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Chapter 71 - Chapter 80

100 Chapters

제71화

고수경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겨 심유빈 옆에 앉아 수다를 떨었고 하종호와 고이한은 자연스럽게 시사와 업무 이야기로 넘어갔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수경의 시선은 슬슬 룸 바깥으로 향했고 그녀의 마음은 이미 저기 놀이터 쪽에 있는 윤하준 곁에 가 있었다.놀이 공간 한쪽에서, 소예지는 요즘 계속 바쁘고 피곤했던 탓인지 갑자기 눈앞이 핑 도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곧 머리가 어지러워지자 그녀는 급한 마음에 본능적으로 윤하준의 팔을 붙잡고 몸을 지탱했다.윤하준은 그녀의 상태를 바로 눈치채고 다정하게 물었다.“괜찮아요? 어디 아파요?”소예지는 얼른 그의 팔에서 손을 떼며 자세를 바로 세우고는 말했다.“괜찮아요. 방금 갑자기 너무 어지러워서 저도 모르게...”그 장면은 마침 고수경의 시야에 들어왔고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뭐야, 새언니가 지금 하준 오빠를 꼬시고 있는 거야? 저렇게 대놓고?’고수경은 재빨리 다가가 억지웃음을 띠며 말했다.“새언니, 제가 하슬이 봐드릴게요.”“괜찮아요.”소예지는 차갑게 선을 그었다.하지만 고수경은 포기하지 않았고 이번엔 윤하준 쪽으로 몸을 돌리며 상냥하게 말했다.“오빠, 내가 이안이 봐줄게. 오빠는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 좀 나눠.”소예지를 못 쫓아낼 거면 차라리 윤하준이라도 이 자리에서 치워 둘을 떼어놔야 했다. 절대로 둘이 더 가까워지게 둘 수 없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그러자 윤하준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부탁할게.”그는 고수경에게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면서 소예지를 한 번 더 돌아봤다.그 따뜻하고 걱정 가득한 눈빛을 고수경은 놓치지 않았고 윤하준이 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녀는 가슴 앞에 팔짱을 끼고 소예지를 쏘아붙였다.“새언니, 하준 오빠한테 가까이 하지 마요.”그 말에 소예지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고 고수경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하준 오빠는 내가 찜했으니까 새언니는 넘보지 말라고요.”그 어이없는 말에 소예지는 한숨을 내쉬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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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화

윤하준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도왔다.소예지는 그런 윤하준의 행동을 가슴 깊이 새긴 채 차가운 눈빛으로 심유빈을 한번 흘겨보고는 곧장 고하슬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심유빈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윤하준을 향해 슬쩍 시선을 돌렸고 그녀의 눈빛엔 날카로운 호기심이 스쳐 갔다.‘설마... 하, 재미있네.’심유빈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고 이번엔 고이한 쪽을 흘끔 바라봤다.하지만 고이한은 마치 조금 전 상황에 아무런 감흥도 없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윤하준이 소예지를 돕는 장면을 못 본 체했다.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고 로비로 나서자 고수경이 물었다.“유빈 언니, 차 가져왔어?”그때 하종호가 눈치 빠르게 심유빈을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심유빈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고마워요, 종호 씨.”“그럼 가시죠.”하종호가 먼저 걸음을 뗐고 심유빈은 그 뒤를 따랐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고수경은 윤하준이 혼자 나가는 걸 보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준 오빠, 운전 조심히 해.”그 사이 소예지는 고하슬을 안고 고이한의 차 쪽으로 따라갔다.“오빠, 난 친구 만나러 갔다가 이따가 알아서 집 갈게.”고수경이 고이한에게 말했다.“너무 늦지 말고 안전 조심해.”고이한은 짧게 당부했다.“알았어!”고수경은 손을 흔들며 돌아섰다.소예지는 그 옆에서 말했다.“그냥 바로 집에 가자. 하슬이 피곤한가 봐.”고이한은 고수경을 집까지 데려다 줄 필요가 없어지자 바로 진가영에게 전화 한 통 걸고 집으로 향했다.차 안에서 소예지는 고하슬을 품에 안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마 생리가 곧 끝나 평소보다 몸이 나른한 것 같았다. 그녀는 자꾸 잠이 쏟아졌고 고하슬도 이미 곤히 잠들어 있었다.차가 멈춰 섰을 때 뒷좌석에서 소예지와 고하슬 둘 다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차 안을 비추는 불빛 속에서 서로 닮은 두 얼굴이 나란히 보였다.고이한은 말없이 둘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고하슬을 안아 들었다. 그 기척에 소예지가 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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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화

