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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시간을 거슬러: Chapter 21 - Chapter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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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화

서인경이 잡은 손에 힘을 주자 사내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난 상왕의 왕비다. 그러니 내가 여기 있는 한, 상왕께서 너희를 모른 체하실 일은 없을 것이다. 다시 소란을 부리는 자에게는 어떤 치료도 해주지 않겠다.”한 노인이 아이를 안고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다.“허나 지금은 탕약도 없고 아무도 저희를 구해주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서인경이 말했다.“약재는 오늘 안으로 도착할 것이네. 지시를 잘 따르면 모두가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거라 내 약조하지.”“그게… 참말입니까? 저희에게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지요?”그 말을 들은 서인경은 손을 들고 말했다.“상왕비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약조하겠다. 오늘부터 나는 이곳에 남아 마지막 환자가 격리 구역을 떠날 때까지 함께하겠다.”서인경의 보증이 있으니 드디어 환자들의 절규가 줄어들고 통제마저 쉬워졌다.성안에서 대비를 마친 연기준은 곧바로 격리 구역으로 달려왔다. 연풍이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왕야, 왕비마마께서는 전염 가능성이 큰 역병이니 절대 들어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연기준이 굳은 표정으로 되물었다.“역병이 사내에게만 전염되고 여인에게는 옮기지 않는다 하더냐?”연풍은 당황한 표정으로 안쪽 사정을 설명했다.“마마께서는 바깥 상황은 왕야께서 통제해 주셔야 한다고 간곡히 말씀하셨습니다. 오후에 약재가 도착할 것인데 왕야의 감독이 필요하다고요. 불순한 의도를 품은 자들이 중도에 가로채지 못하도록 잘 감독해 달라고 부탁하시면서, 안쪽은 마마와 의원들이 있으니 심려치 말라는 당부도 하셨습니다.”연기준은 이렇게나 빨리 약재가 도착할 줄 몰랐는듯 표정이 미묘해졌다.“또 미리 대비를 했단 말이냐?”연풍도 확실치 않은 어투로 말끝을 흐렸다.“아…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연기준은 사찰이 있는 곳을 한참 바라보다가 걸음을 돌렸다.“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사람을 잘 돌보라 명하거라.”연풍이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예.”서인경이 미리 치료 대안을 준비했기에 약재만 도착하면 바로 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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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서인경은 긴장을 풀고 침상에 누워 곧바로 잠에 들었다.이주 관아에서 연기준은 역병 퇴치를 지휘하는 동시에 관료들 중에 제 주머니를 챙긴 자들을 조사하고 있었다.단씨 가문을 가리키는 단서가 발견되자마자 신기하게도 단은설이 찾아왔다.“아버지께서는 가문에서 조달한 구휼물자가 탐관오리의 주머니에 흘러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화병이 들어 하루종일 아무것도 드시지 못하고 몸져누우셨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왕야께 사정을 설명하러 온 것입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저희 가문에서 최선을 다해 조달하겠습니다.”연기준은 문서를 넘기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사양하지. 이곳에 필요한 물자는 이미 강남 상호인 제씨 가문에서 공급하기로 하였다.”제씨 가문이면 맹국공 부인의 친정이었다.단은설은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왕야, 이는 아버지의 잘못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선 정상적으로 물자를 조달하였는데 물자가 어떻게 쓰일지는 아버지께서 결정하실 일이 아닙니다.”연기준은 문서를 덮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그럼 어찌하여 단씨 가문의 딸이 경매로 사들인 칠색유리잔이 이주 지부(知府: 지방 관료)의 서재에서 발견된 것이지?”단은설은 가슴이 철렁했다.“또 어찌하여 단씨 가문에서 이주 지부에 제시한 금액이 시중보다 세 배는 높은 것이지?”단은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그… 그건 저도 모르는 일입니다. 애초에 평안이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가격을 협상한 것이라….”연기준은 이 따위 해명은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경성으로 돌아가면 대리사(大理寺: 고대의 수사기관)와 호부(戶部: 고대의 재정 관리를 맡은 기관)에서 조사가 들어갈 것이다. 