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os os capítulos de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Capítulo 801 - Capítulo 810

812 Capítulos

제801화

그녀는 주예린의 앞에 쪼그려 앉아 아이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손끝으로 살며시 쓰다듬었다.“예린아, 여기는... 아빠네 집인데 아마 한동안은 여기서 지내게 될 것 같아.”주예린의 손에 든 인형은 어찌나 꽉 움켜쥐었는지 모양이 일그러져 있었고 고개를 들어 올린 아이의 맑은 눈에는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아빠네 집?’그 말은 주예린에게 있어 동화책 속 성과도 같이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언제나 말끔한 정장 차림에 눈빛은 차갑기만 했던 남자, 매번 언급할 때면 엄마가 한참을 침묵하게 만들던 그 남자, 멀리서 몇 번 몰래 바라본 적은 있지만 ‘아빠’라는 두 글자를 입 밖으로 꺼내는 것조차 두려웠던 그 남자에게 이렇게 예쁜 집이 있다는 사실이 낯설기만 했다.작은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마음속에서는 두 개의 목소리가 공존했는데 한 목소리는 잔뜩 설레어하는 기색이었고 또 다른 목소리는 겁을 먹은 것이었다.아빠는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았다. 유치원에서는 다른 아이들이 아빠의 손을 잡고 오가는데 주예린은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또 오빠인 주시후는 아빠가 직접 픽업을 해주었지만 주예린은 그렇지 못했다.그런데 이제 엄마가 아빠의 집에서 살게 될 거라고 말한 것이다.‘혹시... 아빠가 나를 이제 인정해 주려는 건가?’그 생각은 작은 씨앗처럼 마음 깊은 곳에 살며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주예린은 입술을 꾹 다물고 인형을 더 꼭 끌어안았다가 고개를 들어 최수빈을 향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모기 소리처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네.”그렇게 애써 어른스럽게 굴려는 딸의 모습을 보자 최수빈은 가슴 한쪽이 미어지는 듯했다. 안타깝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했다.곧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예린의 손을 잡고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현관의 대리석 바닥은 거울처럼 반짝였고 그 위에 비친 모녀의 모습은 유난히 여리고 가냘파 보였다.주민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위층에서 내려온 듯 몸에는 얇은 담요가 덮여져 있었다.기척을 느끼자 그는 고개를 들어 최수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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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2화

그는 모든 걸 알고 있었으나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최수빈과 아이에게 무관심한 척, 그들과 완전히 선을 긋고 싶은 척, 그리고 그들을 한 번도 사랑한 적 없는 척해야 했다.그래야만 그들을 숨어 있는 위험들로부터 멀리 떼어놓을 수 있었고 그래야만 모녀가 아무 탈 없이 살아갈 수 있었다.점심 식사를 마치고 도우미가 그릇을 정리하러 들어가자 거실에는 최수빈과 주민혁 둘만 남았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고요한 분위기, 그 사이로 창밖에서 가끔 새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최수빈은 주민혁의 무릎 위에 올려진 손을 바라보았다.한때 그렇게도 안정적이던 손, 서류에 서명할 때면 힘 있는 필체를 남겼고 운전대를 잡을 때면 늘 여유로웠다. 최수빈이 아팠을 때는 그 손으로 약을 먹여 주었고 이불을 덮어 주며 안심하게끔 온기를 전해 주던 손이었다.그런데 지금은 젓가락조차 제대로 쥐지 못했다.문득 이혼 합의서에 서명하던 날이 떠올랐다.그날도 이렇게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이름을 적었고 잉크는 종이에 살짝 번져 있었다.그때의 최수빈은 그것이 자존심이 상해서, 이혼을 요구받은 데에 대한 분노 때문이라고 여겼었다. 하지만 이제 와 돌이켜보니...“민혁 씨 손...”최수빈의 목소리가 긴 적막을 깨트렸다. 목소리는 티가 안 날 만큼 떨리고 있었다.“그때 이혼 합의서에 서명할 때도...”당시의 주민혁은 최수빈을 구하려다 다친 것이었다.몸이 아주 미세하게 굳더니 주민혁은 고개를 들어 최수빈을 바라봤다. 복잡한 감정이 얽힌 눈빛으로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최수빈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요동치는 마음을 억눌렀다. 그러고는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그래서... 내가 이혼하자고 한 게 진심이라는 것도, 연기가 아니라는 것도 다 알고 있었던 거죠? 일부러 그런 말들로 날 화나게 한 거고요?”주민혁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에는 피로와 함께 체념한 듯 담담한 기색이 섞여 있었다.“응.”잠시 멈칫하다가 그는 낮고 쉰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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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3화