안채린이 의과대학교 앞을 걷기만 해도 흰 가운을 입은 후배들이 몰려 와 그녀를 둘러쌌다.“채린 선배님, 사인 한 번만 해 주세요!”“선배님 진짜 멋있어요. 방송 봤어요!”안채린은 조금 민망했지만 이렇게 열광적으로 주목받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사실 존경받고 인정받고 칭송받는 이 기분이 꽤 좋았다.다만 매번 같은 질문이 반복될 때면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웃어넘겼다.“선배님은 어떻게 그 약을 개발하신 거예요?”그 특효약은 사실 그녀의 손에서 만들어진 게 아닌데 어떻게 대답하겠는가.그날 아침 엄마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집에 와서 밥 먹으라고 했다.점심에 안채린이 안씨 가문 저택에 도착했을 때, 마침 맞은편에서 빨간 페라리가 요란하게 다가왔고 햇빛이 비치자 비슷한 이목구비를 가진 두 여자가 나란히 차에서 내리는 것이 보였다.“채린아.”심유빈이 미소를 지으며 먼저 말을 걸었다.안채린은 늘 그렇듯 도도하게 짧게 대꾸했다.“너도 왔구나.”두 사람은 한 살 차이였고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사이다.예전에 심유빈의 어머니는 임신한 몸으로 안영수에게 결혼을 요구했지만 안씨 가문의 어른들은 그녀의 출신이 낮다며 강하게 반대했고 결국 안영수는 심유빈의 어머니를 M국으로 보내 출산하게 한 후 정치 명문가의 딸인 안채린의 어머니와 결혼해 버렸다.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뜻대로 되지 않는 법, 안채린의 어머니는 출산 후 곧바로 난소암 진단을 받았고 자궁을 절제하게 되면서 더는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그때부터 안채린의 어머니 장인화는 남편이 또 다른 여자를 들이는 걸 막기 위해 차라리 심유빈과 그녀의 어머니를 받아들였고 지금까지 그들의 관계가 유지됐다.더불어 장인화는 남편 안영수가 만난 다른 여자들을 은밀히 처리해 버렸고 더는 밖에서 아이를 가지는 건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다.안영수는 불만이 많았지만 두 딸 모두 외모도 능력도 출중하니 더 이상 아들을 가지려고 고집하지 않았다.큰딸은 재벌 집 아들 고이한과 엮였고 작은딸은 의학계에서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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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화

안채린은 소예지의 것을 훔치고 싶어서 훔친 건 아니었다.하지만 그녀도 알고 있었다. 지금 진실을 밝히면 부모의 눈에 그녀는 다시 ‘실망스러운 딸’로 보일 테고 안채린은 그걸 절대 감당할 수 없었다.어릴 적부터 안채린은 집안 어른들에게 늘 딸이라서 아쉽다는 시선을 받아왔고 아버지 안영수 역시 그녀에게 늘 무심했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발버둥 쳤는지 그녀 자신만 안다.“소예지, 내가 뺏은 게 아니야. 네가 내게 준 거야.”안채린은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고 나서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왔다.식탁 앞에서 웃음이 가득했고 안영수는 이제 몇 번째인지 모르게 반복해서 안채린의 칭찬을 늘어놓고 있었으며 심유빈도 그녀와 사이좋은 자매인 척 두어 마디 거들며 안채린을 띄워줬다.장인화는 말할 것도 없었다.“아들이 없어도 뭐 어때요? 우리 채린이면 충분하죠!”그녀의 표정만 봐도 뿌듯함이 넘쳐나는 게 알렸다.“유빈아, 다음에 고 대표한테 식사 한 번 대접해야겠어. 이번 일을 제대로 감사 인사드려야지.”안영수가 말했다.“네, 아빠. 제가 얘기해 볼게요.”심유빈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안영수는 고이한과 큰딸 심유빈이 어떤 인연으로 엮였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 흐름만 보면 자신의 집안이 이 정도 인맥도 있다는 게 너무 만족스러웠다.잘만 하면 언젠가 고씨 가문과 사돈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안영수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같은 시각, 소예지는 윤하준의 연락을 받고 고하슬을 데리러 가지 않았다.[이한이가 직접 데리러 간다고 하네요.]오후 네 시쯤, 현관에서 고하슬의 발소리와 반려견 젤리가 짖는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소예지는 3층에서 내려오며 그들을 맞이했고 젤리는 반가워 꼬리를 흔들며 달려들었으며 고하슬도 잔뜩 신이 난 얼굴이었다. 고이한도 걸어 들어오며 말했다.“하슬아, 손 씻으러 가자.”“네, 아빠가 도와주세요.”고하슬은 평소처럼 그의 손을 꼭 잡았다.저녁을 먹고 난 뒤, 소예지는 그림책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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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화

