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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거슬러의 모든 챕터: 챕터 211 - 챕터 220

250 챕터

제211화

라은정은 원래부터 서인경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지금 이렇게 한가운데로 나서서 사태를 뒤흔드니 화가 치밀었다.“여기는 너 같은 외부인이 끼어들 자리는 없어!”서인경은 잔잔히 웃으며 맞받았다.“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에 상심하는 모습이 전혀 없군요. 범인을 찾기는커녕, 정작 범인을 찾기 위해 나서는 저에게 화를 내다니... 참 기묘한 일이에요.”라채월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노려보았다.“막수한, 당신 막부가 언제부터 외부인이 함부로 끼어둘 수 있는 곳이 된 겁니까?”막수한은 태연하게 대답했다.“서 아가씨는 효연의 벗이니 우리 막부의 귀한 손님이지요. 저분에게 방법이 있다 말했으니 들어나 봅시다. 마님께서는 은정에게 공정을 세워줄 생각조차 없는 건 아니실 테지요.”단 한 마디가 라채월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녀는 말끝을 잇지 못하고 오히려 서인경을 향해 살기를 품은 눈을 보냈다.“좋습니다. 그대에게 반드시 방법이 있어야 할 겁니다. 감히 우리 집을 농락한다면 저는 결코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서인경은 천천히 라은정 앞으로 다가서더니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눌렀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몸을 튕겨내려 했으나 이미 꽉 제압당해 있었다.“무엇이 두려운 겁니까?”“나… 난 네가 싫다. 네 손길이 더럽단 말이다. 어서 비키거라!”서인경은 한 손으로 그녀의 팔을 제압하고 다른 손으로 맥을 짚듯 손목을 눌렀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일을 겪고 나서 한밤 내내 끙끙 앓아 잠 못 들고 얼굴빛도 상했을 것인데 라 아가씨는 혈색이 곱고 맥박도 안정되어 있습니다. 마치 한밤 푹 자고 난 사람 같아 보이는데 이거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라은정은 그 틈을 타 재빨리 손을 거둬들이며 외쳤다.“허튼소리! 난 어젯밤 내내 울기만 했다! 못 믿겠으면 내 시녀에게 물어보거라!”그 즉시 시녀 차림의 여인이 앞으로 나섰다.“아가씨 말씀이 옳사옵니다. 제가 곁에서 보았으니 증언할 수 있사옵니다.”서인경은 곧 그녀를 찬찬히 훑었다.“화장이 곱게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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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2화

살아 있는 어미를 다 이용해 먹은 뒤 죽은 아비까지 들먹이다니.서인경은 라은정을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었다.라채월은 눈빛을 곤두세우며 서인경을 노려보다 곧 막수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당신이 말했었죠. 제가 지하흑시에 있는 한, 우리 모녀는 보호하겠다고요. 그런데 지금, 이렇게 외부인에게 모욕당하는 걸 두 눈 뜨고 지켜만 볼 것입니까?”막수한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침착히 대답했다.“유모가 오면 알게 되겠지요.”곧 진실이 드러날 터였다.뜻밖의 전개에 라은정은 즉각 땅바닥에서 구르며 울부짖었다.“모두가 날 괴롭혀! 내가 첩이 되겠다는데도 왜 받아주지 않는 거야? 내가 죽어야 속이 시원하겠어? 어머니, 그냥 저를 죽게 해주세요!”라채월은 그 고함에 두통을 느끼듯 인상을 찌푸렸다.“닥쳐라! 누가 너더러 한밤중에 집을 나가 진 가 문 앞에서 추태를 부리라 했느냐! 남이 싫다는데도 네가 매달리다니... 라 가의 딸이 그리도 값어치가 없단 말이냐? 우리 라 씨 가문은 아직 그리 비루하지 않다!”그 말끝에는 진정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라은정은 겁에 질려 더 이상 말도 못 하고 흐느낄 뿐이었다. 하지만 서인경은 그 광경이 오히려 숨 막혔다.라채월은 마치 체념한 듯, 그러나 날카로운 결기로 입을 열었다.“제 딸의 명예는 이미 짓밟혔습니다. 그러니 다시는 누구도 손대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 주 유모라는 사람, 당장 보내세요. 이 일은 더 이상 캐묻지 않겠습니다. 원망할 게 있다면 저 같은 어미를 둔 것을 원망하라 하지요. 저는 어리석어 폭군에게 몸을 주었고 음모꾼들의 손에 놀아났습니다. 그러니 제 딸만은 지킬 것입니다. 다시는 저와 같은 길을 걷지 않게 하겠습니다.”서인경은 귀를 파며 중얼거렸다.‘이 말, 어쩐지 석연치 않는 구석이 있군.’막수한은 더는 참지 못하고 음성을 낮추어 물었다.“도대체 무엇을 바라는 것입니까?”라채월의 눈빛은 두려움 하나 없이 곧았다.“성동 호성하의 수운 사용권. 그것을 주면 이 일은 없던 일로 해주겠습니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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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3화

