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Chapter 681 - Chapter 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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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1화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청산이 한 걸음 더 다가오며 자연스럽게 좁혀졌다.유하는 순간 이성을 잃은 듯,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이런 기사님이 어디 있어요? 감히 여왕을 넘보고, 심지어 무례하게 굴다니!”말이 끝나는 순간, 유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망했다. 나 진짜 망했어!’귓가에는 남자가 참지 못하고 흘리는 낮은 웃음소리가 울렸다.유하가 움켜쥔 손을 놓는 순간, 청산은 곧바로 그 손을 붙잡았다. 넓고 뜨거운 손바닥이 유하의 가는 허리에 닿자, 유하는 작게 몸을 떨었다. 이어서 귓가로 낮고 느릿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그럼, 나의 여왕님은 날 벌해 주시겠어요?”“어떻게 벌할 건데? 뭐로?”“아니면...”청산은 유하의 귀 옆에 얼굴을 가까이 붙인 채 속삭였다.유하는 그대로 터져 버렸다.“선배, 서, 선배...!”유하는 눈을 크게 뜨고, 웃음을 참지 못한 채 즐거워 보이는 청산을 노려봤다. 얼굴부터 목덜미까지 뜨겁게 달아오르자, 있는 힘을 조금 실어 남자의 가슴을 툭툭 쳤다.“왜 이래요, 진짜!”‘선배, 점점 말이 더 수위가 높아지고 있잖아!’‘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해?’‘예전엔 몰랐는데... 이렇게까지...?’‘무슨 성인군자야, 여긴 밖인데!’유하는 씩씩거리며 서둘러 차 안으로 몸을 피했다.청산은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 아무렇지 않게 뒤따라 탔다.유하와 청산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길모퉁이에 설치된 CCTV가 계속해서 두 사람을 향한 채, 붉은 불빛을 깜빡이고 있다는 사실을....이후 ‘대나무숲’ 주택단지로 돌아가는 내내, 유하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청산을 완전히 무시했다.말 한마디 섞지 않는, 당당한 일방적 냉전 선언이었다.‘대나무숲’ 주택단지에 도착하자, 청산은 차에서 먼저 내려 유하 쪽 문을 열어 주며 웃으며 물었다.“진짜로 나랑 말 안 할 거야?”유하는 대답 대신 청산을 한 번 세게 노려봤다.차에서 내려 꽃다발을 안은 채, 유하는 아무 말 없이 자기 집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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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2화

게다가 준서도 약혼식에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준서는 유하의 약혼 자체를 예전처럼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받아들인 것도 아니었다. 이번이 결혼이 아니라 ‘약혼’이었기에 그나마 이 정도로 넘어간 것이지, 만약 바로 결혼이었다면 준서가 끝까지 난리를 쳤을 거라는 걸 유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준서는 그런 아이였다.작은 불씨에도 금방 터질 수 있는, 말 그대로 작은 시한폭탄.집에 아이를 혼자 두고 나온 게 마음에 걸렸다. 보호 인력이 붙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유하는 순간 마음이 약해졌다. 달려온 아들을 향해 두 팔을 벌려 품에 안았다.“이렇게 늦었는데, 왜 안 자고 있었어?”이미 자정도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안 졸려요.”준서는 유하의 품에 얼굴을 파묻은 채, 작게 대답했다.뭔가를 물으려던 듯하다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조금 전까지 반가워하던 얼굴에 금세 분한 기색이 떠올랐다.“엄마!”“어?”‘갑자기 왜 이래?’“또 병원 갔죠!”준서가 버럭 말했다.‘나도 이미 다 참고 있었단 말이야.’‘속셈 가득한 그 청산 아저씨도 참고, 약혼하는 것도 방해 안 했어.’