10층을 지나자 학생들이 내리고 엘리베이터 안이 조용해졌다.소예지는 코웃음을 쳤다.‘안채린, 내 성과를 당연하다는 듯이 자기 업적으로 만들었구나?’띵.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소예지는 곧장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고 도착하자마자 그녀의 조수 양지우가 흥분하면서 말했다.“선배님, 오셨어요! 기다리고 있었어요!”양지우는 요즘 외부에 떠도는 ‘특효약 개발 주역은 안채린’이라는 소문이 가짜이고 진짜 영웅은 지금 눈앞에 있는 소예지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먼저 실험실 가서 준비해. 금방 내려갈게.”소예지가 담담하게 말했다.“네!”양지우는 기운차게 나가서 문을 닫았고 소예지는 자리에 앉아 연구 데이터를 몇 부 출력하기 시작했다.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들었고 이서연이 눈에 들어왔다.“무슨 일 있어?”이서연은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와서 문을 슬쩍 닫았다.“예지야, 요즘 채린이가 특효약 연구 주역이라는 소문이 돌잖아. 혹시 그에 대해 하고 싶은 말 없어?”그녀의 눈빛은 호기심보다는 왠지 누군가를 대신해 묻는 듯한 기색이 강했다.소예지는 눈을 가늘게 떴다.‘이서연은 정말 그게 궁금해서 찾아온 걸까? 아니면 누군가가 시켜서 온 걸까?’“사실 채린이가 일부러 네 성과를 가로챈 건 아니야. 그냥 너 대신 인터뷰 나갔다가 사람들이 오해해서 일이 그렇게 커진 거잖아? 본인도 답답할 거고 설명하고 싶을 거야. 하지만 이제 와서 말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겠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이서연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소예지의 표정을 살폈다. 마치 기분 나쁜 기색을 캐치하려는 듯 말이다.하지만 소예지는 잔잔한 미소로 대답 대신 응수했다.“어차피 이 프로젝트는 우리 실험실 명의로 진행된 거고 우리는 누가 진짜 주역인지 알잖아. 밖에서 뭐라고 하든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이서연은 말을 이어가며 은근슬쩍 분위기를 눙쳤다.그러자 소예지가 일어서며 물었다.“나 매곡마을 관련해서 추가 실험하러 가야 하는데, 혹시 공지 못 받았어?”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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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화

“알겠습니다, 대표님. 검토는 마쳤으니 바로 재무팀에 지시해서 송금 처리하겠습니다.”투자팀 부장이 공손하게 말했다.그 옆에서 안경을 쓴 한 직원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대표님, 성양 그룹의 소송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는데 정말 지금 투자하시는 게 맞을까요?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시는 건 어떨지 싶습니다만...”성양 그룹은 여러 소송에 휘말려 있었다. 그런 시점에 투자를 감행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다.“쓸데없는 소리 말고 하라면 해. 대표님이 이미 결정하신 일이야.”부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후배 직원을 제압했다.고이한은 더 이상의 언급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대표님, 살펴 가십시오!”부장은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고 직원들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고이한이 사무실을 나서자마자 부장이 신입 직원을 향해 말했다.“앞으로 성양 그룹 서류는 과감하게 사인만 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직원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멍하니 서 있었다.“성양 그룹 회장 큰딸이 우리 대표님과 각별한 사이인 걸 모르나 본데?”다른 직원이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거들었다.그제야 주변 직원들도 사정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아, 성양 그룹 회장이 대표님 장인이 될 사람이었구나! 그래서 이번 투자를 무리해서라도 추진하려 했던 거군요.”고이한이 사무실에 돌아오자마자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을 흘깃 본 그는 짧게 전화를 받았다.“응.”“나 감염됐어. 사흘간 격리해야 하니까, 하슬이 좀 잘 부탁해.”소예지의 지친 목소리가 전해졌다.고이한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병원에 입원한 소예지가 막 주사를 맞기 시작할 무렵, 강준석이 마스크를 쓴 채 병실로 들어왔다.“지금 상태 어때? 어디가 제일 힘들어?”“머리 아프고 열이 나고 온몸에 기운이 없어.”소예지가 힘없이 대답했다.“걱정 말고 쉬어. 연구실 일은 신경 쓰지 마.”강준석은 침대 옆 의자에 앉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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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화