억울한 점이 있다면 그들에게 진술하거라.”단은설은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왕야, 동생이 어리고 철없어서 벌인 일입니다. 예전에 가문에서 왕야께 도움을 드린 것을 봐서 한 번만 봐주십시오. 차액은 가문에서 한 푼도 빠짐없이 돌려놓도록 하겠습니다.”과거 얘기가 나오자 연기준의 눈빛이 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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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그나마 역병이 아닌 풍한이라서 다행이었다.온몸에 땀을 흘려서 옷과 이부자리가 푹 젖어서 강물에 빠지는 악몽을 꾸었던 것이다.서인경은 몸을 일으키고 탕약을 단숨에 마셔버렸다.“저는 괜찮습니다. 며칠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연기준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꿈에서 내게 욕지거리를 퍼붓는 걸 보면 내가 괜히 왔다 싶더구나.”말을 마친 그는 뒤도 안 돌아보고 밖으로 나갔다.‘내가 언제 욕을 했다고….’막 의원은 어색한 표정으로 코끝을 매만지며 말했다.“마마께서는 풍한으로 의식을 잃고 꼬박 하루를 잠들어 계셨습니다. 왕야께선 마마를 걱정하시어 말리는 자들을 뿌리치고 안으로 들어오셨지요. 그런데 마마께서 입을 꾹 닫고 약을 삼키려 하지 않으시니, 하는 수없이 왕야께서 입으로 탕약을 먹여드린 겁니다.”말을 마친 막 의원은 얼굴을 붉혔다.“아… 그런 거였군. 별일 없으면 이만 나가보게나.”막 의원은 약그릇을 챙기고는 침상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왕야께서 갈아입을 의복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갈아입고 관아로 돌아가시지요. 이제 이곳엔 경증 환자들만 남았으니 소인과 성내의 의원들이 마무리를 잘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서인경은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아직 정신은 말짱했다.그녀는 따뜻한 물로 땀만 닦은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막 의원은 돌아온 그녀를 보고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마마, 왜 아직도 안 돌아가시고 여기 계신 겁니까?”서인경은 아직 남아 있는 열명 남짓한 환자들을 둘러보고 그들의 상태를 확인한 후에야 약재를 배합하기 시작했다.“마지막 환자가 밖으로 나갈 때까지 함께하겠다고 약조하였네. 상왕비가 되어서 약속을 어기면 안 되지.”그 말을 들은 백성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존귀하신 왕비가 그들을 위해 이렇게까지 할 줄을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의원들이 다급히 다가오더니 그녀의 손에서 약재와 처방전을 빼앗았다.“마마, 아직 몸도 편찮으신데 어서 쉬십시오.”“마마, 저희가 할 테니 저기 가셔서 환자들과 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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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단은설이 오니 이제 방도 안 돌아오네? 그렇게나 그리웠던 거야?’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그녀가 앓아누운 이후로 두 사람은 며칠째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서인경은 갈증을 느끼며 등불을 키기 위해 침상을 내렸다.불을 밝히자마자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바깥에 대고 소리쳤다.“누구냐?”밖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마마, 소인은 관아의 하인입니다. 연풍님께서 소인에게 이곳을 지키고 있다가 마마께서 깨면 왕야께서 쓰러지셨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의원의 진단으로는 아마 역병에 전염되신 것 같다고….”끼익!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인경이 다급히 문을 열고 나갔다.“언제 있었던 일이냐? 왜 진작에 말하지 않았느냐?! 며칠 전까지 멀쩡하시지 않았느냐?”하인은 그녀를 별채로 안내해주며 말했다.“오늘 아침부터 증세를 보이셨습니다. 아침에 왕야께서는 성벽을 순찰 중이셨는데 갑자기 불편함을 호소하셨습니다. 왕야께서는… 마마께서 근래 많이 고생하셨다고 절대 방해하지 말라 명하셨습니다. 탕약을 드셨는데 여전히 호전 증세를 보이지 않고 계십니다. 연풍님께서 소인에게 문밖을 지키고 있다가 마마께서 깨어나시면 고하라 하셨습니다.”그 말에 서인경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돌아오지 않은 이유가 이거였어?’자세히 회상해 보면 연기준은 격리 구역인 사찰에 그녀를 보러 왔다가 전염된 것으로 보였다.‘전장의 신이라는 사람이… 몸이 왜 이렇게 허약해? 난 거기 며칠이나 살았는데도 괜찮았는데… 왜….’얼굴에 면사포를 가린 단은설이 탕약 그릇을 들고 멀리 서 있었다.“나는 환자를 보살핀 경험이 없어… 괜히 방해만 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차라리 시녀에게 시키는 것이 어떠냐?”연풍은 싸늘한 얼굴로 손을 뻗었다.평소에는 그렇게 상왕의 주변을 맴돌더니 위기에 몰리자마자 바로 도망가려는 모습이 무척이나 꼴사나웠다.“그럴 필요 없습니다. 단 소저께서 들어가기 싫으시다면 소인이 하겠습니다.”단은설은 다급히 변명하듯 말했다.“오해하지 말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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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화

