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Chapter 251 - Chapter 260

604 Chapters

제251화

원금영의 목소리는 전보다 한층 더 허전하게 들렸다.“수빈아, 요즘 네가 바쁘다지만, 민혁이보다 더 바쁜 일이 어디 있겠니?”최수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일부러 본가를 피하고 있었다. 주민혁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고 주씨 집안 사람들과 얽히고 싶지도 않았다.하지만 이미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이상,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날이 올 터였다. 그동안 여러 차례 거절해 왔지만 오늘은 더 이상 피할 수 없을 듯했다.그녀가 아무 말 없이 침묵하자, 원금영의 마음은 더 깊이 무너졌다.“지난번에 예린이가 다쳤을 때, 정말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단다. 그 일 이후로 넌 본가에 발길을 끊었지. 박씨 집안 장례에도 예린이를 데려오지 않았고....”원금영의 목소리는 애써 담담했지만 죄책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날 아이가 다친 뒤로 하루도 편히 잠든 적이 없었다. 혹여 손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제 목숨으로도 갚지 못할 거라 여겼다.최수빈이 일부러 주예린을 데려오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라 짐작했다.“이번엔 혼자 와도 된다. 예린이는 데려오지 않아도 괜찮아.”원금영은 끝내 물러섰다.최수빈은 그녀를 친할머니처럼 따르고 있었다. 비록 주민혁과의 관계는 이미 틀어졌지만 자신에게 진심을 다한 그녀를 차갑게 끊어낼 수는 없었다.최수빈은 한숨을 내쉰 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퇴근 후에 들를게요.”퇴근길, 차를 몰고 본가에 도착한 최수빈은 대문 앞에 세워진 주민혁의 차를 먼저 보았다.집 안에 들어서자, 진하게 풍기는 삼계탕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마당에선 주민혁이 가위를 들고 묵묵히 가지를 치고 있었다. 그는 편안한 옷차림이었지만 큰 키와 곧은 자세는 여전히 눈길을 끌었다.그는 늘 그렇듯 서늘하고 담담해 보였다.최수빈은 못 본 척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서로 대화할 필요도, 인사할 이유도 없었으니까.“본가에서 이렇게 차갑게 구는 게 정말 타당하다고 생각해?”등 뒤에서 들려온 낮고 담담한 목소리에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남자는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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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2화

최수빈은 그가 선심 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그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마당에서 가지치기를 마친 주민혁은 곧 그녀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왔다.거실 소파에 앉은 최수빈은 원금영과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랜만의 재회라 원금영은 이것저것 안부를 물었다.그 옆에 앉아 있던 주나연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콧방귀를 뀌었다.“모르는 사람이 보면 올케가 진짜 친손녀인 줄 알겠네요.”원금영은 곧장 주나연을 쏘아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수빈이는 내 친손녀나 다름없다.”“그럼 올케가 친손녀면 민혁이는 뭔데요?”주나연이 비아냥거렸다.바로 그때, 바깥에서 들어온 주민혁이 손에 쥔 가위를 내려놓으며 무심히 대답했다.“나는 손녀사위지.”짧은 한마디에 원금영의 얼굴에는 금세 웃음꽃이 피어났다.“그래, 그나마 네가 눈치라는 게 있구나.”최수빈은 그저 입꼬리를 희미하게 올렸다가 곧 시선을 거두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려는 가식일 뿐이었다.주나연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차갑게 웃었다.“계속 그렇게 해. 얼마나 오래 갈지 두고 볼 거야.”겉만 번지르르한 부부가 언제까지 이 연극을 이어갈 수 있을까.“엄마!”주시후가 뛰어오며 환하게 그녀를 불렀고 최수빈은 미소만 지었을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주민혁은 잠시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더니, 이내 시선을 거두며 아무 일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주시후는 개의치 않고 혼자 장난감을 꺼내 놀았다.아이를 ‘잘’ 가르친 결과였다. 사적으로는 박하린을 엄마라 부르면서도, 사람들 앞에서는 여전히 최수빈을 엄마라 불렀다.저녁 시간.원금영은 늘 그렇듯 둘을 나란히 앉혔다. 하지만 자리만 가까웠을 뿐, 한마디도 오가지 않았다.도우미가 삼계탕을 식탁에 올려놓자, 원금영은 최수빈 앞에 그릇을 놓아주었다.거리가 멀어 손을 뻗으려던 순간, 주민혁이 먼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뜨거운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최수빈이 놀라 손을 빼려 할 때, 그가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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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3화

