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os los capítulos de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Capítulo 691 - Capítulo 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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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1화

현주는 늘 그랬다.여러 해가 흘렀지만 변한 게 하나도 없는 친구였다.겉으로 보면 현주는 늘어지게 앉아 있었다. 금방이라도 바닥에 주저앉아 기절할 것처럼 보이는 얼굴, 깊게 드리워진 다크서클, 하품을 달고 사는 태도. 하지만 전공 이야기가 나오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의과대학 시절, 벽돌처럼 두껍고 산처럼 쌓인 전공 서적들을 현주는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밤을 새우며 버둥거린 기억도 없이, 조용히, 너무도 자연스럽게 의대 수석을 차지했다. 천재라는 말 외에는 달리 설명되지 않았다.차는 익숙한 길을 따라 달리다 한 지점에서 멈췄다.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생명과학관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걷는 동안 유하가 간간이 몇 마디 던지면, 현주는 눈 밑을 문지르며 하품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형식적인 안부나 잡담 같은 대화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탈의실에서 가운으로 갈아입고 실험실에 들어서자, 아까까지 땅바닥에 붙어 있던 것 같던 현주의 텐션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유하에게서 유리 기구를 건네받은 현주는 안에 담긴 장미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편광 안경을 쓰자 흐릿하던 시선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이거야?”“응. 이 꽃에 남아 있는 향기 성분이랑, 꽃 자체 성분 전부.”유하의 대답이었다. 이 정도 실험은 유하도 할 수는 있었지만, 전문가라고 하기엔 약간 부족했다.하지만 현주는 달랐다. 의대 교수라는 타이틀뿐 아니라 생화학 쪽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장미 한 송이와 향수를 분석하는 일쯤은 문제가 될 리 없었다.성분을 분리하고, 비율을 파악하면 조성식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러면 코시오가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도 알 수 있을 터였다.현주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마스크와 뚜껑을 단단히 고정하고 필요한 도구들을 준비했다. 검은 장미를 조심스럽게 꺼내 부분별로 조금씩 분리한 뒤, 한쪽에서 조용히 실험에 집중했다.유하도 가만있지는 않았다. 전문가는 아니어도 보조 역할 정도는 충분히 해낼 수 있었다.실험실 안에는 흰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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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2화

휴게실, 단지 문 하나 사이에 둔 거리였다.문밖의 명훈은 유하를 보자 잠시 멈칫했다. 옆에 있던 사람에게 무언가 짧게 말하더니 이쪽으로 걸어왔다. 명훈의 손이 문을 두드리기 전, 유하가 먼저 문을 열었다.실내에는 여전히 현주가 자고 있었다.유하는 밖으로 나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마음속에는 수많은 추측과 경계가 엉켜 있었지만, 얼굴에는 자연스럽게 웃음을 걸었다. 목소리에도 약간의 반가움이 섞였다.“명훈 씨가 여기 웬일이에요? 정말 오랜만이네요.”“오랜만입니다.”지명훈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유하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이 자연스럽게 유하의 옆으로 내려갔다. 조명 아래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붉은 루비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며칠 전에 일이 좀 있어서 많이 바빴습니다. 