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Chapter 101 - Chapter 110

144 Chapters

제101화

그의 말은 또렷하지만 한 글자 한 글자 최수빈의 귓가에 박혔다.모든 게 다 조롱이었다.단지 박하린을 위한 자리를 하나 얻겠다고 그는 주저 없이 100억을 내던졌다.매년 최수빈은 에둘러 어머니 회사에 힘을 좀 써 달라 부탁했지만 주민혁은 들은 척조차 하지 않았다.그는 그녀를 도와줄 마음이 전혀 없었지만 박하린을 위해서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최수빈에게는 선물 하나 사준 적도 없으면서 투자는커녕 손길조차 내민 적이 없었다.이번에도 주민혁은 협상 같은 건 하지 않고 그저 조건을 내걸며 마치 최수빈이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 단정하는 태도였다.지금 최수빈의 상황에서 그 돈은 절실했고 하루라도 빨리 필요했다.하루만 늦어져도 회사는 버티기 힘들기 때문에.그녀가 잠자코 있자 주민혁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140억, 내일 바로 입금할게.”최수빈의 표정은 싸늘히 굳어버렸고 핏기가 가셔 하얗게 바래갔다.이건 노골적인 모욕이었고 돈으로 사람을 짓누르는 행위였다.그런데도 주민혁은 너무도 정확히 최수빈의 ‘급소’를 저격했다.무엇이 필요한지, 어디를 찌르면 흔들리는지 전부 알고 있었다.앞서 그녀의 투자자를 가로챈 것도 그였다.그러고는 곧바로 박하린을 위해 돈을 내밀었다.최수빈은 조금씩, 그러나 단단히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그리고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좋아요. 어차피 명분만 필요하니까.”사실 업계 회의에 참석한다고 해도 이런 규모의 투자를 유치하기란 쉽지 않았다.무엇보다 어머니의 회사는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그런데 지금 스스로 굴러들어 온 기회를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이 투자를 받지 못하면 회사는 운영조차 불가능했고 병원에 누워 있는 외삼촌 또한 돈이 시급했다....다음 날, 최수빈은 려운에게서 걸려 오는 전화를 받았다.“사모님, 회사로 한번 와서 계약서에 서명하시죠. 서명만 끝나면 바로 회사 계좌로 입금됩니다.”그녀는 곧장 주상 그룹으로 향했다.그런데 로비에서 예약이 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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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화

최수빈은 언제나 선을 지키는 사람이었다.과거 주상 그룹에서 주민혁의 비서로 일할 때조차 그의 사무실은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공간으로 여겼다.억지로 들어갈 때마다 돌아오는 건 늘 불쾌감이 묻은 주민혁의 표정뿐이니 지금 더더욱 발을 들일 이유가 없었다.박하린도 굳이 강요하지 않고 물러났다.홀로 남은 최수빈은 약을 꺼내 손목에 바르기 시작했다.하루 세 번 사용해야 했지만 아침에는 바르지 못했었다.효과는 확실했다.몇 번 쓰지도 않았는데 손목에 남았던 상처 자국이 눈에 띄게 옅어지고 있었다.막 약을 덮어두려는 순간, 박하린이 커피잔을 들고 들어왔다.박하린의 시선은 재빨리 약통으로 향했다.“이거 제가 외국에서 들여온 약 아니에요? 어제저녁부터 안 보여서 찾고 있었는데... 여기 있었네요?”최수빈의 행동은 순간 멈췄다.주민혁이 이 정도로 무심할 줄은 예상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자신과 박하린의 사이가 어떤지 뻔히 알면서도 굳이 그녀의 약을 내밀어 모욕을 준 것이다.최수빈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약통을 모조리 집어 들어 옆에 있는 휴지통에 던져 버렸다.그리고 박하린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주민혁 씨가 저한테 준 순간, 그건 제 거예요. 필요하면 박하린 씨가 주워 쓰면 되겠네요.”말을 끝내자마자 최수빈은 곧장 등을 돌려 나가버렸고 박하린의 표정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가 방금 내던진 건 단순히 약이 아니라 그 약을 건넨 남자의 마음이기도 했다.휴지통 속에서 건질 게 대체 뭐가 있겠는가?박하린은 순간 얼어붙었다.이내 의미를 깨닫자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갔다.‘지금 돌려서 나를 조롱하는 거야?’...회의를 마친 주민혁이 나왔고 계약서에 서명하는 절차는 신속했다.최수빈은 말 한마디 보태지 않고 계약서를 받아 들자 곧장 떠났다.모든 게 원활했지만 그 짧은 순간조차 둘 사이는 낯선 사람보다 더 냉랭했다.점심에는 진승우가 합류했다.오늘은 운상 그룹의 향후 발전 계획과 대출 심사 건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세 사람은 별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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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3화

