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차가운 대표님과의 치명적인 밤들: Chapter 681 - Chapter 690

769 Chapters

제681화

“양세운이죠?”강현우가 낮게 묻자, 한선아의 표정이 굳어졌다.양세운은 그녀가 오랫동안 곁에 두고 온 사람이자, 손에 피 묻히는 일 대부분을 맡아온 인물이었다.강현우는 잠시 그녀의 눈치를 살피더니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윤하경을 찾기 전까진, 저 둘은 제가 데리고 있겠습니다.”“현우야, 잠깐만.”한선아가 급히 손을 뻗었다.“그건 나도 몰랐어. 차 사고 말이야, 그건 정말 내 계획이 아니야. 전부... 우연이었어.”하지만 강현우는 더 듣고 싶지 않았고 단호하게 고개를 젓고는 그대로 문을 나섰다.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거의 끊긴 듯한 이 집사가 사람들 손에 이끌려 집 밖으로 끌려 나갔다.한선아는 아무리 막아보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린 그녀는 잠시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왜 이렇게까지 된 걸까...’한편, 병원에 있던 신인아는 상황이 달랐다. 호영이 무사히 돌아오자, 처음에는 실패한 줄 알고 크게 화를 냈다.그러나 호영이 꺼낸 영상을 보고 나서 그녀의 표정은 순식간에 바뀌었다.영상 속, 윤하경은 차 안에 갇혀 있었고 차 밖에서는 불길이 거세게 치솟고 있었다.그러자 신인아의 입꼬리에 엷은 미소가 피어올랐다.그 미소에는 기쁨만 있는 게 아니었고 어딘가 광기마저 느껴졌다.“윤하경, 정말 죽은 거야?”호영이 고개를 끄덕였다.“그 상황에서 살아남으면... 그건 기적이겠죠.”신인아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이번에는 잘했네.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말해봐.”호영은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전 그냥 인아 씨 곁을 지키는 게 좋습니다. 아무 보상도 필요 없어요.”신인아는 가볍게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였다.“거짓말.”그녀가 손짓하자, 호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가갔다. 그 순간 신인아는 그의 거친 손을 붙잡더니 조용히 입을 맞췄다.신인아의 따뜻한 입술이 호영의 거칠고 단단한 피부에 닿자, 그의 커다란 몸이 순간 굳었다. 전신을 전류가 휘감는 듯한 감각이 밀려왔고 언제든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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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2화

방문이 닫히자, 용천수의 얼굴에 어둡고 복잡한 기색이 드리워졌다.이 일에서 가장 중요한 건 민첩한 감각이다. 아까 신인아의 병실 문을 열기 전, 분명 안에서는 또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많은 훈련을 받은 그는 자기 청각에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대화 안에서 ‘윤하경’이라는 이름도 스치듯 들렸던 것 같았다.같이 근무 중이던 경호원이 그가 멍하니 서 있는 걸 보고 다가왔다.“형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그제야 용천수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별일은 아니야. 신인아 씨 병실은 당분간 특별히 신경 써. 나는 본가에 잠깐 들렀다 다시 인력 붙일게.”“알겠습니다.”그렇게 병원을 나서려던 찰나, 뭔가 이상하다는 기분이 스치듯 들었다. 차에 오르려다 문을 다시 닫고 병원 후원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신인아 병실은 병원 3동에 있었다. 그 아래에 도착한 용천수는 손전등을 꺼내 건물 외벽을 비춰보았다. 역시나, 창문 아래 벽면에 희미하게 남은 발자국 자국이 눈에 들어왔고 그 자국은 건물 위로 이어지고 있었다.용천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핸드폰으로 몇 장의 사진을 남긴 뒤, 조용히 병원을 떠났다.한편, 강현우는 여전히 ‘헤븐’ 서재에 앉아 있었다. 소매를 걷은 셔츠 차림에, 긴 손가락 사이로 담배 연기를 피워 올리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피곤이 고스란히 묻어난 그의 얼굴은 다소 지쳐 보였지만 그 특유의 위압감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서재 문이 열리고 용천수가 들어서자, 강현우는 희미한 연기 너머로 그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윤하경 찾는 건 우지원하고 민진혁이랑 같이 움직이라고 했을 텐데 왜 돌아왔지?”용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예, 두 분은 뵙고 왔습니다. 그런데 따로 보고드릴 게 있어서요.”강현우는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고는 이미 가득 찬 재떨이에 꾹 눌러 끄며 등을 의자에 기대어 차가운 눈빛으로 용천수를 바라봤다.“말해.”용천수는 잠시 망설였다. 신인아가 강현우에게 특별한 존재라는 건 알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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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3화

