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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1화

백우씨는 말하며 항아리를 열어 보더니, 안에 든 것이 장미꽃과 들국화인 것을 보고 물었다.“이 말린 꽃은 다과 만드는 데 쓰는 것이냐? 향이 좋구나.”“차로 우려 드시라고 가져온 것입니다. 장미꽃은 미용과 혈색에 좋고, 들국화는 열을 내리고 화를 삭이는데 도움을 줍니다.”백진아는 이내 백우씨를 자세히 살폈다. 그의 말이나 행동 하나하나, 자연스러웠으며 우아한 기품이 배어 있었다.백우씨는 놀란 듯 말했다.“꽃으로 다과를 만드는 건 알아도, 꽃을 차로 우린다는 건 처음 듣는구나.”백진아는 장미꽃 몇 송이를 찻잔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장미차 한 잔을 우렸다.“꽃차만 따로 우려도 되고, 찻잎과 함께 우려도 됩니다.”뜨거운 물을 붓자마자, 장미 향이 곧바로 퍼졌다.공간에서 나온 것이라 그런지, 향이 유난히 맑고 진했다.“정말 향기롭구나!”백우씨는 찻잔을 들어 향을 맡고는, 후후 불어 한 모금 마셔보았다.“맛도 좋구나.”백진아는 춘화를 보며 말했다.“부인께서 맛볼 수 있도록 복분자와 딸기를 씻어 대령하거라.”“예!”춘화는 무릎을 살짝 굽혀 예를 올리고, 바구니를 들고 나갔다.백우씨의 눈이 반짝였다.“어디서 난 야생 과일이냐? 오래 못 먹어서 그런지, 그 맛이 꽤 그립구나.”“오늘 회춘당에 갔더니, 산에서 일하는 일꾼이 약재를 가져왔습니다. 과일을 조금 얻어왔지요.”백진아는 이런 질문이 나올 걸 미리 알고 일부러 춘화를 먼저 보낸 것이었다.춘화는 그녀와 함께 회춘당에 다녀왔기에, 그녀가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백우씨는 느긋하게 장미차를 한 모금 더 마시며 물었다.“회춘당에서 정말 네가 진료 보는 걸 허락했느냐?”백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물론이죠.”이어 덧붙였다.“고지행에게 들은 말로는... 폐하께서 곧 저에게 태자를 치료하라는 명을 내릴 수도 있다고 합니다. 고지행도 함께 갈 것이니,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시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미리 준비하시지요.”백우씨의 표정이 무거워졌다.“알겠다. 태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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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2화

백진아는 비웃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고지행이 연천능과 그렇게나 친한 사이인데, 과연 어느 편에도 서지 않을 수 있을까 싶었다. 설마 황제가 고지행이 연천능과 가깝게 지내는 걸 묵인하고 있는 걸까?겉으로 보기엔, 연천능은 황제가 가장 총애하는 아들이고, 고지행은 가장 총애하는 외조카이기에, 그 둘이 가까이 지내는 것도 명분상으로는 충분히 말이 되었다.백진아는 안개로 뒤덮인 그들의 속셈을 도무지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백진아는 복잡한 황실의 상황을 듣고, 결심을 내렸다. 반드시 자신의 의술을 이용해, 신의곡의 세력에 의지하겠다고.태자의 병을 고치기 위해 잠깐은 황제와 황후, 태자의 보호를 받을 수 있지만, 그건 결코 장기적인 방법이 아니었다.이곳은 황권이 절대적인 시대, 인권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아무리 강해져도 황권 앞에서는 한순간에 가루처럼 부서질 수 있었다.그러니 모든 희망을 남에게 걸 수는 없었다. 반드시 스스로 강해져야 했다.행지원을 돌아오자마자, 백진아는 공간으로 들어가, 다섯 근짜리 모래주머니 네 개를 만들어 종아리와 팔에 묶었다. 그녀는 조금씩 무게를 늘려가며 훈련할 생각이었다.오늘부터 본격적인 부하 훈련이다. 달리기, 팔굽혀펴기, 스쿼트, 개구리 점프, 턱걸이까지…백진아는 이 모든 걸 공간 안에서 진행했다. 공간은 시간 흐름이 빨라, 노력 대비 효과도 배로 나타났다.완전히 기력이 다해 꼼짝도 못 하게 되자, 그녀는 영천수에 몸을 담갔다.“아, 너무 편하다!”영천수가 몸을 감싸며 온몸의 땀 냄새와 피로를 씻어내자, 몸이 훨씬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백진아는 모공 사이로 검은 기름 같은 노폐물이 또 새어 나오는 게 보였다.처음 영천수에 몸을 담갔을 때도 검은 찌꺼기가 나왔지만, 매일 담그다 보니 점점 옅어지다가, 마침내 나오지 않게 되었었는데 오늘은 체력이 한계에 이를 정도로 단련한 탓에, 몸속 독소가 다시 배출된 것이었다.영천수에 몸을 반 시간쯤 담그자, 피로는커녕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마치 고급 관리를 받은 기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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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3화