막수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이 몇 해 동안 내가 라채월에게 줄 수 있는 자원은 점점 줄어들었고 그녀의 불만은 이미 오래전부터 쌓여왔다. 반기를 들 생각은 있었으나 너와 나를 움직이지 못하니 함부로 힘을 쓰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외부 세력과 손잡을 가능성이 크지. 우리는 늘 경계해야 한다.”서인경은 왠지 허전한 구석이 있는 듯 마음이 쓰였다. 그 순간, 밖에서 급히 달려온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성주께 아뢰옵니다! 남궁열 공자께서 돌아오셨사옵니다!”서인경은 그제야 무언가 깨달은 뜻 흠칫 몸을 떨었다.늘 빠져 있던 한 조각. 남성 성주의 입장이었다.막수한은 말이 끝나자마자 걸음을 옮겼다.“묵염, 나와 함께 가 보자. 효연, 넌 안에서 네 어머니 곁을 지키거라.”“알겠습니다, 아버지.”서인경은 두 사람의 뒷모습이 문밖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다.“남궁열은 누구인 겐가?”“남궁열은 남성의 주인인 남궁오 어르신의 아들이네. 지금은 그가 대신 남성을 다시르기도 하지.”서인경은 시선을 거두고 막효연과 나란히 햇살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남궁댁은 어떤 집안인 겐가? 왜 개시대회 같은 큰일이나, 방금처럼 소란스러운 자리에서는 나서지 않는 겐가?”막효연은 눈을 지그시 감고 안타까운 듯 말끝을 늘였다.“남궁오 어르신은 몇 해 전 흉인에게 독을 당해 두 다리를 잃고 휠체어에만 의지해 있다네. 그 뒤로는 바깥에서 거의 얼굴을 비추지 않으셨지. 남궁열은 사냥에만 몰두하는데 지하흑시 관리에는 전혀 흥미가 없네. 올해도 설이 막 끝나자마자 깊은 산속에 붉은 털의 희귀 여우가 나왔다는 말에 홀린 듯 쫓아가 버렸지. 개시대회의 돈벌이조차 마다하고 말이네.”서인경은 새삼 놀라 입꼬리를 올렸다.“돈보다 취미를 좇는 사람이라니, 성정이 곧은 인물이군.”막효연은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쳇, 그렇게 단순했으면 참 좋겠네.”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뒤쪽에서 시녀가 그녀를 불렀다.“아가씨, 마님께서 일어나셨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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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4화

