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의 모든 챕터: 챕터 11 - 챕터 20

40 챕터

제11화

이도현의 등장으로 신수빈은 놀라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 날이 샐 무렵에야 겨우 눈을 붙일 수 있었다.청하가 그녀를 깨우러 왔을 때, 신수빈은 잠이 부족해 아린 이마를 주무르며 일어섰다."대공자께 전해라. 무예에 능하고 몸 쓰는 데 익숙한 아씨 둘을 구해보시라 하여라."지난밤 이도현이 왔다 간 일을 아무도 몰랐던 탓에 신수빈은 심한 불안감을 느꼈다.청하는 고개를 끄덕이고 신수빈의 세수를 거든 뒤 안채로 서씨 부인께 문안을 드리러 갔다.서씨 부인은 본래 성질이 까다로웠다. 시집왔을 적 시어머니께 갖은 시집살이를 받았던 만큼 이제 며느리를 대함에 있어 더욱 엄하였다.병을 앓는 중이라 하였지만 신수빈의 조석 문안은 면제되지 않았다. 그녀는 아침상을 들인 뒤 약을 챙겨드렸고 서씨 부인은 침상에 누워 다리가 저리다며 다리를 주물러 달라 하였다.신수빈은 말없이 낮은 탁자 곁에 앉아 정갈히 다리를 눌러드렸다.전생에도 이랬다. 서씨 부인은 언제나 그녀를 갈궜고 이런 행태는 늘상 써먹던 수작이었다.이윽고 점심 무렵이 되어야 서씨 부인은 진정되었고 이어서 점심상을 차려야 했다.한참 뒤, 서씨 부인이 낮잠에 들고 나서야 청하는 속상한 듯 입을 열었다."마님, 부인께서 주무시는 사이 잠시 눈을 붙이시지요."신수빈은 허리를 주무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씨 부인이 곧 깨어 다시 부를 것이 분명했기에 그녀는 부인의 처소 옆 귀방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청하는 부채질을 하며 그녀의 눈 아래 짙게 내려앉은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그저 안쓰럽기만 하였다.무슨 권세가 집안이라지만 속은 시궁창 같은 일뿐이었다. 그녀가 친정에 있을 때는 이보다 훨씬 자유로웠는데...다행히 오후가 되자 서씨 부인은 피곤했는지 더는 시비를 걸지 않았고 신수빈도 그제야 오래 누울 수 있었다.청하가 그녀를 깨울 즈음 바깥에서는 울음섞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곧이어 그 소리는 안채로 들어왔다.신수빈은 소란에 눈을 떴고 윤서원과 한 어미에게서 태어난 적형제인 윤서령임을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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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윤서령은 두어 마디만 꺼냈을 뿐인데 신수빈이 이토록 길고 또렷한 말로 반격해 오리라곤 생각지도 못하였다.무어라 되받아쳐야 하나 궁리하던 찰나, 신수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작은아씨도 머지않아 혼사를 앞두고 계시지요. 저와 서방님, 그리고 시부모님께서 작은아씨의 혼수를 성심껏 마련해 드릴 터이니 훗날 시집을 가시면 그 집안의 일원이 되시는 겁니다. 혹여 그 집에서 아씨를 모욕하거나 업신여기면 저희가 마땅히 나서서 도와드릴 것입니다. 허나, 장차 시집갈 몸이 자꾸 친정에 손을 벌리면 저희 부부나 시부모님께서야 입 꾹 다물고 도와줄 수 있겠지만 남편 집안 식구들은 아닙니다.그들은 아가씨를 비웃을 것이지요. 이 이치는 작은아씨께서도 아셔야 합니다."신수빈은 큰며느리는 어미와도 같다는 태도로 나서서 조곤조곤 타일렀고, 그 말에 성이 치민 윤서령은 눈을 부릅떴으나 도무지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서씨 부인은 딸을 감싸고 싶었으나 신수빈의 말에 딱히 흠잡을 곳이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됐다. 그만들 하거라. 아직 시집도 안 간 처녀에게 무슨 말을 그리도 길게 하느냐. 도가 지나치다.""어머님의 말씀, 마음에 새기겠습니다."신수빈은 부드럽게 받아쳤다.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곁에서 듣고 있던 청하는 속이 뒤집어졌다. 어떻게 해도 결국엔 아씨 탓이 된다! 한 달 남짓 전부터 아씨는 완전히 사람이 달라진 듯하였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불평을 몇 마디 내뱉었을 터인데 이제는 모든 말을 꾹 삼킨 채 웃으며 받아넘긴다. 그 모습이 마치 사람의 탈을 쓴 부처 같아 슬펐다.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윤서원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발걸음은 무거웠고 이마에는 응축된 노기가 가시지 않아 어디서 불쾌한 일을 겪었다고 대놓고 광고하는 듯했다.