백진아는 회춘당으로 향했다. 그녀는 어느새 출근하는 기분을 제대로 느끼고 있었다.백진아가 가마 안에서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갑자기 거리에서 소란스러운 소리와 뒤엉킨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비켜라! 말이 놀랐다!”“비켜! 그렇지 않으면, 치여 죽어도 싸다!”이렇게 안하무인인 말투는 정말 듣기 거북했다. 권세 높은 자가 할 법한 말이었다.백진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가마의 가림막을 올려, 밖을 내다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화려한 마차 한 대가 돌진해 오고 있었고, 마부는 혼비백산한 얼굴로 고삐를 잡아당기고 있었다.그러자 말은 정말로 놀란 듯, 이리저리 마구 날뛰며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재빨리 피했지만, 차마 마차의 속도까지 따라갈 수는 없었다.마차는 그대로 인파 속으로 돌진해 여러 사람을 들이받았고, 결국 “쿵!” 하는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혔다. 마차는 바로 전복될 듯했다.그때, 어디선가 검은 옷의 사내 하나가 나타나, 몸을 날려 마차 위로 뛰어올랐다. 그는 마차 안의 여인을 안아 밖으로 꺼냈다.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직도 날뛰는 말에게 장풍을 쏘았다.말은 바로 울부짖더니 “퍽” 소리를 내며 쓰러졌고, 그대로 죽어버렸다.검은 옷의 사내가 사람을 구한 뒤 재빨리 사라진 것으로 보아, 분명 암위였다.마차에 있던 여인은 바로 금양 공주였다. 그녀의 작은 얼굴은 창백했고, 눈빛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백진아는 여러 명의 부상자가 쓰러져 피를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급히 가마에서 내려서 치료하러 갔다.“공주마마, 괜찮으십니까?”마차 안에서 궁녀 하나가 기어 나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금양 공주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공주!”백성들은 경악했다. 그리고 이내 엎드려 예를 올렸다.“공주마마를 뵙습니다!”하지만 그들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섞여 있었다. 분명 많은 사람이 금양 공주가 행인을 다치게 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대낮에 거리에서 말을 몰아 난동을 부린 일이 이번이 처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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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4화

백진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금양 공주를 비웃듯 말했다.“지금 제게는 약도 없고, 도구도 없습니다. 그러니 천으로 감아서 치혈하는 것밖에 할 수 없지요. 이렇게 시간을 끌며, 환자를 의원으로 보내지 않는 이유가 뭡니까? 공주마마는 대체 백성들의 목숨을 무엇으로 여기시는 겁니까?”‘이 모든 책임을 나에게 떠넘기려고? 역시 황실 사람답게 참 치밀하네.’백성들은 이 말을 듣자마자 술렁이기 시작했다. 큰소리는 내지 못했지만, 여기저기서 작은 목소리로 금양 공주의 오만함과 사람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태도를 비난했다.금양 공주의 마음속에 쌓인 분노가 폭발했다.“백진아! 네가 감히 불경을 저지르다니!”금양 공주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지만,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 있을 뿐 가까이 오지는 못했다. 