그날 밤, 최수빈은 어머니 이혜정에게 걸려 오는 전화를 받았다.140억이 이미 입금되었고 이제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 있다는 소식이었다.입술을 살짝 눌러 깨물고 있던 최수빈은 속으로 생각했다.‘역시 돈을 보낼 때는 엄청 빠르네.’“투자자가 민혁이던데 혹시 너...”이혜정은 말끝을 흐렸지만 최수빈은 담담하게 받아쳤다.“주민혁 씨는 박하린 씨를 위해서라면 돈을 아끼지 않아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예요. 박하린 씨가 내일 열리는 육천 그룹 산업 회의에 들어갈 수 있도록 자리 하나를 사준 거죠.”이혜정은 곧 상황을 이해한 듯 숨을 깊게 들이켰다.“그래도 이건 부부의 공동 재산인데 제멋대로 쓸 수는...”“법정에서 따지면 되죠.”최수빈은 컴퓨터 화면에 띄운 계산 프로그램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느릿하게 말했다.“저는 제 몫만 챙길 거예요. 더도 덜도 없이 아이 양육비랑 제가 지난 5년 동안 쏟아부은 만큼 받을 거예요. 그것만 받고 깨끗하게 끝내면 돼요.”이혜정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어릴 때부터 자기 뜻이 확고한 아이였으니까....업계 포럼 당일.날씨는 화창했고 기온은 무려 37도까지 치솟았다.어느덧 여름이 성큼 다가온 날씨였다.최수빈은 집에서 나오며 이미 육민성의 차가 문 앞에 와 있는 걸 발견했다.오늘은 그가 직접 내부 통로로 인도할 예정이었다.“좋은 아침이에요.”최수빈은 손에 든 도시락 상자를 내밀며 조수석 문을 열었다.“아침에 예린이 밥 차리면서 선배 것도 챙겼어요. 먹고 가요.”“와, 뭐야? 갑자기 이런 서프라이즈는?”육민성이 웃으며 받아서 들었다.“오늘은 아침 굶는 줄 알았는데.”식사를 마친 뒤, 차는 곧장 행사장에 도착했다.이미 많은 인사들이 속속 도착해 있었고 걸음을 옮기던 와중 육민성이 말했다.“오늘은 서갑수 씨가 와서 대표로 연설을 한다더라.”“그래요?”최수빈은 그 말에 살짝 놀랐다.그는 국가항공우주국 소속으로 이번에 산업 정책과 향후 방향성을 이야기하러 직접 오는 것이었다.하지만 서갑수가 이런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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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4화