신수빈은 그런 서방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시원했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던 피로가 조금은 풀리는 듯하였다.윤서원은 서씨 부인께 인사를 올린 뒤, 곁에 앉은 신수빈을 향해 한마디 하였다."어머니 곁엔 더 있지 않아도 되니 돌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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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청하는 깜짝 놀랐다. 아씨가 어찌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신수빈은 고개를 살짝 저어 보이며 말을 삼가라는 뜻을 보냈고 청하는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놀란 표정을 감추었다.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윤서원이 신수빈을 데리고 마가로 들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청하는 더 머뭇거릴 수 없었다. 마부를 적당히 핑계로 돌려세운 뒤 곧장 몸을 뺐다.문제는 그녀는 섭정왕 저택이 어디 있는지 몰랐다. 다행히 밤거리에 사람들이 많아 행인을 붙잡고 물으며 발걸음을 옮겼다.한편, 신수빈은 윤서원을 따라 마가의 후원으로 향했다.마상서는 선황의 유지를 받은 고명 대신이자 지금은 내각 수보로 그와 이도현, 한 사람은 내정을 쥐고, 한 사람은 병권을 장악하고 있으며, 여기에 또 다른 고명 대신이 재정을 주관하고 있으니, 셋 다 권세를 한손에 쥔 실권대신들이었다.연회 자리에 앉자 마용의 시선은 끊임없이 신수빈에게 머물렀다. 그 눈빛은 마치 곧 손에 넣을 사냥감을 보는 듯 탐욕이 분명히 드러나 있었다."역시 윤 공자가 복이 많소. 이런 미인을 아내로 맞다니 늙은이도 부럽기 그지없소.""상서 대인께서는 세상 온갖 미색을 두루 보셨지 않습니까. 더구나 지금은 조정을 좌우하시는 분이시니, 품지 못할 미인이 어디 있겠습니까."윤서원은 아첨 섞인 말로 마용을 띄웠다.마용은 흐뭇한 듯 수염을 쓸며 고개를 끄덕였으나 말은 겸손히 돌렸다."그저 선황께서 신임하셨기에 소신이 조정을 보필할 수 있었을 뿐이오. 무슨 권세니 세도니, 그런 말은 금하시오. 윤 공자의 말은 분명히 벌을 받아야 하겠소.""예예, 대인의 말씀 옳으십니다. 부인과 함께 잔을 들어 벌을 받겠습니다."그는 곧 신수빈의 잔에 술을 가득 채워주며 말했다."이리 와 대인께 한 잔 올리거라."신수빈은 혼례 첫날, 혼례주 한 잔으로 정신을 잃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 일이 생각나니 어찌 이 술을 입에 댈 수 있겠는가.그녀는 술잔을 힐끗 본 뒤 옆에 놓인 찻잔을 들며 말했다."몸이 편찮아 술은 사양하겠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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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이도현이 싸늘한 기운을 뿜으며 후원의 사합채로 향하였을 때, 마당엔 인적이 없었다. 그는 서릿발 같은 기운으로 문을 걷어찼다.애초에 그는 신수빈이 그 늙은이를 피하지 못했을 것이라 여겼다. 이번에 그녀를 구하는 것은 첫날밤 자신의 죄를 덜어주는 셈이라 여겼고 이후로는 더 이상 연을 맺지 않으리라 다짐하였다.하지만 문 안으로 들어선 순간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온통 피로 물든 장막과 흐트러진 옷차림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칼로 얼굴이 가려진 채 손에 비녀를 쥔 쥐고 쓰러진 마상서의 목을 반복해서 찌르고 있었다. 침상은 물론, 주위 장막까지 핏물이 튀어 있었고 마상서는 이미 숨이 끊긴 지 오래였다. 그러나 그녀는 멈추지 않고 미친 듯이 계속 찔러댔다.그 모습을 본 이도현은 불현듯 그날 궁중 편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아찔한 눈매와 달콤한 말투로 자신을 유혹하던 그녀 겉으로는 요염한 첩실의 외양이었으나 그 모든 것이 탈이었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 눈빛에 독이 서린 그녀야말로 진짜였다.그녀가 혼례 첫날 밤에도 깨어 있었다면 아마 그날의 자신 역시 이렇게 찔러 죽였으리라.