백진아가 혹시라도 독을 쓸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백진아는 오히려 담담하게 말했다.“제가 어찌 감히 불경을 저지르겠습니까? 저는 다만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마마, 더 이상 의원을 부르지 않으면, 정말 누군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백진아의 태도는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았고, 한마디 한마디 모두 금양 공주가 사람 목숨을 외면하고 있음을 에둘러 지적하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금양 공주는 순간 부끄러워져, 분노가 더욱 치밀었다.고작 천한 백성 몇 명의 목숨일 뿐, 돈 몇 닢 주면 될 일을, 이렇게 문제 삼을 필요가 있단 말인가?이처럼 오만한 금양 공주가 어떻게 참을 수 있겠는가?그녀는 손가락으로 백진아를 가리키며 소리쳤다.“불경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그럼, 어찌 나를 보자마자 꿇지 않았던 것이냐? 감히 무슨 배짱으로 날 무시하는 것이냐? 네가 아직도 능왕비라 생각하느냐?”그래도 금양 공주는 똑똑한 편이었다. 백진아를 벌할 명분은 얼마든지 있었고, 마침 눈앞에 정당한 죄목 하나가 딱 있었다.백진아는 말문이 막혔다. 의사로서의 직업적 본능 때문에, 그저 반사적으로 사람을 구하러 나섰을 뿐이었다. 게다가 현대인인 그녀는 애초에 누군가에게 무릎 꿇는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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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5화

백진아는 허리를 곧게 세운 채 무릎을 꿇고 앉았고, 고개를 살짝 숙인 채 금양 공주의 오만하고 득의양양한 얼굴을 보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금양 공주는 그녀의 풀이 죽은 모습을 보자, 기분이 너무 좋아서 웃음을 터뜨렸다.“오라버니에게 버림받은 주제에, 아직도 자기를 능왕비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네가 그 자리에 어울리기나 하느냐? 너처럼 천한 계집은 비구니가 되든지, 아니면 삼척 백릉에 목 매달아 죽어야지. 대체 무슨 낯짝으로 거리에 나와 설치고 다니는 거야? 나라면 진작 죽으려 했을 것이다...”백진아를 모욕하는 것이 너무나 통쾌했기에, 금양 공주는 쉬지 않고 말을 쏟아냈다.백진아는 그녀가 끝도 없이 떠드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공주마마, 다친 자를 의원에게 보내지 않으면, 정말 목숨을 잃을 것입니다.”부상자의 가족들은 더는 참지 못하고, 용기를 내어 애원했다.“부디 자비를 베푸시어 먼저 의원으로 데려가게 해주십시오!”그러자 주변 백성들의 눈빛도 점점 변해갔다. 사람을 다치게 한 것은 금양 공주지만, 오히려 백진아가 사람을 구했다는 이유로 뺨을 때렸다. 게다가 지금은 공개적으로 무릎까지 꿇고 모욕을 당하고 있으니, 누구라도 보기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특히 백진아에게 치료받은 부상자들은 분노에 찬 눈으로 금양 공주를 노려봤다. 하지만 상대의 신분이 귀하니, 감히 말로 옮기지 못할 뿐이었다.“공주마마, 마마의 처사는 황실의 체통을 잃고, 황실의 명성을 더럽히는 것입니다.”여유롭고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니, 고지행이 화려한 붉은색 옷차림을 하고, 부채를 흔들며 유유히 걸어오고 있었다.금양 공주는 고지행을 보자마자, 방금까지의 오만하고 독한 표정을 거두고, 순식간에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반갑게 말했다.“오라버니, 어쩐 일이에요?”“대낮에 말을 몰아 사람을 다치게 했다는 말을 듣고, 민심을 달래고 부상자를 치료할 수 있을까 해서 와봤지요.”그는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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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6화