아직 축하 인사를 못 드렸네요. 유하 씨 약혼...”‘그랬겠죠, 정말로 바빴겠네.’유하는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전혀 믿지 않았다.약혼식 당시 유하는 명훈과 코시오의 관계를 알지 못했다. 명훈이 소성란의 초대로 알게 된 인연이라는 점도 있었고, 형식적인 예의를 생각해 명훈에게도 초대장을 보냈다.하지만 명훈은 그날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 올 수 없었을 것이다.코시오가 벌였던 그 난장판을 생각하면, 더 일찍 국내에 들어와 있던 명훈이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려웠다.명훈은 오랫동안 유하를 속였다. 소개팅을 피하기 위한 핑계라며 접근했고, 유하는 최근에서야 직접 조사해 확인하지 않았다면, 향수 명가 출신이라는 점도, Y국에서 대학원을 다녔다는 그의 모든 이력이 전부 거짓일 가능성을 고려했을 것이다.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부분만큼은 사실이었다.생각해 보면 완전히 가짜일 수는 없었다. 신분을 전부 조작했다면 소성란을 속일 수 없었을 것이고, 애초에 유하 앞에 설 수도 없었을 것이다.‘하아. 또 하나, 얼굴만 멀쩡한 사기꾼이네. 다 한통속이야.’그 생각은 머릿속을 스치듯 지나갔고, 유하는 눈앞의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은 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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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3화

돌계단에 발을 올리는 순간, 유하의 어깨에 누군가 갑자기 툭 하고 손을 올렸다. 심장이 그대로 튀어나올 뻔했다.유하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눈 밑에 짙은 다크서클을 달고, 영혼이 반쯤 빠진 얼굴의 현주가 느슨하게 서 있었다. 하품까지 하나 덧붙이며.“어디 가?”“진짜... 먼저 인기척 좀 내주면 안 되냐?”유하는 가슴에 손을 얹어 진정하며 말했다. 현주가 예전부터 소리 없이 다가오는 버릇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적응이 안 됐다.“동료한테서 방금 전화 왔어.”현주는 핸드폰을 흔들며 벽에 등을 기대었다. 눈꺼풀은 반쯤 내려와 거의 실처럼 가늘어져 있었다.“내가 빌려준 3A 실험실에서 뭐 연구 중이냐고 묻더라.”유하의 눈이 순간적으로 커졌다.‘3A 실험실?’‘그거... 내가 부탁해서 빌린 데잖아.’이번엔 정말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지명훈, 진짜 사람 속 긁는 재주 하나는 타고났네.’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명훈은 유하의 아까 변명 같은 말을 믿지 않았고, 자리를 뜨자마자 오늘 대여된 실험실 목록을 확인했을 게 분명했다. 그 정도 확인은 어렵지도 않다.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실험실에서 뭘 했는지는... 결국 빌린 사람에게 직접 묻는 수밖에 없다.유하의 시선이 벽에서 미끄러질 듯 서 있는 현주에게 고정됐다.유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듯 현주는 눈도 뜨지 않은 채 말했다.“아무 말 안 했어.”“알아.”유하는 그걸로 충분했다.‘의심을 왜 해. 현주는 그런 거 안 하지.’“근데 하나만 물어봐 줄 수 있어?”유하는 한 박자 쉬고 말을 이었다.“아까 문 앞에서 말하던 사람 있잖아. 지명훈. 오늘 여기 와서 뭐 하는지, 무슨 연구하는지.”“가능해.”현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느릿하게 핸드폰을 꺼냈다. 전화를 거는 걸 보자 유하가 급하게 덧붙였다.“좀... 돌려서 물어봐. 너무 직설적으로 말고.”“알겠어.”전화받자마자, 현주는 아주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지명훈이라는 사람이 오늘 뭐 하러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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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4화