다행히 이제라도 돌아왔으니 아직 늦지 않았다.육민성은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최수빈을 향해 말했다.“아버지가 잠깐 오라고 하시네. 너는 여기 좀 둘러보고 있어. 금방 올게.”최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일 보세요.”육민성이 자리를 비우자 최수빈은 전시품들을 계속 둘러보았다.그때, 문 쪽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어? 주 대표님 오셨네? 옆에 있는 여자는 여자 친구인가?”최수빈은 본능처럼 고개를 돌렸다.검은 슈트 차림의 주민혁은 여전히 차분하고 기품 있었다.그 옆에는 박하린이 파란 드레스를 입고 서 있었다.드레스의 무늬와 색이 주민혁의 넥타이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마치 커플룩처럼 보였다.사람들은 입을 모아 감탄하기 시작했다.“봐, 커플룩까지 맞췄잖아. 완전 잘 어울린다.”최수빈의 입꼬리는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예전 그녀도 일부러 주민혁과 비슷한 계열의 옷을 입고 맞춰보곤 했었다.하지만 돌아온 건 그가 무심히 내뱉은 한마디.“그런 거 보기 안 좋아.”그 후로는 일부러라도 같은 색을 피했었다.처음에 주민혁이 싫어하는 줄 알았다.하지만 지금 보니 그는 그저 최수빈과 맞추고 싶지 않았던 거다.최수빈은 시선을 돌렸다.이제 주민혁이 누구와 어떻게 맞추든 더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었다.그녀는 다시 전시품을 바라봤다.그곳에는 업계의 최신 장비와 시스템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그러다 눈길이 멈춘 곳은 바로 자신이 처음 개발했던 무인기였다.그 시절, 날밤을 새워가며 만들었던 설계.짧은 항속 거리와 부족한 지속력을 해결하고 전술적 활용성을 대폭 높였던 모델이었다.결국 군에서 실전에까지 투입됐던 그 성과물.최수빈은 무심결에 그 작품을 만지고 싶어 손까지 덜덜 떨며 다가갔다.하지만 순간, 누군가 손목을 거칠게 낚아챘고 최수빈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마주친 건, 여유로운 미소를 띤 박하린이었다.“최수빈 씨, 이런 건 함부로 만지면 안 돼요.”그녀는 일부러 밝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이게 얼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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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화

처음부터 최수빈의 관심은 서갑수에게 있지 않았다.그런 거물급 인물은 업계 사람들 모두가 붙잡고 싶어 하는 대상일 뿐, 굳이 무리해서 다가갈 필요는 없었다.그녀의 목표는 오히려 서갑수의 곁을 지키는 두 비서였다.국가급 지도자의 비서는 높은 행정급수를 지닌 실세, 업계의 숱한 사람들이 기회를 노리고 있었지만 그들은 줄곧 무대 뒤 대기실에만 머물렀다.방이 어디인지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감히 먼저 찾아 들어갈 수 있는 이는 없었다.반면, 박하린의 목표는 분명했다.바로 511 연구소의 한재준.아직 자신의 회사를 세우지 못한 그녀는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싶어 했다.예전에 511 연구소 공개 행사에서 서로 안면을 튼 적은 있으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어떻게든 접점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그렇게 어렵게 찾아낸 한재준은 차를 홀짝이며 앉아 있었다.박하린은 환한 웃음을 띠며 다가갔다.“원장님, 안녕하세요. 저희 예전에 뵌 적 있죠?”그는 눈길을 한번 주고 예의상 고개를 끄덕였지만 열의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이런 자리까지 쫓아올 줄이야.’한재준은 내심 그렇게 생각했다.허지만 박하린은 미소를 유지한 채 말을 이었다.“저 해외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고 돌아왔어요. 앞으로 더 깊이 공부하고 싶어서요. 늘 존경해왔습니다. 원장님이 저희 항공우주를 한 단계 이끄신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까요.”“과찬입니다.”한재준이 손을 내저으며 대답하자 박하린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섰다.“사실 최근 준비 중인 프로젝트가 있는데 좋은 스승이 필요합니다. 원장님께 조언을 구할 수 있다면...”말끝에 담긴 속내는 분명했다.그가 자신을 제자로 받아만 준다면 그 길은 순탄할 터였다.마치 육민성이 육천 그룹을 등에 업고 천공 연구원을 키워낸 것처럼.곧 한재준은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제가 가르쳐드릴 건 없습니다.”사실상 이건 거절이었기에 박하린은 재빨리 그를 붙잡았다.“원장님, 도대체 왜...”한재준은 다시 손을 저었다.“당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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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화

