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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1화

이건의 턱에 힘이 단단히 들어가 저렸다.엄마가 사고를 당한 후부터, 누나는 시집가고, 친아버지라는 사람은 이건에게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었다.이건은 갑작스레 세상에 혼자 남겨진 사람이 됐다.세상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고, 그래서 삐뚤어졌고, 누나가 그렇게 쉽게 결혼해 버린 게, 도무지 이해도 용서도 되지 않았다.‘누나는 말로는 나밖에 없다면서... 어떻게 나 두고 가?’그 마음이 증오로 뒤섞여, 이건은 한동안 진짜로 이람을 없는 사람처럼 여겼다.이람과 연락도 끊고, 이람이 찾아와도 안 만나고, 그는 죽어도 이람과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이건은 처음으로 너무도 선명하게 깨달았다.이람은 바람 든 듯 결혼을 했어도... 단 한 번도 이건을 마음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세상에서 이건에게 잘해주는 사람은 오직 이람뿐이었다.누나가 하는 모든 행동이 어떤 계산도, 어떤 이유도 없는... 단 하나의 진심에서 나온 것이라는 걸... 이건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이건에게 문제가 생기면 마지막까지 책임지고 버텨주는 사람도 결국 이람이었다.그 이유는 단순했다. 이람은 이건의 누나였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람도 이건과 똑같이 엄마를 잃었다. 같은 고통을 겪었고, 그런데도 남은 힘도 없었을 텐데... 이건이라는 못난 동생을 위해 또다시 발버둥 쳤다.이람이 힘들 때, 생각만 해도 벅차 눈물이 터져 나올 때, 이건이 한 것은...비아냥. 빈정거림. 차가운 말.누나의 마음은 또 얼마나 무너졌을까?‘누나 말이 맞잖아. 얼마나 아프고... 얼마나 힘들었겠어.’이건은 감히 더 생각을 이어가지 못했다.그 생각 끝에서 솟아오를 죄책감이 자신을 통째로 삼켜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이건은 아직도 너무 어려서 아직 도망치는 법밖에 몰랐다.책임을 지는 것도, 좋은 동생이 되는 것도, 그 어떤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지금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자 눈물이 광대뼈를 타고 흘러내렸다....한편.이람은 마지막 말을 내뱉고, 얼음처럼 차가운 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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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2화

심혜영이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가방끈을 잔뜩 틀어쥐고 벌떡 일어서더니, 말을 툭 던지고는 바로 돌아서 걸어가 버렸다.“미안하다, 이모가 우리 이람이 입맛 떨어지게 했네. 너 천천히 먹고 가라. 이모가 계산했어.”이람은 심혜영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차가운 얼굴로 여전히 김이 오르는 음식들을 내려다봤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이건이 따라오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이건이가 여기 있었으면 진짜 미쳐버렸을 거야.’‘분명 또 나한테 욕했겠지.’‘왜 이모 보러 왔냐고, 괜히 욕이나 들으러 온 거냐고, 진짜 멍청하다고!’평소 일도 힘들고 생활도 고단해서 이람은 절대 식사를 거르지 않는다.배가 덜 차서 그냥 계속 먹었다.하지만 이건 혼자 몰래 와서 엿듣고 있던 것만이 아니었다.연나도 있었다.연나는 이람이 자기 얼굴을 모른다는 걸 알고, 대놓고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자기도 음식을 시켜 놓고 먹는 시늉을 하면서, 귀는 쭉 이쪽에 댄 상태였다.전부 듣고 난 뒤, 연나는 제대로 안도했다.이람은 이혼했고, 전남편은 있고, 남동생은 망하기 일보 직전.이혼이라는 큰일이 터졌는데 찾아온 사람이라고는 이모인 심혜영 하나뿐이라는 건... 