‘그런데 말이야, 현주는 이미 교수인데 이렇게 안 바쁜 게 말이 되나?’‘아니면 오늘 휴가라도 낸 건가?’유하는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았다. 벽에 걸린 시계를 한 번 올려다봤다. 오후 두 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몇 시간만 더 지나면 결과가 나올 거야.’‘지명훈이 여기서 뭘 했는지만이라도 알아낼 수 있으면 더 좋겠는데...’...시곗바늘이 곧 4시 반을 가리켰다.유하는 곧바로 현주를 깨웠다. 아직 잠이 가득한 얼굴의 현주를 거의 끌다시피 해서 실험실로 데려갔다. 예상대로였다. 실험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조금 전까지 바닥에 붙어 있던 사람처럼 보이던 현주의 눈에 다시 초점이 돌아왔다.현주는 먼저 실험대 위의 시약을 확인했다. 연한 노란색 액체 속에 검은 장미 꽃잎이 잠겨 있었다.수동 장비로 액체 반응을 먼저 관찰한 뒤, 현주는 분석기에 시료를 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출력된 보고서가 나왔다.“엉망이야.”현주는 보고서를 힐끗 보더니 그대로 유하에게 건넸다.유하는 받아 들었다. 보고서에는 각종 성분명과 화학 용어, 그에 대응하는 비율이 빼곡하게 정리돼 있었다. 페이지를 몇 장 넘길수록 유하의 미간이 점점 좁아졌다.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했다.너무 복잡했다.유하는 보고서를 읽고 의미를 이해할 수는 있었다. 문제는 성분이었다. 그녀는 머릿속에서 비율을 하나씩 재구성해 보자, 장미 자체에서 추출된 구조를 제외한 나머지, 즉 남은 향기로 분석된 성분들은 어떤 조합으로도 완성된 향수가 되지 않았다.“이 분야는 나도 잘 몰라.”현주는 한 손으로 실험대를 짚은 채 시약을 내려다보며 말했다.“보고서가 틀렸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아니라면... 하나가 아니라는 뜻이지.”유하가 고개를 들었다.“하나가 아니라는 건, 향수가 여러 개 섞여 있다는 말이야?”“가능성일 뿐이야.”현주는 단정 짓지 않았다.“장미에 남은 향기가 너무 뒤섞여 있어. 게다가 어느 정도 오염도 됐고. 가능하면 완제품 자체를 그대로 가져오는 게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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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5화

“누나.”생명과학관 유리문 앞, 네 단짜리 돌계단 위에 승환이 서 있었다. 유하를 보는 순간, 승환의 표정이 잠시 멍해졌다.유하도 그대로 굳어 섰다. 며칠째 이어진 일들로 가득 찬 머리가 잠깐 멈췄다가 한 박자 늦게 돌아왔다.‘아... 그러고 보니 승환이가 이 학교 다니고 있었지. 학부 2학년.’유하는 향수랑 장미 생각에만 정신이 팔려서 이걸 완전히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그리고 놀람이 가라앉자, 반가움이 먼저 올라왔다. 그녀는 승환을 본 것도 꽤 오랜만이었다. 마지막으로는 전화 한 통, 그것도 약혼식 초대 이야기였을 뿐이다. 유하는 자연스럽게 앞으로 다가갔다.“승환아!”몇 걸음 더 다가선 순간, 유하는 다시 멈췄다.밤이 막 내려앉은 시간이었다. 아까는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처마 밑 조명 아래로 들어오자 승환의 얼굴이 또렷해졌다. 원래도 예쁜 얼굴이었지만, 지금은 어딘가 축 늘어져 있었고 눈 밑에는 큼직한 다크서클이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유하가 그대로 놀라서 말을 내뱉었다.“너희들 다 왜 이래?”“저희요?”승환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그제야 유하는 알았다. 가까이서 들으니 목소리도 확연히 쉬어 있었다. 깊은 피로가 그대로 묻어나는 목소리였다.‘이상한데...’유하의 머릿속에 마지막으로 본 승환의 모습이 스쳤다. 놀이공원에서 박영심과 몰래 작별하던 날. 그날 이후로 승환의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고, 유하가 학교까지 찾아갔을 때는 만나지도 못했다. 그때는 조절해 보겠다고 했는데, 지금 보니 오히려 더 심해졌다.그 일 때문이라고 생각한 유하는 그대로 물었다.“그때 일 때문이야?”승환은 잠깐 멈칫하더니, 고개를 저었다.“아닙니다. 그냥... 요즘 학업이 좀 바빠서요.”더 말하고 싶지 않은 듯, 승환은 바로 화제를 돌렸다.“누나는 여기서 뭐 하세요?”승환의 시선이 생명과학관 쪽으로 향했다. 눈빛이 살짝 가라앉았다.“연구 좀.”승환에게는 굳이 숨길 생각이 없었다. 유하는 들고 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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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6화