그가 지키려 한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최수빈과 주예린뿐이었다.박하린은 가짜 ‘위협’을 내세워 주민혁의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려 했고 그는 일부러 그 계략에 넘어간 척했다. 그녀가 자신의 계획이 완벽하다고 믿게 만들어야 뒤에서 더 촘촘하게 그물을 치고 진짜 위험들을 하나씩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최수빈은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시큰함과 벅찬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와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그가 이렇게까지 많은 일을 해 왔다는 것, 늘 자신의 방식으로 그녀와 아이를 지켜 왔다는 사실을 최수빈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면서 오히려 그를 오래도록 오해해 왔다는 생각에 가슴이 저려 왔다.“민혁 씨...”최수빈은 울먹이며 말을 꺼내려 했지만 하고 싶은 말들이 목구멍에 한꺼번에 걸려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이미 지나가 버린 일들을 그녀는 어떻게 내려놓아야 할까.용서라고 말하기도, 그렇다고 원망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했다.최수빈의 붉어진 눈을 보자 가슴이 미어진 주민혁은 본능처럼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 주려다 반쯤 들린 손을 문득 멈추고는 천천히 내려놓았다.그리고 그 짧은 동작 하나가 최수빈의 마음을 다시 한번 시리게 했다.“지나간 일은... 그냥 지나간 일로 두자.”주민혁의 목소리는 조금 쉰 듯했다.“지금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어. 우리... 당분간은 좀 버텨야 할 것 같아.”그의 말은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적들을 향해 하는 말이었다. 최근 들어 다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해 주민혁은 이전보다 훨씬 더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최수빈과 주예린을 자신의 곁으로 데려오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안전한 선택이었다.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밖에 두고 누군가의 약점으로 이용당하는 것보다는 나았다.최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우린 안 무서워요.”그때 계단 쪽에서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주예린이 토끼 인형을 안은 채 계단 입구에 서서 거실에 있는 두 사람을 조심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낮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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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4화

막 부상을 입은 몸이라 충분히 쉬는 게 마땅하지만 여전히 손에 쥔 일들을 놓지 못한 채 쉴 틈 없이 처리하고 있었다.기척을 느끼자 주민혁이 고개를 들었다. 곧 시선이 그녀가 들고 온 우유 잔에 닿는 순간, 눈빛이 잠시 깊어졌다.최수빈은 말없이 우유를 그의 손이 닿는 곳에 내려놓고 맞은편 의자를 끌어 앉았다.서재에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고 종이를 넘길 때 나는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잔잔하게 울려 퍼질 뿐이었다.주민혁은 펜을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보더니 목젖을 가볍게 움직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러는 거... 혹시 날 그렇게까지 미워하지는 않는다는 뜻이야?”최수빈은 피식 웃었고 손끝은 무의식적으로 의자의 무늬를 쓸었다.“미워한다고 하긴 애매해요.”잠시 숨을 고른 뒤, 그녀가 주민혁을 바라봤다.“많은 일들이 지나갔지만, 그래도 없던 일은 아니잖아요.”차분하지만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무게감이 실린 눈빛이었다.“그때의 일들, 민혁 씨에게도 사정이 있었고 생각이 있었던 건 알아요. 하지만 어떤 일이든 나랑 상의할 수는 없었어요? 같이 해결할 수는 없었나요? 혼자서 다 짊어지고 가면서 한마디 설명조차 없었잖아요.”주민혁은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긴 속눈썹이 눈 아래에 옅은 그림자를 드리웠다.“난... 네가 걱정 없이 지냈으면 했어.”그의 목소리는 아주 가벼웠다.“넌 우주를 사랑했고 눈에 별을 담고 살았잖아. 그곳이 네가 있어야 할 자리였고 네가 가져야 할 세상이었어. 결혼이나 감정 때문에 네 인생과 열정을 멈추게 하고 싶지 않았어.”이에 최수빈은 갑자기 목이 무언가에 막힌 듯 코끝이 시큰해지더니 금세 눈가가 붉어졌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손등으로 눈가를 눌렀다. 들키지 않으려 했지만 떨리는 것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하지만 그때의 나는... 민혁 씨를 정말 사랑했어요.”주민혁을 위해 기꺼이 부엌으로 들어갔고 그가 바쁠 때는 말 없이 곁을 지켰으며 그를 위해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그와 함께한 날들은 소소하고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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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5화