부모님은 이미 없다는 뜻이고, 뒤에서 받쳐주는 집안도 없다는 의미였다.거기다 창업에 실패한 동생이라는 짐까지 있으니, 집안 사정은 그냥 최악.직업은 비서.말하는 거 보면 머리는 좀 돌아가는 것 같지만...그래도 비서는 비서. 돈과 힘은 없고, 문제만 많다.이걸로 어떻게 연나와 경쟁을 하겠는가?연나는 연훈이 한 말을 충분히 이해했다.하준과 사귈 수 있느냐는 결국 하준이 얼마나 좋아하느냐에 달렸지만, 결혼까지 간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땐 분명 ‘집안’이 판단 기준이 된다.‘하준 오빠 어머니, 강하고 자기 고집 엄청 센데...’‘조이람 같은 이혼녀를 좋아할 리가 없지.’‘근데 나는 집안도 좋고, 연애도 한 번도 안 했고, 나름대로 이름 있는 화가잖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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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3화

유민은 이람이 전혀 흔들리지 않자, 이번엔 노골적으로 비웃고 잘난 듯 뽐내기까지 했다.“아, 맞다. 제헌이 형이 우리 누나한테 집도 한 채 사줬어. 진짜 크고, 위치도 끝내 줘. 누나 회사 다니기 편해지라고 사준 거야.”“집 고를 때도 제헌 형이 끝까지 같이 다녀주고, 둘이서 꼼꼼하게 고른 집이거든. 조이람 씨, 제헌이 형이 당신한테는 한 번도 이렇게 잘해준 적 없죠? 질투 나서 미칠 것 같지 않아?”말을 듣자마자 심혜영이 슬쩍 이람을 살폈다.이람이 자기에게 가차 없기는 해도, 이람이 제헌을 깊이 사랑했던 건 사실이다. 3년이나 매달렸고, 어머니 심혜주의 높은 지능을 그대로 물려받은 데다, 누군가를 인정하면 끝까지 가는 심혜주의 고집까지 그대로 이어받았다.그런 애가 이렇게 단칼에 이혼을 끝냈다.정말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걸까?심혜영은 예전부터 언니 심혜주에게 묘한 기대가 있었다.심혜주가 완벽하지 않았으면, 좀 평범한 사람이었으면...그러면 동생인 자신도 언니를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고,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 이상한 감정이 이제 심혜주와 닮아 있는 조카, 이람에게로 전이되었다.질투와 비슷하지만 질투라고 할 수도 없는, 심혜주에게 느꼈던 복잡하고 뒤틀린 감정이 그대로 이람에게 향한 것이다.그래서 심혜영은 기다렸다.이 이야기를 들은 뒤, 이람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하지만 이람은 어떤 미세한 흔들림도 없었다.심혜영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유민이 또 뭔가 말하려던 찰나, 심혜영이 먼저 한숨을 쉬었다.“이람아, 네가 네 엄마 닮아서 똑똑한 건 아는데, 아직 네 엄마만큼은 아니야. 괜히 힘 빼지 말고, 내가 도와줄 때 좀 받으란 말이야.”이람은 대학만 졸업했다. 타고난 머리는 좋아도, 전문적으로 능력을 확장할 기회가 없었고 경험도 부족했다.그래서 아직 유리만큼 치고 올라오지 못하는 상황이었다.이람은 차갑게 말했다.“이모, 제가 말씀드렸죠. 저, 필요 없어요.”유민은 심혜영보다 더 버럭했다.“조이람 씨, 진짜 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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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4화

전화를 걸 때, 제헌은 이미 무슨 말을 할지 머릿속에 다 정리해 둔 상태였다.하지만 제헌의 귀에는 기계음만 들려왔다.[지금 거신 전화는 연결할 수 없습니다. 나중에 다시 걸어주시기 바랍니다.]그 순간, 제헌은 마치 누가 머리 위에서 얼음물을 한 양동이 그대로 쏟아부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몇 초 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비로소 상황을 이해했다.이람이 제헌의 번호를 차단했다.‘조이람이 감히 나를 차단했다고?’‘조이람이... 어떻게 감히?’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는 더 이상 억누르기 힘들었다.그리고 불현듯 제은이 떠올랐다.이람이 자기를 차단했다며 화가 잔뜩 나서 달려와 하소연하던 제은. 