용천수의 보고를 들은 강현우는 말없이 눈을 가늘게 뜨며 사진을 들여다봤다. “네. 알겠습니다.”그리고 용천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답한 뒤 문을 열고 나갔다.책상 위 희미한 스탠드 조명 아래, 다시 혼자가 된 강현우는 깊은 눈매를 드리운 채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그 속에 담긴 의미를 곱씹었고 그의 눈빛은 점점 어둡고 무겁게 가라앉았다....윤하경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낯선 공간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무리 봐도 병원 같진 않았고 가구 하나하나가 고급스러워 보이는 방이었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는 몸을 일으키려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하얀 간호사복을 입은 젊은 여성이 들어오더니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 깨어나셨네요?”아직 정신이 몽롱한 윤하경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여기가 어디죠?”간호사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여기요? 모성이에요.”“모성...?” 윤하경은 이마를 짚으며 되물었다. 그러다 문득, 얼마 전 경매장에서 하석호가 모성에 와본 적 있냐고 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아, 네.”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간호사는 이불을 걷어 올리려 했다. 윤하경은 반사적으로 손으로 막아섰고 간호사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하경 씨를 데려오셨을 땐 많이 다쳐 계셨어요. 특히 다리를. 지금은 약 바르고 소독해드릴 거예요.”윤하경은 조심스레 손을 내리며 낮게 말했다.“감사합니다.”이불이 걷히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한 상처에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간호사가 천천히 붕대를 풀자, 따끔한 통증이 퍼지며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평소 외모에 민감했던 그녀는 주저하며 물었다.“흉터 남을까요?”간호사는 능숙한 손길로 소독하며 웃었다.“요즘 기술 좋아서요. 혹시 흉터가 남아도 금방 지워질 수 있어요.”윤하경은 그제야 조심스레 숨을 내쉬었다.간호사가 약을 다 바르고 나간 뒤, 저녁 무렵 하석호가 방에 들어섰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땐, 윤하경은 창밖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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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4화

하석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그냥 나랑 같이 한 사람만 만나주면 돼요.”“누구를요?”윤하경은 더욱 경계심을 높이며 조심스레 되물었다. 그러자 하석호는 그녀의 반응이 우스운 듯 껄껄 웃었다.“걱정하지 마세요. 그저 얼굴만 한 번 보는 거예요. 위험한 일 절대 없어요. 당신의 안전은 내가 책임질게요. 다치게 두지 않아요.”어째서인지, 그 말 한마디에 윤하경의 마음이 조금 놓였다.“그런데 저 여기 며칠이나 있었나요?”“사흘쯤 됐어요. 여긴 제 개인 별장이고 올 때도 제 전용 비행기를 탔어요.”그는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그러니까, 지금 당신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윤하경은 조용히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바로 그게 그녀가 바라던 상황이었다. 이젠 더 이상 경성에 미련도 없고 강현우와의 일도 여기서 마무리라고 생각했다. 모든 건 끝났고 이제부터는 새 인생을 시작하면 되는 거다.“당분간은 푹 쉬세요. 몸 좀 나아지면 다시 올게요.”하석호가 시계를 힐끗 본 뒤 말했다.“지금은 급히 처리할 일이 좀 있어서요.”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배웅했고 그러다 문 앞까지 간 그를 불렀다.“하석호 씨.”그가 돌아보며 고개를 기울였다.“부탁 하나만 더 해도 될까요?”“말해보세요.”“휴대폰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여긴 너무 조용해서...”하석호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곧 가져다드릴게요.”그가 떠나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로 누군가가 핸드폰을 들고 찾아왔다. 심지어 유심까지 미리 꽂혀 있었고 저장된 첫 번째 연락처는 ‘하석호’였다.정말 세심한 사람이라 생각하며 윤하경은 무심코 웃음을 지으며 핸드폰을 들여다보다가, 결국 검색창에 ‘강한 그룹’을 입력해 최근 경성에서 있었던 뉴스를 찾아봤다.놀랍게도 강현우의 결혼식 파행에 대한 보도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강한 그룹의 힘이라면 그런 스캔들은 언론에 나가지도 못하고 묻혔을 테니.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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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5화

