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의 모든 챕터: 챕터 101 - 챕터 110

212 챕터

제101화

아래층 일반 병실.주연은 깨어나자마자 줄곧 울었다.울면서 유민이 자신을 속였다고 욕을 했다. 약속한 예물 값을 받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피까지 그렇게 많이 뽑아가서 태중의 아이에게 얼마나 안 좋은지, 만약 아이를 잃게 되면 전부 유민의 탓이라고 말했다.주연이 임신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승현이 유민에게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물론 이를 알지 못했다.이제 욕을 먹고 맞아도 반항은커녕, 어쩔 수 없이 다정한 말로 달랠 수밖에 없었다.“내가 반드시 방법을 생각해 낼게.”“무슨 방법을 생각해 낸다는 건데? 오씨 집안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모욕했는데, 이 쓸모없는 자식아!”전에 괴롭힘 당했던 기억들이 떠오르자, 주연은 화가 치밀어 소유민의 뺨을 올려붙였다.더 때리려는 참에, 갑자기 핸드폰이 진동했다.주연이 핸드폰을 꺼내 보니, 저장되지 않은 전화번호였다. 그녀의 눈에 어두운 빛이 스쳤다. 더 때릴 마음이 사라지자, 간단히 정리하고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바닥에 발을 디딘 순간 다리가 약간 풀리자, 순간 유하에 대한 원한이 더 커졌다.승현이 유하 때문에 자신의 피를 뽑았고, 유하는 유민의 친누나이면서도 20억의 예물 값도 내주지 않으려 했으며, 그녀 때문이 아니라면 자신도 피를 뽑혀 의식을 잃을 정도까지 이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당연히 유하를 원망했다.‘반드시 복수할 거야!’주연은 이를 악물며 유민이 잡은 손을 내치고 병실 문 밖으로 나갔다.“따라오지 마!”유민은 빨개진 얼굴을 어루만지며, 국물이 조금 쏟아진 국그릇을 들고 한숨을 쉬며 병상 옆으로 돌아와 앉았다. ‘요즘따라 성격이 괴팍해진 것 같네.’‘다 내 탓이야. 내가 원하는 것들을 구해줬다면...’‘누나도 참, 그렇게 돈이 많으면서 왜 20억 예물 값 하나 내주지 않는 거야?’‘게다가 일을 이 지경까지 만들어서, 아무 죄도 없는 내가 맞기까지 했잖아.’‘아직도 얼얼하네... 엄마 아빠도 나를 때린 적이 없는데!’...승환이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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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화

승환이 심각한 표정을 보이자, 유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진지하게 물었다.“무슨 일인데?”승환은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유하에게 건넸다. 그가 엿들을 때 녹음을 해뒀는데, 잘 들리지는 않지만 중요한 부분은 모두 담겨 있었다.“누나, 이것 한번 들어보세요.”유하는 의아한 표정으로 녹음 파일을 재생했다. 다 듣고 나니 대략 상황이 이해됐다. 그녀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진주연을 만난 거야?”승환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 여자가 슬쩍 숨어서 전화하는 모습을 보니 문득 생각이 났어요. 누나 동생인 유민 형이 몇 년째 누나를 찾지도 않다가...”“왜 하필 지금 찾아왔는지, 하필 연우 누나가 국내에 돌아온 시기와 맞닿아 있는지 말이에요. 뭔가 수상쩍다는 생각이 들어 몰래 따라갔다가 이런 말들을 듣게 됐어요.”승환은 어렵게 고민했지만, 결국 말하기로 마음먹었다.하지만 그는 일부러 승현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 일을 철저히 하씨 가문 쪽으로만 이끌어가서 먼저 이 상황에서 빠지려 했다.그동안의 만남으로 승환은 유하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유하는 주관이 뚜렷하고 결단력도 있으며, 뭔가 이상함을 감지하면 반드시 파헤쳐 보는 사람이었다.조사만 시작하면, 하씨 가문과 관련이 있든 없든, 승현이 이 일에서 한 역할도 반드시 드러나게 될 터였다.파고들다 보면...어쩌면 승현이 숨겨왔던, 예전의 그런 추잡한 일들까지 상당히 드러날지도 모를 일이다.그렇게 되면 두 사람의 사이는 반드시 끝장나게 될 것이다.그때가 되면, 유하는 틀림없이 승현을 죽도록 미워할 테고, 이혼은 다시 돌이킬 여지없이 완전한 기정사실이 되어 버릴 것이다.승환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눌러 억누르며, 미지근한 물 한 잔 따라 건넸다.“누나, 물 좀 마셔요. 화내지 마세요.”유하는 멍하니 물을 받아들이며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딱히 화가 난 건 아니었다.다만...“녹음 내용대로라면, 진주연의 신분이 아직 숨겨져 있다는 거지. 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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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3화

