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날밤, 상사의 아이를 임신했다: Chapter 1601 - Chapter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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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01화

병원에서 나와 차에 앉은 나태현은 아픈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운전석에 앉은 양지호에게 말했다.“량천옥 씨랑 우리 아버지 사이에 있었던 일을 좀 알아봐.”운전하던 양지호가 말에 잠시 멈칫했다. 그는 백미러로 나태현을 흘끗 바라보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대표님이 조사해달라는 건 확실한 진실을 알고 싶다는 던데...’나태범의 태도를 본 나태현은 확신했다. 그때 일은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 완전히 다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고은지가 손을 씻고 나오자 량천옥은 이미 식탁에 앉아 있었다.고은지는 그녀 맞은편에 앉아 가득 차려진 밥상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거 안 해도 돼요.”국을 떠주던 량천옥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리고 고은지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깊은 슬픔을 담은 눈빛으로 말했다.“아직도 날 원망하는 거야?”희주에 대한 이야기였다. 고은지는 시선을 떨어뜨리며 대꾸하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나태현과 고은지 사이의 원한처럼 보였지만 사실 고은지와 량천옥 사이에 박힌 가시이기도 했다.당시 그녀가 희주를 데려가지 않았다면 희주는 식물인간이 되지도 않았을 테니 말이다. 량천옥이 아무리 보상하려 해도 그녀의 상처는 메울 수 없었다.그리고 량천옥도 그걸 알고 있기에 고은지가 이 일로 자신을 용서해 주길 바라지도 않았다.“나를 용서하지 않을 걸 알아. 하지만 나를 내쫓지는 말아 줘.”고은지가 자신을 용서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량천옥은 단지 고은지 곁에 머무르고 싶을 뿐이었다.“왜 굳이 여기서 저랑 고생하려고 해요? 전 여기서 떠날 생각 없어요.”이곳은 고은지와 희주가 함께 살던 곳이었다. 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장소였다.“네가 있는 곳이면 나도 어디든 괜찮아.”그 말에 젓가락을 쥔 고은지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이런 게 바로 어머니가 아이에게 느끼는 마음인 걸까? 나도 전에는 희주가 있는 곳이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지치지 않았었는데...’고은지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저랑 태현 씨 사이 일은 이제 시작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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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02화

방 안에서 무슨 통화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희미하게 들리는 량천옥의 목소리엔 분노가 섞여 있었다.십여 분 뒤, 량천옥은 방에서 나왔다. 이미 감정을 다 추스른 상태였다.고은지는 그녀를 한번 바라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량천옥이 고은지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은지야...”“네.”고은지의 대답은 건조하고 담담했다.량천옥이 물었다.“혹시 신경 쓰이니?”“뭐가요?”고은지는 무슨 말인지 몰라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량천옥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나 어쩌면 정말 형편없는 사람일지도 몰라. 넌 내 딸이잖아...”‘무엇을 말하려는 거지?’이쯤 되자 량천옥의 목소리는 숨이 막힌 듯 멈춰 버렸고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고은지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엔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모든 걸 포기한 사람의 눈처럼 너무나도 차분하고 담담했다.그런 그녀의 눈을 마주한 순간, 량천옥의 마음은 덜컥 무너져 내렸다.낮에 나태현을 마주했을 때는 그렇게도 담담하고 냉정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눈앞에 있는 딸을 마주하자 전혀 다른 감정이 밀려들었다.‘그래... 내가 왜 잊고 있었을까. 은지는 내 딸이었지...’량천옥은 자신이 어떤 오명을 뒤집어쓰든, 세상이 그녀를 뭐라고 욕하든 상관없었다. 나태범과 끝장을 보게 되더라도 개의치 않았다.하지만 고은지는 달랐다. 고은지는 그녀가 그토록 아끼는 딸이었다. 만약 과거 나씨 가문과 그녀 사이의 일들이 세상에 드러난다면 가장 큰 상처를 받는 건 고은지였다.순간, 량천옥은 처음으로 고은지와 다시 만나고 정체를 밝힌 것을 후회했다.고은지가 그녀의 딸이라는 걸 강성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데 이제 와서 과거의 추악한 진실이 드러난다면 그 모든 더러운 오명은 고은지에게도 영향을 끼칠 것이다.“네가 하고 있는 일 잠깐 멈추고 외국으로 가면 안 되겠니? 내가 보내줄게.”한참을 뜸 들인 뒤, 량천옥은 마치 간신히 숨을 토해내듯 말했다.자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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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03화