전화를 끊고 돌아서려는 순간 박하린이 뜨끈한 찻잔을 들고 재빠르게 다가와 그녀 앞을 막아섰다.“아까부터 여기서 한참 서 있던데 혹시 민혁 오빠 찾으러 오신 거예요?”박하린이 찻잔을 내밀며 웃었다.“이거 좀 마시면서 해요. 이렇게 더운 날에 더위 먹으면 안 되잖아요.”최수빈은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뜨거운 차를 내려다봤다.‘이걸 마시면 입천장이 홀랑 데이겠네. 일부러 이러는 건가?’그녀는 싸늘한 눈빛으로 박하린을 보며 입을 열었다.“저희 이렇게까지 친한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 굳이 볼 때마다 일부러 인사 건네지 않아도 돼요. 불편하니까.”말을 마치자마자 돌아서려 했지만 박하린이 입을 열었다.“요즘 집에 잘 안 들어가져? 제가 계속 시후를 보고 있어요. 시후는 최수빈 씨가 해준 새우 요리를 먹고 싶다고 하던데 그거 만드는 방법 좀 알려줄래요?”그 말에 최수빈의 발걸음이 순간 멈췄다.그제야 그녀는 박하린의 의도를 알아챘다.‘결국 또 같은 말이구나. 네가 없는 집에 내가 자주 드나든다는 걸 은근히 과시하려는 거지.’이미 신혼집의 비밀번호는 바뀌었고 안방에 걸렸던 웨딩사진도 내려졌다.침대까지 몽땅 교체해 버린 박하린은 그렇게 집 안 곳곳에서 최수빈의 흔적을 지워가고 있었다.“가르쳐줄 수 있죠?”박하린은 멈칫한 그녀를 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지난번에는 알레르기 반응 때문에 고생했잖아요. 저는 아직도 마음이 쓰여서...”“사실 전 시후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아요. 최수빈 씨한테서 배울 수 있으면 좋겠어요. 언제든 집으로 와도 돼요. 저는 항상 환영이니까.”“항상 환영이라고요?”최수빈은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었다.마치 그 집이 자신과 주민혁의 신혼집인 양 당당하게 말하는 꼴이 보기 싫었다.“제가 요즘 시후랑 오래 함께 지냈으니 당연히 애정도 생겼겠지만 그렇다고 최수빈 씨는 아이를 이렇게 내버려둬도 되나요?”도덕과 예의, 그리고 아이에 대한 사랑을 들이밀며 압박해 오는 박하린을 최수빈은 싸늘하게 식은 눈빛으로 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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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화

최수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화장실로 향했다.지금 한시라도 빨리 가슴에 쏟아진 뜨거운 차를 조금이라도 처리해야 했다.거울 앞에 서니 쇄골 아래 피부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옷깃이 스치기만 해도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최수빈은 애써 옷깃을 정리했지만 지금으로서는 뾰족한 수가 없기에 결국 회의가 끝난 뒤에야 연고를 사서 바를 수밖에 없었다.한편, 육민성은 주차장에서 두 명의 비서와 접촉해 명함을 교환하고 연락처를 확보했다.인맥 관리에 있어서는 역시 그가 한발 앞서 있다는 걸 최수빈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행사가 끝나고 육민성은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었고 차 안에서 그는 문득 최수빈의 쇄골에 번진 붉은 기를 눈치챘다.“다친 거야?”안전벨트를 잡던 최수빈의 손이 살짝 멈칫했지만 이내 무심한 듯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별건 아니고 그냥 실수로 다친 거예요. 집에 가서 연고 바르면 돼요.”사실 이렇게 눈에 띄게 붉은 자국은 누구라도 알아볼 만했다.그런데도 주민혁은 모른 척한 걸까, 아니면 일부러 외면한 걸까.그 순간, 최수빈의 입가에 비웃음 같은 웃음이 스쳤다.육민성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병원에 가는 게 낫지 않을까? 내일은 시스템 정식 테스트잖아. 체력 안배도 필요해.”그녀가 천공 연구원에 합류한 지도 한 달 가까이 지났다.그리고 메인 설계자로서 정밀도가 부족해 늘 고질병처럼 문제를 일으키던 우주 로봇 팔을 개선하고 위성 궤도 데이터 수집 효율을 크게 높이는 신시스템을 고안했다.내일은 그 결과를 공식적으로 시험하는 날이었다.“테스트 하루 미루고 좀 쉬는 게 어때?”하지만 최수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괜찮아요. 지금은 성과를 직접 확인하고 싶어요. 헛수고로 끝나진 않았다는 걸 증명하고 싶거든요.”...다음 날 아침.그녀는 주예린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다가 그곳에서 주시후와 마주쳤다.가방을 멘 아이는 고개를 홱 돌리며 콧방귀를 뀌더니 퉁명스럽게 교실로 들어가 버렸다.이미 마음이 되돌려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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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화