연풍의 안색이 급변했다.상왕이 과거 부상을 당한 것은 절대 비밀이었는데 서인경이 그걸 알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때 당시 태의는 분명히 억지로 이물을 빼내려 한다면 상왕의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고도 했다.그럼에도 서인경이 주저없이 상왕의 곁에 다가가는 것을 보니 알 수 없는 신뢰가 생겼다.“마마, 성공할 자신이 있으신 겁니까?”서인경은 연기준의 눈꺼풀을 뒤집어보며 답했다.“나도 완전히 장담할 수는 없어.”연풍이 주저하며 말했다.“그렇다면 차라리 시도를 하지 않는 게….”“체내에 이물은 언제든 염증을 유발하고 왕야의 목숨을 거둬갈 수 있다. 지금 상태로는 그걸 제거하지 않는다면 왕야께서 깨어나실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연풍은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필요한 것들을 일단 최대한 빨리 준비해다오. 그리고 별채 안팎에 사람을 두고 아무도 안으로 들지 못하게 하오. 식사는 사람을 시켜 대문 밖에 놔두게 하고.”연풍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필요한 것은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소인은 마마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서인경은 종이에 필요한 것들을 써서 연풍에게 건네주었다.사람들이 다 나간 후, 그녀는 탕약 그릇을 들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오해하지 마십시오. 전에 제가 아팠을 때, 저를 보살펴 주셨기에 하는 겁니다. 받은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하는 법이지요. 완쾌되면 이혼을 허락해 주십시오. 자, 이제 입을 벌리세요.”삼일 후, 혈흡충 증세가 완화된 후 서인경은 수술 준비를 했다.고대에는 무균 환경을 만들 여건이 되지 않으니 그녀는 조심스럽게 상처를 처리했다.옆에서 지켜보는 연풍은 손에 땀을 쥐고 그 광경을 지켜보며 감격했다.‘마마께선 참으로 왕야를 소중히 여기시는구나.’그는 위기에 빠졌을 때 비로소 진짜가 보인다고 왕비가 상왕을 너무도 연모해서 이런 위험을 감수한다고 생각했다.‘왕야께서 깨시면 마마의 마음은 소인이 꼭 전달해 드리겠습니다.’연풍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서인경은 힘겹게 가슴에 박힌 이물을 빼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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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화

그런 말을 하는 연풍의 두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서인경도 순간 할 말을 잃었다.황가에 형제의 우애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연풍이의 말이 맞았다. 연기준은 이용가치를 잃게 되는 순간 황제에게 가차없이 내쳐질 것이다.그리고 그때가 되면 그의 적이었던 자들이 우르르 몰려올 것이었다.그리고 지금 이 나라도 장군으로서의 상왕이 필요했다.그가 쓰러진다면 변방의 안녕을 보장할 수는 없었다.서인경은 전생의 복수를 하고 싶었지만 변방 백성들의 안위를 무시할 수 없었다.만약 연기준에게 나쁜 일이 생긴다면 나라는 기용할 수 있는 장군이 없으니 할아버지도 은퇴하고 귀향할 수 없었다.‘설련삼이 있다면 좋을 텐데.’그것은 내상과 외상에 특효가 있는 진귀한 약재였다.그게 있으면 연기준은 한달 안에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알겠다. 왕야께선 내일 아침에 눈을 뜰 거다. 닷새 동안 침상에서 내려서는 아니되고 두 달 안에 격렬한 움직임이 있어서도 안 된다. 자네는 이분을 잘 지키고 있게. 남은 건 내가 방법을 생각해 보겠다.”죽어가던 연풍의 눈빛이 반짝하고 빛났다.“예, 소인이 왕야의 곁을 잘 지키겠습니다.”서인경은 봉합을 마무리하고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땀범벅이 된 그녀를 본 연풍이 다급히 손수건을 건넸다.땀을 닦은 서인경은 긴장감이 풀리며 피로가 몰려왔다.“남은 건 네게 맡기마.”연풍은 아주 공손하게 그녀를 문밖까지 배웅했다.연기준의 가장 최측근인 연풍은 주인을 닮아 성격이 무뚝뚝하고 늘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전생에 그는 서인경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한 번도 그녀를 좋게 대한 적이 없었다.‘이 녀석이 내게 이렇게까지 공손해질 줄은 몰랐는데.’방으로 돌아온 서인경은 목욕을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다음 날, 잠에서 깬 그녀는 바로 외출했다.이주 동복 객잔에서 제씨 가문의 가주 제혁은 며칠째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서인경은 맹은영이 준 신물을 보여준 후, 자리에 앉았다.