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평창동 저택을 다녀온 지 사흘이 흘렀다.
연수는 몇 번이나 태성에게 그날 일을 이야기하려다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대표님께 말씀드리면… 오히려 더 걱정하시겠지.'회사에서의 태성은 다시 예전처럼 차가웠다.회의에서는 한 치의 사적인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고, 연수에게도 필요한 업무 외에는 말을 걸지 않았다.하지만 연수는 알고 있었다.그 차가움은 자신을 밀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애써 감정을 감추려는 태성의 방식이라는 것을.금요일 오후.휴대전화가 조용히 울렸다.발신인은 김미진 여사의 비서였다."하연수 씨.""사모님께서 이번 주말에도 시간이 괜찮으신지 여쭤보십니다."연수는 잠시 숨을 멈췄다."...제가 또 찾아뵈어도 될까요?""사모님께서 직접 오셨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짧은 통화였지만,연수는 이것이 단순한 초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했다.<“강태성 대표님! 폐쇄된 물류 창고에 불법 침입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연수 씨! 하정우 대표가 불법 자금 이동에 가담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강태성 대표가 증거를 없애려고 건물에 불을 질렀다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정우 산업의 기밀 자료를 훔치려 했다는 의혹을 인정하십니까?”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질문이 쏟아졌다. 연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걸음을 멈췄다. 태성은 피가 흐르는 어깨를 감춘 채 즉시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물러서.” 그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화재는 계획된 범죄야. 우리는 안에서 죽을 뻔했어.” 그러나 기자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태성의 상처와 연수의 그을린 얼굴을 더욱 가까이 촬영했다. “계획된 범죄라고 주장하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누가 불을 질렀습니까?” “건물 안에서 가져온 자료를 공개할 수 있습니까?” 태성은 연수를 자신의 등 뒤로 감쌌다. “연수야, 아무 말도 하지 마.” “하지만 오빠…….” “지금 네가 하는 말은 전부 편집돼서 이용될 거야.” 그때 경찰들이 기자들 사이를 가르며 다가왔다. 선두에 선 형사가 서류를 내밀었다. “강태성 씨 맞습니까?” 태성은 연수를 등 뒤에 둔 채 형사를 바라봤다. “그렇습니다.” “CK 물류 소유 법인으로부터 불법 침입 및 기밀문서 절취
하정우는 중요한 서류를 구분할 때 문서 모서리에 작은 점 두 개와 선 하나를 남기곤 했다. 남들은 의미 없는 낙서라고 생각했지만 연수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만의 표시였다. “잠깐만요.” 연수가 태성의 팔을 조심스럽게 벽에 기대게 했다. “연수야, 어디 가?” “아빠 표시가 있어요.” 연수는 연기가 자욱한 바닥을 기어 서류 상자 쪽으로 다가갔다. “위험해! 돌아와!” 태성이 따라가려 했지만 상처 때문에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연수는 불길이 번지기 직전 상자 안에서 얇은 서류철 하나를 꺼냈다. 서류철 겉면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오른쪽 아래에 아버지의 표시가 있었다. 연수는 떨리는 손으로 서류철을 펼쳤다. 대부분 비어 있는 종이들이었다. 그 가운데 한 장의 뒷면에 작고 흐릿한 글씨가 남아 있었다. 연수는 소매로 먼지를 닦아냈다. 그리고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숨을 멈췄다. 서명하지 않은 장부를 믿지 마라. 숫자는 M-17에서 다시 시작된다. 아버지의 필체였다. 연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잉크가 흐려졌지만 글자의 기울기와 마지막 획을 올리는 습관은 분명 하정우의 것이었다. 연수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떨어졌다. “아빠…….” 태성이 힘겹게 그녀에게 다가왔다.
“우리는 같이 들어가고.” 연수가 태성의 말을 이었다. “같이 나가요.”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단단히 잡은 채 비밀 통로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진혁이 휴대전화의 불빛으로 앞을 비추며 먼저 좁은 통로를 살폈다. 벽과 천장은 모두 녹슨 철판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오래된 먼지 위에는 누군가 최근에 오간 듯한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태성은 한 손으로 연수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 벽을 짚으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통로 안으로 들어갈수록 공기는 더욱 답답해졌다. 오래된 기름과 금속이 뒤섞인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진혁이 앞쪽을 살피며 낮게 말했다. “통로 끝에 공간이 하나 더 있어.” “사람이 있는 것 같아?” “아직은 모르겠어.” 진혁이 바닥의 발자국을 비췄다. 안쪽으로 들어간 흔적뿐 아니라 밖으로 나온 흔적도 여러 개 뒤섞여 있었다. 누군가 이 장소를 최근까지 드나들었다는 뜻이었다. 연수는 태성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잡았다. 태성이 곧바로 그녀를 돌아봤다. “괜찮아?” “네.” 연수는 짧게 대답했지만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묻어났다. 태성은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무슨 일이 생겨도 내 뒤에 있어.” “오빠도 혼자 앞에 나가지 마요.” “연수야.” “약속했잖아요.” 연수는 그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말했다.