그동안 모두가 프로젝트에 매달려 밤낮 없이 달려왔기에 휴식이라고는 제대로 가져본 적도 없었다.그래서 이번 단합 대회는 말 그대로 숨 돌릴 기회였다.회의가 끝난 최수빈은 이혜정에게서 걸려 오는 전화를 받았다.투자 문제와 관련해 주민혁과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자리를 마련하라는 것이었다.투자금이 들어온 이상, 세부 실행안은 투자자와 맞춰가야 했다.전화를 끊은 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주민혁의 번호를 블랙리스트에서 해제했다.그리고 오랜만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상당히 오랜 시간 연결음이 울린 끝에야 주민혁이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귀에 익으면서도 여전히 싸늘하고 무심한 목소리.이제는 익숙해진 태도였으니 최수빈은 간단히 요점을 말했다.“내일 시간 돼요? 저희 엄마가 투자 건으로 이야기 나누고 싶어 하세요.”“바빠. 나중에 얘기하자.”단칼에 한 거절에 최수빈은 미간을 찌푸리며 구체적인 시간을 물어보려 입을 열었다.그런데 그 순간, 전화기 너머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민혁 오빠, 물 받아놨어요. 씻으러 안 오세요?”곧 그는 낮게 대답했다.“응.”뚝!통화는 그대로 끊겼고 휴대폰을 쥔 최수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그리고 곧, 이런 생각이 들었다.‘같이 씻는 건가?’‘그러니까 나한테 그렇게 건조하고 무심했구나. 괜히 내가 방해꾼처럼 끼어든 셈이네.’최수빈은 전화번호를 이혜정에게 넘겨주며 직접 연락해 약속을 잡으라고만 전했다.다음 날.최수빈은 주예린를 데리고 회사 단합 대회에 참석했다.요즘 일에 치여 아이와 제대로 시간을 보내지 못했던 터라 이번 기회가 소중했다.주말조차도 연구실에서 밤을 지새우던 날이 많았다.‘앞으로는 아이의 일상을 지켜줄 수 있는 균형을 찾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예린이가 성장하는 모습을 또다시 놓치게 되겠지.’단합 대회 장소는 휴양에 탁월한 리조트였다.승마, 암벽, 온천, 실내 스키장까지 갖춘 호화로운 시설.마침 햇살은 따사롭고 잔디는 푸르게 물들어 아이들과 연을 날리기에 제격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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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화

