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기획팀 사무실의 공기는 팽팽한 활시위처럼 당겨져 있었다. 프랑스 본사에서 긴급하게 날아온 ‘글로벌 럭셔리 라인 컨셉 보완’ 과제는 단순한 업무를 넘어, 9층 전체의 자존심이 걸린 시험대였다. 박 차장을 비롯한 팀원들이 며칠 밤을 새우며 매달렸지만, 본사에서 요구하는 ‘유럽 상류층의 미묘한 감성’을 건드리지 못해 번번이 퇴짜를 맞던 참이었다.
연수는 탕비실에서 커피를 내리다, 어제저녁 대표실 문밖에서 들었던 태성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내가 너를 혹독하게 대하는 이유는, 너를 가장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악역을 자처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연수 또한 그의 기대에 부응하는 방법으로 보답해야 했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붓기로 했다. 사실 연수에게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조각난 과거가 있었다. 아주 어린 시절, 부모님의 손을 잡고 다녔던 프랑스 파리의 살롱과 그곳“거짓말.” 연수는 힘겹게 말했다. 그러나 이민우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당신도 이미 알아봤잖아. 그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어린 시절부터 수없이 보았던 아버지의 서명이니까. 연수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그 말은 정확했다. 문서에 적힌 서명은 너무도 익숙했다. 아버지가 생일카드에 써주던 이름. 학교 준비물에 적어주던 글씨. 회사에서 돌아와 피곤한 얼굴로 자신이 내민 알림장에 서명하던 손끝까지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민우는 연수의 침묵을 즐기는 듯했다. —왜 아무 말도 못 하지? 연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서명만 진짜일 수도 있어.” —그래? “내용을 속이고 받은 서명일 수도 있고,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을 수도 있어.” —그렇다면 박성규가 남긴 유서도 거짓이라고 해야겠군. 태성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무슨 유서지?” —박성규가 죽기 전에 남긴 마지막 기록. 박성규의 아내는 녹음테이프와 수첩을 건넸지만 유서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성은 이민우가 진실을 말하는지 판단할 수 없었다. “정말 그런 게 있다면 공개해.” —때가 되면. “존재하지 않으니까 보여주지 못하는 거겠지.” 태성의 도발에도 이민우는 흔들리지 않았다.
지하 공간은 예상보다 훨씬 넓었다. 낡은 철제 선반과 부서진 나무 상자가 어둠 속에 줄지어 놓여 있었고, 바닥에는 오래된 서류철이 널브러져 있었다. 대부분은 습기에 젖어 종이가 서로 붙어 있었고, 글씨도 알아보기 어려웠다. 진혁은 손전등으로 벽에 붙은 번호표를 비췄다. M-12. M-13. M-14. 번호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공기는 더욱 차갑고 무거워졌다. 태성은 연수보다 반걸음 앞에 서서 주변을 살폈다. 누군가 튀어나오면 가장 먼저 자신이 막겠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연수는 그런 그의 등을 바라보다 조용히 손을 뻗어 옷자락을 붙잡았다. 태성이 곧바로 돌아봤다. “왜?” “그냥요.” “무서워?” 연수는 잠시 망설이다 작게 대답했다. “오빠가 너무 앞서 가서요.” 태성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그는 다시 그녀 곁으로 돌아와 손을 내밀었다. “말했잖아. 떨어지지 않겠다고.” 연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오빠가 저보다 먼저 위험한 걸 발견하려고 자꾸 앞에 서잖아요.” “그게 낫지.” “저는 안 나아요.” “연수야.” “오빠가 다치는 것도 저한테는 똑같이 아픈 일이에요.” 태성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연수는 그의 손등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진혁에게서 CK 물류에 관한 보고가 도착한 것은 새벽 두 시가 넘어서였다. 박성규가 남긴 수첩 속 메모. M-17 / CK 물류 / 지하 보관실. 그 짧은 문장을 시작으로 진혁은 폐업 법인의 기록과 토지대장, 건물 소유권 변경 내역을 밤새 추적했다. CK 물류는 서류상으로 십 년 전에 폐업한 회사였다. 하지만 도심 외곽에 자리한 물류 터미널은 철거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현재 소유자는 이창석이나 이민우와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작은 투자 법인이었다. 문제는 그 투자 법인의 대표가 실체를 확인하기 어려운 인물이라는 점이었다. 대표자는 오랫동안 해외에 체류 중이었고, 국내에서 회사를 운영한 기록도 없었다. 그럼에도 세금과 건물 관리비, 화재보험료는 단 한 번도 연체되지 않았다. 누군가 건물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사라지지 않게 관리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진혁이 마지막으로 찾아낸 기록은 더욱 수상했다. 정우 산업이 파산한 직후, 수십 개의 문서 상자가 CK 물류로 옮겨졌다는 운송 기록이었다. 운송 지시자의 이름은 지워져 있었지만 도착지는 분명했다. 지하 보관실 M-17. 그리고 그날 이후 그 공간이 다시 열렸다는 공식 기록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태성은 진혁이 보내온 자료를 몇 번이고 살펴봤다. 모든 단서가 지나치게 완벽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더욱 의심스러웠다. 마치 누군가 자신들이 그곳까지 찾아오기를 기다리며 길을 닦아놓은 것 같았다. 태성은 옆에서 자료를 읽고 있던
