손을 놓았다. 유나는 손등으로 눈가를 거칠게 닦았다. 울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 때문에 울어야 했던 사람은 따로 있었다. 하연수. 그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가슴 한가운데가 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