주민혁의 눈빛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그 눈빛은 마치 자기 딸을 보는 게 아니라 낯선 아이를 대하는 듯했다.“아.”아이는 자신이 또 잘못 불렀다는 걸 깨닫고는 두 손을 꼭 쥔 채 어쩔 줄 몰라 고개를 숙였다.“야, 누가 네 아빠야? 함부로 부르지 마!”주시후가 뒤에서 뛰어나오더니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아빠는 네 아빠가 아니라 내 아빠야. 그러니까 가까이 오지 마!”최수빈은 표정이 굳은 채 황급히 달려가 딸을 부축했다.“많이 아프지?”주예린의 팔꿈치와 무릎은 심하게 까져 피가 배어 나오고 흙까지 묻어 있었다.아이는 울음을 꾹 참았지만 엄마를 본 순간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안 아파요.”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목소리는 떨렸다.박하린은 고개를 숙이며 주시후를 달랬다.“그만해, 함부로 말하지 마.”하지만 주시후는 입술을 삐죽이며 시선을 돌려버렸다.어차피 아이는 ‘엄마’가 싫었다.집에 있을 때마다 뭐든 못 하게 막고 먹는 것도 공부도 늘 간섭만 했기에 그녀는 늘 자기를 괴롭히는 존재라고 생각했다.“언니, 애 데리고 오셨네요?”박하린이 주시후의 손을 잡으며 환하게 웃었다.“마침 잘됐네요. 남매끼리 같이 놀면 좋잖아요.”“그러게.”옆에서 진승우까지 비웃듯 말을 보탰다.“아이 보는 일은 최수빈 씨가 제일 잘 하지 않습니까? 본업이 가정주부시잖아요.”최수빈은 그저 차가운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이 사람들, 정말 귀신 어디서든 나타나네.’아직 대꾸도 하기 전 주민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다음엔 조심해.”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경고처럼 들렸다.이번은 그냥 넘어가 주지만 다음번엔 다르다는 뉘앙스였다.최수빈이 말하려는 순간, 먼저 입을 연 건 주예린이었다.“죄송해요, 아저씨. 제가 못 봤어요.”비록 부딪치며 다친 건 아이였지만 주예린은 먼저 사과했다.주시후는 금세 팔을 벌리며 칭얼댔다.“아빠, 저 힘들어요. 안아주세요.”주민혁은 시선을 떨구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아이를 들어 올렸다.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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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0화

최수빈은 땀으로 흠뻑 젖은 주예린의 얼굴을 수건으로 닦아주고 아이패드로 게임을 하겠다기에 옆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줬다.저녁 무렵, 육민성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우리 캠핑장 쪽에서 바비큐 시작하려고 하는데 어디야? 같이 먹자.”최수빈은 주예린의 손을 잡고 캠핑장으로 향했다.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들로 북적였고 바비큐 파티를 즐기는 이들로 가득했다.겨우 육민성 일행을 찾았는데 그 앞을 지나려니 주민혁과 박하린 무리가 자리하고 있었다.그들의 불판을 지나쳐야 했다.박하린은 주민혁 옆에 바짝 붙어 앉아 있었다.“민혁 오빠, 지난번 손 다친 게 아직도 아프네요.”최수빈의 시선이 그녀의 손에 닿았고 아직 붕대가 감겨 있었다.그리고 주민혁은 묵묵히 박하린을 챙기며 고기를 구워주고 있었다.그 시선에는 자신이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다정함이 담겨 있었다.최수빈은 조롱 섞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지난날, 두 아이와 함께 고열에 시달리다 병원에 실려 갔을 때조차 주민혁은 나타나지도, 안부 한마디 묻지도 않았던 남자였다.그런 그가 지금은 이렇게 세심히 챙기는 모습이 참 우습게 느껴졌다.최수빈은 주에린을 데리고 육민성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어딜 가도 꼭 있네요.”뒤에서 들려온 비아냥거리는 목소리, 주인공은 진승우였다.“맨날 일부러 쫓아다니는 것 같은데... 아주 웃겨 죽겠어요.”박하린도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저쪽은 육 대표님 회사 사람들 같네요. 어제 새 시스템 발표해서 다들 협력하겠다고 줄 선다던데요?”진승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육 대표님은 확실히 인정할 만하죠. 업계에서도 최고니까.”곧 박하린은 먼지를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층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육 대표님, 이렇게 우연히 만났는데 같이 앉으실래요?”육민성은 이내 최수빈을 바라봤지만 그녀는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그때 송미연이 박하린을 째려보며 쏘아붙였다.“같이는 무슨! 전 당신만 보면 체하거든요.”그 말에 박하린의 표정이 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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