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Chapter 91 - Chapter 100

100 Chapters

제91화

다음 날 아침이었다.소예지는 딸아이의 작은 손을 잡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계단 아래서 기다리고 있던 고이한은 딸의 모습을 발견하자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소예지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 미소는 금세 희미하게 사라졌다.고이한이 딸과 함께 등교하러 간 직후 소예지의 휴대폰이 울렸다. 윤혁이었다.“오늘 협회와 정부 관계자 몇 분이 방문할 예정이야. 매곡 마을 사건에 관해 네가 주요 연구자니까 참석해서 직접 설명을 해주면 좋겠어.”“알겠어요. 바로 갈게요.”소예지는 전화를 끊자마자 곧장 실험실로 향했다.그 시각 실험실의 휴게실.이서연이 부러운 듯 입을 열었다.“오늘 협회와 정부에서 많은 고위 인사들이 온다더라. 이번에도 소예지가 모든 주목을 받겠네.”마침 휴게실에 들어서던 도윤재가 그 말을 듣고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아버지가 소영욱 교수인데 당연히 좋은 기회는 전부 소예지 몫이겠지. 우리에게까지 기회가 돌아오겠어?”안채린도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컵을 더욱 힘껏 쥐었다.“이제부턴 우리도 기회를 적극적으로 잡아야 해. 언제까지 소예지 혼자 좋은 걸 독차지하게 둘 순 없잖아.”이서연이 힘 빠진 목소리로 덧붙였다.“우리도 이번 매곡 마을 사건 연구에 정말 열심히 참여했는데 전혀 성과가 없으니 너무 답답해.”도윤재는 의미심장하게 혀를 찼다.“강 팀장이 소예지 옆에 붙어 있는 이상, 우리가 좋은 자원을 확보하기는 쉽지 않을 거야.”안채린의 눈에 순간 질투 어린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 모습을 포착한 도윤재가 그녀 옆으로 다가앉으며 목소리를 낮췄다.“나한테 아주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 한번 들어볼래?”이서연도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빠르게 다가왔다.“무슨 아이디어인데요, 선배? 빨리 말해보세요.”도윤재는 주변을 한번 둘러본 뒤 더욱 목소리를 낮췄다.“너희 지유선이라는 사람 알지? 남편이 국내 최고 부자였다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이후,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암 기초과학 연구와 자선사업에 전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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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화

오후의 부드러운 햇살이 회의실 창가로 비스듬히 쏟아졌다.흰 실크 블라우스를 입은 소예지는 차분한 표정으로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깨끗하게 정돈된 옷매무새와 우아하게 올려 묶은 검은 머리칼, 눈부시게 투명한 피부가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시선을 사로잡았다.그때 문이 열리며 강준석이 들어섰다. 순간 그의 시선이 잠깐 멈칫했다. 소예지가 고개를 들어 눈이 마주치자 그는 어색한 듯 안경을 슬쩍 밀어 올리며 물었다.“정리 다 했어?”“응, 다 끝났어.”소예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가 다시 물었다.“구내식당에서 먹을래 아니면 밖으로 나갈까?”“식당이 좋겠어.”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강준석은 근사한 곳에서 식사하고 싶었지만 소예지는 언제나 화려함보다 실속을 우선시했다.오후가 깊어질 무렵 윤혁이 두 사람에게 저녁 연회 초대장을 건네며 말했다.“예지야, 집에 가서 예쁜 드레스로 갈아입고 와.”“저는 연회를 즐기러 가는 게 아니라 일하러 가는 거예요.”소예지가 난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윤혁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했고 옆에 있던 강준석이 웃으며 덧붙였다.“지금 차림도 예쁘니까 괜찮아.”“그래요, 그럼 저녁 여섯 시에 연회장 입구에서 봐요.”윤혁이 말을 마치고 먼저 자리를 떴다.오후 4시 30분, 소예지는 정확히 시간에 맞춰 딸을 데리러 학교에 도착했다. 하지만 건너편 주차장에는 이미 고이한의 차가 서 있었다. 잠시 후, 그가 딸을 데리고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고하슬!”“엄마!”딸이 활짝 웃으며 달려왔다.“엄마, 아빠가 할머니 댁에 데려다준다고 했어요. 엄마도 같이 가요!”소예지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몸을 낮췄다.“그럼 엄마 차 타고 갈까?”“아니요, 아빠 차로 가요!”고하슬이 앙증맞은 표정으로 엄마의 손을 잡았다. 딸은 아빠가 운전하는 동안 엄마와 함께 뒷좌석에서 놀고 싶었던 것이다.딸의 귀여운 제안에 소예지는 학교에 자기 차를 놔둔 채 고이한의 차에 올랐다. 차 안에서 고이한은 딸과만 간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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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화