’감히 나의 체면을 건드리다니, 본때를 보여줘야겠어! 버림받은 여자면서 주제도 모르고 지행 오라버니를 유혹하려 들다니, 정말 웃기는군!’고지행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가장 독한 것은 여자 마음이라더니!그는 부채로 부상자들을 가리키며 담담하게 물었다.“저 부상자들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금양 공주는 상관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고지행 앞에서는 그래도 애써 선심을 베풀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오라버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사람들을 전부 의원으로 보내고, 돈도 제가 부담하지요.”고지행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예. 만약 마마께서 그 비용을 내지 않으면, 직접 폐하께 받아낼 것입니다.”고지행은 그 말을 남기고, 소매를 휘날리며 돌아섰다.“오라버니, 기다리십시오!”금양 공주는 치마를 움켜쥐고 급히 뒤따라갔다.수행하던 시위들은 남아 뒤처리를 하며, 부상자들을 데리고 회춘당으로 향했다.백진아의 뺨을 때렸던 그 궁녀는 자발적으로 그곳에 남았고, 옆 노점에서 의자를 하나 빌려 와, 자리까지 잡으며 백진아를 감시했다.백진아는 이를 갈 만큼 분노했지만, 말없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제 해가 질 때까지, 8시간이나 버텨야 했다. 그녀는 그저 자신의 무릎이 망가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고지행이 나를 실망하게 하지 않기를... 꼭 그 좋은 것을 금양 공주에게 써야 할 텐데.’조금 전, 고지행이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던 순간, 백진아는 그에게 약 가루 한 봉지를 슬쩍 건네며 작은 소리로 금양 공주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말했다.아까까지만 해도 구경하던 백성들 역시 어찌할 바 모르기 시작했다. 백진아가 사람을 구하려다 이런 일을 당했다는 것을 이제는 모두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족과 귀족의 다툼에, 평범한 백성들이 감히 끼어들 수나 있겠는가?어떤 이들은 백진아와 연천능 사이의 과거를 알고 있었고, 화리를 하고 친정으로 돌아온 일을 두고 수군댔다.백진아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연민, 무관심, 비웃음까지 뒤섞여 있었다.백진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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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7화

정어사는 과거 여러 차례 금양 공주의 언행이 부적절하다고 탄핵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 그가 오늘 일을 알게 된다면, 분명 다시 금양 공주를 탄핵할 것이 분명했다.다만 정어사는 성품이 워낙 강직하고 고집스러워, 신하들과 패를 이루는 일은 아마 하지 않으려 들 것이다.연천능이 말했다.“걱정하지 말거라. 정어사의 아들 정박이 궁 안에서 유여매의 정조를 빼앗았다. 난 정박이 남긴 흔적과 증거를 없앨 수도 있고, 다시 세상에 드러내게 할 수도 있지. 가문의 목숨이 걸린 일이니, 정어사도 말을 들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그러자 무진이 웃으며 말했다.“역시 현명하십니다. 이 일로 정어사를 손안에 넣으셨군요.”무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연천능이 다시 명했다.“오늘 금양 공주가 저지른 일을 퍼뜨려라. 폐하와 황후에게 부담을 주어야지 않겠느냐? 이런 공주는 황실의 체면만 깎아 먹을 뿐이다.”“예!”무진은 예를 올린 뒤, 직접 일을 처리하러 갔고, 연천능은 창가로 다가가서 백진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한 사람은 대로 한가운데서 꼼짝하지 않고 무릎을 꿇고 있었고, 한 사람은 누각 위에서 꼼짝 않고 서 있었다.마치 조각상처럼, 안타까운 이 시간을 멈춰 놓은 듯했다.시간은 조금씩 흘러갔지만, 백진아는 매초가 끝없이 늘어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리는 점점 굳어갔고, 조금이라도 움직이려 하면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다리가 저린 느낌은, 정말 말도 안 되게 괴로웠다.