“또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니겠죠?” 박성규의 아내가 불안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연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사모님과 가족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겠습니다.” 태성도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 저희가 찾아온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조치하겠습니다.” “필요하시면 안전한 거처도 마련해드리겠습니다.” 여자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오랜 시간 누구도 믿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성은 카세트테이프와 수첩을 증거물 보관 봉투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원본은 최대한 훼손되지 않도록 전문 기관에 복원과 감정을 맡기겠습니다.” “복사본을 먼저 만들고, 원본은 사모님 동의 없이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여자는 박성규의 사진을 한 번 바라본 뒤 말했다. “가져가요.” “그 사람도 이걸 숨기기만 하려고 남긴 건 아닐 테니까.” 연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깊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진실만 밝히는 게 아니라 박 상무님의 진실도 함께 밝힐게요.” 박성규의 아내는 씁쓸하게 웃었다. “우리 남편이 잘못이 없었다고 말하지는 마요.” 연수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사람도 돈을 받았고, 다른 사람의 회사를 망가뜨리는 일에 가담했어요.” 여자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겁을 먹었다
[박성규: 이건 너무 위험합니다.] 지지직거리는 잡음 사이로 들려온 목소리에 거실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박성규의 아내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카세트플레이어를 바라봤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남편의 목소리를 단번에 알아본 듯했다. 잠시 후 다른 남자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창석: 무엇이 그렇게 위험하다는 거지?] 연수의 눈빛이 흔들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이민우의 아버지, 이창석 회장이었다. [박성규: 정우 산업의 기술을 그렇게 넘기면 강 회장님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이창석: 강 회장은 늙었어.] 잠시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창석: 사람을 믿는 버릇도 여전하고.] [박성규: 그래도 이건 강 회장님이 승인한 일이 아닙니다.] [이창석: 승인한 것처럼 만들면 되지.] 연수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태성은 탁자 아래에서 그녀의 손을 더욱 단단히 잡았다. [이창석: 정우 산업의 기술을 별도 법인으로 넘겨.] [이창석: 개발권까지 우리가 가져오면 강 회장은 나중에 보고만 받으면 돼.] [박성규: 하정우 사장이 계속 면담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연수의 숨이 멎는 듯했다. [이창석: 막아.] 낮고 태연한 한마디였다. 그러나 그 짧은 명령 하나가 하정우의 마지막 희망을 완전히 끊어놓았다. [박성규: 그 사람이 직접 강 회장님을
태성과 연수는 조심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은 오래되고 좁았다. 가구는 낡았지만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벽 한쪽에는 젊은 시절 박성규와 아내가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사진 속 박성규는 지금까지 서류에서 보았던 딱딱한 얼굴과 달리 밝게 웃고 있었다. 여자는 두 사람을 낮은 탁자 앞에 앉혔다. 그리고 한동안 안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연수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움켜쥐었다. 태성이 탁자 아래에서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따뜻한 체온이 전해졌다. 연수는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잠시 후 박성규의 아내가 오래된 철제 상자 하나를 들고 나왔다. 상자는 녹이 슬어 있었고 작은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여자는 목에 걸고 있던 열쇠로 자물쇠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낡은 수첩과 사진 몇 장, 오래된 카세트테이프 하나가 들어 있었다. 테이프의 라벨에는 날짜가 적혀 있었다. 2006년 4월 17일. 정우 산업이 부도 처리되기 약 한 달 전이었다. 연수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게…….” “남편이 감옥에 가기 전에 맡긴 거예요.” 박성규의 아내가 말했다. “언젠가 자신이 죽고 난 뒤 누군가 이걸 찾으러 올 거라고 했어요.” 그녀의 시선이 태성에게 향했다. “강 회장이 아니라 그 아들이 올 거라고 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