서방에게 물건처럼 취급받고 타인에게 내쳐진 여자. 그런 여인을 보며 이도현은 처음으로 경외에 가까운 감정을 품었다.그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고 힘껏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는 아래로 시선을 떨구며 단호히 말했다."이미 죽었다."신수빈은 자신만의 광기에 빠져 있었는지 그의 말에도 멍한 눈으로 허공을 헤맸다. 하지만 점차 흐릿하던 시야가 또렷해지며 그녀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철갑을 입은 강한 남자의 눈빛이 어지러웠고 가벼운 조소와 함께 억누른 감정이 엿보였다.신수빈은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피범벅이 된 얼굴로 꽃처럼 환하게."이 자는 죽었는데 왕야는 어찌 아직 살아 있는지요."그 말에 이도현의 눈빛이 깊어졌으나 이내 감정을 누른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상처가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비로소 안도했다. 피는 모두 마상서의 것이었다. 그 사실에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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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태의와 여의가 도착했을 즈음, 이도현은 이미 갑옷을 벗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여의에게 먼저 들어가 보라고 하였다.여의가 안으로 들어서자 침상 위에 손발이 묶인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입 또한 천으로 막혀 있었기에 여의는 놀라움에 숨을 삼켰다. 다시금 그녀의 얼굴과 알몸을 마주하자 여의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더는 쳐다볼 수 없었다.이도현은 미리 여인에게 옷을 입혀주라 명했기에 여의는 옷을 입힌 후에야 태의와 이도현을 들이게 하였다.이도현은 신수빈이 고통스러워 찡그린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돌려 태의에게 말했다."미혹약에 중독되었다. 해독하게 하라."태의와 여의는 동시에 놀랐다. 지금의 모습이야말로 처참하기 짝이 없으나 그 속에서도 그녀의 용모는 절세가인이라 할 만하였다. 이런 미인이 미혹약에 걸렸다면 평소 같으면 직접 몸으로 해독하는 것이 상례였다.그런 이들의 망설임을 눈치챈 듯 이도현은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아이를 지녔다."태의와 여의는 다시금 놀랐고, 이내 비로소 이도현이 몸소 해독하지 않은 이유를 깨달았다."왕야, 이와 같은 약은 약으로는 해독할 수 없습니다. 얼음물에 담그는 방법이 유일한 대책이나, 태기가 있는 몸으로 찬물에 들어가면 아이는..."태의는 난처한 듯 말했다."다른 방법은 없는가?"이도현은 그녀가 간절히 애원하던 얼굴이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렇지 않으면, 그저 독을 참아내는 수밖에 없습니다."이도현은 한참을 말없이 침묵하다, 고개를 떨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일단 의식을 되찾게 해라."태의는 곧 침을 들어 그녀의 손끝을 찔렀다.신수빈은 온몸을 떨며 반응하였고 혼미하던 눈빛이 점차 또렷해졌다.이도현은 침상 곁에 앉아,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태의가 왔다. 이 약은 해독법이 없다. 네가 나를 거부하는 한, 고통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찬물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리하면 아이는 살 수 없어."신수빈은 고개를 돌려 태의를 바라보았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아이를 살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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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그녀의 손목과 발목에는 이미 피가 맺힐 정도로 상처가 깊게 나 있었다. 속박이 풀어졌을 때 신수빈은 이미 의식을 잃고 있었다.여의는 그녀의 손목과 발목에 조심스럽게 약을 발랐다.