소예지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오늘 밤 심유빈은 값비싼 보랏빛 오트 쿠튀르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늘씬한 몸매와 우아한 기품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그녀가 연회장에 발을 내딛자마자 모든 이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다.그녀의 곁에 서 있던 남자 역시 눈부신 외모로 주변 남성들을 전부 초라하게 만들어 버렸다. 두 사람의 등장은 순식간에 연회장의 모든 관심을 독차지했다.심유빈은 쏟아지는 시선을 여유롭게 즐기며 자신감 어린 미소와 함께 때때로 부끄러운 척 고이한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사람들은 앞다투어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이한과 심유빈 주위는 유명 인사들로 금세 북적였다.그 모습을 본 이서연이 흥분하며 안채린의 팔을 잡아당겼다.“너희 언니 오늘 분위기 진짜 대박이다. 완전 여신이라니까!”안채린 역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위기 면에서 심유빈은 확실히 그녀보다 뛰어났다.“고 대표님도 진짜 멋있다. 둘이 정말 잘 어울려!”이서연도 부러운 듯 말했다.바로 그때 도윤재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아까 윤 선배 만났는데 오늘 강 선배랑 소예지도 왔다던데?”안채린의 눈빛이 순간 반짝였다.“강 선배도 왔다고?”“응! 세 사람도 지 여사님을 보러 왔다던데?”사실 오늘 안채린은 강준석 앞에서 돋보이고 싶어 평소보다 훨씬 공들여 화려하게 치장했다.한편, 소예지는 목이 말라 바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참이었다. 그때 풍채 좋은 한 귀부인이 그녀를 힐끗 보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거기, 웨이터! 이 잔 좀 치워요.”소예지는 순간 당황해 걸음을 멈췄다. 귀부인은 친구와 이야기하느라 제대로 살피지 않은 채, 소예지를 당연히 웨이터로 착각하고 와인잔을 무심히 내밀었다.쨍그랑!—잔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져 큰 소리를 내며 깨졌다. 귀부인과 주변 사람들은 놀라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귀부인은 화가 난 듯 즉각 언성을 높였다.“이 웨이터는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잔 치우라는 말 못 들었어?”그녀의 목소리는 연회장 전체의 이목을 끌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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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화

역시나 강준석은 고이한보다 한발 빨리 소예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얼굴이 벌게진 귀부인을 향해 차분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이분은 오늘 초대받은 손님이지 직원이 아닙니다.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귀부인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강준석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그럼 당신은 또 누군데?”마침 호텔 매니저가 급히 달려왔다. 그는 소예지를 힐끗 살펴 직원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귀부인에게 연신 머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매니저까지 나서서 사과하자 귀부인은 못 이긴 척 소예지를 향해 성의 없는 사과를 툭 던지고는 친구와 함께 불쾌한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이미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든 터라, 소예지는 더 이상 문제를 키우고 싶지 않았다. 강준석은 그런 그녀를 조용히 이끌고 발코니로 나가 잠시 숨을 돌리게 했다.한편, 손님들 사이에 섞여 있던 고이한의 얼굴에는 여전히 침착하고 우아한 미소가 담겨 있었다. 그의 옆에서 심유빈은 그의 눈빛 속에서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조차 짐작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심유빈의 눈에는 소예지가 제대로 망신당한 것처럼 보였다.발코니에 나온 소예지는 의외로 담담했고 조롱당한 사람답지 않게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강준석이 그녀에게 과일주스를 건네며 위로하듯 말했다.“이거 한 모금 마셔. 아마 그 여사님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야.”소예지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알아.”오늘 자신의 옷차림이 문제였다는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강준석이 무언가 더 말을 이어가려는 순간, 뒤에서 안채린의 목소리가 들렸다.“강 선배도 여기 있었네!”강준석은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너희는 어떻게 온 거야?”도윤재가 곧바로 설명했다.“이 박사님 허락받고 지 대표님이랑 협력 논의하려고 왔어.”이서연은 소예지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괜찮아?”“응, 괜찮아.”그러나 안채린은 속으로 불편했고 강준석이 소예지를 두둔하는 모습이 자꾸 신경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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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화