최수빈은 차에 올라타고 저택을 빠져나갔다.“네 와이프도 참, 제법 큰소리치네. 너한테 대체 무슨 태도야?”등 뒤에서 주나연의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왔다.주민혁은 고개를 돌려 무심히 그녀를 바라봤다. 오늘따라 주나연도 본가에 머물 생각은 없는지 차로 향하다가, 방금 장면을 목격한 듯했다.손끝으로 네일을 들여다보던 그녀는 비릿하게 웃었다.“그러니 네가 다른 여자한테 눈길 준 거지.”그 말에 고개를 들어 주민혁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올케 태도, 예전이랑은 완전히 달라졌잖아. 벌써 바람난 거 아니야? 결혼하고도?”예전의 최수빈은 주민혁의 말이라면 고분고분 따르며, 바라보는 눈빛마다 애정과 애틋함이 묻어났다.그 모든 걸 주씨 집안 식구들은 다 지켜봤는데 이제는 싸늘하기 짝이 없는 태도뿐이었다.사람이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을까.주나연은 동생이 이 변화를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두 사람의 모습은 그저 남남에 불과했으니까.주민혁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오늘따라 한가한가 보네.”“흥.”주나연은 코웃음을 치며 차로 걸음을 옮겼다.“난 이런 집안일에 휘말릴 생각 없거든?”차 문을 열며 마지막으로 한마디 던졌다.“단 하나, 주씨 집안 명성에 먹칠은 하지 마. 아빠가 평생 쌓아온 걸 절대 망쳐선 안 돼.”며칠 뒤, 천공의 두 협력사가 연달아 넥스트 테크로 넘어갔으나 제작 단계는 줄곧 막히기만 했다.이 소식을 들은 송미연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탁 내리치며 분노를 터뜨렸다.“제길! 저 여자가 뭐라고 이렇게 날뛰는 거야!”최수빈이 손대는 건 뭐든 가로채려는 모양새였다.어쩔 수 없이 최수빈은 센터 기업에 전화를 걸어 다음 날 미팅을 잡았다. 그곳은 군수용 원자재를 공급하는 회사라 조건도 까다롭고 가격도 높아, 웬만한 기업은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지금은 원자재 수급이 막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과 협상을 마쳐야만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제작 단계로 들어갈 수 있었다.최수빈은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회사 건물 밖을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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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4화

“박하린이야?”육민성이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네.”최수빈은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피식 웃었다.“방금 전화해서 뭐라 했는지 알아요? 협력사 두 곳을 연달아 따냈다며, 우리더러 축하 자리에 오라고 하더라고요.”“허.”육민성이 코웃음을 쳤다.“가로챌 능력은 있어도 지켜낼 능력이나 있을까.”이렇게 빨리 자랑하다니,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그녀가 대단한 성과라도 낸 줄 알 것이다.최수빈은 가볍게 웃었다.“두고 보면 알겠죠.”그 시각, 박하린은 전화를 끊자마자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옆에 앉아 있던 진승우가 다급히 물었다.“어때요, 온대요?”“안 온대요.”진승우는 비웃으며 와인잔을 들어 올리더니 다리를 꼬고 여유롭게 웃었다.“그게 정상이죠. 무슨 낯으로 오겠어요? 제대로 된 실력도 없는 주제에 협력사들이 왜 굳이 최수빈을 택하겠어요? 본인도 잘 알겠죠. 괜히 나타났다간 망신만 살 거라는 거.”그는 주민혁을 바라보며 말했다.“형, 이혼한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그런 여자를 집안에 두면 체면만 구겨요.”진승우는 잔에 남은 와인을 삼키고는 고개를 저었다.“똑같이 기술 개발 회사인데, 넥스트 테크는 개업하자마자 계약을 줄줄이 따내고, 천공은 핵심 기술을 쥐고도 하나 제대로 못 해내잖아요. 이건 회사 대표 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예요.”“혹여 협력사들을 속여 허울뿐인 성과를 내세우는 건 아닌가 싶어요.”박하린은 그 말들을 차분히 듣고 있다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그 정도는 아니에요. 다만 누군가 발목을 잡고 있을 뿐이죠.”육민성의 능력은 업계에서 이미 인정받고 있었고 천공의 성과도 허상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에 밀려났을 것이다.박하린은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가, 옆에 앉은 주민혁을 돌아봤다.“민혁 오빠, 오빠는 어떻게 생각해? 천공이 정말 이 프로젝트를 끝까지 끌고 갈 수 있을까? 원자재 협상에 막혀 제작이 늦어지고 있는데, 납품 시한이라도 어기면 우리 쪽에도 곧장 타격이야.”주민혁은 담배를 들어 올리더니 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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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5화