고은지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량천옥의 마음도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고은지를 외국으로 보내겠다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량천옥은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고은지와 나태현 사이의 일이 끝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이다. 그러자 그녀는 오히려 두 사람의 사이가 이렇게 끝나지 않기를 바라게 되었다.만약 모든 게 끝나버린다면 지금까지 고은지를 버티게 해준 마지막 기둥이 무너질지도 모르니까 말이다.희주는 그녀의 목숨과도 같았다. 지금의 고은지는 희주를 위해서 버티고 있는 것이다. 복수가 끝나버린다면 고은지도 함께 무너질지도 모른다.이런 생각이 들자 량천옥의 가슴은 더욱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다음 날 아침, 고은지는 평소처럼 천락 그룹으로 출근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마치 모든 걸 다 정리한 사람처럼 냉정하고 차분했다.고은지가 출근하고 나서야 량천옥은 오랜만에 본가의 저택으로 돌아왔다.병원에서 나태범과 만난 후로 그곳에 발을 들인 건 처음이었다.량의는 그녀를 보고 숨을 길게 들이쉬며 물었다.“왜 이제 와서 돌아왔어?”량천옥은 맥없이 대답했다.“지금... 마음이 너무 복잡해서요.”“무슨 일이야? 설마 나씨 가문 쪽 일이야?”량의가 보기에 량천옥이 신경 쓸 일이라고는 딱 하나, 나씨 집안과의 분쟁뿐이었다. 게다가 나태현과 대립 중인 상황이었기에 과거의 일이 세상에 까발려지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다.그러나 량의의 물음에 량천옥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나씨 가문 때문이 아니라 은지 때문에 그래요.”그녀가 진짜로 신경 쓰는 건 더 이상 나씨 집안이 아니었다. 그 일이 어떻게 되든 그녀에겐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조심스러웠던 건 그 일이 고은지에게 영향을 끼칠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녀 자신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량의는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은지가 왜?”량천옥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금 은지가 나태현을 향해 복수를 준비하고 있어요.”“은지가 그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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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04화

량천옥은 갑작스레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공포감에 휩싸였다.그녀는 더 이상 고은지와 나태현의 관계가 그렇게 쉽게 끝나버리는 걸 원치 않게 되었다.고은지의 생각을 어렴풋이 짐작하자 량천옥의 마음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고은지는 늘 그랬듯, 아무 일 없다는 듯 천락 그룹으로 출근했다.엘리베이터 앞에 막 도착하자 지하 주차장에서 올라온 지신혜가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었다.눈이 마주치자 지신혜는 고은지를 보며 비웃듯 코웃음을 쳤지만 더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번에 있었던 사무실에서의 사건 이후로 또 한 번 된통 당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고은지에게 함부로 말을 걸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고은지의 편을 들어주는 량천옥이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고은지는 무표정한 얼굴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엘리베이터는 조용히 위로 올라갔다.그러자 참다못한 지신혜가 먼저 입을 열었다.“대체 어떻게 해야 여길 떠나실 건가요?”그녀는 고은지더러 천락 그룹을 나태현을 떠나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고은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 말이 들리지 않는 듯 무표정으로 앞만 보고 있었다.그러자 지신혜는 오히려 분노가 차올랐고 숨결이 점점 거칠어졌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고은지가 먼저 발걸음을 내디뎠고 지신혜는 그녀의 등을 노려보다가 이를 악물며 따라갔다. 그녀가 나태현이 있는 층으로 향하는 걸 본 순간 지신혜는 더욱 화가 나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고은지가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는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문자 내용을 확인한 그녀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커피 좀 줘요.”지신혜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드립커피로요.”그리고는 냉정하게 덧붙였다.고은지는 그녀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은 채, 휴대폰을 들고 비상계단 쪽으로 걸어갔다.지신혜는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고은지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그리고는 고은지의 뒤를 뒤쫓았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사무실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비상계단에 다다랐을 때, 고은지가 발걸음을 멈췄다.그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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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05화