밤이 깊어지자, 승환은 근처 호텔 식당으로 영양식을 가지러 자리를 떴다.그가 떠나자마자, 유하는 핸드폰을 꺼내 안면이 있는 언론계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유하는 예술 디자인을 계속 연구하기 위해 오래도록 여러 방면의 자료를 모아 왔다. 그 과정에서 국내의 민속 전통뿐만 아니라 지역의 독특한 생활 문화와 현대적 사회 현상까지도 담아냈다. 자료를 보다 깊이 있게 다루고, 취재 과정에서 사람들과 공식적으로 소통하기 위해 그녀는 ‘출입기자증’을 따로 발급받았다.그 계기로 신문사와 방송사 등 다양한 언론 현장에서 활동하는 기자들과 자연스레 인연을 맺게 되었다.이번에 연락한 사람도 그중 하나로, 정보 수집에 능하지만 입은 무거운 친구였다.전화는 금방 연결되었다.서로 이미 잘 아는 사이였기에, 유하는 불필요한 서론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사람 한 명 좀 조사해 줘. 특히 사회관계와 최근 만난 사람들 위주로. 이름은 이따 문자로 보낼게.”전화 너머에서 남자의 불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누나, 며칠 있으면 곧 설날인데, 각종 폭로 거리가 쏟아지면서 좋은 시작을 위해 안 그래도 지금 엄청 바쁘다고요.]유하는 주저 없이 바로 핵심을 말했다. “그냥 공짜로 부탁하는 거 아니야. 일 잘 해결되면, 보수 외에도 단독 특종 기사로 쓰게 해 줄게.”상대방은 그 말을 듣자마자 말투가 진지해졌다. [누구랑 관련된 일인데요, 대물인가요?]“하씨 가문의 사생녀.”유하는 간결하게 설명했다.상대방은 그 말을 듣자마자 흥분지수가 치솟았다. [최근 유학에서 돌아온 하연우 씨의 집안 말인가요? 혹시 MB그룹 오승현 대표랑 엮인 그 집안이에요?]“맞아.”[좋, 좋아요! 제가 맡겠습니다. 확실하게 다 조사해 드릴게요!]하씨 가문은 꽤나 영향력이 있는 가문이었다. 하씨 가문의 외동딸이 최근 오씨 가문의 승현과 엮이고, 사이좋기로 유명한 하지철 부부한테 사생아가 존재하다니.이건 분명 엄청난 뉴스였다.[이름 빨리 보내주세요! 이건 반드시 제가 최초 보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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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4화

지난 7년 동안 단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보인 적 없는 승현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곧 병상이 확 내려앉는듯한 감각과 함께 유하의 입술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닿았다.감히 입을 맞추다니...유하는 눈을 번쩍 뜨고 승현을 노려보았다. “이 미친...”말이 채 끝나기 전에 다시 입이 틀어 막혔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유하는 이를 악물어 깨물었지만, 상대방은 오히려 그녀의 손을 잡은 채 더욱 거칠게 달려들었다.한참 후에야 승현이 조금 물러났다. 여우 같은 눈이 가늘게 실룩이며 웃고 있었고, 입술은 짙게 물들어 있었다.“이제야 반응해 주네?”‘이 미친놈이!’하지만 더 이상 무시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저 미친놈이 못할 게 뭐가 있겠어!’유하의 가슴은 분노로 꽉 막혀 숨이 턱 막히는 듯했고, 머리의 통증이 더 심해지자 기운 없이 병상에 머리를 기대었다.상태가 이상함을 눈치챈 승현도 장난기를 접고, 큰 손으로 그녀의 관자놀이를 살살 문질러 주었다.정신을 차린 유하는 그 손을 내팽개치며 할퀴었다. ‘너 같은 자식이 오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화낼 일은 없었을 텐데.’승현은 화내지 않고 그저 웃으며 제자리에 앉았다. “걱정 마, 당신 괴롭히던 놈들 다 처리했으니까.”유하는 눈썹을 찌푸리며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그래서?”승현은 담담한 미소를 보였다.“다시 예전처럼 내가 당신 도와주고 지켜줄게. 그러니까 당신도 더 이상으로 나한테 시비 거는 건 그만둬. 더 나아가면 질투가 아니라 시비 거는 걸로 볼 수밖에 없어.”‘질투?’‘질투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유하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웃음을 참았다. “그럴 필요 없어. 이런 일들은 당신이 도와주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해결할 수 있으니까.”“어떻게 해결한다는 거지?”승현은 그녀의 붕대 감긴 이마를 힐끔 쳐다보았다. “머리에 구멍 하나 더 내면서 해결할 건가?”유하는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다. “이건 돌발 상황이었고, 상대도 만만찮게 당했거든.”“그럼 소씨 집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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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화