소예지는 조용히 자리를 골라 앉았고 마침 맞은편에 고급스럽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두 미녀가 우아한 모습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녀들은 소예지가 단숨에 알아볼 정도로 유명한 여배우들이었다.“공익광고 모델, 원래 이수정 아니었어? 갑자기 피아니스트 심유빈으로 왜 바뀐 거야?”“고신 그룹하고 지온 재단이 원래 협력 관계였잖아. 모델 정도는 저쪽에서 한마디만 하면 바로 바뀌지 뭐.”“부럽다, 그런 운은 아무한테나 오는 게 아니지. 듣기로는 심유빈이 고이한 곁에 있은 지 벌써 몇 년이나 됐다던데. 고이한이 다른 여자한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심유빈만 총애한다고 하더라.”“정말이야?”“나도 들은 얘기지만, 원래 임은우 회사가 먼저 경기장 사용 계약을 마쳤대. 그런데 임은우 콘서트 일정이 8월로 미뤄지고 심유빈이 먼저 독주회 장소로 쓰게 됐다고 하더라고.”“임은우 콘서트가 미뤄졌다고?”소예지 역시 그 이야기에 잠시 놀랐다. 임은우는 지난 10년간 최고의 인기를 누려온 스타였다.잠시 후 매니저들이 나타나 여배우들을 연회장으로 안내했고 소예지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연회장으로 향했다.연회장에 들어서자 화려한 차림의 한 중년 여성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참석자들의 존경 어린 시선만 봐도 그녀가 오늘 행사를 주최한 지온 자선재단의 지유선 대표임을 알 수 있었다.지유선은 10년 넘게 자선활동에 헌신한 인물로 정·재계 인사들이 그녀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오늘 밤 모두 이 자리에 참석한 듯 보였다.그때 사회자가 무대에 올라 말했다.“지금부터 한 시간 동안 자선 경매가 진행됩니다. 먼저 지유선 대표님의 축사가 있겠습니다.”지유선이 무대에 올라 진심 어린 눈빛으로 참석자들에게 감사를 전한 후, 간략히 경매 물품을 소개하고 본격적으로 경매가 시작되었다.사람들은 준비된 자리에 자유롭게 앉기 시작했다. 소예지 일행은 뒷줄에 자리를 잡았고 고이한과 심유빈은 가장 앞줄의 특별석에 앉았다.윤혁이 소예지에게 조용히 속삭였다.“너도 가서 고 대표 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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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화

십여 점의 경매품은 순식간에 모두 주인을 찾았고 그중에서도 가장 값비싼 물품은 심유빈의 차지가 되었다.곧이어 본격적인 만찬이 시작됐다.잔잔한 음악이 부드럽게 흘러나오고 고급 와인의 은은한 향기가 연회장 안을 가득 메웠다. 참석자들은 여전히 방금 전까지 진행된 경매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소예지가 윤혁에게 물었다.“선배, 곧 9시인데 지 여사님은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요?”“아마 곧 만날 수 있을 거야.”마침 그때 조명이 바뀌었다. 아늑하던 실내가 은은한 댄스홀 분위기로 변했고 음악도 우아한 춤곡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자연스레 짝을 지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도윤재는 용기를 내어 안채린에게 춤을 신청했으나 그녀는 춤을 출 줄 모른다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민망해진 도윤재를 외면한 채 안채린은 기대를 담은 눈빛으로 강준석을 바라보며 그가 자신을 초대해 주기를 기다렸다.바로 그 순간 윤혁의 휴대폰 화면이 환히 빛났다. 그는 급히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강준석과 소예지에게 말했다.“지금 나랑 같이 가자.”세 사람은 윤혁을 따라 연회장 2층으로 올라갔다.안채린은 질투 어린 눈길로 소예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오늘 밤 내내 강준석의 시선은 오직 소예지에게만 향해 있었다.한편, 2층의 호화로운 휴게실 앞에서는 심유빈이 고이한의 넥타이를 부드럽게 고쳐주고 있었다.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고이한이 고개를 돌렸고 그의 시선이 소예지와 마주쳤다. 화려한 조명 아래 선 소예지와 강준석은 마치 서로에게 완벽하게 어울리는 연인 같았다.고이한은 심유빈에게 짧게 말했다.“나 먼저 들어갈게.”“그래.”심유빈이 사랑스러운 미소로 화답했다.고이한이 문 안으로 들어가자 심유빈은 우아한 걸음으로 소예지 일행에게 다가왔다.“강 선생님, 또 뵙네요.”윤혁은 순간 혼란스러웠다. 고이한은 분명 소예지의 남편인데 방금 본 심유빈의 행동은 어딘지 모르게 부적절해 보였다. 그러나 소예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소예지 씨, 잠깐 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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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화