연기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말을 아끼는 게 아니라 말할 거리가 없는 것이다. 다섯 해 전 남궁오가 자객에게 당해 두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된 이후 남궁댁은 스스로 몸을 낮추어 왔다. 새로 집안을 이은 남궁열은 사냥에만 심취해 세상일은 돌아보지 않았지. 남궁 가문의 장사만 돌볼 뿐, 지하흑시의 일은 늘 막 가의 뜻에 따르고 감히 이견을 내지 않았었다.”서인경은 입안의 만두를 천천히 씹으며 머리를 굴렸다.“그렇다면 오직 라 가만이 모든 이와 엇박자를 내고 있는 셈이군요. 하지만 방금 효연이 말해 준 건데 그 자도 그리 단순하지 않다 던데요. 남궁댁에도 뭔가 숨겨진 사정이 있을 겁니다.”연기준은 그녀를 흘끗 바라보았다.“숨겨진 내막이란 남궁댁은 대대로 외아들만 이어오던 집안인데 정작 남궁열은 후사를 볼 수 없는 몸이라는 것이다. 곧 남궁 가문의 씨가 마르겠지.”서인경은 순간 손끝이 굳어 막 집어 올리던 만두가 허공에 멈췄다. 그녀는 목을 뻣뻣하게 돌리며 물었다.“정말입니까?”사냥을 광적으로 즐기는 사내라 하면 그녀의 머릿속에는 장대한 어깨, 우람한 기골, 넘치는 정력,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모습이 떠올랐다.한데... 어찌하여 자손을 잇지 못한단 말인가?천성적으로 정자가 없는 것일까 아니면 후천적으로 화를 입은 것일까?만약 후천적인 것이라면 고칠 길이 있을까?연기준은 그녀 머릿속에서 굴러가는 상상을 짐작한 듯 얼굴에 애매한 빛을 띠었다.“사내의 그 일은 외모나 취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서인경은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그럼 무엇과 상관있습니까?”“정말로 알고 싶은 것이냐?”그 말에 담긴 기운을 읽은 서인경은 고개를 저으며 급히 물러섰다.“아… 아니, 알고 싶지 않습니다.”*남궁 저택.남궁열은 정말 붉은 여우 한 마리를 붙잡아왔다.여우는 아직 살아 있었으나 뒷다리가 덫에 걸려 털이 피에 젖어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 외의 털빛은 불꽃처럼 선명히 빛나고 있었다.짐승은 영물이라 이미 길들여졌다 해도 사람 무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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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5화

남궁오는 이제 겨우 오십을 넘겼을 뿐인데 그의 용모는 이미 칠순 노인처럼 초췌해 보였다. 그러나 그의 눈빛만은 여전히 날카롭고 속내를 꿰뚫는 듯한 기민함이 서려 있었다.“무슨 연극을 한다는 것이냐? 채월아, 나는 네 말 뜻을 모르겠구나.”라채월은 싸늘히 웃으며 비수 같은 말을 던졌다.“조심하세요. 오래 속이다 보면 정말로 저 두 다리는 못 쓰게 될지도 모르니까.”남궁오는 대꾸도 하지 않고 휠체어를 돌려 자리를 뜨려 했다.“무슨 헛소린지 알 길이 없구나. 다른 일이 없다면 물러가거라.”그러나 라채월은 성큼 다가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저는 방금 막수한에게서 수운권을 받아냈습니다. 그 사용권, 원래는 셋째 오라버니 손에 있던 게 아니었습니까?”남궁오의 눈매가 가늘게 접혔다.“그래서 어쩌겠다는 것이냐? 이 몸은 이미 폐인이나 다름없다. 무슨 권한을 쥘 수 있겠느냐?”라채월은 그의 굳은 두 다리를 노려보며 입꼬리를 차갑게 비틀었다.“폐인인지 아닌지는 시험해 보면 알겠지요.”그녀는 그 말과 함께 손가락 사이에 낀 은침을 휠체어 위로 날려보냈다.남궁오는 재빠르게 휠체어를 돌려 몸을 피했다.“라채월,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라채월은 방향을 바꾸어 곧장 뒤쫓았다. 남궁오는 미처 피하지 못했고 은침이 그의 허벅지를 찌르는 순간 거센 장풍이 휘몰아치며 누군가가 라채월을 힘껏 밀쳐냈다.“아버지, 괜찮으세요? 어서 의원을 부릅시다.”남궁오는 무표정한 얼굴로 은침을 뽑아내며 담담히 답했다.“괜한 소란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나는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했으니 괜찮다.”남궁열은 분노에 치를 떨며 라채월을 노려보았다.“저보다 어른이시라 그리도 공경했건만 감히 제 아버지를 해치다니요!”라채월의 입술에는 피가 맺혔고 두어 번 헛기침을 토했으나 그녀의 얼굴은 오히려 기묘하게 환희로 물들어 있었다.방금 자신이 밀려나던 그 순간 은침이 남궁오의 다리에 꽂혀도 그가 아무런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는 똑똑히 확인한 것이다.“셋째 오라버니께서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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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6화