그땐 제은의 과한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이건 이해가 아니라 똑같이 느끼는 중이었다.차의 운전기사는 또다시 식은땀을 흘렸다.이번에도 분명 조이람 때문일 거라고 직감했다.지난번 공항에서처럼, 이번에도 제헌의 표정이 너무 험악했다.심장 멎을 뻔했던 기억이 떠올라, 차라리 당장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그때, 제헌이 낮게, 얼음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핸드폰 줘.”기사님은 목이 쿵 내려앉은 듯했다. 가슴이 식겁해서 튀어나올 뻔했다.“빨리.”기사님은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핸드폰을 내밀었다.제헌은 기억하지 못하던 번호를 통화 기록에서 다시 찾아 눌렀다.그리고 이번에는 확실하게 번호를 외워버렸다.신호음이 두 번 울리고 이람이 전화를 받았다.받자마자 제헌은 이성을 잃고 내질렀다.“왜 나 차단했어!”이람은 제헌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전혀 놀라지 않았다.제은조차 차단당한 걸 버티지 못했으니, 제헌 같은 자존심 덩어리는 말할 것도 없었다.어차피 상대는 이혼한 전남편.평생 안 보면 그만인 사람이다.하지만, 이람은 자신을 속일 수 없었다.자신의 인생 3년을 제헌이라는 남자가 분명하게, 선명하게 차지하고 있었다.그 사실까지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강재헌이라는 인간은 내 삶에서 분명히 존재했어. 그건 부정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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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5화

이람은 말을 끝내자마자 아주 시원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말보다 더 아픈 건 마음을 찌르는 말이라는 걸 이람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굳이 길게 말할 필요도 없다.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만큼만 찌르면 된다.어차피 제헌을 ‘없는 사람’처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그러면 만날 때마다 ‘왜 이 인간은 아직도 내 앞을 어슬렁거려?’라는 짜증만 더 커질 테니까.그건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였다.그러니 차라리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게다가 이제 ‘협력자’가 될 서하준이라는 카드가 있기 때문에, 제헌이 또 제멋대로 굴어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제헌이 자기 앞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굴욕만 당하는 상황이 더 속이 시원했다.계속 부딪치고 계속 무시당하면, 제헌도 어느 순간 ‘계속 이럴까 말까’ 고민하게 될 것이다.그러다 결국 조용해지겠지.그러니 완전히 끊어내는 것보다 적당히 괴롭게 남겨두는 게 낫다.생각을 정리한 이람은 더 이상 제헌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택시를 잡아타고 어젯밤 갔던 바에 들러 레인지로버를 찾은 뒤, 그대로 회사로 향했다....반면, 제헌은 아직 마이바흐 안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이틀 동안 이람에 대해 새로 알게 된 게 너무 많았다.그리고 이람이 어떻게 반응할지도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 들은 말은 그 예상조차 너무 순했다.하준을 끌어들이는 건 완전한 도발이었다.이람이 예전에도 한두 번 비슷한 말을 하긴 했다. 심지어 ‘하준의 침대에 올라가면 제일 먼저 제헌한테 알려주겠다고’ 같은 헛소리까지 했었다.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화가 나서 뱉은 감정 섞인 협박 정도였다.실제로 하준과 이람은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그런데 방금 이람의 말투는 달랐다.다분히 의도적이었다.그리고 단 하나의 주저함도 없었다.심지어 하준이 알아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그러자 제헌의 머릿속에 의문이 스쳤다.‘조이람이 서하준을 이용하는 건지, 아니면 진짜 서하준의 마음을 알고 있는 건지?’제헌은 본능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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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6화