“아직 자재상 문제 못 푸셔서 고민이 크신가 봐요?”박하린은 육민성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듯, 최수빈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말을 꺼냈다.“지난번 제가 드린 제안, 어떻게 생각하셨어요?”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눈치가 빠른 이들이라, 박하린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다. 그녀는 대놓고 이간질을 시도하고 있었다.하지만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순수한 연구자라기보다는 상업적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들이었다.이미 511연구원의 연구원으로 자리 잡은 육민성이 굳이 회사를 차린 것도, 결국은 돈과 생존 문제 때문이었다.그렇다면 그는 당연히 회사의 존망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스스로도 어떤 선택이 옳은지는 알고 있을 터였다.육민성이 물었다.“뭘 생각하라는 건가요?”박하린은 잠시 말을 멈췄다.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모른 체하며 넘어갈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그럼에도 그녀는 별다른 동요 없이, 곧 태연하게 표정을 고쳤다.“어차피 저희는 이미 협력 관계잖아요. 자재 문제를 끝내 해결 못 하신다면, 저희가 공급해 드릴 수 있어요. 물론 그만큼 수익의 일부는 양보하셔야겠지만요.”“고맙습니다만,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육민성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박하린은 곧바로 최수빈에게 시선을 옮겼다.최수빈이 아름답다는 건 인정해야 했다. 육민성이 저토록 고집을 꺾지 않는 것도 분명 저 여자 때문이겠지.“수빈 씨, 본인 욕심 때문에 괜한 사람 끌어들이지 마요. 애초에 어울리지도 않는 판이에요. 괜히 버티다 빚만 떠안고, 딸 학비조차 감당 못 하게 될 수도 있어요.”그녀는 안 좋은 말을 먼저 꺼냈다.“우리 사이를 생각해서 드리는 말이에요. 그 지긋지긋한 계약, 저는 무효로 해드릴 수도 있어요. 육 대표님 같은 인재가 괜히 발목 잡히는 건 보고 싶지 않으니까요.”최수빈을 밀어내고 육민성만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계산이었다.연달아 협력사들과 계약을 체결한 그녀는 이제 승승장구했고, 반대로 최수빈 쪽은 벽에 부딪히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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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6화

“방금 최수빈이 만난 사람이 센터 기업의 고위층이에요?”그가 고개를 돌려 박하린과 주민혁을 번갈아 바라봤다.박하린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곧 눈썹을 찌푸렸다.“설마요. 그럴 리가 없죠.”그들은 늘 지정된 협력 업체와만 거래를 해왔다. 천공 측과 직접 만날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방금 차가 막 떠나는 걸 내가 분명히 봤어요. .”그 역시 자신의 눈을 의심했지만 착각일 리는 없었다.최수빈이 고개를 돌리자마자 주민혁의 서늘한 눈빛과 마주쳤다.“협상 끝났습니까?”주민혁이 묻자, 육민성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미묘하게 웃었다.“끝났습니다. 계약은 이미 체결됐죠.”그의 시선에는 묘한 서늘함이 스쳤다.“이번엔 주 대표님 지출이 꽤 클 것 같네요.”박하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이상한 위기감이 밀려왔다. 만약 그들이 정말 계약서에 명시된 수익을 달성할 수 있다면, 그녀도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었다.지금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새로운 기술을 내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손에 넣었던 것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그녀는 해외 연수 시절부터 수많은 신기술을 가져왔고 지금이 바로 그것을 쏟아낼 때였다.“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주민혁이 담담히 말했다.“천공이 성공한다는 건 곧, 우리 신세계 그룹의 투자 안목이 옳았다는 뜻이니까요.”그는 조용히 최수빈을 바라보았는데 그녀의 눈빛에서는 그 어떤 것도 읽기 힘들었다.“축하해.”최수빈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이어 육민성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진승우는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고작 계약 한 건 따냈다고 저렇게 우쭐대다니.”그는 비아냥거리며 시선을 거두었다.“근데 도대체 어떻게 센터랑 연결한 거죠?”박하린은 입술을 꾹 눌렀다.“육 대표의 배경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죠. 수빈 씨는 그냥 그 옆에 붙어 빛 좀 본 것뿐이에요.”그녀가 뭐 그리 잘났다고 고개를 빳빳이 쳐드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차에 오른 뒤, 육민성은 팔짱을 끼고 느긋하게 웃었다.“박하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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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7화