윤하경은 조용히 중얼거리듯 말했다.“고마워요.”별장에서 며칠 지내다 보니 그녀는 점점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했다.그래서 상처를 회복하는 틈틈이 인터넷으로 ‘모성’에 대해 찾아보며 시간을 보냈다.이곳은 그녀에게 익숙한 도시는 아니었지만 딱 하나 좋은 점이 있었다.경성과는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 게다가 강한 그룹의 사업 영역도 이곳에는 전혀 닿지 않았다.어차피 여기까지 온 김에, 이 도시에서 정착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모성의 풍토와 사람들, 삶의 방식들을 검색해 보며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그때, 갑자기 그녀가 설정해 둔 알림이 하나 뜨며 화면을 덮었다.[한빛 그룹 파산, 윤수철 회장 생명 위독... 후계자 교통사고로 실종.]무의식적으로 뉴스를 눌러 들어가자, 화면에는 윤수철의 사진이 떴다.그가 병세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들은 뒤, 이렇게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한때 강인했던 윤수철은 지금 온몸에 의료기기와 호흡기 줄이 연결된 채 병상에 누워 있었지만 윤하경은 그 모습이 전혀 안쓰럽지 않았고 오히려 차가운 미소가 입가를 스쳤다.“아빠가 엄마를 배신하던 순간에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겠지.”그녀는 낮게 혼잣말을 내뱉으며 침대에 앉아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분명히 자신이 바라던 결과였지만 가슴 어딘가가 먹먹하고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똑똑.그녀는 급히 눈물을 닦고 문 쪽을 향해 말했다.“들어오세요.”문이 열리자 하석호가 들어왔고 표정이 어딘가 불안하고 초조해 보였다.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핸드폰 화면 위를 스쳤고 윤하경이 아직 화면을 끄지 않았기 때문에 방금 그 기사를 본 것이 분명했다.하석호는 잠시 입술을 꾹 다물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집안일은 저도 들었어요. 혹시 도움이 필요하다면 아니면 돌아가고 싶으시면...”“그럴 필요 없어요.”윤하경이 가볍게 웃으며 말을 잘랐다.“그건... 제가 원했던 결과예요.”그 결과를 얻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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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6화

“사실 오늘... 제 할아버지를 한 번 만나줬으면 해서요.”운전 중이던 하석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할아버지께서 오랫동안 편찮으셔서 병원에 입원해 계시는데 정신도 오락가락하시고요. 지금도 가장 마음에 걸려 있는 사람이 제 고모예요.”윤하경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그런데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 있죠?”하석호는 잠깐 백미러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담담히 말했다.“처음 하경 씨를 봤을 때, 제 고모랑 너무 닮아서 깜짝 놀랐거든요.”“그럼... 석호 씨 고모는...?”윤하경은 잠시 머뭇거리며 불안한 예감에 말끝을 흐렸고 하석호는 짧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말하자면 길어요. 제가 다섯 살 때 고모가 어떤 일로 집을 나간 뒤로 가족과 연락을 완전히 끊었어요. 그동안 가족들이 계속 찾아봤지만 한 번도 소식이 없었고... 이번에 제가 경성에 갔을 때 하경 씨를 보고 정말 깜짝 놀랐어요.”그는 웃으며 덧붙였다.“하경 씨가 너무 어려 보여서 그땐 참았지만 솔직히 입에서 ‘고모’라는 말이 나올 뻔했죠.”윤하경은 그제야 하석호와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당황했던 이유를 이해했다.“그래서... 이따가 그분을 뵈면 제가 뭘 하면 되죠?”“그냥... ‘하여진’인 척해주세요. 제 고모 이름이에요.”하석호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부탁드려요.”윤하경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도움이라기보단, 은혜를 갚는 거죠.”사실 하석호가 고모 이름이 하여진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윤하경은 어쩌면 자신의 엄마가 그의 고모가 아닐까 의심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한 번도 외가 쪽 가족을 본 적이 없었고 어머니조차도 그에 대한 이야기를 늘 피했다.딱 한 번, 아주 어릴 적 추석이었다. 한수아가 별장 정원에서 달을 보며 ‘엄마, 미안해요’라고 속삭이던 기억, 그마저도 이제는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그런 생각에 잠긴 사이, 차는 어느새 고급 개인 병원 앞에 도착해 있었고 건물 외관부터가 범상치 않았다.하석호가 먼저 차에서 내려 윤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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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7화