고은지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그 속엔 싸늘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 지신혜는 그 기세에 절로 몸을 움찔했다.고은지 따위한테 왜 이렇게까지 압도당해야 하나 싶었지만 고은지의 눈빛 앞에선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끝내 참지 못한 지신혜가 발끈하며 뒤돌아섰다.비상구 문이 열리던 그 순간, 길게 뻗은 실루엣의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냉철한 기운을 품은 채 서 있는 나태현이었다. 그 모습에 지신혜는 또다시 숨을 삼켰다.“태현 씨?”고은지는 그를 보는 순간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나태현 역시 고은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얼음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경고가 담겨 있었다.그의 시선이 계속 고은지를 향하자 지신혜는 속이 뒤틀렸다. 질투와 분노가 섞인 그녀는 나태현의 팔에 매달리듯 다가갔다.“오래 기다렸어요. 드릴 말씀 있으니까 같이 갈까요?”나태현은 아래로 시선을 내려 그녀가 자신의 팔을 감싼 손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말했다.“그래, 가자.”말을 마친 나태현은 다시 한번 고은지를 쳐다봤는데 그 눈엔 분명한 경계가 서려 있었다.고은지는 눈을 감았다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나태현이 언제부터 밖에 있었는지도, 무엇을 들었는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려 했다. 하지만 통화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양지호가 나타났다.“잠시 시간 괜찮으신가요? 저랑 같이 가주시죠.”고은지는 말없이 핸드폰을 내려놓고 그를 따라갔다. 양지호는 그녀를 자신의 사무실로 이끌었고 문을 닫자마자 책상 위에 서류봉투 하나를 ‘쿵’ 소리 나게 내던졌다.“직접 나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제가 이걸 나 대표님께 전달해 드릴까요?”고은지는 잠시 봉투를 내려다봤다. 그 안에 무엇이 들었을지 짐작은 갔다. 그녀는 눈을 들어 무표정하게 대답했다.“맡기세요. 상관없습니다.”양지호는 말문이 막혔다. 이 상황에서조차 태연한 태도라니, 예상 밖이었다.“다른 일 없으시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그녀는 돌아서며 말했고 양지호는 조급하게 그녀를 불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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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06화

‘정말 죽는 것도 두렵지 않은 건가? 나태현의 성격이 어떤지도 알고 있을 거고 지금 본인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도 뻔히 알 텐데... 됐어, 생각하지 말자.’증거는 다 넘겼으니 이걸 어떻게 처리할지는 그의 몫이었다.그 시각, 고은지는 나태현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안에서 남자의 낮고 냉정한 목소리가 들렸다.“들어와.”고은지가 문을 밀고 들어섰다. 그러자 강한 담배 냄새가 훅 몰려왔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이마를 찌푸리고는 말없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문을 여는 순간부터 나태현의 날카로운 눈빛이 그녀의 얼굴을 꿰뚫듯 쏘아보고 있었다.고은지는 덤덤하게 문을 닫고 그의 맞은편에 서서 한마디 말도 없이 그를 바라봤다.나태현은 방금 양지호가 가져다준 서류봉투를 그녀 앞에 내던졌다.“이거 좀 봐.”고은지가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가만히 서 있자 그가 다시 말했다.“보라고 했다.”다섯 글자였지만 그 안엔 분노를 억누르는 기색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하지만 고은지는 어떤 말을 해도 무표정으로 받아치며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무엇 하나 신경 쓰지 않는다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듯한 태도로 말이다.결국, 나태현의 거의 강압적인 어조에 고은지는 손을 뻗어 서류봉투를 집어 들었다.그녀가 봉투를 열고 안의 서류를 꺼내자 그 안엔 그녀와 육명호 사이의 관계에 대한 조사 내용이 담겨 있었다. 두 사람이 언제 처음 만났는지, 그동안 몇 번이나 접촉했는지 적혀 있는 서류였다.놀라운 건, 양지호의 정보력이었다. 고은지가 육명호와 연락한 후, 천락 그룹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까지 세세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분명 고은지와 연관이 있다는 식의 기록이었다.나태현은 손에 쥔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며 물었다.“할 말 있어?”고은지는 차갑게 대답했다.“없어요.”그 두 글자는 이미 숨 막히던 사무실 분위기를 더 싸늘하게 얼어붙게 만들었다.나태현은 날카롭게 그녀를 노려보며 다시 물었다.“다 네가 한 짓이라는 거야?”이렇게 묻고 잇었지만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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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07화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대치했다. 사무실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나태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증거를 원한다고?”고은지는 단호하게 답했다.“증거가 없으면 전 인정 못 해요.”“증거가 있었다면 여기서 나랑 대화하는 일은 없었을 거야.”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서늘했다.고은지는 알고 있었다. 증거를 찾아내면 나태현은 그녀를 감옥에 보낼 것이었다.‘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한가? 그때면 천락그룹은 이미 망했을 건데...’고은지는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의식을 잃었던 동안 하느님이 뭐라고 하시던가요?”그 웃음은 악마의 웃음과 다름없었다.나태현은 담배를 꽉 쥐었다. 그가 의식을 잃었던 동안 많은 일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하지만 지금 량천옥과 아버지의 과거 때문에 의심이 깊어진 그는 고은지와의 갈등을 더 키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와 육명호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나태현은 머릿속에서 피어오르는 안 좋은 생각을 억누르며 차갑게 말했다.“앞으로 육명호와는 일절 연락하지 마.”고은지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반응이 예상과 달랐기 때문이었다.“그리고 지금 당장 회사에서 나가.”“대표님 아버지께서 허락하시던가요?”“돈은 줄 테니까 알아서 해.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고은지의 말은 나태현에게 들리지 않는 듯했다. 어쨌든 지금은 그녀가 회사에 남아있으면 안 됐다.고은지는 침착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가라니까.”그는 단호하게 말했다.분명 어떤 이유를 대도 그는 고은지를 회사에 두지 않을 것이었다. 그의 태도를 본 고은지는 끝까지 버텨도 그가 결코 물러서지 않을 걸 알았기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사무실을 나섰다.나태현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 한구석이 차갑게 식었다.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사무실은 다시 조용해졌다.그러나 그의 머릿속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지금 벌어진 일들은 그에게 너무 혼란스러웠고 그동안 확신했던 것들도 흔들리고 있었다. 모든 게 변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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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08화