‘근데 오늘은 약혼식이었잖아.’‘그런데 왜 엄마한테서 병원 소독약 냄새랑 약 냄새가 나?’향은 아주 옅었지만, 준서는 요즘 이 냄새에 유독 예민했다.‘엄마 또 재윤이 보러 간 거야?’‘왜 또...?’“그건...”유하는 잠깐 말을 멈췄다. 병원에 다녀온 게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날 일인지 바로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준서가 박영심과 각별하다는 걸 떠올리자 괜히 아이가 더 걱정할까 싶었다. 그래서 박영심의 입원 이야기는 꺼내지 않기로 하고, 다른 설명을 찾고 있었다.그런데 준서는 갑자기 조용해졌다.아까의 분노도, 투정도 사라진 얼굴로 유하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 다음에 병원 갈 때 나도 같이 갈래요.”유하가 눈을 깜빡였다.“응? 네가 왜...”“저도 재윤이 보러 가고 싶어요.”준서는 이를 꼭 다문 채, 해맑게 웃었다.“재윤이가 요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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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3화

병원, 병실.설아는 간이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과도를 들고 사과를 깎고 있었다. 손놀림은 익숙하고 가벼웠다. 붉은 껍질은 한 번도 끊기지 않은 채 길게 이어져 얇은 띠처럼 벗겨졌다.“깼네. 몸은 어때?”설아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 목소리도 담담했다. 거기에는 어머니라면 으레 있어야 할 온기 같은 건 전혀 없었다.병상 위에는 온몸과 머리에 붕대를 감은 아이가 누워 있었다. 창백한 얼굴로 눈을 뜨고 있었지만 표정은 비어 있었다. 혈연으로 묶인 ‘엄마’를 바라보는 눈에도 아무런 파문이 없었고, 아무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다.두 사람 사이에는 정상적인 모자 관계의 흔적이 조금도 없었다.하지만 그건, 둘 모두에게 이미 익숙한 풍경이었다.길게 이어지던 사과 껍질이 통째로 떨어져 쓰레기통 안으로 들어갔다. 설아는 사과를 접시에 놓고 몇 조각으로 잘랐다. 한 조각을 포크로 찍어 입에 넣으며, 무심하게 말을 던졌다.“말 좀 해. 나 냉전 제일 싫어하는 거 알잖아.”재윤의 동공이 느리게 움직였다. 설아를 흘끗 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설아는 혀를 차며 짜증을 냈다.재윤의 저 표정이 유독 신경을 긁었다. 이유 없이 화가 치밀었다. 다른 사람이 설아 앞에서 저런 얼굴을 했다면 진작에 손을 댔을 것이다. 그래도 재윤은 자신이 낳은 아이였다.비록 아이 아빠는 역겹기 짝이 없는 인간이었지만, 요즘 재윤의 얼굴은 점점 그 인간을 닮아 가고 있었다.‘앞으로 더 크면, 점점 더 그 쓰레기랑 똑같아지겠지.’‘아, 진짜 짜증 나.’설아는 사과를 삼키고, 과도 끝을 이로 물었다.‘그래도 쓸모는 있어.’‘어쨌든 내가 낳은 아이니까.’설아는 다시 차분한 얼굴로 사과 한 조각을 찍어 먹으며 말했다.“사람들 말로는, 네가 스스로 뛰어내렸다고 하던데.”“뭐야, 내가 그렇게 귀찮아?”“나한테 화났어?”“아니면 나 엿먹이려고 그런 거야?”보통이라면 입에 올리기조차 조심스러운 말들이었다.하지만 설아는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그러다 문득,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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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4화

“엄마를 만나고 싶어.”‘이 꼬마 녀석... 그래, 아주 잘했어.’설아의 차가운 눈동자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병상 위에 누운, 병색이 역력하고 얼굴이 눈에 띄게 여윈 아이를 내려다보던 설아는,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갑작스럽게 웃음을 지었다. 그 미소에는 뜻밖에도 약간의 만족이 섞여 있었다.“역시 너는... 나를 가장 많이 닮았네.”...“실수로 떨어진 거라고요?”유하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설아에게서 들은 말이었다.일부러 뛰어내린 게 아니라는 말에 일단 안도했다. 하지만 기쁨은 얼마 가지 않았다. 다음 순간, 유하는 본능적으로 이상한 지점을 짚어냈다.