윤하경의 한마디에 방 안 분위기가 일순간 싸늘해졌다. 모두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 윤하경을 바라봤고 몇몇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꾸짖을 듯한 눈치를 보였다.그러나 하석호가 먼저 돌아서며 시선을 돌렸다. “둘째 작은아버지, 셋째 작은아버지,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둘 사이에 잠깐의 눈치 싸움이 오갔고 막 입을 떼려던 찰나, 병상에 누워 있던 노인의 쉰 목소리가 방 안을 가르며 들려왔다.“여진아... 여진이가 왔구나...”말은 흐릿하고 힘이 없었지만 그 순간 노인의 텅 빈 눈빛에 기적처럼 생기가 돌았다. 그가 떨리는 손을 천천히 들어 윤하경을 향해 뻗자, 그 눈가에는 이내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윤하경의 가슴이 알 수 없는 울컥함으로 조여왔다. 감정을 감추며 살아온 시간이 길었건만 이 순간만큼은 그녀도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노인의 곁으로 다가가, 낮고 부드럽게 속삭였다.“아버지, 저 돌아왔어요.”노인은 떨리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 사이 방 안 사람들 사이에는 또 다른 침묵이 흘렀고 그들 눈빛 속에는 각기 다른 의미가 어른거렸다.“그동안... 어디에 있었느냐...”노인의 목소리는 메말라 있었지만 말끝에는 숨길 수 없는 애틋함이 묻어났다.윤하경은 잠시 머뭇대며 대답을 고르다가, 침대 머리맡에 놓인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죽그릇을 집어 들었고 조심스럽게 떠낸 죽을 노인의 입가로 가져갔다.“많이 허기지셨죠. 일단 죽부터 조금 드세요.”노인은 말없이 그녀의 눈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숟가락을 받아들였다.하석호는 그 모습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며칠 전부터 식사를 거부하며 겨우 링거에만 의존하던 노인이, 지금 윤하경이 떠주는 죽을 기꺼이 받아먹고 있었다.그는 작게 웃으며 방 안을 둘러봤고 그런 그의 눈빛에는 뚜렷한 조소가 담겨 있었다.“여기 계신 분들, 오늘은 다 돌아가 주세요. 오늘 밤은 제가 할아버지를 모실게요.”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무리 중 한 명이 벌떡 일어나 외쳤다.“하석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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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8화

윤하경의 손이 잠시 멈췄다. 무심결에 하석호를 바라봤고 그 역시 난처하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입술을 꾹 다문 윤하경은 이내 고개를 돌려 침착하게 웃으며 노인을 바라보았다.“저예요. 여진이죠.”그러자 노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너 이 아비를 바보로 아는 거냐. 여진이 눈꼬리에는 이런 점이 없어.”윤하경은 무심결에 손을 들어 자신의 눈꼬리를 살짝 만지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정말 눈썰미가 대단하시네요, 어르신. 하지만요, 제 정체가 궁금하시다면... 이 죽, 다 드셔주셔야 해요.”그녀는 눈길을 죽 그릇 쪽으로 돌렸다. 노인의 쇠약한 상태를 생각하면 꼭 먹어야 할 음식이었다.한편, 옆에 서 있던 하석호는 속으로 긴장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평소 예절에 엄격했고 손주들조차 말끝을 높이지 않으면 혼나는 게 예사였다.지금 윤하경이 하는 말투를 들었다면 벌써 회초리가 나왔을 텐데.하석호가 입을 열어 그녀를 말리려던 찰나 예상 밖의 반응에 하석호는 눈을 휘둥그레 뜨게 되었다.“하하하! 그래, 먹을게.”‘헐! 이게 지금 정말 가능한 일인가?’자기 할아버지가 이런 식으로 누군가의 말을 순순히 따르다니.윤하경은 별일 아니라는 듯 웃으며 숟가락으로 죽을 떠 노인의 입에 조심스럽게 가져다 댔다. 노인은 생각보다 순하게 한 숟갈, 또 한 숟갈 받아넘겼다. 많이 굶주렸던 것인지, 죽이 절반을 넘어갈 즈음에야 고개를 저으며 입을 다물었다.윤하경은 무리하지 않고 그릇을 옆에 두고 조용히 말했다.“이제 제 이름을 알려드려도 될까요?”노인은 하석호가 건넨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고 아까보다 훨씬 또렷한 눈빛으로 윤하경을 바라봤다.“그래, 말해보렴.”“저는... 윤하경이라고 해요.”이미 정체가 들통난 마당에 굳이 숨기지 않았다.“얼마 전 사고를 당했는데 하석호 씨가 절 구해주셨어요. 오늘 이렇게 온 건 그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 싶어서예요.”노인은 겉으로 보기에는 몸이 많이 쇠약해 보였지만 정신만큼은 아직 또렷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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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9화