두 번째 사진 속에서 딸아이는 앙증맞은 빨간 목마 위에 앉아 있었다. 아이는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카메라를 든 심유빈을 향해 작은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그리고 있었다.그 사진을 보자마자 소예지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겨우 하루 집을 비운 사이에 고이한이 벌써 딸을 데리고 심유빈을 만났다는 사실이 온몸을 떨리게 했다.소예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분노와 서글픔이 목을 조르듯 숨을 막았고 원래도 아프던 머리가 쪼개질 듯 욱신거렸다.그때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간호사가 들어오는 줄 알았던 그녀가 고개를 들어보니 뜻밖에도 윤하준이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소예지가 놀라 물었다.윤하준 역시 예상치 못한 상황에 문 앞에서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차분히 입을 열었다.“제 지인이 여기 입원해 있어서요. 지나가다 문에서 소예지 씨 이름을 보고 들어와 봤어요.”소예지는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바이러스에 감염됐어요.”말을 내뱉는 순간, 분노로 욱신거리던 머리가 극심한 메스꺼움과 함께 뒤엉켜 견딜 수 없을 만큼 속이 뒤틀렸다. 소예지는 갑자기 입을 막으며 괴로운 신음을 내뱉으며 침대 위로 고꾸라졌다.윤하준은 서둘러 쓰레기통을 가져와 그녀 곁에 대주었다. 소예지는 참지 못하고 결국 침대 위로 구토를 하고 말았다. 괴로운 구토가 끝나고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 앞에 젖은 물티슈 한 장이 내밀어졌다.“고마워요...”소예지는 겨우 쉰 목소리를 흘리며 말을 잇다가 다시 심한 기침을 했다. 등 뒤로 따뜻하고 큰 손바닥이 부드럽게 그녀를 두드려주자 막혔던 숨이 서서히 편안해지는 듯했다.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린 소예지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말했다.“빨리 나가세요. 바이러스 있어요. 괜히 감염되면 어떡하려고...”윤하준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기침이 한참 지나고서야 소예지는 지친 기색으로 침대 위에 힘없이 누웠다. 윤하준은 물 한 잔을 따라 건네며 부드럽게 말했다.“따뜻한 물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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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화

소예지는 다시 혼미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희미하게 누군가의 손길이 얼굴 위를 부드럽게 스쳐가는 듯했지만 몸을 움직일 힘조차 없었던 그녀는 그저 불편한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릴 뿐이었다. 그 순간, 귓가에 작고 무력한 한숨 소리가 스며들었다.다음 날 아침, 병실 밖에서 들려오는 간호사의 수레 소리에 소예지가 천천히 눈을 떴다. 이미 고이한은 자리에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고 곧 간호사가 다가와 주사를 놓았다.오전 열 시쯤, 강준석이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려 병실로 들어섰다. 소예지의 컨디션은 확실히 어제보다 나아 보였다.“어젯밤에 고 대표가 왔었나 봐?”강준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예지는 살짝 놀라 눈을 깜빡이며 답했다.“어떻게 알았어?”“간호사가 밤에 누가 널 보러 왔다고 하길래 그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지.”오후가 되자 소예지의 몸 상태는 눈에 띄게 호전되었다. 강준석은 저녁때까지 그녀 곁에 머물다 돌아갔다.입원 사흘째 되던 날, 열이 내리고 기침도 멈췄다. 몸이 아직 무기력하고 뻐근했지만 검사 결과도 음성으로 바뀌어 있었다. 소예지는 사흘이면 충분히 회복될 줄 알았는데 이번 바이러스를 너무 쉽게 본 모양이었다. 병세가 나아졌음에도 삼 일간의 추가 자가격리를 마쳐야 퇴원할 수 있었다.소예지는 딸이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결국 이틀을 겨우 참고 고이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뜻밖에도 심유빈이었다.“여보세요?”“이한 씨 바꿔줘요.”소예지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건 놀랄 일도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미 부부처럼 지내왔으니까.“지금 이한 오빠 씻고 있는데 끝나면 연락하라고 할까요?”심유빈이 여유롭게 웃었다. 딸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와 함께 있다는 사실에 소예지는 아무 말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날 밤, 고이한의 연락은 끝내 오지 않았다. 심유빈이 전하지 않았거나 그가 무시했거나 둘 중 하나였다.일주일이 지나 소예지는 드디어 퇴원했다. 그녀는 이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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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화