심유빈의 눈가엔 미묘한 도발이 깃든 미소가 감돌았다.“소예지 씨, 그 목걸이 말이에요. 내가 양보할게요. 그러니 너무 서운해하지 말아요.”“내가 관심 없는 물건이라면 얼마든지 가져가도 돼요.”소예지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지만 그녀의 말끝이 슬쩍 심유빈 옆에 서 있던 남자에게 기울었다. 뜻을 곱씹게 만드는 묘한 말이었다.그 의미를 알아차린 듯 고이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호기심과 탐색의 시선으로 소예지를 빤히 응시했고 심유빈 역시 소예지를 천천히 훑었다. 어딘가 이상했다. 그녀는 문득 눈앞에 있는 소예지가 반년 전 자신이 알던 사람과 전혀 다른 인물처럼 느껴졌다.과거의 소예지는 마음속을 쉽게 읽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리 살펴봐도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상대가 되어 있었다.그때 강준석과 윤혁이 다가왔다. 윤혁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이한에게 물었다.“고 대표님, 얘기는 잘 끝나셨나요?”고이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심유빈을 향해 말했다.“우리 먼저 내려가지.”잠시 후 윤혁 일행은 안내를 받아 귀빈실로 들어갔다. 그 순간 고이한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그는 화면을 확인하고 조용한 발코니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여보세요.”“이한아, 과학기술원에서 6월에 의학 시상식을 열 예정인데 자네를 시상자로 초청하고 싶다고 하네. 시간 괜찮겠지?”“영광입니다. 꼭 참석하겠습니다.”“좋아, 그럼 만나서 다시 얘기하지.”통화를 마친 고이한은 다시 심유빈에게 다가가 말했다.“지 대표님 쪽에서 연구실 지원을 약속했어.”심유빈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 지었다.“역시 오빠라면 날 실망시키지 않을 줄 알았어.”“그리고 과학기술원에서 연락이 왔는데, 6월에 있을 시상식에 나를 시상자로 초대한다고 해.”심유빈이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그럼 나도 따라가도 될까?”그러더니 마치 문득 떠올린 듯 덧붙였다.“내 동생이 주인공이 될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고이한 역시 이번 시상식에서 특효약 개발자가 수상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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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화

“나 안 가려고.”소예지가 단호히 거절했다.“왜 안 가? 야근도 없잖아.”소예지는 더 이상의 설명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실험실로 향했다. 이서연이 답답하다는 듯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 티켓, 40만 원이나 하는 거라고!”잠시 후 이서연은 안채린에게 다가가 불만을 털어놓았다.“소예지 걔 도대체 뭐야? 네가 좋은 마음으로 준 티켓인데 고마워하긴커녕 받지도 않아.”안채린이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안 받을 줄 알았어.”“설마 아직도 인터뷰 뺏긴 일 때문에 너한테 앙심 품고 있는 거 아니야?”“겉으론 괜찮은 척하지만 속으론 분명 화났겠지.”안채린의 목소리엔 확신이 담겨 있었다.“걔가 안 가면 우리끼리 가지 뭐. 네가 준 스무 장 티켓 다 나눠줬어. 다들 벌써 엄청 기대하고 있다고!”“강 선배도 티켓 받았대?”안채린이 물었다.“조수한테 줬어. 강 선배가 사무실에 없더라고.”안채린은 강준석이 오기를 은근히 기대했다. 그가 온다면 둘만의 아름다운 저녁을 보낼 수 있을 것이었다.한편, 강준석과 소예지는 구내식당에서 함께 점심을 먹었다.화제는 심유빈의 연주회로 흘러갔고 강준석 역시 갈 생각이 없었다.오후 내내 연달아 회의를 끝낸 강준석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매곡 마을 주민들이 화학공장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으며 그쪽에서 증거 자료가 필요하다는 연락이었다.강준석은 곧 법원에서 증인으로 출석하라는 요청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며 소예지에게는 참석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강 선배도 조심해. 지난번 경고 전화는 화학공장 측에서도 대응에 나섰다는 뜻일 테니까.”실험실로 돌아온 소예지는 박시온과 영상통화를 했다.“오늘 심유빈 단독 연주회 날이잖아.”박시온이 아이패드를 들고 몇 번 화면을 넘기다가 심유빈의 홍보 영상을 틀었다. 영상 속 체육관의 대형 LED 광고판엔 온통 심유빈의 포스터가 가득했다.“정말 팬이 많긴 많네.”박시온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심유빈의 회사는 그녀를 완벽하게 포장했다. 그녀의 이름 앞엔 언제나 글로벌 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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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화