“어머! 백가 아가씨 아닌가? 어찌 여기서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냐?”백진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속으로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오늘은 정말 재수도 없지!’고개를 들어보니, 유여매가 가마에 앉아 가림막을 걷고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여매의 표정은 연민과 걱정으로 가득했지만, 눈빛 속에는 고소하다는 기색이 스쳤다.처마 아래서 백진아를 지켜보던 궁녀는 급히 일어나 유여매에게 예를 올렸다.“능왕비를 뵙습니다!”궁녀는 유난히 세게 ‘능왕비’라는 세 글자를 외치더니, 무릎 꿇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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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8화

향명은 큰소리로 하녀에게 명을 내렸다.“아가씨에게 그늘막을 만들어 주거라!”그러고는 은혜를 베푸는 듯한 표정으로 백진아에게도 말했다.“이건 마마께서 베푸는 은혜니, 아가씨께서도 보답할 줄 알아야 합니다!”옆에 있던 구경꾼들도 바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아이고, 능왕비는 정말 착하고 너그러우셔.”“역시 새 능왕비가 능왕과 잘 어울리네.”“현명하고 용감하신 능왕 전하는 당연히 가장 좋은 여인을 고르지 않겠소?”“능왕비야말로 여인의 본보기야.”“정말 착하고 현숙한 왕비시네.”그 말에 백진아는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권위를 잃으니, 별의별 사람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는가?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상황에도, 유여매 같은 가식적인 사람이 현숙한 척을 할 기회를 주다니. 바로 그때, 한 하녀가 우산을 들고 와서 백진아를 도와 햇볕을 가려주었다.“고맙습니다, 능왕비. 하지만 능왕부의 하녀에게 폐를 끼칠 순 없으니, 그만 물리시지요.”청아한 목소리와 함께 백우씨가 하녀와 노복들을 거느리고 우아하게 걸어왔다.버들 같은 눈썹과 살구 같은 눈, 오뚝한 코와 얇은 입술, 눈처럼 흰 피부에 잘록한 허리까지. 그녀는 걸을 때 치맛자락 사이로 발끝조차 드러내지 않았고, 장신구끼리 서로 부딪히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여전히 대가의 기품이 드러났다.미모는 말할 것도 없고, 기세와 위엄만으로도 유여매 같은 평범한 여인을 단번에 압도했다.백진아는 처음으로, 바깥사람들 앞에 선 백우씨를 보았다. 집 안에서 안주인의 기품을 풍기던 모습과는 달리, 뼛속에 밴 그녀의 고귀함은 저절로 고개를 들게 만들고, 경외심을 품게 했다.“신첩, 능왕비 마마를 뵙습니다.”백우씨는 당당하면서도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며,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진아를 도와주신 데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다만 햇볕을 가리는 일로 마마의 하녀를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날이 워낙 더우니, 백가의 하녀가 대신 우산을 들게 하겠습니다.”역시 노련한 사람은 달랐다. 그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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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9화