승환이 입을 열자마자 수식과 이론이 줄줄 흘러나왔다. 몇 분도 안 돼서 유하의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대학 시절 유하의 수학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꽤 좋은 편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잘하는 학생’ 수준이었다. 연구 가설을 붙잡고 파고드는 단계는 전혀 다른 영역이었다. 전공도 맞지 않았고 그걸 따라갈 능력도 없었다.반면 승환은 아직 2학년임에도 불구하고, 손에 쥔 연구 주제 자체가 이미 학부 수준을 훌쩍 넘어 있었다. 지도교수와 함께 진행하는 연구였고, 집안 사정과 여러 제약만 아니었다면 승환은 해외로 나가서 진작에 학위를 마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지금 승환이 말하는 내용은 유하의 머릿속에 절반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수학은 확실히 다른 분야와 달랐다. 잘 배우는 방법은 있어도 그걸 가지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는 건 전적으로 재능의 영역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타고난 감각을 요구하는 학문이었다. 물론 재능이 있다고 해서 다 길이 열리는 건 아니었다. 승환 정도의 수준이라면, 맞닥뜨린 벽도 당연히 만만할 리 없었다.유하는 조금씩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이런 종류의 벽이라면, 사람을 저 정도로 말려버리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유하는 급히 손을 들며 말을 끊었다. 웃음은 어딘가 어색하게 굳어 있었다.“잠깐, 잠깐. 알겠어. 그럼 너는...”원래는 적당히 쉬엄쉬엄하라는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조명이 문제였는지, 시선이 자연스럽게 승환의 머리카락으로 내려갔다. 살짝 웨이브가 진 머리, 그 뿌리 쪽 몇 센티미터에 걸친 옅은 갈색, 금빛이 섞인 색감에 멍하니 시선이 멈췄다.유하는 무심코 말이 튀어나왔다.“너 머리 염색했어? 파마도 했고?”승환의 표정이 잠깐 굳었다. 이전보다 훨씬 컬이 살아 있는 머리카락을 한 번 만지작거리며, 짙은 눈동자는 계속 유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이내 고개를 저으며 낮게 말했다.“아닙니다.”염색을 한 게 아니라 염색을 안 한 상태였다. 자연 금발이었다.“누나, 왜 그러세요?”승환은 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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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7화

“응.”승환은 얌전히 꼬치에 꿴 고기를 빼서 먹다가, 스몰톡처럼 물었다.“누나 약혼식은... 잘 마쳤어요?”‘아니, 진짜. 지명훈도 그렇고,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왜 다들 ‘축하하다’보다 이 말을 먼저 물어보는 거야.’‘약혼식에 뭐, 사고 날 게 그렇게 많다고... 있긴 있었지...’유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잘 마쳤어.”“그렇군요.”승환은 고기 한 점을 삼키고 눈을 한 번 깜박였다.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다시 물었다.“그분은 누나한테 잘해 주세요?”“응, 잘해.”유하는 자연스럽게 웃었다.“예전에도 말했잖아. 이름은 임청산이야. 아직 만난 적 없지? 다음에 시간 맞으면 같이 보자.”유하는 승환을 늘 동생처럼 여겼다. 약혼식에 승환을 부르지 못한 건 오씨 가문 때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청산과 승환이 영영 얼굴을 못 볼 사이는 아니었다.“네. 좋습니다.”승환은 다시 꼬치를 집어 천천히 씹었다. 눈꺼풀이 살짝 내려간 채로 말했다.“누나는 오늘 왜 갑자기 여기 오신 거예요? 연락도 없이. 조금만 엇갈렸으면 못 만날 뻔했어요.”“연구할 게 좀 있어서.”유하는 짧게 답했다.박영심 이야기가 나올까 봐, 향수와 장미 이야기를 꺼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승환이 그쪽 이야기에 얼마나 예민한지 유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괜히 불안만 키울 필요는 없었다.유하는 더 깊이 설명하지 않고, 승환에게 얼른 먹으라며 재촉했다. 