“아이가 막 깼는데, 바로 그것부터 물어보셨어요?”‘쯧, 역시나.’설아는 대놓고 눈을 굴렸다.‘이럴 땐 보통 안도의 한숨부터 쉬는 게 정상 아닌가?’‘어쨌든 이 일로 내가 다시 문제 삼을 일도 없고, 소유하 아들 붙잡고 법정에 세울 명분도 사라졌는데...’‘정말 둔한 인간이야.’유하의 말에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 설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갔다. 유하 옆에 서 있던 준서와 눈이 마주쳤다.키 차이만큼이나 대비되는 두 시선이 공중에서 잠시 맞붙었다.설아는 붉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악의가 숨겨지지 않은 미소였다.‘꼬맹이.’준서는 설아를 잠시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다.“어떻게 물으셨어요?”유하는 여전히 설아에게 묻고 있었다.유하는 솔직히 믿기 어려웠다.‘배설아가 말을 곱게 할 리가 있나.’‘저 입은 하루도 독 안 뿜는 날이 없는데, 애가 막 깼는데 다짜고짜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해서 자극부터 준 거 아니야?’그 생각이 드는 순간, 유하는 더 이상 설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병실 문을 밀고 들어갔다.아직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았는데, 침대에 반쯤 기대앉은 재윤이 먼저 유하를 알아봤다. 힘없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환해졌다.“엄마!”유하는 반사적으로 발걸음을 멈출 뻔했다.‘이건 곤란한데...!’유하는 급히 고개를 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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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5화

결국 유하는 재윤을 외면할 수 없었다.재윤을 모른 척하는 건 더더욱 불가능했다.“의사 선생님께 가서 상태 좀 물어보고 올게. 재윤아, 여기서 얌전히 기다릴 수 있지?”아직 담당 의사를 만나지 못한 상태라 유하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재윤이 옷자락을 꼭 쥐고 놓지 않자, 조심스럽게 손을 풀며 간호사를 부르려 했다.설아는 보호자이니 당연히 같이 가서 의사를 만나야 했다.재윤은 손을 놓지 않은 채 고개를 살짝 들었다. 목소리는 거칠었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어린애 특유의 말랑함이 남아 있었다. 크고 동그란 눈이 어렴풋이 빛났다.“엄마, 뽀뽀.”예전부터 그랬다.유하가 자리를 뜰 때마다, 재윤은 꼭 이렇게 말했다. 뽀뽀해 주면, 다음에 다시 돌아온다고 믿는 듯이.유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조금 더 괜찮아지면... 이 아이가 엄마를 헷갈리는 버릇은 꼭 바로잡아야겠지.’‘친엄마가 바로 여기 있는데, 계속 이러는 건 좋지 않잖아...’하지만 유하는 그 눈빛을 끝내 외면하지 못했다.등 뒤에서 꽂히는 시선을 느끼면서도, 유하는 재윤의 피부 아래 뼈가 그대로 만져질 만큼 마른 뺨에 살짝 입을 맞췄다. 코끝이 찡해졌다.‘너무 말랐어...’속은 쓰렸지만, 얼굴에는 끝까지 미소를 띠었다.병실을 나서자마자 잠시 숨을 고르며 감정을 추슬렀다.설아가 간호사를 부르러 간 사이, 함께 나왔던 준서가 갑자기 유하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아무 표정 없이 자기 뺨을 가리켰다.“뽀뽀.”유하는 잠시 멈췄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한쪽만 달래면, 다른 쪽이 또 삐질 테니까.’유하는 허리를 숙여 준서의 말랑한 볼에 한 번 뽀뽀했다. 일어나려는 순간 다시 끌려가 반대쪽 볼에도 한 번 더. 몇 번이나 반복하고 나서야 준서는 만족한 듯 놓아주었다.간호사가 도착하자 이번엔 준서가 움직이지 않겠다고 했다.“나 안 갈래. 나도 병실에 있을래. 재윤이랑 같이 있고, 엄마 올 때까지 기다릴래.”유하는 망설였다.조금 전에도 봤듯이 두 아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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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6화