약을 다 바르자 이도현은 손을 흔들어 물러가라 명하였다."임 태의를 데리고 가서 쉬게 하라."임 태의는 당장 내보내려는 것이 아니라는 뜻을 알아채고 하인을 따라 별채로 향하였다.흔들리는 촛불 아래 이도현은 신수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옷은 이미 땀에 흠뻑 젖어 있었고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얇은 비단 커튼이 살랑거렸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곁에 있던 얇은 이불을 들어 그녀에게 덮어주었다.이때의 그녀는 머리카락까지 땀에 흠뻑 젖어 뺨과 가슴에 달라붙어 있었다.그 모습은 마치 그날 밤, 지쳐 기절했던 때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처연하면서도 부서질 듯한 아름다움에 왠지 더 망가뜨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이도현은 천천히 다가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떨림 때문인지 그녀의 길고 곡선진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고 코끝에 맺힌 땀방울조차 유난히 애처로워 보였다.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다가 그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듯 그녀의 아랫배를 흘끗 바라보았다. 방금까지의 복잡한 감정이 모두 가라앉고 표정이 어두워졌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제 소식을 전했던 시녀를 불러 시중들게 한 뒤 방을 나섰다.그날 밤, 경성에는 암류가 일렁였다.마씨 집안 사람들과 조정의 중신들은 이미 태화문 앞에 모여 있었다.섭정왕은 어젯밤 내각 대신의 저택을 포위하고 심지어 사람까지 죽였다.이 사건은 조정 전체를 뒤흔들기에 충분했다.태화문이 열리자 조정 대신들은 태화전 안에 무릎을 꿇고 섭정왕이 조정을 어지럽히고 권력을 독단적으로 휘두르며 대신을 해쳤다고 상소하였다.사정을 모르는 대신들은 몸을 움츠리고 존재감을 낮추었다.황제는 아직 어린 나이였고 태후는 수렴청정 중이라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대신들의 상소를 들으며 매우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섭정왕이 어찌하여 내각 대신의 저택을 포위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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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이도현을 탄핵하려던 조정의 대신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마씨 집안에서 이도현이 마용을 죽였다고만 들었지 이런 내막이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게다가 사람을 죽인 것도 이도현이 아니었고 살인한 첩도 이미 죽어서 증언할 수 없으니 모두 난감해졌다."이제 마상서께서 돌아가셨으니 섭정왕께서 뭐라고 하시든 그 말씀이 곧 진실이 되겠지요. 살인죄를 자신의 첩에게 뒤집어씌우셨으니 신으로서는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마상서 쪽 사람들은 이때도 여전히 물러서지 않았다.이도현은 조정에 오기 전부터 이런 말들이 나올 것을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그는 말을 꺼낸 대신을 바라보며 점점 서늘해지는 기운을 뿜어냈다. 길고 가느다란 눈동자는 어둡고 깊게 가라앉아 마치 사람을 삼켜버릴 듯한 심연 같았다.섭정왕의 위세 아래, 태화전 안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고 대신들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모두가 섭정왕이 노하여 이 일을 강제로 누를 거라 생각할 때,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마용 그 늙은 놈이 직접 말하게 하지요."그의 말이 끝나자, 전각 밖에서 갑옷을 입은 군사들이 무언가를 들고 들어왔다.대전 안에 이르자 군사들은 들고 온 것을 내려놓고 하얀 천을 걷어 올렸다.천이 벗겨지자, 대전의 사람들은 놀라 비명을 질렀고 가까이 있던 이들은 뒷걸음질치다 넘어지기까지 했다.마상서의 사위인 공부시랑이 분노에 차서 외쳤다."