유리는 문득 목 깊은 곳에서부터 서늘한 원망이 치밀었다.지금까지도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도대체 자신이 언제, 어디서, 무엇으로 민서의 기분을 상하게 한 건지...만약 민서와의 관계만 잘 만들어졌다면...그러면 유리는 자연스럽게 민서 회사의 ‘에이스’에게도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그렇게만 됐으면, 지금 연구팀에 있는 그 속물 같은 연구원들이 누가 감히 유리를 들러리 취급하면서 무시할 수 있었겠는가?이 부분은 생각만 해도 울컥했다.그리고 가슴이 뻐근하고 통증이 느껴질 만큼 서러웠다.하지만 솔직히 인정해야 했다.민서 팀의 ‘에이스’는 너무 압도적이었다.능력이 너무 사기캐 수준이라서, 오히려 비교할 필요도 없었다.그 전부가 열등감 대신 체념을 선택할 만큼.그럼에도 유리는 연구팀 1팀의 팀장이었다.실력 차이가 크다 해도 직위는 분명 존재했다.유리를 못마땅하게 보던 인간들도... 유리 앞에서는 결국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그 정도면 충분했다.물론, 유리는 여전히 생각하고 있었다.어떻게든 민서 회사의 그 ‘에이스’를 만나야 한다고.그렇게 머릿속이 복잡한 상태에서 유민에게서 전화가 왔다.유민은 당장이라도 터져 나가는 듯한 흥분으로 방금 있었던 이람의 이야기를 쏟아냈다.듣던 유리는 비웃음을 터뜨렸다.“진짜 그렇게 세게 나왔어?”유민이 바로 맞장구쳤다.[그럼! 누가 조이람처럼 잘난 척을 해? 세상에 없지!]유리는 피식 웃었다.“조이람한테 지금은 강제헌도 없고, 엄마한테도 안 굽신대고, 그럼 누굴 믿고 저러는 건데?”유리는 거의 말할 뻔했다.‘설마 비서 주제에 서하준 등에 업힐 생각은 아니겠지?’유민이 대신 말했다.[아마 꿈에서나 가능하겠지.]유리는 이제 이람을 아예 사람으로도 치지 않았다.둘 사이의 격차는 이미 하늘과 땅이었다.이람이 이혼해 가장 크게 잃은 건 사회적 지위였다.명문가 며느리에서 순식간에 ‘일반인’ 수준으로 추락했다.경력이라도 좋으면 모르겠지만, 이람은 일개 비서였다.그나마 이건이 게임을 잘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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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7화

민서는 재원에게 또 하나 빚을 더 졌다.재원 때문이었다.[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셨어.]민서는 대충 둘러댔다.[목이 좀 아파.]이람이 걱정스럽게 말했다.“조심하지.”민서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한빈 교수님 돈 입금됐어. 우리 반반으로 나눠.]이람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당연하지. 너희가 3주 동안 죽어라 테스트했는데 대가는 줘야지.”기술적 핵심을 제공한 건 이람이었지만, 후속 테스트와 디테일 정리는 전부 민서와 팀이 도맡아 한 일이었다.민서가 말을 이어갔다.[한빈 교수님이 우리 팀 에이스 이람 님한테 관심 많으시던데. 한번 꼭 만나고 싶대.]“나를? 무슨 일로?”민서는 장난 섞인 칭찬으로 말했다.[아무 일도. 그냥 우리 회사 ‘에이스’가 누구인지 궁금한 거지. 직접 가보면 좋을 텐데. 가서 사람들이 놀라는 얼굴 좀 봐.]이람은 바로 알아듣고 잘라 말했다.“나 시간 없어. 의미 없는 자리에는 안 나가. 네가 잘 말해.”민서도 이미 처리해 둔 듯 여유롭게 말했다.[당연히 벌써 거절했지. 우리는 실력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니까 좀 도도해도 돼. 아무나 원한다고 만날 수 있는 거 아니잖아.]만약 한빈 교수가 거절을 기분 나쁘게 받아들인다면, 그건 인간 자체가 비틀린 것이므로 민서는 앞으로 관계를 깊게 가져갈 생각이 없었다.이람이 웃으며 말했다.