주민혁의 목젖이 작게 움직였다. 손끝은 옆에 늘어진 옷자락을 무의식중에 움켜쥐고 있었고 눈빛 깊은 곳에서는 꾹 눌러 참아 온 감정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일렁였다.몇 초간의 침묵 끝에 그는 아주 미세하게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사랑해, 아주 깊게.”최수빈의 눈동자가 순간 크게 흔들렸다. 손끝이 반사적으로 오그라들었고 숨마저 한 박자 늦게 이어졌다.여전히 복잡한 감정이 뒤엉켜 있는 그의 눈을 바라보면서도 최수빈은 목 안이 부드러운 솜으로 막힌 듯 말을 잇지 못했다.이런 대답을 들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주민혁의 입에서 이렇게 직설적인 고백을 듣게 될 줄은 더더욱 말이다.말을 마치자마자 주민혁은 시선을 살짝 내리며 최수빈의 눈을 피했다. 목소리는 한층 더 가라앉아 있었는데 고백이라기보다는 독백에 가까웠다.“사랑할 자격은 없지만.”최수빈이 그를 바라봤다.“만약 민혁 씨의 계획이 전부 실패해서 나랑 예린이가 죽었더라면... 그래도 끝까지 말 안 했을 거예요?”주민혁의 눈빛이 굳어졌다.“넌 늘 이렇게 묻지만 네가 묻는 일들은 현실이 아니야.”최수빈은 일부러 가슴이 미어지는 듯 목소리를 떨리게 했다.“그럼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져도 똑같이 선택하겠네요.”주민혁은 깊고 어두운 눈빛으로 최수빈을 바라보며 한참을 침묵했다.그리다 마침내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최수빈, 난 선택지가 없었어.”최수빈은 갑자기 마음이 확 풀리는 걸 느끼며 눈을 감았다가 그대로 등을 돌려 나가버렸다.그리고 주민혁은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눈빛에는 설명되지 않는 감정만이 짙게 남아 있었다.그리고 다음 순간.강지안이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주민혁은 경계선처럼 드리운 그늘 속에 앉아 있었다. 손가락 사이에 끼운 담배는 이미 끝까지 타들어 가 검은 바지 위로 재가 떨어지고 있었지만 그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다.기척이 느껴지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 밑에는 짙은 피로가 드리워져 있었고 눈빛마저도 오랜 병치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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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6화

그때 이미 알아봤어야 했다. 이 사람은 오래전부터 자기 목숨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는 걸.“넌 수도 없이 스스로 생을 끝내고 싶어 했어.”강지안의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그리고 머릿속에는 주민혁의 병력 기록이 떠올랐다.불면, 환청, 자해 충동 등등 빽빽하게 적힌 글자 하나하나가 전부 칼날 같았다.“하지만 그 사람들 때문에 끝까지 마음이 안 놓이는 거잖아. 그렇지?”주민혁은 대답하지 않았고 그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그 사람이 꼭 고마워할 거라는 보장도 없어.”강지안의 말이 그의 생각을 다시 끌어당겼다.“네가 다 알아서 길을 깔아준 게 그 사람 눈에는 그냥 네 멋대로 통제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어. 전공을 네가 대신 정한 것도 미워할 거고 자기 인생이 네 손에 묶어버린 것 자체를 원망할 수도 있어.”주민혁은 시선을 떨궜다. 그러자 자신의 손등에 시선이 머물렀다.거기에는 연한 흉터 하나가 남아 있었는데 작년, 면도날로 손목을 그으려다 남은 자국이었다.그는 그 흉터를 천천히 문지르며 바람처럼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그는 애초에 최수빈이 자신을 용서해 주길 기대한 적도 없었고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 주길 바란 적도 없었다.그저 그녀가 무사히, 먹고사는 걱정 없이, 아픔에 시달리지 않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랐을 뿐이었다.그 삶에 자신이 없어도 괜찮았다.이런 주민혁의 모습을 보자 강지안은 화가 나면서도 가슴이 미어졌다.“그게 너한테는 사랑이야?”그녀가 생각해 온 사랑은 두 사람이 함께 가는 것이었고 서로 기대고 버티는 것이었다.하지만 주민혁의 사랑은 달랐다. 모든 고통은 혼자 삼키고 좋은 것만 상대에게 남겨두면서도 ‘고맙다’는 말조차 기대하지 않고 심지어 미움받을 각오까지 이미 끝내 둔, 혼자서 희생하는 것이었다.주민혁이 낮게 웃었다. 비웃음과 체념, 짙은 피로가 섞인 웃음이었다.그러고는 세상사를 이미 다 겪어본 사람처럼 무심한 눈빛으로 강지안을 올려다보았다.“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사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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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7화