섭정왕께서 이게 무슨 뜻이오? 어찌 시신을 모욕하는 것이오!"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마용의 시신이었고, 마씨 집안에서는 이미 옷을 잘 입혀놓아 몸에 끔찍한 피자국은 가려져 있었다.이도현은 누가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전각 밖에서 병사들에게 이끌려 들어오는 이를 바라보고 있었다.그 사람은 떨리는 몸으로 전각에 엎드려 두려움에 사로잡혀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다."초… 초민이 폐하께, 태후마마께, 그리고 섭정왕께 문안 올립니다."관직이 없는 자라 대전에서의 예법을 알 리 없었으나 이 순간 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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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그의 손은 왼손 호구 자리에 희미하게 남은 이자국을 천천히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것은 어젯밤, 신수빈이 자해하지 못하도록 막다가 그녀에게 물린 자국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니 감히 그와 눈을 마주치는 자는 없었고 모두가 저절로 머리를 떨구었다.이제서야 모두는 깨달았다. 소위 고명대신, 삼족정립의 형세는 모두 허상일 뿐, 실로 생사대권을 손에 쥐고 있는 자는 줄곧 이도현 한 사람뿐이었다.검시관이 계속 시신을 살폈고 조정에는 감히 다시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동각대학사, 내각차보라 할지라도, 그가 죽이라 하면 죽는 법. 이젠 말 한 마디를 내뱉을 때조차 제 목이 얼마나 단단한지 헤아려야 할 판이었다.마용의 시신이 검시관에 의해 알몸으로 드러나자 목덜미와 가슴팍을 가로지르는 흉흉한 상처가 모두의 눈앞에 드러났다.목을 중심으로 가슴까지 이미 살점이 찢기고 피범벅이 되어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검시관이 조심스레 살피더니 심지어 아래쪽까지 확인한 후 한참 만에 무릎을 꿇고 아뢰었다."아뢰옵니다, 섭정왕 전하. 사망자는 예리한 도구에 찔린 상처가 주를 이루옵니다. 상처의 모양을 보건대 십중팔구 금비녀로 인한 것이오며 그 중 목 부위의 상처가 가장 치명적이었사옵니다. 그 외에 모두 육십칠 차례나 금비녀에 찔렸으며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나이다."조정의 신료들은 이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이도현의 말을 믿게 되었다.이도현이 직접 죽였다면 어찌 금비녀로 육십칠 번이나 찔렀겠는가.검시관은 이어 덧붙였다."사망자는 생전에 흥분을 돋우는 보약을 복용한 흔적도 있사옵니다."이로써 이도현의 말이 더욱 사실임이 드러났다.태화전 안은 일시에 침묵에 휩싸였고 마용의 일파 또한 더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신하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이도현이 드디어 침묵을 깨고 물었다.그의 나른한 시선이 대전을 한 바퀴 휘돌자 그 안에는 모든 것을 꿰뚫는 듯한 투명함이 서려 있었다.이때 감히 나서는 자는 없었고 오히려 마용의 세력에 붙어 있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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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오늘은 마용의 일로 인해, 이도현이 도찰원과 대리사, 그리고 형부에 명을 내려 마씨 집안의 남녀를 가리지 않고 행패를 부린 일과, 각종 부정과 뇌물 수수 등 온갖 비리를 철저히 조사하도록 했다. 조정에는 감히 이의를 제기하는 이가 없었고 조회도 일찍 끝이 났다.평소라면 조회가 끝나면 이도현은 곧장 경기 대영이나 금군처로 향하였으나 오늘은 조회가 끝나자 곧바로 왕부로 돌아가려 하였다.태화전을 막 나서려던 참에 내관이 다급히 다가왔다."왕야, 태후마마께서 조회가 끝난 뒤 영수궁으로 들라 하십니다."이도현은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가 내관을 따라 영수궁으로 향했다."태후마마를 뵙습니다." 이도현은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휘장 너머에서 태후는 비록 허리를 굽혔으나 결코 비굴하지도 교만하지도 않은 그 남자의 곧은 기개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근심이 끊임없이 휘돌았다."