신물을 받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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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설련삼은 아주 희귀한 약재입니다. 죄송합니다, 마마… 소인에게는 없습니다.”서인경은 실망스러웠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습니다. 다시 방법을 생각해 보지요.”제혁이 물었다.“설련삼은 중상을 입은 사람에게 특효가 있는 약입니다. 혹여, 마마의 신변 사람 중에 누가 부상을 당한 것입니까?”서인경은 사실을 말할 수 없으니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내 친한 친우 중에 희귀한 약재를 수집하는 사람이 있는데 꼭 구해달라고 부탁해서 물어본 겁니다.”제혁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그녀가 대답을 흐리니 그리 간단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인지했다.“비록 소인이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어디 있는지는 압니다. 하지만 아주 험난한 여정이 될 것이고, 구할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으니, 마마께서 잘 고민하시고 판단하십시오.”서인경의 눈이 반짝 빛났다.“어서 말씀해 보세요.”제혁이 말했다.“이주에서 남쪽으로 백리 정도 떨어진 곳에 흑수암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절벽 아래쪽이 바로 독왕곡이지요. 십년 전에 마지막에 목격되었던 설련삼은 독왕곡 곡주인 도팔천이라는 자가 사갔습니다. 그 후로는 아무도 설련삼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했지요. 설련삼이 필요하시거든 그곳을 찾아가 보십시오.”“흑수암, 독왕곡….”서인경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지명이었다.“어떤 곳이죠? 도팔천은 또 어떤 사람입니까?”제혁은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도팔천은 독약에 능통한 자로, 독왕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습니다. 그자가 만든 독이 불과 하루안에 병영 하나를 소멸시켜 버렸지요. 그는 옆나라 열국에서도 꼭 영입하고 싶어하는 인재이기도 합니다. 도팔천을 얻는 자가 천하를 제패한다는 설도 있을 정도니까요.”“50여년 전, 도팔천의 어린 딸이 그가 제조한 독약을 부주의로 먹고 즉사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충격을 받은 그의 처도 독약을 먹고 자결했지요. 맹독이라 손쓸 시간도 없었다고 합니다.”“그날 이후로 도팔천은 두문불출하며 한 번도 산에서 나온 적이 없습니다.”제혁은 차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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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연풍이 오만상을 쓰며 물었다.“그럼 내일 아침에 출발하는 건 어떠십니까? 적어도 왕야께서 의식을 되찾는 모습은 보고 가셔야 할 것 아닙니까.”하지만 서인경은 여전히 고집을 부렸다.“내일 출발하면 늦어. 백리나 되는 길을 무슨 수로 하루안에 도착한단 말이냐. 지금 떠나도 간당간당할 판국에.”“그럼 안 가면 되지 않습니까? 만약 왕야께 돌발상황이라도 생기면… 마마께서 곁에 있어야 안심할 수 있습니다.”“쯪.”서인경은 준비한 보따리를 등에 메고는 웃으며 말했다.“네가 날 이렇게까지 신뢰한다니 참으로 기쁘구나. 걱정 마렴. 너희 왕야께선 워낙에 건강하니 내일이면 무조건 깨어나실 거다. 물론 네가 그분의 곁을 잘 지키면서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해야겠지만. 난 분명히 말했다. 닷새 안에 절대 침상을 내려오면 안 된다고.”서인경은 마지막까지 여정의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약재를 구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고, 그녀가 독왕곡에 간다는 얘기를 누군가가 듣기라도 한다면 따라붙을 위험도 있었다.연풍은 그녀를 홀로 보낼 수는 없으니 언짢은 얼굴로 호위들에게 잘 지키라고 당부했다.서인경은 그런 그가 말이 많다며 재빨리 말고삐를 휘둘렀다.곧이어 여섯 사람을 태운 말들이 질주하기 시작했다.한편, 연기준은 서인경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회복력이 좋았다.그는 그날 저녁에 황혼이 들 무렵 의식을 되찾았다.눈을 뜨자마자 침상 옆에 앉아 있는 단은설이 보였다.“왕야, 깨어나셨군요! 무려 나흘 밤낮을 잠들어 계셨으니 허기지실 겁니다. 제가 좁쌀죽을 끓여왔으니 지금 드시겠습니까?”연기준은 고개만 돌리며 좁은 방을 훑어보았다.“왜 너 혼자만 여기에 있지?”갈라지듯 쉰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졌다.당은설은 급히 일어나 물잔에 물을 따른 후, 조심스레 그의 입에 갔다대고는 말을 돌렸다.“정말 저 간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왕야께서 이대로 무슨 일 생길까 두려워 의식을 잃은 동안 한시도 발을 떼지 못하였습니다.”연구정의 창백한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그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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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화