병실 안은 침묵이 내려앉았다.고개 숙인 유하의 가슴이 들썩거렸다. 숨이 막힐 것 같았고, 눈가가 뜨거워지며 코끝이 시큰거렸다.지금 돌이켜보면, 그들은 이미 오래전에 끝나버린 사이였다.잘못된 시작은 결코 좋은 결말을 낳을 수 없음을, 유하는 진작에 깨달아야 했다.승현의 얼굴에 내던져진 이혼 합의서는 스르륵 미끄러져 그의 손으로 떨어졌다. 그는 종이를 꽉 쥐며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당신은 나한테 이럴 자격이 없어.”승현의 차가운 목소리가 칼날처럼 내리 찍혔다. 합의서는 구겨진 채 바닥으로 떨어졌다.유하는 허탈하게 고개를 들어 그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했다. 죽은 호수처럼 고요하고 차가운 그 시선은, 7년 전 어둠에 싸인 작은 방 안에서의 혼란스러웠던 밤과 겹쳐졌다.억눌렀던 기억의 파도가 밀려왔다.유하는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사지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고, 온몸이 억제할 수 없이 떨려왔다.“제발, 오지 마...”유하는 간신히 두 단어를 짜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저 승현이 다가오는 것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승현의 차가운 가늘고 긴 손가락이 그녀의 얼굴을 스쳤다. 유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승현의 손이 목에 닿자 공포에 질려 움직일 수 없는 데다가 숨이 막히는 듯했다.곧 승현의 입가에 차가운 말이 맴돌았다.“내가 진작 깨달았어야 했어. 당신도 제대로 된 교훈이 필요해. 영원히 갇혀...”말이 채 끝나기 전에 병실 문이 세게 열렸다.승환이 도시락을 들고 들어왔다. 그리고 병실 안의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형, 왔어요? 같이 드실래요?”...승현이 유하의 목에서 손을 떼었다.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주머니에서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그는 먼저 전화를 받았다.전화기를 든 순간, 남자의 굳었던 표정이 순식간에 부드러워졌고 병실 안의 살벌했던 공기도 한순간 사그라들었다.“알았어, 기다려. 지금 바로 갈게.”그는 병상에 축 쳐진 유하를 내버려두고 빠른 걸음으로 문밖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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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화

“승환이 잘 감시해. 조금이라도 선을 넘는 행동 보이면, 바로 때려눕혀서 병원에 처넣어. 말 잘 들을 때까지 퇴원 금지야.”태건은 잠시 망설이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진짜 너무하네. 이거 누나 주려고 특별히 주문한 건데.”승환이 바닥에서 일어나 쏟아진 음식을 내려다보았다. 물론 더 이상 먹을 수 없는 상태였다.하지만 그것들을 정리할 새도 없이 유하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한달음에 병실에 도착했다.문을 열자 유하가 병상에 꼼짝도 않고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다. 승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리고 유하를 부르며 달려갔다.“누나!”유하가 힘없이 손을 들었다. “괜찮아.”승환이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걱정되어 의사를 다시 불러 상세히 진찰받았다.다행히 현재 유하에게 큰 문제는 없지만, 감정 기복을 최대한 피하고 정신적 안정을 취할 것, 특히 머리 상처에 각별히 신경 쓸 것 등 의사가 몇 가지 당부하고 나갔다.“다 형 때문이야! 대체 왜 온 거야?”승환은 분노가 치밀었으나, 문득 신음하며 얼굴을 찡그렸다.“아야 아야, 누나... 아파요.”유하가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앉아 승환의 얼굴 상처를 소독하며 약을 발라주었다. 그녀는 가슴이 미어지듯 아팠고, 눈가가 붉어졌다.“그 미친놈이... 무슨 깊은 원한이라도 있는 거야? 사람을 이 지경이 되도록 때리다니.”그러나 승환은 오히려 환하게 웃었다.“누나가 이렇게 걱정해 주니까 하나도 안 아파요. 전 누나가 웃는 모습 보는 게 제일 좋아요.”유하는 그를 흘겨보았지만, 결국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승환이 바닥에 구겨진 종이 뭉치를 주워 들었다. 틈새로 비친 글자를 보고는 병상의 그녀를 바라보았다.“누나, 이게...”유하가 종이를 받아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신경 쓰지 마. 이건 이미 여러 장 준비해 뒀어.”“그럼 형이랑...” 승환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유하가 희미하게 웃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단호했다.“합의하는 건 포기했어.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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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화