“하경 씨가 괜찮다면 당분간 이 병원에서 지내보는 건 어떠세요? 여기 의료진이 전문성도 높고 마침 저희 할아버지 곁도 지켜드릴 수 있잖아요.”그 말에 윤하경은 잠시 망설였다. 병원에 머문다는 건 곧 흔적이 남는다는 뜻이니까.그녀의 표정을 읽은 듯, 하석호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눈썹을 살짝 들어 보였고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었다.윤하경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이 정도의 권력을 가진 하석호라면 자신의 흔적을 지우는 일쯤은 식은 죽 먹기일 테니까.’“그럼, 부탁드릴게요.”그 뒤로도 윤하경은 잠시 병실에 남아 여운을 달래듯 노인과 대화를 이어갔다.하지만 노인은 오래 말할 기운도 없이 금세 지쳐 보였고 그런 와중에도 그녀를 향한 눈길만은 쉽사리 거두지 못했다.윤하경이 조곤조곤 달래듯 말했다.“할아버지, 조금 쉬세요. 언제든지 부르시면 곁에 있을게요.”그 말을 들은 노인은 비로소 눈을 감았고 곧 조용한 숨소리를 내며 잠에 들었다.윤하경과 하석호가 병실 문을 나서자,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바로 조금 전 병실 안에 있었던 중년 남자들이었다. 그들의 표정만 봐도, 딱히 우호적인 목적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윤하경은 이런 재벌가의 집안싸움에 끼고 싶지 않아 조용히 자리를 피해 보려 했지만 그들이 먼저 다가왔다.평소 윤하경 앞에서는 언제나 부드럽고 신중한 태도를 보였던 하석호는 그 순간, 눈빛부터 차갑게 가라앉았고 더 이상 온화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두 분, 무슨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그중 먼저 입을 연 건 하석호의 둘째 작은아버지 하성주였다.그는 거침없는 성격답게 직설적으로 말했다.“하석호, 네가 손주 노릇을 하는 건 알겠는데 말이지, 너무 들이대다간 도리어 망신당할 수 있어.”말을 던진 그의 시선이 잠시 윤하경을 스치듯 머물렀고 그 눈빛에는 분명히 경멸이 묻어 있었다.하지만 하석호는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고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충고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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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0화

하석호가 미안한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다가와 윤하경의 차 문을 열어주었다.“미안해요. 나 때문에 괜히 그 사람들한테 말 들었죠.”윤하경은 조용히 차에 올라 안전벨트를 매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하석호는 그제야 조금 안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아직 식사 안 했죠? 밥 먹고 갈래요?”마침 배가 고팠던 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고 하석호는 그녀를 데리고 조용한 개인 식당 앞으로 차를 몰았다. 둘은 이제 막 알게 된 사이였지만 윤하경은 이상하게도 그에게서 믿음을 느낄 수 있었다. 최소한 오건우보다는 훨씬 더 말이다.하석호가 그녀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웃으며 물었다.“왜 그렇게 빤히 봐요?”윤하경은 슬며시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그냥요. 하석호 씨처럼 부드럽고 단정한 사람이 오건우랑 친구라는 게 좀 신기해서요.”“아, 오건우?”하석호가 피식 웃었다.“우린 대학 동기예요. 사실 그 사람, 알면 괜찮은 사람이에요.”그의 말에 윤하경은 속으로 눈을 굴렸다. 괜찮은 사람이 여자한테 대뜸 며칠만 같이 있어달라 하고 그런 식으로 행동하진 않겠지. 하지만 그 문제로 굳이 논쟁하고 싶지는 않았다.윤하경은 대신 문득 떠오른 일이 있어 조심스럽게 말했다.“석호 씨, 제가 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우리 사이가 너무 멀게 느껴지는데요?”하석호가 웃으며 젓가락을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봤다.“말만 하세요.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도와줄게요.”“제가 지금 여기 있는 일, 그러니까... 제가 이 도시에 있다는걸, 절대 경성 쪽 사람들은 몰랐으면 해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윤하경은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며 또렷하게 말했고 하석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간단한 일이에요.”그러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근데... 들은 얘기로는 강 대표님이 결혼했다면서요. 하필이면 하경 씨가 사고 난 바로 그날.”윤하경은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조용히 젓가락을 들어 다른 반찬을 집었다.“이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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