“알겠어요, 제가 데리고 갈게요.”“정말 화가 나서 못 살겠다니까! 예지 걔는 나이가 들수록 고집만 더 세지니 원. 너희 둘 결혼한 지 벌써 6년이나 됐는데도 어린애처럼 철이 없으니 말이다!”진가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아들에게 불만을 쏟아냈다.“어머니, 제가 잘 타이르겠습니다.”고이한이 차분한 목소리로 어머니를 달랬다.“내가 그때 왜 그렇게 결혼을 반대했는지 이제는 너도 알겠지? 결국 이런 문제가 터지잖니. 사리 분별은커녕 어른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조차 없잖아!”진가영은 오늘만큼은 꼭 참아온 말을 다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 순간 등 뒤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시어머니 최현숙이 서 있었다. 진가영은 급히 휴대폰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이만 끊자.”최현숙은 이미 그녀가 하는 말을 다 들은 모양이었다.“넌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며느리랑 티격태격하니?”“어머니, 방금 걔가 얼마나 고집을 부리는지 못 보셔서 그래요. 내 딸이었으면 진작에 혼냈죠. 며느리니까 참고 있는 거죠.”진가영이 억울하다는 듯 하소연하자 최현숙이 그녀를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요즘 애들 사이가 좀 냉랭해진 거 모르니? 젊은 사람들 일에 너무 끼어들지 마라.”진가영도 물론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이 오히려 안쓰럽고 마음 아팠다.“우리 이한이가 한 달 생활비만 몇억씩 꼬박꼬박 챙겨주는데, 도대체 얼마나 더 잘해줘야 하나요? 그런데도 매번 그렇게 싸늘하게 구니...”최현숙은 손자가 최근 너무 바빠 손자며느리를 외롭게 만든 탓이라 생각했다.‘앞으로 이 늙은이가 잘 다독여서 둘 사이를 더 돈독하게 만들어야겠어.’고이한의 별장.“엄마, 이것 봐요! 내가 그린 그림이에요. 엄마, 아빠, 나랑 젤리까지 다 있어요!”딸 고하슬이 자신이 그린 그림을 들고 달려왔다.소예지는 딸의 귀여운 볼을 살짝 비비며 칭찬했다.“우리 하슬이 정말 잘 그렸네! 내일 쉬는 날인데 어디 가고 싶어?”아이는 엄마의 목을 끌어안으며 환하게 웃었다.“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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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화

소예지는 몸을 돌려 뒤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팔짱을 낀 그녀의 입술에는 조롱이 서린 미소가 희미하게 번지고 있었다. 한참을 말없이 그를 응시하던 소예지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단을 올라가 버렸다.씁쓸한 고이한의 눈빛도 갈피를 잡지 못한 복잡한 감정으로 심하게 흔들렸다.소예지는 방으로 들어가 딸을 재웠고 고이한 역시 샤워를 마치고 곧이어 딸의 방으로 들어왔다. 어린 딸아이가 앳된 목소리로 재잘거리자 그는 몇 번이나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우리 공주님, 아빠의 귀염둥이.”고이한은 젖내가 아직 가시지 않은 딸을 조심스럽게 품에 안아 한 번 입을 맞춘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이내 몸을 숙여 소예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소예지는 순간 온몸이 굳어졌지만 딸 앞이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필사적으로 감정을 억누르며 그가 방을 나서자 소매로 서둘러 이마를 문질렀다.새벽녘이었다.고이한은 침대 위에 팔을 베고 누운 채 휴대폰으로 한 동영상을 틀었다. 영상 속 장면은 8년 전의 모습이었다.병상에 의식 없이 누워있는 그 곁에서 한 소녀가 손을 꼭 잡은 채 부드럽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어때? 새로 배운 노래야. 자장가처럼 불러줄 테니까 어서 일어나서 좋다고 말해줘야 해.”소녀의 목소리는 맑고 고왔으며 생기로 가득 차 있었다.“이번엔 새로운 동화책 읽어줄 거야. 듣기 싫으면 빨리 일어나서 말해줘. 그렇지 않으면 싫다고 할 때까지 계속 읽어줄 거니까.”중환자실 안에서 소녀는 침대 가장자리에 기대어 앉아 생동감 넘치는 표정으로 동화책을 읽어 내려갔다.고이한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팔을 베고 누운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지난 반년 동안 소예지가 자신에게 보인 차가운 태도가 그의 가슴을 서늘하게 할 때마다, 그 기억은 더욱 선명해졌다.그는 잘 알고 있었다. 세상 그 누구도 소예지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다음 날 아침, 소예지는 딸을 데리고 아침 식사를 한 뒤 양희순과 함께 놀이공원으로 향했다. 고하슬은 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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