그는 곰곰이 생각했다.라채월은 왜 수운권을 손에 넣자마자 곧장 남궁오를 자극한 것일까? 그리고 왜 남궁오가 연기한다고 의심한 것일까?한편, 서인경은 막부에 머무는 일이 지루하기만 했다. 드물게 연기준이 먼저 나서서 그녀를 데리고 성 안을 거닐며 마음을 달래주었다.둘은 흑시를 한 바퀴 돌아보며 내일 열릴 경매에 대해 들었다.어제는 약재가 거래되었다면 내일은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들, 즉 희귀한 보석과 옥기, 진주와 마노 따위가 경매에 오른다 했다.그 말에 서인경의 눈이 반짝였다. 연기준은 그녀의 얼굴을 흘낏 살피며 물었다.“욕심나는 것이냐?”서인경은 고개를 기울이며 태연히 대답했다.“은영이랑 맹부 사람들에게 조금 사 가려고요. 그렇지 않으면 제가 경성으로 돌아갔을 때 저를 원망할 게 뻔하잖아요.”연기준은 대꾸하지 않고 짧게 잘라 말했다.“네가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사거라.”서인경은 일부러 웃으며 그를 떠보았다.“근데… 들으니 값이 꽤 비싸다던데요?”연기준은 곁눈질로 그녀를 한번 쳐다보더니 단호하게 말했다.“본왕이 그깟 돈이 모자라겠느냐.”그 말투에는 전형적인 권세가의 오만함이 배어 있었다.서인경은 비록 그 호의에 크게 연연하지는 않았으나 마음속으로는 실컷 그의 재물을 뿌리고 다니고 싶어졌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계산을 굴리며 걷다 보니 어느덧 정오가 되었다. 연기준은 그녀를 성안의 진 가 주루로 이끌었다.마침 점심때라, 주루는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볐고 밖에는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주인이 연기준을 알아보고는 허둥지둥 나와 그를 맞이하였다.“어르신, 이리 2층으로 모시지요. 저희 공자님께서 특별히 일러 주셨습니다. 귀한 손님이시라고.”서인경은 따라 올라가며 물었다.“전에 여기 와본 적이 있습니까?”연기준은 눈길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대답했다.“어제.”서인경이 다시 물으려는 찰나 그가 덧붙였다.“어제 네가 나를 화나게 만든 이후에 온 것이다.”서인경은 눈을 흘기며 한숨을 쉬었다.대체 누가 누구를 화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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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7화

“쾅!”라은정이 문을 밀치고 들어왔을 때 서인경 앞에 놓인 작은 사발에는 이미 음식이 가득 쌓여 있었다. 연기준은 그 소란에도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여전히 그녀에게 반찬을 집어주고 있었다.“맛 좀 보거라. 진묵염이란 놈의 인품은 형편없으나 이 주루의 요리 맛은 제법이니.”라은정은 안에 있던 서인경을 보자 눈에서 불이 튀었고 이어 그녀 곁에 앉아 있는 연기준을 발견하고는 그 불꽃 속에 섬광이 번쩍였다.“당신이 서인경의 그... 곧 죽을 남편입니까? 생긴 건 꽤 괜찮군요. 묵염 오라버니보다도 잘생겼네!”태어나서 진묵염 말고는 그토록 잘생긴 사내를 본 적이 없는 그녀는 순간 숨이 막힐 듯한 경이로움에 사로잡혔다. 어릴 적부터 단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압도적인 아름다움이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진묵염에게 지쳐버린 마음이 눈앞에 있는 사내를 보자 생전 처음 느끼는 두근거림으로 변해버렸다. 그녀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그러나 방금 전 라은정이 생각 없이 뱉은 말은 서인경의 신경을 곧장 건드렸다.아침까지만 해도 진묵염에게 목숨 걸 듯 매달리던 여자가 이제는 연기준 얼굴을 한 번 본 것만으로 눈이 휘둥그레지다니... 정말 제정신이 맞는 건가?서인경은 비꼬듯 입을 열었다.“라 아가씨, 남자가 그리도 모자랍니까?”라은정은 눈을 부릅뜨고 맞받았다.“본 아가씨는 너하고 말한 적 없거든? 네 신랑은 곧 죽어갈 사람이다. 그런 자를 내가 거들떠보는 것만도 그에게는 큰 영광이지!”서인경은 태연하게 젓가락을 내려놓고 팔꿈치로 연기준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어머, 상공. 얼굴 값 한 번 제대로 하는군요. 곧 죽는 몸뚱어리에 아직도 탐내는 사람이 있다니 말입니다.”그제야 연기준은 곁눈질로 그녀를 바라보며 나직이 대꾸했다.“내 마음속에는 오직 부인뿐. 다른 이는 담아낼 자리가 없다.”뜻밖의 고백에 서인경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라은정 앞에서 일부러 손가락으로 연기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우리 상공, 참 착하기도 하지.”연기준의 눈빛이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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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8화