“근데 진짜 네 목소리 듣기 힘들다. 가서 목에 좋은 캔디라도 좀 사 먹어.”민서가 잠시 말이 없다가 대답했다.[됐어. 너 먼저 끊어.]민서의 목이 이 지경이 된 건 전적으로 재원 때문이었다.그런데 민서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내가 어제 그렇게까지 소리 질렀나? 진짜 목을 갈아 넣었나?’하지만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재원이 귀 옆에서 숨을 들이쉬던 그 소리가 떠오르니, 일하는 데에 집중이 안 될 지경이었다.재원의 침대 매너가 민서 기준에서는 ‘별로’였지만, 그래도 책임감은 있었다.집에서 나간 지 얼마 안 돼서 바로 자신의 건강검진 결과표를 보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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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8화

하준은 세진을 잠시 바라봤다.그 시선에는 분명 누구라도 움찔할 만한 압박감이 있었다.세진은 단번에 눈치를 챘다.‘대표님... 기분 안 좋으신가?’다시 슬쩍 눈을 들여다봤다.그런데 이번에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내가...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인 건가?’세진은 늘 그렇게 믿고 있었다.하준은 이람을 좋아하지 않는다고.다른 직원들과 다를 바 없이 공적인 태도, 관심도 없고, 챙기는 것도 없고, 감정의 결이 아예 없는 사람.하준은 원하는 걸 정했다면, 목숨 걸고라도 그것을 손에 넣는 성격이었다.그 집요함과 집중력은 세진이 누구보다 잘 아는 부분이었다.‘대표님이 진짜 이람 씨를 좋아한다면...’‘이람 씨가 이혼한 지금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여자 얼굴도 성격도 이 정도면 구애하는 남자들 줄 선 게 정상이고...’‘장성모 대표님도 이람 씨 소개팅 주선하려고 혈안이던데...’‘그러니까... 대표님은 절대 관심 없는 거지.’세진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더 이상 고민할 가치도 없었다.하준도 평소와 다름없이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딱히 감정 변화도 없어 보였다.그래서 세진도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이건은 A1 출구 앞에 서 있었다.퇴근길 인파가 쏟아져 나오고, 대부분의 얼굴은 피곤하고 무표정했다.하지만 이건은 달랐다.스타트업 대표, 하루 12시간 근무는 기본, 주 7일이 기본.밤새워 일하는 게 일상인데, 지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오히려 젊고 날 선 에너지가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멀리서 이람이 차를 모아오며 서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독보적으로 튀는 이건을 보았다.평소에는 보면 볼수록 얄밉고 답답한 동생이었는데, 사람들 속에 있으니 얼굴, 분위기, 에너지... 확실히 남달랐다.눈부실 만큼.이람은 차를 바로 앞에 세우고, 창문을 내렸다.“타.”이건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차 앞으로 돌아와 뒷좌석 문을 잡았다.그러나 잠겨 있었다.결국 살짝 인상을 쓰고는 조수석에 얌전히 앉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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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9화