“속 좀 그만 썩이고 어서 마시거라!”백우씨는 꾸짖는 말투로 말했지만, 얼굴에는 걱정과 안쓰러움이 가득했다.그녀는 이내 녹두 탕을 들어, 백진아에게 먹여 주었다.백진아는 바로 받아 마셨고, 얼음과 설탕을 넣은 것이라 시원하고 달았다.그녀는 눈을 몇 번이나 깜빡이며 간신히 눈물을 삼켰다.주변에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을 때 눈물은 가장 쓸모없는 것이었다. 괜히 가까운 사람만 아프게 하고, 원수만 기쁘게 할 뿐이다.백우씨는 백진아에게 녹두 탕 한 그릇을 다 먹인 뒤, 바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는 의자를 하나 달라고 하여 처마 밑에 단정히 앉아, 백진아가 네 시진을 꿇어앉아 있을 때까지 함께 기다렸다.그녀가 이 자리에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는 달랐다.그녀는 백근당의 부인이며, 곧 백가의 태도를 대표했다.비록 백근당은 황제의 부하고,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다고는 하나, 손에 병권을 쥐고 있었다. 그를 건드려서 좋을 일은 하나도 없었다.금양 공주는 황후와 태자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백진아를 모욕하는 것은 곧 황후와 태자가 백가를 적으로 돌리는 일이었다.백우씨는 백진아가 화리 후 친정으로 돌아왔지만, 백가가 딸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행동으로 분명히 보여 주고 있었다.백진아는 허리를 곧게 세우고, 눈물을 삼키며 허공을 바라보았다.전생에 그녀는 고아였어서 단 한 번도 모성애를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이렇게 어머니에게 보호받는다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백진아의 굳은 눈빛 속에는 점점 차가운 기운이 스며들었다. 무언가가 조용히 변하고 있었다.그녀는 현대에서 태어나, 법을 지키며 자랐고, 법과 평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형성된 가치관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일들은 절대 하지 않았다.이를테면, 그녀는 먼저 남을 해치지 않는다. 늘 먼저 괴롭힘과 억압을 당한 뒤에야 비로소 반격을 했다. 게다가 그 반격조차도 상대에게 뼈가 부러질 만큼의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교훈 정도에만 그칠 뿐이었다.심지어 그녀를 죽이러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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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0화

어느새 거의 정오가 되었고, 백진아는 이미 두 시진 가까이 꿇어 앉은 상태였다. 무릎은 아프고 다리는 너무도 저려왔다.다리를 조금만 움직여도 버티질 못할 정도라, 몸이 옆으로 기울며 넘어질 뻔했지만, 다행히 춘화와 추월이 붙잡아 주었다.백진아는 두 사람의 부축을 받아 겨우 일어섰다. 그녀의 달빛 같은 하얀 치마에는 어느새 핏자국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아… 아이고!”발이 땅에 닿는 순간, 수많은 개미가 물어뜯는 듯한 통증이 몰려와, 그녀는 또다시 쓰러질 뻔했다.다리와 발이 저릴 때의 그 느낌은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 시고 아려서 미칠 것 같은, 정말 사람을 돌아버리게 만드는 감각이다.백우씨는 마차를 불러오라 명을 내린 후, 하녀들에게도 지시했다.“어서, 아가씨를 마차에 모셔라!”몇 명의 하녀와 노파가 거의 업다시피 백진아를 마차에 태웠다.백진아가 마차 안에 앉자, 춘화와 추월도 함께 올라타 양옆에서 그녀의 다리를 주물러 주며 혈액 순환을 도왔다. 백우씨도 마차에 올라타며, 마부에게 집으로 가라고 명을 내렸다.그리고 황후가 하사한 설련옥로고를 꺼내 춘화와 추월에게 말했다.“이 약을 무릎에 발라 주거라.”하지만 백진아는 오히려 경계하며 말했다.“제가 먼저 확인해 본 뒤에 쓰는 게 좋겠습니다.”궁에서 나온 물건은 함부로 쓸 수 없었다.백우씨는 연고를 열어 살펴보았고, 냄새까지 맡아보았다.“문제는 없을 것 같구나. 이 설련옥로고는 색이 옥처럼 희고, 향도 은은하다. 만약 사람을 해칠 물건이라면 외관이나 향부터 달랐을 것이다.”상자를 여는 순간, 마차 안에는 상쾌하고 맑은 향이 가득 퍼졌다.백진아는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거의 네 시진을 꿇어앉아 있었기에, 옷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몸 전체에 땀 냄새가 감돌고 있었다.그런데 연고를 바르자마자, 코끝에 오직 향기로운 냄새만이 느껴졌다.백우씨는 연고를 백진아에게 건네며 말했다.“자, 보거라.”백진아는 연고를 건네받았는데, 수정처럼 투명하고 눈처럼 희어, 보기만 해도 고급스러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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