주먹밥도 하나 더 시켰고, 화제는 일부러 가벼운 쪽으로 돌렸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밤이 깊었다.승환의 표정이 조금은 풀린 걸 확인한 뒤에 유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학교 정문 근처, 가로수가 늘어선 길.앞서 걷는 승환의 깡마른 뒷모습을 보다가, 유하는 결국 한마디를 던졌다.“승환아.”승환이 멈춰 섰다.“힘들거나 기분 안 좋거나, 이유가 뭐든 혼자 끙끙대지 마. 다 괜찮아. 언제든 누나한테 연락해도 되고.”“연구가 너무 버거우면, 잠깐 내려놔도 돼. 네 행복이 제일 중요해.”저녁과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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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8화

좁은 욕실 안, 물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차가운 물줄기가 철사처럼 연이어 승환의 살짝 굽은 어깨와 등 위로 내리꽂혔다. 승환은 한 손으로 벽을 짚은 채, 고개를 조금 숙이고 서 있었다.찬물이 몸을 덮치고 있었지만, 감각은 둔했다.찬물의 냉기가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승환은 며칠째 계속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머릿속은 매일 납을 들이부은 것처럼 무겁고 둔했다. 잠들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완전히 깨어 있지도 못한 상태. 그 혼탁함을 밀어내기 위해 승환은 계속 찬물에 몸을 노출했다. 최소한 이렇게 하면, 의식이 조금은 또렷해질 수 있었다.하지만 오늘 밤만큼은 아마 다시 불면에 시달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승환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쳤다.차가운 물에 얼어붙은 듯 굳어 있던 몸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피로에 잠겨 있던 눈이 조금 열리며, 승환은 이제야 현실로 돌아온 사람처럼 손을 더듬어 수도꼭지를 돌렸다.차가운 물이 멎고, 따뜻한 물이 흘러나왔다.수증기가 피어올랐다.하얀 김이 욕실 안을 가득 채우며 승환의 얼굴 윤곽을 흐릿하게 가렸다.물소리는 멈추지 않았다....그 물소리 속에서 유하는 천천히 눈을 떴다.몽롱한 상태로 귀에 들어오는 소리를 빗소리로 착각하며, 한 손으로 둔통이 전해지는 이마를 짚고 작게 중얼거렸다.“비 오나...?”‘집 창문 닫아놨나? 바람 불면 감기 드는데... 잠깐, 아니지.’유하는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이마를 짚고 있던 손을 그대로 멈췄다.기억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현주를 찾아가 장미 향수 분석을 부탁했고, 생명과학관을 나서다 승환을 만났고, 그리고...유하는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시야에 들어온 건, 지나치게 간결한 인테리어의 방이었다. 이상하게 비즈니스호텔을 연상시키는 공간. 벽면 틈에 숨겨진 간접조명이 은은한 금빛을 흘리고 있었고, 나무 바닥은 지나치게 깔끔했다.유하는 방 안에서 유일하고, 가장 큰 가구인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흰색의 얇은 이불이 유하가 몸을 일으키자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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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9화

유하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솔직히 말하면, 지금 이 상황에서는 코시오에게 납치된 것보다는 차라리 승현의 짓이었으면 했다.적어도 승현이라면, 유하가 저지른 일들을 알아차렸다고 해도 함부로 굴지는 않았을 것이다. 협상의 여지도 있었고, 박영심이라는 공통분모도 있었다.하지만 코시오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유하의 머릿속에 장미 향수에 관한 화학 분석 보고서들과 실험 데이터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 자료들이 코시오 손에 넘어간다면... 그건 정말 끝장이었다.‘맞다, 자료.’유하는 번뜩 정신이 들었다.침대에서 내려갈 수 없는 상황에서 유하는 고개만 겨우 움직이며 방 안을 훑었다. 