뒤돌아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한 순간, 유하의 눈썹이 찌푸려졌다.배남진이었다.태준범과 마찬가지로 승현의 절친 중 한 명이자, 연우와도 각별한 사이인 남자이니 당연히 유하를 싫어하는 사람인 것도 당연했다.비록 남진은 준범처럼 직접적인 폭력은 가하지 않았지만, 수없이 유하를 불쾌하게 만든 장본인 중 하나였다.지난번 유하는 이솔의 일로 프라이빗 클럽에서 승현을 찾았을 때도 남진이 있었고, 그 클럽 역시 남진의 소유였다.‘이 사람이 왜 병원에 온 거지?’남진 역시 유하를 마주치게 될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리고 여자의 이마에 감긴 흰 붕대를 보고 눈썹을 찡긋거렸다.“소유하 씨는 정말 대단해요. 승현이의 관심을 받으려고 자해까지 한 줄은 몰랐네요.”유하는 그의 터무니없는 말에 어이가 없었다.‘뭐라고 지껄이는 거야?’남진은 몇 걸음 다가오며 비아냥거렸다.“쓸데없는 짓 그만해요. 요즘 승이는 계속 연우 누나랑 같이 있으니까 이런 유치한 방법을 아무리 써봤자 소용없을 거예요. 승현은 소유하 씨의 것이 아니니까요.”유하가 가슴 깊숙이 숨을 들이마셨다. “저한테 이딴 소리를 지껄이는 이유가 뭐죠?”남진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유하의 날카로운 반응에 당황한 사이, 그녀의 독설이 이어졌다.“배남진 씨, 정신적으로 힘드시면 치료 먼저 받으세요. 지금 병원에 와 계시잖아요. 바로 앞에 정신건강의학과가 있습니다.”“괜히 저랑 실랑이하시다가 진료 늦어지면 안 되잖아요.”남진의 표정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유하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참, 길을 모르시나 봐요. 이해해요!”유하는 일부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지나가던 간호사를 붙잡았다.“저기요, 이 분 정신이 좀 이상한 가봐요. 정신건강의학과 가는 길도 못 찾겠다고 하시는 데 좀 도와주세요.”“이봐요, 소유하 씨!”남진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유하는 그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쫓아가려던 순간 곱슬머리를 한 소년이 유하 곁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포착했다.“오승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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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화

준서는 집 안으로 들어섰지만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연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다정하게 준서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걱정하지 마, 다 괜찮아질 거야. 이따가 맛있는 거 먹고 밖으로 놀러 가자.”...유하의 머리는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가끔 어지러움을 느꼈기에, 승환이 직접 차를 몰아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기로 했다.승환이 ‘대나무숲’ 주택단지에 있는 유하의 집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길가에 줄지어 주홍빛 가로등이 걸려 있고, 특히 맞은편 별장이 화려하게 장식된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누나, 맞은편 집엔 누가 살아요?”유하가 어둠에 잠긴 건물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최근에 해외에서 돌아오신 분이야. 아직 뵙진 못했지만 좋은 분이시더라고.”유하는 집 밖에 매달린 고양이 모양의 가로등을 가리키며 미소 지었다. “이것도 앞집에 사시는 이웃분이 집 장식하다가 덤으로 달아주신 거야.”승환이 귀여운 고양이 모양의 가로등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예쁘네요.”집 안으로 들어서자 온통 직접 디자인된 작품들로 가득한 모습에 승환은 더욱 감탄하며 둘러보았다. “누나 진짜 대단해요!”유하는 부끄러워하며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승환의 숙박 요청은 거절해야 했다. 유하는 차를 불러 그를 집으로 보냈다.홀로 남은 유하는 식욕이 없어 침대에 누워 쉬려던 참이었는데, 소성란의 전화가 걸려왔다....[몇 번을 부르는데 맨날 바쁘다는 거야? 얼른 밥 먹으러 와! 할 얘기가 있다고!]몇 번이나 거절당한 소성란의 목소리에 불만이 서려 있었다.유하는 이마의 붕대를 어루만지며 난감해했다. 가지 않을 수 없었지만 상처를 어떻게 숨길지 고민이 되었다.소성란의 집요한 질문을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었기에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잠시 생각하더니 유하는 이솔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했다.전화를 끊고 옷을 갈아입은 후, 유하는 오렌지색 털모자를 찾아 썼다. 모자는 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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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화