서인경은 들으면 들을수록 두 눈이 점점 커졌다.수운권이라는 말이 나오자 그녀는 슬그머니 몸을 옮겨 라은정 곁에 붙어 앉았다.마치 세상 온갖 소문을 캐내려는 듯 눈빛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수운권이라니요? 그건 겨우 배 좀 띄워 성 안의 물건을 내다 파는 게 아닌가요? 그게 얼마나 돈이 된다고?”라은정은 당장이라도 그녀가 촌에서 올라왔다며 조롱할 기세로 코웃음을 쳤다.“시골뜨기, 네가 뭘 안다고 떠드는 것이냐?”서인경은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 저는 촌구석 출신이라 큰 장사에는 문외한이죠. 다만 좀 궁금해서요. 그리도 돈이 된다면 어찌 막 성주께서 그리 쉽게 내주셨을까 해서...”라은정은 비웃음을 흘리며 속내를 내비쳤다.“그 사람 손에 있으면 돈이 안 돼. 한데 우리 어머니 손에 들어오면 그건 황금이 되지.”라은정은 능청스럽게 그녀의 팔을 끼고는 자매지간처럼 다정한 얼굴로 속삭였다.“좀 더 자세히 얘기해 주세요. 저 같은 촌사람은 세상 물정을 배울 기회가 흔치 않거든요.”라은정은 콧방귀를 뀌며 그녀의 말을 잘라냈다.“말해도 너는 못 알아듣는다. 네게는 쓸모도 없고.”서인경은 집요하게 파고들었다.“그건 모릅니다. 우리 마을에도 강이 흐르고 배가 몇 척 있거든요. 잘 배우면 저도 고향 가서 한몫 챙길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라은정은 혐오스럽다는 듯 팔을 홱 뿌리쳤다.“네가 하는 꼴이 우스워 죽겠네. 우리 어머니 장사는 그런 하찮은 게 아니야, 그건...”“아가씨…”마침내 귀를 쫑긋 세운 서인경이 라 가의 비밀을 들을 수 있나 싶던 그때, 하녀가 갑자기 뛰어들며 말끝을 잘라버렸다.“마님께서 어서 돌아오라고 하옵니다.”라은정은 얼굴을 찡그리며 투덜댔다.“난 가지 않은 것이다! 돌아가면 또 욕먹을 텐데. 오늘 아침 일은 나 혼자 원해서 그런 것도 아닌데 왜 자꾸 날 탓하는 것이냐!”하녀의 눈빛에는 노골적인 경계가 깃들어 있었다. 눈치 빠른 서인경은 더 이상 앞선 화제가 이어질 수 없음을 알아차리고 화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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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9화