“무슨 일이야?”잠에 잠긴 듯 쉰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잘생긴 얼굴 위로 졸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소예지의 눈동자에 순간 혐오가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그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는 듯 등을 돌렸다.고이한은 말없이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했고 평소 날카롭게 빛나던 그의 눈빛은 어느새 차가운 냉기로 굳어 있었다.잠시 후 문이 조용히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소예지는 천천히 침대로 돌아가 몸을 눕혔다.다음 날 아침, 소예지가 조식을 먹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고이한은 이미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어제보다 한층 더 서늘해져 있었다.소예지는 양희순에게 조용히 부탁해 아침상을 2층 거실로 옮기게 했다. 남편과 마주 앉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얼마 후 고이한의 차가 멀어져 가는 소리가 들렸고 그 뒤를 이어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화면에는 낯선 번호가 떠 있었다.“여보세요?”“안녕하세요! 하슬이 집에 있어요?”귀에 익은 목소리에 소예지는 잠시 멍해졌다.“이안이구나. 하슬이는 지금 할머니 집에 있어.”“아, 그렇구나. 하슬이한테 작별 인사하고 싶었는데. 저 곧 외국에 있는 할머니 댁으로 가거든요.”“해외로 간다고?”“네. 삼촌이 아파서 더 이상 저를 돌봐줄 수 없대요. 그래서 할머니 댁에서 잠깐 지내야 해요.”순간 소예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윤하준 씨가 아프다고? 혹시 그날 병실에서 나 때문에 바이러스에 감염된 걸까?’강한 죄책감이 그녀를 덮쳤다.‘나 때문이야. 나 때문에 아픈 게 틀림없어.’아이와의 통화를 마친 후 소예지는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망설이다 결국 윤하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윤하준의 목소리가 쉰 듯 무겁게 들려왔다. 그 목소리만으로도 그 역시 바이러스에 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괜찮으세요?”“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냥 가벼운 감기예요.”그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그날 제가 옮긴 것 같아서 정말 죄송해요.”소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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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화

소예지는 자신이 상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에 가슴이 설레었다. 그녀는 강준석과 매곡마을에 관해 몇 마디 더 나눈 뒤 전화를 끊었다.실험실.평소 가십 수집에 열정을 보이던 이서연은 과학기술원이 6월에 시상식을 연다는 소식을 듣고 안채린에게 슬쩍 다가가 말을 걸었다.“채린아, 들었어? 이번에 과학기술원에서 시상식 한대.”안채린은 관심 없다는 듯 대꾸했다.“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인데?”이서연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이듯 말했다.“정말 관심 없어? 소예지도 이번 수상자 명단에 오를 것 같은데.”글을 쓰던 안채린의 손이 순간 멈췄다.“정말 이름이 올라갔어?”“확실하진 않지만 특효약을 만든 사람이니 당연히 포함되겠지. 성과가 워낙 대단하잖아.”안채린은 불편한 듯 긴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한숨을 쉬었다.“어쩌면 소예지 아버지가 남긴 연구 자료 덕분인지도 모르지.”이서연은 목소리를 낮추며 계속 말했다.“그리고 강 선배가 최근에 예지 씨를 해부실에도 데려갔다던데? 아무래도 강 선배가 정말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이서연은 안채린의 표정을 흘긋 살폈다. 안채린의 눈에 질투의 기색이 스치는 것을 보곤 서둘러 위로했다.“너무 신경 쓰지 마, 너도 분명 강 선배 눈에 들 수 있을 거야.”안채린은 주먹을 꼭 쥐었다.‘이번 매곡마을 사건에서 반드시 공을 세워야 해. 소예지에게 다시 주목을 빼앗길 순 없어!’오후 4시, 소예지는 박시온의 전화를 받았다. 박시온은 자신과 초등학교 동창이면서 심유빈과 같은 예술대학을 나온 친구를 소개해 주겠다며 만나자고 했고 마침 시간이 있던 소예지는 흔쾌히 저녁 약속을 잡았다.저녁 6시가 되자 키가 크고 우아한 분위기의 긴 머리 여성이 레스토랑으로 들어섰다. 박시온은 둘을 서로 소개했다.“이쪽은 내 친구 소예지, 이쪽은 팽지현.”박시온은 팽지현과 잠시 초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나누다가 곧 본론으로 들어갔다.“지현아, 너도 M국 예술대학 출신이라며? 그럼 심유빈이라는 사람 알아?”“지금 업계에서 심유빈 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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