“네.”양지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사무실을 나섰다.문을 나서는 순간, 그는 이미 짐을 정리한 채 회사를 떠나는 고은지를 보았다. 곧은 등과 고개를 높이 든 그녀는 거침없이 당당했다.그 모습을 본 양지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양지호가 본 고은지는 소문으로 들었던 것과는 너무도 달랐다.고은지는 부드러움 속에 강단이 있는 비서라고 그는 예전부터 전해 들었었다. 하지만 지금 본 그녀는 너무나도 냉정했고 그것도 보통의 차가움이 아니었다....고은지가 천락 그룹을 나서자마자 고은영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예전과 달리 그녀의 목소리는 가볍지 않았다.“언니, 지금 당장 시간 좀 내줘. 내가 찾아갈게.”고은지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무슨 일이야?”그녀의 말투에서 이상함이 감지됐던 것이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는 듯했다.고은영은 단호하게 말했다.“얼굴 보고 말할게.”“그럼, 천락 그룹 앞 카페에서 보자.”“그래. 나 20분이면 도착해.”전화를 끊고 나서도 고은지의 미간은 펴지지 않았다.차들이 쉴 새 없이 오가는 도로를 바라보며 그녀는 조용히 중얼거렸다.‘이 시점에 나를 부르다니... 설마 조보은 때문에 그러나? 아닐 거야. 그 여자 문제라면 은영이가 이 정도로 무거운 분위기를 낼 리 없지.’고은지는 곧바로 짐을 들고 약속한 카페로 향했다.20분 뒤, 고은영이 숨을 몰아쉬며 도착했다.테이블 옆에 놓인 박스를 본 그녀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이건 뭐야?”“일 그만뒀어.”고은영은 충격을 감추지 못했지만 고은지는 그저 담담했다.‘그토록 단호하게 복직을 주장하던 그녀가 이렇게 조용히 물러나다니...’“진짜 그만둔 거야?”“응. 할 만큼 했어.”할 만큼 했다는 말에 고은영은 말을 잇지 못했다.‘그럼 나태현 씨는?’고은지가 천락그룹에 복직한 이유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녀가 어떤 걸 각오하고 그 자리에 돌아갔는지 알 것이다.그리고 지금,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할 만큼 했다는 건 그만큼 나태현의 인내심을 건드리는 일들이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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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09화