두 사람은 곧 소성란이 예약한 레스토랑의 룸에 도착했다.이솔은 활발한 성격답게 문을 열자마자 자리에 앉아 뾰로통한 소성란에게 달려가 안겼다.“고모할머니, 보고 싶었어요!”유하 덕분에 이솔도 소성란과 친근한 사이였다. 오랜만의 만남이지만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소성란은 이솔의 다정한 모습에 마음이 누그러져 더 이상 뭐라 말하진 않았다. 하지만 유하가 모자를 쓴 채 들어오자 눈썹을 찌푸렸다.“실내인데 모자를 왜 그렇게 쓰고 다니니? 난방이 이렇게 잘 돼있는데 안 답답해?”유하가 코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감기 기운이 있어서 모자 쓰고 있어요.”“맞아요, 맞아요!” 이솔이 재빨리 말을 받았다. “요즘 일교차 심해서 조심하지 않으면 더 심해질지도 몰라요.”이솔은 소성란 곁에 착 붙어앉아 소성란의 최근 안부를 묻는 등 화제를 돌렸다.그러자 소성란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날씨 추우니 건강에 유의하라는 말만 덧붙인 뒤 음식을 주문했다.유하는 살짝 안도의 숨을 내쉬며 자리를 잡았다. 감기 옮길까 봐 걱정된다는 핑계를 댔지만 사실은 이마의 상처를 들킬까 봐 소성란과 거리를 유지했다. 이솔이 곁에서 요리를 집어주며 이야기를 건네자 소성란은 더 이상 유하를 의심하지 않았다.식사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소성란이 가방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유하에게 건넸다.유하가 서류를 들자 국제 패션위크 관련 최신 자료와 여러 디자인 스케치들이 쏟아져 나왔다.소성란이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지금 이 시점에선 올해 상반기 패션위크에 참가하는 건 어림도 없을 거야.”하이엔드 옷 한 벌을 만드는 데는 재료 수집부터 디테일링, 핸드메이드 제작까지 최소 두 달은 소요된다. 그러니 올해 있을 3월과 6월의 국제 행사는 이미 물 건너간 셈이었다.“하지만 하반기에는 아직 기회가 있어.”소성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7월 멜라노에서 내년 봄, 여름 시즌을 겨냥한 오트쿠튼르 쇼가 열릴 예정이야. Splendid에서는 이번엔 두 테마로 총 72벌을 선보일 예정이야. 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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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0화

“그리고 내가 왜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아?”소성란의 입가에 담담한 미소가 스쳤다.“설 연휴가 끝나면 Splendid에 합류해. 그리고 초안을 들고 와. 실력으로 동료들의 인정을 받는 건 네 몫이야.”이렇게까지 이야기한 이상, 유하는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었다.드디어 가슴에 맺혔던 응어리가 풀리는 듯했다. 그녀의 얼굴에 편안한 미소가 번졌다.“알겠습니다.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게요.”소성란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생각난 듯 덧붙였다.“참, 상반기 쇼는 참여하지 못하지만, 나랑 함께 관객으로 동행할 순 있어.”“난 올해 설이 지나면 해외로 돌아갈 거니까, 이혼 절차 마무리는 서둘러라.”“이번 3월과 6월 패션쇼에 나와 함께 가서 세계적 거장들의 작품을 보고, 경험을 쌓아야 해.”소성란의 브랜드 본사는 해외에 있었고, 해외에서 상장된 기업이기도 했다. 그러니 매년마다 귀국하는 건 아니었다.이번에도 유하 때문에 잠시 들른 것이었다. 떠날 때가 되었으니, 자신의 손녀를 데려가야 했다. 소성란도 이제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더 이상 유일한 혈육과 떨어져 있기 싫었다.유하는 머리가 아팠지만 어쩔 수 없이 소성란의 제안을 수락했다....식사를 마치자 소성란을 태울 차가 도착했다.두 사람이 소성란을 배웅한 뒤, 이솔이 걸음을 멈추더니 서류를 들고 있던 유하의 팔을 잡아당겼다.“저게 어떻게 된 상황이야? 왜 하연우랑 준서가 단둘이 만나고 있는 거지?”이솔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유하도 멈짓하며 그쪽을 바라보았다.저 멀리서 준서가 환하게 웃으며 연우의 손을 잡고 깡충깡충 호텔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식사하러 온 것인지, 승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유하는 순간 소성란이 탄 차가 멀어지는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숨을 내쉬었다.‘못 보셨나 보네, 정말 다행이야.’“아니, 저 여자가 도대체 왜 네 아들이랑 같이 다니는 거야?”이솔은 준서가 속은 건 아닌지 걱정되어 불안해하며 따라가려 했지만 유하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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