연수는 한동안 화면이 꺼진 휴대전화를 바라봤다. 강한 척했지만 손끝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태성은 휴대전화를 진혁에게 건넨 뒤 연수 앞에 섰다. “연수야.” 연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태성은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나 봐.” 연수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렀다. “오빠.” “응.” “저 사실 무서워요.” “알아.” “혹시 아빠가 정말 잘못한 거면요?” 태성의 표정이 아프게 흔들렸다. 연수는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 “제가 믿었던 아빠가 제가 알던 사람이 아니면 어떡해요?” 태성은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댔다. “그래도 네가 사랑받았던 기억까지 거짓이 되는 건 아니야.” “…….” “사람은 잘못할 수 있어.” 그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하지만 진실을 안다고 해서 네가 아버지를 사랑했던 시간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야.” 연수는 눈을 감았다. 태성의 숨결과 체온이 가까이 느껴졌다. “그리고 어떤 진실이 나와도.” “네.” “그 진실이 널 아프게 하면 나도 같이 아플게.” 연수가 눈을 떴다. “왜 그런 말까지 해요.” “네 아픔을 대신 가져갈 수는 없으니까.”
“거짓말.” 연수는 힘겹게 말했다. 그러나 이민우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당신도 이미 알아봤잖아. 그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어린 시절부터 수없이 보았던 아버지의 서명이니까. 연수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그 말은 정확했다. 문서에 적힌 서명은 너무도 익숙했다. 아버지가 생일카드에 써주던 이름. 학교 준비물에 적어주던 글씨. 회사에서 돌아와 피곤한 얼굴로 자신이 내민 알림장에 서명하던 손끝까지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민우는 연수의 침묵을 즐기는 듯했다. —왜 아무 말도 못 하지? 연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서명만 진짜일 수도 있어.” —그래? “내용을 속이고 받은 서명일 수도 있고,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을 수도 있어.” —그렇다면 박성규가 남긴 유서도 거짓이라고 해야겠군. 태성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무슨 유서지?” —박성규가 죽기 전에 남긴 마지막 기록. 박성규의 아내는 녹음테이프와 수첩을 건넸지만 유서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성은 이민우가 진실을 말하는지 판단할 수 없었다. “정말 그런 게 있다면 공개해.” —때가 되면. “존재하지 않으니까 보여주지 못하는 거겠지.” 태성의 도발에도 이민우는 흔들리지 않았다.
지하 공간은 예상보다 훨씬 넓었다. 낡은 철제 선반과 부서진 나무 상자가 어둠 속에 줄지어 놓여 있었고, 바닥에는 오래된 서류철이 널브러져 있었다. 대부분은 습기에 젖어 종이가 서로 붙어 있었고, 글씨도 알아보기 어려웠다. 진혁은 손전등으로 벽에 붙은 번호표를 비췄다. M-12. M-13. M-14. 번호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공기는 더욱 차갑고 무거워졌다. 태성은 연수보다 반걸음 앞에 서서 주변을 살폈다. 누군가 튀어나오면 가장 먼저 자신이 막겠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연수는 그런 그의 등을 바라보다 조용히 손을 뻗어 옷자락을 붙잡았다. 태성이 곧바로 돌아봤다. “왜?” “그냥요.” “무서워?” 연수는 잠시 망설이다 작게 대답했다. “오빠가 너무 앞서 가서요.” 태성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그는 다시 그녀 곁으로 돌아와 손을 내밀었다. “말했잖아. 떨어지지 않겠다고.” 연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오빠가 저보다 먼저 위험한 걸 발견하려고 자꾸 앞에 서잖아요.” “그게 낫지.” “저는 안 나아요.” “연수야.” “오빠가 다치는 것도 저한테는 똑같이 아픈 일이에요.” 태성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연수는 그의 손등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