“지금부터... 우리... 친구인 거지?”병실 안.재윤은 병상 위에 앉아 있었다. 추락 사고 때 입은 상처는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아, 드러난 피부 곳곳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재윤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준서를 차분하고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분명 친구가 되고 싶다는 말이어야 할 텐데, 재윤의 입에서 나온 말에는 이상할 만큼 감정의 기복이 없었다. 간절함도, 비굴함도 없었다. 오히려 무감각에 가까운 기운이 섞여 있었다.확인당하는 쪽인 준서의 얼굴에도 기쁨이나 뿌듯함 같은 건 전혀 없었다.준서는 자신보다 한 살 많은데도 지나치게 말라 보이고,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재윤을 차갑게 노려봤다. 분노가 그대로 얼굴에 떠올랐다.준서는 이를 악물었다.“너, 나 갖고 노는 거지!”지금까지 살면서 준서에게 ‘후회’라고 부를 만한 건 그리 많지 않았다. 엄마와 관련된 일은 그중 하나일 수 있었지만, 배재윤은 아니었다.준서는 애초에 재윤이랑 친구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학교에서 친한 척했던 것도, 전부 장난이었다. 순전히 재윤을 놀리는 재미로 그랬을 뿐이었다.그런데 지금은... 조금, 정말 조금 후회가 밀려왔다.‘배재윤은 완전히 들러붙는 껌이야.’‘그것도 제일 징그러운 종류.’‘태건 삼촌만 아니었으면...’태건은 늘 말했다.무슨 일을 하든, 대가는 반드시 따른다고.‘대가? 난 인정 못 해.’‘나는 반드시 ...’그날의 장면이 떠오르자 준서의 숨이 가빠졌다.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그 순간, 대답을 기다리던 재윤이 더는 기다리지 않는다는 듯 행동했다.재윤은 팔에 감긴 붕대를 움켜쥐고, 그대로 잡아당겼다.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붕대가 풀려 떨어졌다.추락하며 긁힌 팔의 상처는 딱지가 벌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선혈이 배어 나왔다. 아직 완전히 떼어내지 못한 붕대 가장자리가 금세 붉게 물들었다. 마른 아이의 팔에서 그 장면은 유난히 끔찍하게 보였다.그런데도 재윤의 얼굴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아픈 기색조차 없이, 그대로 피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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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7화

“우리 엄마 어디 있어요?”준서가 목소리를 높여 간호사의 말을 끊었다.간호사는 순간 멈칫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병실 안에서 애교를 부리며 말캉하게 웃던 아이였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준서는 전혀 딴판이었다. 얼굴에는 노골적인 짜증이 떠 있었고, 간호사를 바라보는 시선도 차갑고 거슬렸다.‘무슨 눈빛이지?’‘잘생기긴 여전히 잘생겼는데...’‘전혀 아이답지 않네.’‘요즘 애들은 다 이런가? 안색 바뀌는 게 책장 넘기는 것보다 빠르네.’간호사가 잠깐 멍해진 사이, 준서는 이미 복도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길까 싶어 몇 걸음 따라가려던 간호사는 병실 안에 아직 돌봐야 할 아이가 있다는 걸 떠올리고 발을 멈췄다.‘어쩌지...?’그런데 더 골치 아픈 일이 바로 벌어졌다.병실 침대 위에서 쉬고 있어야 할 재윤이 어느새 침대에서 내려와 있었다. 몸을 끌듯 비틀거리며 병실 문을 나서더니, 간호사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듯 준서가 사라진 방향으로 향했다.“어, 어? 잠깐만!”간호사는 재윤을 붙잡으려다 멈췄다. 온몸에 감긴 붕대가 눈에 들어왔다. 자칫 잘못 손을 대면 아이를 아프게 할 것 같았고, 상처가 벌어질까 겁이 났다.그 짧은 망설임 사이, 재윤은 이미 꽤 멀리 가 있었다.간호사는 머리를 짚었다.‘아니, 애들 둘이 잠깐 얘기하겠다더니...’‘이게 왜 이렇게 된 거야?’간호사는 결국 둘을 쫓아 뛰기 시작했다....상담실.유하는 의사에게 재윤의 상태를 하나하나 물어 확인하고 있었다. 옆에 선 설아는 전혀 집중하지 않은 얼굴로 담배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유하는 참다못해 설아의 어깨를 툭 쳤다. 