연풍은 눈을 반짝이며 치료과정을 설명했다.“왕비마마는 참 대단한 분이십니다. 단도로 왕야의 가슴을 가르고 화살촉을 꺼냈습니다. 그 과정에서 심맥을 건드리지 않으시려고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이셨지요. 소인은 그런 왕비마마의 모습을 처음 보았습니다. 예전의 그분 하고는 전혀 달라 보였습니다.”연기준은 눈살을 확 찌푸렸다.“예전과 많이 달라지긴 했지. 그래서 어딜 간 것이냐?”연풍은 난감한 표정으로 머뭇거렸다.“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시다며….”“그럼 여의주를 보러 영롱탑으로 떠난 것 아니더냐?”연풍은 연기준이 깨어나자마자 사실을 알게 될 줄은 몰랐지만, 단은설이 말한 거라고 확신했다.비록 왕비의 그런 처사가 이해가 되진 않지만 거짓을 고할 수는 없었다.“왕야,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마마께선 어쩌다 한번 경성을 나오셨는데 보고 싶은 게 많은 게 당연지사이지요.”“허, 전에 변방 일대를 시도 때도 없이 돌아다닌 사람이거늘.”연기준은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가서 낱낱이 조사하거라. 다루에서 맹은영을 찾아오기 전에 누구와 접촉했고 또 무슨 일을 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알아내고 내게 고하거라.”자세히 생각을 해보면 그날부터 그녀는 이혼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때부터 말하는 어투와 행동도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갑자기 뛰어난 의술실력까지 보여주었다.‘대체 누구지? 의도가 뭘까? 진짜 서인경은 어디로 간 거지?’연풍은 단번에 그의 의도를 알아들었다.좀 불가사의한 일이긴 하지만 그는 곧바로 명을 받들었다.“예. 그럼, 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 조사하겠습니다.”큰 병을 앓고 난 연기준은 극심한 피로가 몰려와 눈을 감았다.“혼자 갔느냐?”연풍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호위 다섯 명을 같이 보냈으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연기준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흥. 내가 그 여자를 왜 걱정하지? 어차피 제멋대로 안 하고는 못 배기는 성격인데 누가 막을 수나 있겠어? 만약 밖에서 또 사고를 치고 돌아온다면, 그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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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화

흑수암에 관한 전설은 그들도 들은 바가 있었다.서인경은 솔직하게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번 여정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너희를 곤란하게 하지는 않겠지만, 혹여 내키지 않은 자가 있다면 지금 당장 짐 싸서 이주로 돌아가거라. 다만 돌아가서도 이 비밀은 꼭 지켜주었으면 한다.”호위들은 어안이 벙벙해서 서로 눈치만 살폈다.호위들의 수장인 육승은 건장한 체구에 우락부락한 인상을 가진 사내였다.‘육승은 연기준의 충복이야. 무공 실력으로 치면 연풍에게 조금 뒤처지지만 호위들 중에서는 가히 으뜸이라 할 수 있지.’잠시 후, 침묵을 지키던 육승이 입을 열었다.“그러면 흑수암에 저희가 왜 가야 하는지 이유를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서인경은 대충 얼버무리기로 했다.“지금은 상세하게 말해줄 수 없지만 너희가 모시는 상왕을 위한 일이란 것만 명심하거라.”호위들은 또 서로 눈치를 보았다.잠시 침묵하던 육승이 먼저 입을 열었다.“마마께서는 일전에 고통받는 이주 백성들을 살리셨고 저희 왕야의 목숨도 구하셨습니다. 그러니 저희가 존경하고 따라야 할 분이지요. 연풍님께서는 저희에게 목숨을 걸고 왕비마마를 지키라 명하셨습니다. 저는 마마를 믿습니다. 따라가겠습니다.”남은 사람들도 분분히 뜻을 밝혔다.“저희도 마마를 믿고 목숨 걸고 따르겠습니다!”이 순간 서인경은 모시는 존재를 위한 고대인의 충심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감동적이네.’그녀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그리 비장하게 말할 필요는 없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무사히 너희를 데리고 돌아갈 것이니. 오늘 밤은 일단 쉬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자꾸나.”“예!”호위들이 각자 방으로 돌아간 후, 서인경도 침상에 누웠다.‘내가 괜히 호언장담한 게 아닐까?’흑수암 얘기가 나왔을 때 보인 육승과 일행의 반응을 보면 아주 위험한 곳임은 확실했다. 그녀 또한 자신의 안위마저 장담할 수 없을 정도였다. 찰나의 순간 그녀는 자신의 경솔함을 조금 후회했다.이번 여정은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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