“다만, 청운 X7은 극비 프로젝트라 엔지니어의 신분이 새어나가면 위험해요.”511연구원 전체를 통틀어도 그만큼의 실력을 갖춘 사람은 육민성뿐이었다.지금은 천공까지 세워 승승장구하고 있으니 박하린의 머릿속에도 자연스레 하나의 생각이 스쳤다.만약 정말 청운 X7이 그의 손에서 나온 거라면 육민성은 그들이 반드시 손을 잡아야 할 인물이었다.최수빈과 육민성은 그날 저녁까지도 공장에 남아 있었다.그때, 송미연이 최수빈을 찾으러 운상에 왔는데 그녀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무슨 일이야?”최수빈은 그녀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읽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어린이집에 예린이를 데리러 갔는데, 선생님 말로는 오후에 다쳐서 아빠가 데려갔대.”그 말에 최수빈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심장박동도 한껏 빨라졌다.서둘러 휴대폰을 꺼내니, 화면에는 선생님에게서 온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가 떠 있었다.엄마인 그녀가 전화를 받지 않으니, 자연스레 선생님은 주민혁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그중에는 주민혁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도 있었다.최수빈은 곧장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연결되자, 그녀는 공장을 빠져나가며 다급히 물었다.“예린이는? 어떻게 된 거야?”“일 다 끝났어?”전화기 너머로 남자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걱정 마. 지금 신혼집에 있어.”“지금 데리러 갈게요.”최수빈의 걸음은 더욱 빨라졌다.“급해할 필요 없어.”주민혁은 서재에서 서류를 정리하며 무심하게 말했다.“여기 안전하니까 네 일부터 마저 해.”최수빈은 그런 말을 믿을 리 없었다.전화를 끊자마자, 그녀는 현장 일을 간단히 정리한 뒤 택시를 잡아 신혼집으로 향했다.운상 공장은 외곽에 있어, 도심의 신혼집까지는 한 시간 넘게 걸렸다.송미연은 그녀의 표정이 굳어 있는 걸 보고 곧장 따라붙었다.“수빈아, 너무 조급해하지 마. 아무리 그래도 애한테 손대진 않을 거야.”“응...”최수빈은 필사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하지만 지난 생에서의 비극, 그리고 예린이가 암벽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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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8화

코끝에 남자의 서늘한 향기가 다가왔다.그녀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고, 그러다 탁자 모서리에 세게 부딪치며 눈살을 찌푸렸다.그 소리에 그녀는 본능적으로 침대 쪽을 돌아봤다.주예린은 여전히 곤히 잠들어 있었다.“언제 올라온 거예요?”그녀가 묻자, 주민혁은 한 걸음 물러나며 거리를 두었다.“그렇게 놀랄 일인가?”주민혁의 짙은 눈동자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봤다.“창문 닫는 거 좀 도와주려던 건데.”그 시선은 마치 그녀의 영혼까지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나를 무서워하네.”그의 말투는 질문이라기보다 확신에 가까웠다.“아니면, 내가 예린이한테 무슨 짓이라도 할까봐 그래?”그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걸고 있었지만 웃음이라기엔 위화감이 들었다.그렇다, 그녀는 두려웠다. 비극이 반복될까 두려웠고, 다시 같은 길을 밟을까 무서웠다.주민혁의 눈빛은 날카로웠고 그의 감각은 예리했는데 상대의 미세한 표정 변화까지 읽어낼 수 있었다.수년을 부부로 지낸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와 맞서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최수빈은 탁자를 짚으며 눈썹을 찌푸렸다.“예린이는 어떻게 다친 거예요?”그녀는 그의 물음에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체육 시간에 넘어졌어.”주민혁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이어졌다.“선생님이 전화했는데 네가 안 받아서 나한테 연락이 왔고, 병원에 다녀왔어. 별일 아니야.”“그래요.”“오늘 밤은 여기서 재우자.”그가 말했다.“낮에 놀란 탓에 겨우 잠든 거니까.”최수빈의 눈썹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네가 예린이랑 자.”주민혁은 손목시계를 흘깃 보았다.“나는 오늘 밤 나가야 돼.”그는 그녀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시후도 같이 봐 줘. 내일 아침은 도우미가 학교에 데려갈 거야.”이 시간에 아이를 깨우고 데려가는 건 무리였다. 창문을 닫은 것도 혹여 밤공기에 감기라도 걸릴까 걱정돼서였다. 그건 그녀에게 악몽이나 다름없는 일이었으니까.원래라면 창문을 닫고 내려가 주민혁과 대화를 나눌 생각이었다. 이번 일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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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9화