제법 힘이 실렸다.“제발 좀 진지하게 들으세요.”‘도대체 누구 애인데.’“아, 듣고 있잖아.”설아는 눈을 한 번 굴리며,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문 채 말없이 앉아 있는 의사를 향해 턱짓했다.“계속해.”이야기는 금방 정리됐다.재윤은 당분간 입원하며 관찰을 이어가야 했다. 뇌와 신체에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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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8화

“네, 알겠습니다.”유하는 연달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신경 써 주셔서요.”의사는 예의 있게 손을 내저었다....상담실을 나오자마자, 유하가 아직 아이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설아가 먼저 선수 쳤다.“그날 내가 했던 말, 생각은 해 봤어?”“장미에 남은 향기가 다 날아갈 때까지 기다릴 생각은 아니겠지?”유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오늘 병원에 온 이유는 재윤을 보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이 문제 때문이기도 했다.하지만 설아의 이런 오만방자한 태도는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유하는 목소리에 짜증을 숨기지 못했다.“재윤이 일에 좀 신경 쓰세요.”“내가 언제 신경 안 썼어?”설아는 노골적으로 불쾌한 얼굴이었다. 입술에 물고 있던 담배가 말과 함께 미세하게 흔들렸다.“병원비를 안 냈어?”“아니면 입원을 안 시켰어?”“내가 여기서 며칠이나 시간 버리고 있는데, 이걸로 부족해?”짝!맑고 날카로운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유하는 손을 휘두르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설아는 한 손으로 뺨을 감싼 채 고개를 돌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한 발 뒤로 물러서는 모습에 유하는 그제야 상황을 인식했다.“미, 미안해요...”유하는 화가 치밀어 순간적으로 손을 참지 못했다.‘그래도 배설아가 전혀 잘못이 없는 건 아니잖아...!’“이 미친 것이 감히 나를 때려?”설아의 입에서 쪼개진 담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설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충혈된 눈이 유하를 집요하게 노려봤다.“내가 요즘 너한테 너무 만만하게 보였나?”“사람이 어디까지 기어오르나 보자, 이게.”‘지난번 얼굴 맞은 건 참고 넘겼다.’‘근데 또?’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여기가 병원 복도라는 것도 잊은 채, 설아는 유하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아 방 안으로 끌고 갈 기세였다.그때, 아이의 목소리가 복도 끝에서 울렸다.“엄마! 여기 있었어요!”설아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유하와 설아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복도 옆 계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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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9화

재윤이 집에 가는 건 불가능했다.조금 전 유하는 의사와 다시 이야기를 나눴다. 현재 의식을 되찾기는 했지만, 여전히 입원 관찰이 필요했다. 게다가 조금 전 소동으로 상처가 다시 벌어지기까지 했다. 이 상태로는 움직이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두 아이를 달래 병실로 돌려보내고 나니, 유하의 머리가 오히려 더 복잡해졌다.조금 전, 찰나처럼 스쳐 간 의심.준서의 눈물과 재윤의 설명, 그리고 다시 손을 잡고 병실로 돌아간 두 아이의 모습에 그 생각은 유하의 마음속 깊이 눌려 버렸다.유하 자신도 이해되지 않았다.왜 재윤의 그 모습 앞에서 자신이 반사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는지...