방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시계 초침 소리만이 또각또각 울리는 것이 마치 무언가를 위해 카운트다운하는 듯했다.햇빛이 조금씩 자리를 옮기며 무릎 위까지 스며들었지만 어둠이 깔린 주민혁의 눈빛만큼은 끝내 비추지 못했다.강지안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말로는 그를 돌려세울 수 없다는 걸.최수빈 모녀를 위해 길을 닦아주겠다고 마음먹은 그 날부터 주민혁은 이미 자신의 생사는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었다.그의 세계에는 ‘나’가 없었고 오직 ‘그녀들’만 있을 뿐이었다.강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의 병력 기록을 집어 들며 조용히 말했다.“다음 주에 있을 최수빈 씨 외삼촌분의 수술은 내가 직접 챙길 거야.”주민혁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짧게‘응’하고 답할 뿐이었다.그렇게 강지안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문이 닫히는 순간, 서재 안에서 아주 미세한 한숨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깃털 하나가 심장 위에 내려앉듯 가벼운 소리였는데도 마음이 많이 아팠다.곧 비가 쏟아질 것처럼 구름이 낮게 깔려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다 문득 조금 전 주민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사랑은 포물선이고 결혼이 최고점이며 그 이후는 내리막이라는 말 말이다.그렇다면 최수빈과 그는 애초부터 최고점이 존재하지 않는, 시작부터 아래로 향해 결국은 끝없는 심연으로 떨어질 포물선이었던 건 아닐까?강지안은 그 답을 알지 못했으나 이것만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주민혁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 그리고 최수빈은 아마 영원히 모를 거라는 것, 또 그녀가 그토록 미워하던 남자가 자신의 생을 대가로 그녀의 앞길을 밝히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다음 날 아침.최수빈이 잠에서 깨어나 집 안을 둘러봤으나 주민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러다 어젯밤 잠들기 전, 그의 왼팔 붕대에 피가 조금 배어 있던 게 생각나 무의식적으로 손끝을 말아 쥐었다.휴대폰 화면에 뜬 ‘주민혁’이라는 이름을 한참 바라보다가 그녀는 끝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신호음이 세 번 울리고 나서야 전화는 연결되었다.수화기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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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8화

“외삼촌 보러 왔어요.”최수빈은 그의 눈을 피한 채 권우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고는 아주 조심스러운 말투로 말했다.“권 선생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권우진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주민혁을 한 번 보고는 다시 최수빈을 향해 가볍게 웃어 보였다.“별일 아니에요.”강지안은 두 사람의 표정을 훑어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서류를 정리했다.“가족분들께 수술 전 안내사항 전달하고 올게요. 편하게 이야기 나누세요.”그녀는 최수빈의 옆을 지나며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하지 못한 말들을 눈빛에 담아둔 채 말이다.그렇게 곧 회의실에는 최수빈과 주민혁, 그리고 권우진만 남았다.주민혁은 의자에 기대앉아 컵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천천히 문지르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두 사람에게 시간을 내주는 모습이었다.그러다 권우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보다는 표정이 한결 진지해져 있었다.“수빈 씨, 민혁 씨가 말 안 한 게 하나 있는데 그래도 이건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최수빈이 심장이 빠르게 뛰어 옷자락을 꽉 쥐고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외삼촌분 병...”권우진이 말을 이어갔다.“세 달 전에 이미 적합한 공여자를 찾았어요. 다만 상대가 갑자기 마음을 바꾸는 바람에 수술이 미뤄졌고요. 그 뒤로 민혁 씨가 직접 지방을 세 번이나 오가면서 여기저기 부탁해서 다시 동의를 받아냈어요. 괜히 걱정할까 봐, 민혁 씨가 수빈 씨한테는 말 안 했던 거예요.”한마디 한마디가 돌처럼 가슴에 떨어졌다. 놀라움, 미안함, 그리고 설명하기 어려운 묵직한 감정이 겹겹이 퍼졌다.최수빈은 고개를 돌려 주민혁을 봤다. 그는 여전히 의자에 기대앉아 있었는데 시선을 내리고 있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무지 읽히지 않았다.“왜... 왜 나한테는 말을 안 한 거예요?”최수빈의 목소리가 살짝 잠겨 있었다.“내가 얼마나...”그녀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내가 얼마나 민혁 씨를 미워했는데... 왜 민혁 씨는 미움받을 짓을 하면서도 뒤에서는 날 위해 움직였던 거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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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9화