오늘 조회에서 그대가 한 말 과연 진실이냐?"이도현은 모르는 척하며 되물었다."신이 조회에서 말한 것이 많사온데 태후께서는 어느 말씀을 묻고 계십니까?"태후는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구슬 휘장 너머로 그를 응시하였다.남자는 태연하게 대전 앞에 우뚝 서서 마치 그녀의 속내 따위는 전혀 모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태후가 먼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됐다. 그대도 이젠 나이가 찼으니, 첩이라도 두어야 하지 않겠느냐…"한참 동안 두 사람 모두 말이 없었다. 이도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태후께서 별다른 일이 없으시다면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이도현이 돌아서려 하자 태후는 그가 이토록 냉랭하게 말하는 것이 참을 수 없어 순간 이성을 잃고 자신의 신분도 잊은 채 벌떡 일어나 구슬 휘장을 젖혔다. 그가 떠나려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참지 못하고 외쳤다."너, 평생 나와 이렇게 말할 작정이냐?"이도현의 발걸음이 멈추고 등은 곧게 펴졌다.태후 곁의 궁녀들이 이 광경을 보고 조용히 눈짓을 주고받으며 모두 방을 빠져나갔다.태후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천천히 그의 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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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말을 마친 이도현은 뒤돌아 떠났다. 태후는 마음이 덜컥 비어버린 듯한 허탈함에 휩싸여 무의식적으로 그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으나 바람에 휘날리는 그의 옷자락조차 잡지 못했다.태후는 문에 몸을 기댄 채 손가락으로 문틀을 힘껏 움켜쥐었다. 손톱이 부러질 정도로 세게 쥐었지만 아픈 줄도 모르고 그저 그의 길고 곧은 뒷모습이 영수궁 문 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곁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태후의 측근인 소상궁이 다급히 달려와 태후의 손을 떼어냈다."태후마마, 어찌 이리 애를 태우십니까…" 소상궁은 이내 사람을 시켜 태의를 부르러 갔고 태후는 혼이 빠진 사람처럼 소상궁의 부축을 받아 침상에 앉았다."젊은 시절, 그는 이렇지 않았는데…" 태후는 중얼거리듯 나직이 말했다. 소상궁는 그 말을 들으며 속으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태후 곁을 지켜오며 그들의 지난 사연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해 태후가 궁에 들어가기로 결심한 순간, 그녀와 섭정왕의 인연은 이미 끝난 것이었다.한참을 멍하니 있던 태후는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소상궁의 손을 움켜잡았다."소영아, 네가 가서 알아봐라. 그가 새로 들인 첩이 누구냐? 어떤 여인인지, 또 첩이 몇이나 되는지…" 소영은 태후를 바라보며 이제는 왕야가 몇 명의 첩을 들이든 태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으나 태후가 그 말을 받아들일 리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이도현이 왕부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 그는 앞뜰에 머무르지 않고 곧장 내원으로 향했다.청하는 새벽부터 신수빈 곁을 지키고 있었다. 눈은 이미 울어서 퉁퉁 부어 있었다.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랐지만 지금 아씨가 깊은 잠에 빠져 있고 얼굴은 창백하며 눈두덩에는 푸른빛이 돌아 전날 밤 큰 고생을 했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아침에는 열이 심하게 올라 의녀가 침을 놓고서야 겨우 열이 내렸다. 하지만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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