왜 하필 준서를 의심했는지...유하조차 의식하지 못한 순간이었다.분명 두 아이는 사이가 좋았다.오늘 다시 만났을 때도 별다른 충돌은 없었고, 오히려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다.“내가 요즘 너무 정신이 없긴 했지...”병원 복도를 걷던 유하는 이마를 짚었다. 순간 어지럼증이 스쳤다.최근의 유하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좋은 일, 나쁜 일이 뒤엉켜 한꺼번에 몰아쳤고, 몸과 마음이 다 지쳐 있었다.유하는 벽에 등을 기대 잠시 숨을 골랐다.그때 상담실 문이 열리며 설아가 나왔다. 얼굴은 여전히 좋지 않았지만, 아까처럼 날이 서 있지는 않았다. 손을 올릴 기색도 없이 차갑게 물었다.“그럼, 이렇게 하는 걸로 결정한 거야?”“네.”유하는 설아를 한 번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아이들을 겨우 진정시킨 뒤, 유하는 곧바로 청산에게 전화를 걸었다.지명훈이 해외에 있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확인됐고, 지명훈이 말하던 지도교수에 대해서도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향수의 정확한 성분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유하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배설아가 제안했던 그 ‘협력’에 대해 유하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렀다.“미리 말씀드려요. 말씀하신 쪽 일에는 제가 익숙하지 않아요. 할 수 있는 만큼만 할 겁니다.”“그리고 단 한 번이에요.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 이후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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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0화

유하는 잠시 말을 잃었다.배설아라는 사람에게 이제야 배남진과 닮은 구석이 보였다.재윤이 엄마를 잘못 부르는 문제로는 더 이상 물고 늘어지지 않더니, 이번에는 동생 배남진이 늘 입에 올리던 것처럼 재윤을 유하의 양아들로 만들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고 있었다.유하는 그저 허탈했다. 설아의 헛소리를 하나하나 받아칠 기운도 없었다.‘재윤이만 회복하면, 그때가 진짜 끝이야.’‘그땐 배씨 가문이랑 완전히 선 긋는 거야.’재윤은 분명 좋은 아이였다.하지만 설아 같은 사람을 인생에 하나 더 들일 여력은... 유하에게 없었다.잠깐 상대하는 건 가능해도 평생은 불가능했다.유하는 아직 오래 살고 싶었다....병원을 나서기 전, 유하는 다른 건물에 있는 박영심의 병실에도 들렀다.멀리서라도 한 번 보려고 했는데, 도착해서야 이미 퇴원해 집으로 돌아갔다는 말을 들었다.아마 오광진은 외부에 오래 두는 것이 불안했을 것이다.유하는 당시 박영심을 담당했던 의사를 찾아가 입원 중에 혹시 특이한 이상은 없었는지 물어봤다.이상이 없지는 않았다.하지만 듣고 보니 전부 예전부터 있던 문제들이었다.정신적 손상으로 오랫동안 약을 복용해 온 탓에 몸 상태가 온전할 리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 생긴 문제는 아니었다.그날 밤, 유하는 준서를 데리고 ‘대나무숲’ 주택단지 집으로 돌아왔다.그날 저녁, 설아는 약속대로 검은 장미가 들어 있던 유리 용기를 사람을 시켜 보내왔다. 덤으로, 필요하면 언제든 돕겠다는 말까지 남겼다.유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이미 사람도, 실험실도 다 알아봐 둔 상태였다.국정원 쪽에서 조용히 경호 인력을 붙여 준 덕분에, 유하는 준서를 집에 두고도 비교적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청산에게 한마디 남긴 뒤, 유하는 곧장 차를 몰아 고리대학교로 향했다.유하는 그 대학 출신이었다.동문도 많았다.각자 다른 길을 개척해 나간 사람도 있었고, 학교에 남아 교수로 지내는 사람도 있었다.공현주는 그중 하나였다.차가 정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유하는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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