한바탕 서인경을 떠본 후, 라은정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하면서도 결국 입을 다물었다 서인경은 마음속으로 라은정이 흘린 퍼즐을 맞추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기에 다가오는 그림자를 알아차리지 못했다.“정말, 하고 싶은 말이 없는 것이냐?”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니 시커먼 얼굴이 이미 눈앞에 와닿아 있었다.서인경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뒤로 젖혔다.“쳇, 그리도 소심하게 굴지 마세요. 말뿐이잖아요. 왕야 같은 상왕을 제가 어디 팔아넘길 수나 있겠습니까?”‘이 여인이 말하는 거 좀 보소!’팔아넘길 수 없다라니... 대체 지금 누굴 흥정거리로 여기고 있는 건지!막 화를 터뜨리려던 순간, 서인경의 손끝이 그의 얼굴을 스치며 내려앉았다. 그녀의 온화한 촉감에 가슴속에서 치솟던 불길이 잠시 잦아들었다.“상공께서는 어찌할 생각입니까? 라채월의 저 행보, 혹시 우리가 쫓는 소녀 실종 사건과 얽힌 건 아닐까요?”손길은 애무하는 것처럼 부드러웠으나 입술에서 흘러나온 말은 차가운 이성의 칼날이었다. 연기준은 순간 화를 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그건 모른다.”서인경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상공께서는 이미 지하흑시에 손을 뻗어 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한데 어찌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모를 수 있단 말입니까?”연기준은 그저 묵묵히 그녀를 응시할 뿐, 답하지 않았다.서인경은 자존심을 내려놓고 그의 턱을 가볍게 집어 올렸다. 그러고는 그의 입가에 짧게 입술을 스쳤다.“말해 주세요, 상공...”연기준은 순간 얼어붙었다. 잠시 후, 그의 눈은 이글거렸고 방금 잠재워졌던 불길은 다시금 치솟았다. 이번에는 분노가 아니라 뜨겁고 가시 돋친 갈망이었다. 그가 몸을 숙이며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찰나, 서인경은 손끝으로 그의 입술을 막아 세웠다.“여긴 남의 땅입니다. 오늘 밤, 우리 방으로 돌아가서… 그때 얘기합시다.”연기준의 가슴속 불길은 더 커져 당장이라도 터져 나올 듯했다.‘밤까지 어떻게 참으란 말인가?’“안 되겠다. 그만 먹고 돌아가자.”연기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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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0화

밤을 가르듯 연기준이 불쑥 입을 열었다.“남궁열은 어떠하냐?”진묵염이 고개를 돌리며 답했다.“남궁열은 다시는 산에 들어가지 않겠다 맹세했습니다. 앞으로는 성안에 머물며 부친을 도와 집안을 다스린다 약조했습니다.”그 말을 들은 연기준의 눈빛이 매서워졌다.“즉시 사람을 보내 그가 갔던 산중을 낱낱이 뒤져보게 하거라.”진묵염은 뜻밖이라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혹시 남궁열을 의심하시는 겁니까?”연기준은 서늘하게 입꼬리를 올렸다.“개시대회 같은 중대사에 라채월은 기어코 소란을 일으켰다. 그런데 남궁댁 중 한 명은 문을 걸어 잠그고 다른 한 명은 산으로 들어가 종적을 감췄지. 수상하지 않으냐?”진묵염은 곱씹듯 중얼거렸다.“들어보니 마치 무언가를 피하려는 듯하군요. 알겠습니다. 제가 사람을 붙이겠습니다.”한편, 서인경의 관심은 온통 금전초에 가 있었다.어떻게 하면 그 은밀한 매입자를 붙잡을 수 있을까?막부.막수한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곧장 부관을 서재로 불렀다.“금전초를 판 자는 찾았느냐?”부관은 고개를 떨구었다.“저의 불찰이옵니다. 그 여인은 얼굴을 가려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사옵니다. 제가 성주님을 볼 면목이 없사옵니다.”막수한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만두거라. 대신 수운을 지켜보거라. 금전초는 극한의 땅에서 사십구 일 동안 얼음 속에 묻혀야 약성이 극대화된다. 내 짐작이 옳다면 라채월은 배를 이용해 그 매입자를 곧장 막북으로 실어 나르려 할 것이다.”부관은 깜짝 놀라 고개를 조아리며 급히 응했다.“명심하겠사옵니다.”그 시각, 서인경은 밖에서 돌아와 침상에 앉아 책을 펼쳐 들고 있었다.약왕곡에서 도팔천이 기른 금전초.그녀는 줄곧 이 약재가 생명을 구하는 신령한 약초라 여겨 왔다.그러나 방금, 막수한의 입에서 또 다른 용도를 들었다.금전초는 유월비설과 결합하여 사람을 통제하는 무시무시한 도구가 된다는 것.지식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낀 서인경은 며칠째 이를 파고들며 돌파구를 찾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지하흑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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