‘더 하이엘’ 아파트에 있는 큰 집은 이람의 외삼촌이 남겨준 집이었다.이건은 태어나서 한 번도 이 집에 와본 적이 없었다.형제 간의 이해와 관계를 좀 더 쌓기 위해 이람은 이건을 데려왔다.물론 이건은 내키지 않아 죽을상을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하유민 문제가 마음에 걸려 따라왔다.차를 세우고 내린 뒤, 이람은 뒷좌석에서 자료들을 꺼내기 위해 문을 열었다.이건은 이람 옆에 딱 서서 그 모습을 힐끗 보더니, 당연하다는 듯 가방을 뺏어 들었다.그리고 손으로 몇 번 들어보며 말했다.“이렇게 무겁게 뭘 넣고 다니는 건데?”동생이 가방 들어주는 건, 이람에게 당연한 일이라 굳이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이람이 앞장서 걸으면 이건은 말없이 뒤따랐다.“논문 쓰려면 참고해야 하는 자료들.”이건은 어려서부터 이람보다 지능은 떨어졌다.하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자기에겐 운동 능력이 있으니까.물론 운동 능력과 별개로 이람에게 맞고 울던 기억도 많았다.그런데 지금 누나를 따라가다가 문득 깨달았다.‘어릴 적 악마처럼 무서웠던 누나가 이제는 나보다 훨씬 작구나.’이람이 큰 편도 아닌데, 이건이 키가 너무 크다 보니, 173cm인 이람의 머리가 이건 턱 밑에 있었다.이건은 잠시 진지하게 생각했다.‘내가 진짜 마음만 먹으면 한 주먹으로 누나 날릴 수도 있겠네.’그 상상을 하자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물론 절대로 이람에게 들키지 않게.키는 자기보다 작지만, 요즘 자주 붙어 다니면서 이건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누나는 크고 단단한 존재이며 자신이 믿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었다.문제가 생기면 이람의 안정된 중심성 덕에 이건의 산만하고 불안한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그리고 이람은 무엇보다도 절대 쉽게 부서지지 않는 사람이었다.이런 생각을 하자 이건은 괜히 자랑스러워졌다.‘우리 누나 이렇게 멋있는데, 지수범 그 새X도 질투 좀 해야지.’아파트 로비에 들어간 이람은 입주민 시스템을 열면서 말했다.“지문 등록해.”이건은 날카롭게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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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0화

이람이 말했다.“얼굴 인식해야 들어갈 수 있어.”논문 때문에 다루는 자료와 문헌이 워낙 많아서 아무리 진영자를 믿는다고 해도 서재를 아무나 드나들게 열어둘 수는 없었다.이건이 문틀을 살펴보니, 거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카메라가 숨어 있었다.이람이 문 앞에 서자 1초도 되지 않아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딱-이건은 순간 멍해졌다.‘시장에 이런 정밀한 제품이 있었나?’‘반응 빠른 건 있어도, 이 정도로 정밀한 건 없는데?’이건은 바로 물었다.“이 시스템 어디서 샀는데? 링크 보내.”이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안으로 걸어가며 말했다.“내가 직접 개조해서 정밀도 올렸어. 시판 제품은 없지.”이건은 말은 안 했지만, 속으로 완전히 제대로 한 방 먹었다는 표정을 하고 서재로 들어섰다.그리고 곧바로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서재는 30평 가까이 되는 넓은 방이었다.한쪽 벽면은 천장까지 가득 찬 대형 책장으로 채워져 있었고, 그 안에는 각종 논문과 자료, 전문 매뉴얼이 꽉 들어차 있었다.게다가 네 대의 초대형 모니터와, 일반 가정에서 쓰는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워크스테이션급 서버 한 대가 자리 잡고 있었다.이건은 다시 한번 눈을 크게 떴다.저 정도면 수억 원은 가볍게 넘기는 장비일 것이다.이건은 무의식적으로 이람을 보았다.이람은 그런 이건을 보지 못하고 책상 쪽을 가리켰다.“거기 내려놔.”이건은 말없이 말을 잘 들으며 가방을 내려두고, 옆에 놓여 있던 문서를 하나 집어 들었다.“원격 지능체 연구...?”제목을 읽는 순간 머리가 어질어질했다.“이건 또 뭐야?”이람이 차분하게 설명했다.“내 논문 연구 방향. 주로 우주 탐사...”“스톱. 나 못 알아들어.”하지만 이람은 멈추지 않고 이어 말했다.“과장한 건 아니야. 회피 알고리즘 최적화 같은 거. 예를 들어 화성 탐사 로버처럼...”“혹은 원격 수술처럼, 카메라로 상처의 정밀 데이터를 캡처해야 하고, 심우주 통신 지연 때문에 방해 요소가 생기니까 여러 지능체를 넣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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