그들이 센터 기업과의 계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은 이미 업계에 쫙 퍼졌다. 여러 곳에서 이 소식을 듣고는 천공 쪽으로 줄줄이 러브콜을 보내왔다.오늘 오전에만 해도 열 곳이 넘는 회사와 미팅을 치렀고 사무실은 사람들로 북적였다.한참을 그렇게 정신없이 보내고서야, 겨우 숨 돌릴 틈이 있었다.육민성이 손으로 부채질하며 투덜거렸다.“하, 이러다 내가 접수 담당으로 전직하겠네.”최수빈은 고개를 숙인 채 궤도 설계 도면을 그리며 말했다.“좋은 일이죠. 선배가 좀 더 수고해 줘요.”그는 도면을 흘끗 보며 물었다.“511연구원 쪽 일, 벌써 시작한 거야?”육민성은 최수빈의 추진력에 늘 감탄을 금치 못했다.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일 생각뿐이었다.“네. 일찍 손대야 문제 생겨도 빨리 고치니까요.”일은 결국 그녀가 해야 할 몫이니, 할 수 있을 때 얼른 완성해야 했다.육민성이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었다.“요즘 돈 부족해?”최수빈은 펜을 쥔 채 멈칫했다. 잠시 후, 그녀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그렇게 보여요?”주민혁과 이혼 합의서를 쓴 이후, 그녀는 상가며 부동산이며 현금까지 손에 넣어 작은 부자가 됐고 지금은 굳이 돈 걱정을 할 이유가 없었다.요즘 어머니 회사도 큰 위기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넉넉하진 않아 그녀가 수시로 보태주고 있었다.문제는 삼촌의 병이었다. 장기 이식이 필요한 상황이라, 지금은 적합한 조직이 나타나길 기다리는 중이었다.이건 돈이 아니라, 운과 시간이 필요한 문제였다.육민성이 눈썹을 치켜올렸다.“보통 저렇게 죽어라 일하는 사람들 이유는 돈인데, 넌 뭐야?”최수빈은 고개도 들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이건 국민의 의무잖아요.”그녀에게 이 일은 단순한 직업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분야였고 그 안에서 자신이 빛나길 바랐다.오후, 최수빈 팀은 공장으로 가 제작 과정을 직접 지켜봤다. 저녁 무렵, 공장에서는 직원 식사를 마련해 주었고, 그들도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최수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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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0화

“천공이야 지금은 잘나가고,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지만, 그게 영원할 거란 보장은 없어요.”진승우가 그렇게 말하자, 육민성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진 대표님처럼 오래 업계에 몸담은 분이라면 잘 아실 텐데요? 이번 프로젝트 완성이 뭘 의미하는지.”그건 하나의 ‘이정표’였다.박하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성과라는 건 깨지라고 있는 거예요. 아무도 영원히 1등 자리에 앉진 못하죠.”그녀는 최수빈을 바라보았다.“특히 이번 1등이, 어떤 사람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점에서 말이에요.”누가 봐도 이번 프로젝트의 성공은 육민성과 천공 기술팀의 몫이었다. 최수빈은 그저 중간에 합류해서 허드렛일이나 하다 이름만 얹힌 사람에 불과했다.박하린은 팔짱을 낀 채 비아냥거렸다.“하루 동안 천공 분위기 좀 느껴봤는데, 수빈 씨가 내부에서 별로 인정 못 받는 것 같던데요? 다들 불만 많아 보였어요.”“그래요?”최수빈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무심하게 눈을 들었다.“그 사람들이 날 얼마나 못마땅해하든, 그건 당신이 신경 쓸 일 아니죠. 마음이 근질근질해도, 할 수 있는 건 멀리서 보는 것뿐이잖아요.”단 한마디에 박하린의 표정이 굳었다.최수빈의 말끝마다 ‘천공에 발도 못 들이는 주제’라는 조롱이 묻어 있었으니까.그때였다.“큰일 났습니다!”박하린의 비서가 다급히 뛰어 들어왔다는데 그의 얼굴에는 심상치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박하린은 그런 비서를 보고도 침착했다.“무슨 일이라고 그렇게 허둥대? 천천히 말해.”그리고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나무랐다.“회사 안에선 이미지 관리하랬지? 늘 침착해야지.”진승우도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뭐야, 무슨 일이야?”비서는 망설였다.“어서 말해.”박하린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이... 이 대표님 건 말입니다. 생산 투입 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순간, 박하린과 진승우의 표정이 동시에 무너졌다.“뭐라고?”박하린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고 진승우도 황급히 그 뒤를 쫓았다.최수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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