뭔가를 숨겨 두었을 법한 곳, 가방이나 서류를 놓아둘 만한 곳을 찾았지만, 방은 지나치게 비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그때, 뒤에서 소리가 났다.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유하의 등이 순간적으로 굳었다.지금 와서 다시 누워 자는 척을 할 수는 없었다. 유하는 목을 뻣뻣하게 세운 채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욕실 쪽을 바라보았다.심장이 한 번 크게 철렁 내려앉았다.‘끝났다.’코시오에게 붙잡혔을지도 모른다는 가설보다 훨씬 나쁜 추측이 현실이 되어 있었다.눈을 크게 뜨고 욕실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보는 동안, 눈이 점점 커졌다. 유하는 침대 옆에 서 있는 승환을 똑바로 보며 간신히 목소리를 짜냈다.“오승환.”방 안은 숨 막히게 조용했다.이미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확실하게 확인하고 나니 충격이 없을 수는 없었다. 유하는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이어지지 않았다.긴 침묵 속에서 먼저 움직인 건 승환이었다.승환은 침대 쪽으로 걸어왔다가 유하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리자 멈춰 섰다. 침대 옆에 선 승환이 고개를 조금 들었다.벽에 숨겨진 조명이 또렷하게 비추고 있었다.막 욕실에서 나온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게, 승환은 깔끔한 흰색 반팔 티셔츠와 무릎을 살짝 넘기는 검은 반바지 차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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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0화

‘오씨 가문의 어른이 시킨 걸까? 아니면 승환이 스스로 선택한 걸까?’“누나, 그렇게 보지 마세요.”승환이 몸을 조금 숙였다. 젖은 머리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하얀 이불 위에 스며들며 작은 얼룩을 만들었다. 옅은 연녹색 눈동자가 시선을 피하려던 유하의 눈과 정면으로 맞닿았다.“저도... 최근에야 알았습니다.”‘최근에?’유하는 입술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누나는... 제가 왜 그랬는지 안 궁금하세요?”승환이 조금 더 다가왔다.몸에 남아 있는 물기가 많아서인지, 숨이 닿는 주변 공기까지 눅눅해지는 느낌이었다.유하는 본능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참지 못하고 손을 들어, 아직 축축한 승환의 머리를 눌러 밀어냈다.너무 가까웠다.“그럼 말해 줄 거야?”유하가 물었다.승환은 밀려난 채로도 별다른 저항 없이 서 있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느긋했다.“그럼요. 누나가 뭘 물어보든 다 말씀드릴게요. 이유는 간단해요. 아버지가, 저랑 어머니를 D국으로 데려가겠다고 했거든요. 거기서 저는... 새로운 가족을 갖게 된대요. 완전한 가족을요.”‘역시 최악의 경우네.’유하의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너... 그걸 믿어?”‘불과 얼마 전까지 존재도 몰랐던, 소위 말하는 친아버지를?’하지만 곧바로 박영심을 향한 승환의 집착과, 가족이라는 말에 유독 흔들리던 모습을 떠올리자, 유하의 생각도 흔들렸다.‘코시오가 그렇게 말하면... 승환은 넘어갈 수도 있겠지.’‘하지만 그 인간을 어떻게 믿어?’유하가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하려는 순간, 승환이 먼저 말을 이었다.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믿고 말고가 중요한가요? 그 사람은 제 아버지잖아요. 자식이, 아버지 부탁을 거절할 수 있을까요.”아버지의 요청이었다.유하는 정말로 할 말이 없었다.이 논리는 반박하기가 어려웠다. 유하 역시 과거의 혈연을 스스로 끊어낸 사람이었지만, 승환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유하는 어린 시절 부모의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있었고, 그 끝이 잔혹했을 뿐이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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