회의실의 형광등은 차가운 빛을 쏟아내며 주민혁의 곧은 실루엣을 유난히 가냘파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정장 소매의 단추를 매만지며 잔뜩 굳어 있는 최수빈의 옆얼굴에 시선을 두었다. 목젖이 크게 한 번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지만 입은 열리지 않았다.그러다 최수빈이 먼저 시선을 들었는데 맑은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입술을 가볍게 다물더니 곧 그녀가 다시 담담하게 말했다.“생각 정리되면 그때 다시 와서 얘기해요. 우리 사이에 해야 할 말들은 분명히 해야지, 지금처럼 애매하게 흘려보낼 일이 아니에요.”미움이든 오해든, 무엇이든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했다.말을 마치자 그녀는 주민혁의 반응을 더 이상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주민혁은 그 자리에 굳어 선 채 손끝에 점점 더 힘을 주었다. 단추 가장자리가 손가락을 파고들어 통증이 느껴질 때쯤에서야 그는 천천히 손을 풀었다. 그리고 복도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최수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의 눈빛 깊은 곳에서는 복잡한 감정이 일렁였다.다음 날 아침.병실 창으로 스며든 첫 햇살이 하얀 침대 시트를 비췄다.최수빈이 보온통을 들고 병실로 들어섰을 때, 어머니 이혜정은 침대 옆에 앉아 누워 있는 이성민의 이불을 조심스럽게 정리해 주고 있었다. 이성민의 얼굴은 핏기없이 창백했고 한때 단단하던 몸은 큰 병을 앓아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심지어 숨을 쉬는 것마저 힘에 부쳐 보였다.“삼촌, 삼촌 좋아하시는 계란죽 가져왔어요.”최수빈은 침대 옆 탁자에 보온통을 내려놓고 조심히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따뜻한 김과 함께 은은한 향이 퍼졌다. 그녀는 그릇에 죽을 담아 이성민의 앞에 내밀며 목소리를 한층 낮췄다.곧 천천히 눈을 뜬 이성민은 눈앞에 선 외조카와 누나를 보자 눈가가 붉어지더니 입술을 달싹이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다들 고생하네... 이 병이 참 사람 잡는다.”이혜정은 그의 손을 꼭 잡고 코끝이 시큰해지는 것을 애써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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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0화

“삼촌의 건강은 또 다른 문제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일단 건강해야 하는 거지 건강을 걸고 감정적으로 버티시면 안 돼요.”이성민은 깊게 한 번 숨을 고른 뒤에도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건강이 중요하다는 건 알아. 하지만 나 때문에 네가 그 사람하고 다시 애매하게 얽히는 건 더 못 보겠다.”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최수빈을 바라보며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덧붙였다.“사실 잠들어 있을 때도 어렴풋이 느꼈어. 그 사람이 여러 번 왔다는 걸. 매번 문밖에만 서 있다가 돌아갔지, 안으로 들어온 적은 없고.”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며 이성민의 등을 짚고 있던 최수빈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그녀는 주민혁이 뒤에서만 움직이고 있다 생각했었기에 그가 병원까지 와서 외삼촌의 병실 앞에 머물렀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최수빈이 알지 못했던 그 시간들 속에서, 주민혁은 문밖에 서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생각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이성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눈빛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짙게 서려 있었다.“수빈아, 삼촌 말 좀 들어. 그 사람이랑 감정적으로 얽히지 마.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 섞이면 안 돼. 내가 이렇게 도움을 받게 된 것도 결국 네가 그 사람과 엮여 있기 때문이잖아. 그건 네가 빚을 진 거나 다름없어. 주민혁이 어떤 사람인지는 나도 잘 알아. 만만한 상대 아니야. 솔직히 말해봐. 이 일로 너한테 부담을 주거나 뭔가를 요구한 적은 없었니?”최수빈은 눈을 내리깔며 조용히 손끝을 말아 쥐었다.그러고는 그동안의 시간을 차분히 되짚어 보았다. 주민혁은 때때로 복잡한 감정을 내비치긴 했지만 삼촌의 일을 이유로 그녀를 압박한 적도, 무리한 요구를 한 적도 없었다.사전 검사부터 전문가 협진, 쉽게 구할 수 없는 약품까지...모든 건 그가 조용히 정리해 둔 일이었고 최수빈이 따로 신경 쓸 일은 거의 없었다.그래서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어 걱정으로 가득한 이성민의 눈을 마주 보며 낮게 말했다.“삼촌, 그 사람 저한테 부담 준 적 없어요. 이런 일들, 다 그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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