량천옥과 나태현이 강성으로 돌아온 이후, 고은지는 단 한 번도 해외에서 있었던 일들을 묻지 않았다. 감히 들춰볼 수 없었던 것이다. 희주의 일이라면 단 하나의 소식조차도 그녀에겐 치명적이었기 때문이었다.화장터라는 말은 입에 올려본 적도 없었다. 죽었다는 사실을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버거웠으니까 말이다.하지만 지금, 고은영이 ‘화장터’ 얘기를 꺼냈으니 결국 희주가 세상을 떠난 그 순간의 진실을 건드린 셈이었다. 고은지가 그토록 외면해 왔던 바로 그 진실을 말이다.“나태현 씨가 마지막에 화장터에서 받아온 유골 말이야. 그거 희주 거 아니었어.”“뭐?”‘희주 유골이 아니라니? 그럼 누구 유골인데? 어떻게 된 거지?’고은지는 그대로 얼어붙어서 고은영을 바라봤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지만 그녀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정보가 뒤엉켜 미친 듯이 얽히고 있었다.오랜 침묵 끝에 고은지는 가까스로 숨을 쉬며 물었다.“네 말은... 희주가 화장터에 가지 않았다는 거야?”“응.”숨이 멎을 듯 조여왔다.“그럼 희주는? 지금 어디 있는 건데?”‘화장터로 간 게 아니었다면 나태현이 받아온 유골은 대체 누구의 것이고 희주는 지금 어디에 있다는 거지? 설마... 살아 있는 거야? 희주가 아직 살아 있다면 누가 데려간 거지? 무슨 목적으로?’모든 게 뒤엉켜 버렸다. 고은지의 머릿속은 이제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그 와중에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나태현의 반응이 자꾸만 떠올랐다. 희주가 죽었든 살았든, 그는 언제나 무덤덤했다.‘혹시 정말 나태현이?’“지금은 어딨는진 몰라.”고은영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그럼 나태현이 한 짓일 수도 있잖아.”그녀는 이미 마음속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량천옥과 나태범 사이의 과거 일들 때문에 그녀와 아이 모두를 부정하고 싶어 했던 그였으니 말이다.하지만 고은영은 단호했다.“아니야.”“정말?”‘그럼 누가...’고은지는 차라리 그게 나태현의 짓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랬다면 희주는 아직 살아 있을 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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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10화

만약 정말로 나태현의 계략이라면 고은지는 다시는 아이를 볼 수 없을 것이었다.하지만 그와 연관이 없다면 지금이야말로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가 아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게 하는 게 나았으니 말이다.어차피 그와 고은지 사이는 넘을 수 없는 벽이나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사이에 감정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으니까.고은영의 말을 들은 고은지가 물었다.“희주가 아직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거야?”고은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쉽게 단정 지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이 소식은 예상치 못한 경로로 들은 거고 희주가 정말 살아 있는지는 아직 아무도 몰라.”고은영은 고은지에게 헛된 기대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만큼 이 일은 너무도 복잡했다. 해외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으니 말이다.“량천옥한테 한 번 물어봐 보는 게 좋을지도 몰라.”나태현에게는 절대 티를 내선 안 된다. 하지만 량천옥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분명 더 철저히 숨길 것이다. 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았다.“알겠어.”고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녀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을 확인한 그녀는 전화를 받지도, 끊지도 않았다. 그리고는 고은영에게 조용히 말했다.“준우 씨한테 잘 부탁한다고 전해줘.”“응. 걱정하지 마.”고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바쁘면 먼저 가도 돼.”고은영은 고은지와 나태현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이제 와서 나태현이 어떤 꼴을 당하든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다.량천옥이 없었더라면 고은지가 다칠까 봐 걱정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도 없었다.“응, 나 좀 처리할 게 있어서 먼저 갈게.”“그래.”고은지는 박스를 들고 일어나더니 자리를 떴다. 홀로 남겨진 고은영은 자리에 앉아 곧장 배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은지 씨 만났어?”“금방 만났어요. 조사할 때 절대 나태현 씨한테 들키면 안 돼요. 알겠죠?”지금은 모든 게 불확실했지만 만약 희주가 정말 살아 있다고 해도 고은영은 고은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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