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Chapter 81 - Chapter 90

100 Chapters

제81화

박시온은 혹시라도 소예지가 자극받을까 봐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러나 정작 소예지는 담담했다. 이제 그런 일은 그녀에게 그저 흘러간 구름처럼 덧없이 느껴졌다.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박시온이 운전대를 잡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예지야, 괜히 마음 쓰지 마, 알았지?”“괜찮아.”소예지는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박시온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흘끗 바라보았다.“너 정말 많이 변한 것 같아. 전엔 그렇게 힘들어했는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 넉 달 전만 해도 전화로 그렇게 펑펑 울었잖아. 고 대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사람이 떠난다고 생각하면 숨조차 쉴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소예지도 그날을 선명히 기억했다. 그녀는 전화기 너머로 하염없이 눈물을 쏟으며 자신이 얼마나 그를 사랑하고 그와의 이별이 얼마나 두려운지 고백했었다.“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니까.”소예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박시온은 그런 그녀를 보며 마음 한구석이 아팠다. 조금 전 팽지현에게 들었던 이야기 탓에 소예지와 고이한 사이의 인연이 얼마나 잔혹한 운명의 장난인지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심유빈이 고이한의 첫사랑이었다면 소예지와의 결혼은 결국 ‘보은’이라는 허울 좋은 핑계에 불과했던 것이다.다음 날 아침, 소예지는 메일함에서 강준석이 보내준 매곡마을 사건 관련 보도 자료 몇 건을 확인했다. 병원과 정부 당국에서 실험실에 압력을 가하고 있었고 실험실에 특별 조사팀을 꾸려 조속히 원인을 규명하라고 요구한 상태였다.소예지는 곧장 강준석의 사무실로 향했다. 그와 추가로 발생한 환자들에 관해 의견을 나누던 중 안채린의 조수가 다가왔다.“강 박사님, 안 팀장님이 뭔가 발견하셨다며 잠시 와달라고 하십니다.”조수는 말을 마치며 의미심장한 눈길로 소예지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알아차린 소예지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강 선배, 이만 가볼게.”실험실로 돌아온 소예지는 방금 도착한 새로운 샘플을 받아 현미경 앞에 앉았다. 샘플 관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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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화

심유빈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안채린에게 물었다.“그 소예지라는 사람은 어떻게 네 연구팀에 들어온 거야?”“그 여자를 알아?”안채린이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응, 뭐 대충.”심유빈은 더 이상의 설명을 피했다.안채린이 담담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그 사람 아버지가 의학계에서 유명한 소영욱 교수님이잖아. 우리 지도교수님인 이 박사님과도 절친한 사이시고. 이 박사님이 소 교수님 체면 봐서 특별히 팀에 받아준 거야.”심유빈은 그제야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소예지가 다시 돌아온 건 그저 집에서 아무것도 못 하는 평범한 주부라는 딱지를 떼고 싶었던 거겠지. 그러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연구팀에 들어왔겠고.'하지만 심유빈의 눈에 과학계라는 곳은 그리 만만한 세계가 아니었고 원하는 대로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는 환경은 더더욱 아니었다.이번엔 안채린이 심유빈을 바라보며 물었다.“근데 너 오늘 어쩐 일이야?”심유빈이 입을 열려던 순간, 회의실에서 노트북을 들고 나오는 소예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심유빈은 그녀에게 들리도록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난 올 생각 없었는데 이한 오빠가 꼭 같이 가자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온 거야.”안채린은 점점 다가오는 소예지를 보고 급히 심유빈의 손목을 붙잡았다.“우리, 내 사무실 가서 얘기할까?”“그래.”심유빈은 소예지를 향해 승리감이 어린 시선을 던지고는 안채린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한편, 강준석의 사무실에서는 고이한이 몇 마디를 나누다가 서류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이건 장인어른께서 오래전에 제게 맡기신 서류입니다. 서명이 확실하니 빠르게 연구를 진행해 주시죠.”강준석은 서류를 펼쳐 보다가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연구 기증자 이름은 소예지의 어머니인 ‘신정숙’이었고 문서에 기록된 번호는 그녀가 14년 전 세상을 떠날 때 기증한 골수의 식별번호였다.“고 대표님, 그럼 지금... 장모님의 골수를 연구에 사용하시겠다는 겁니까?”강준석의 놀란 질문에 고이한은 차가운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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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화

‘소예지는 이 일을 알고 있을까? 만약 이 골수 샘플이 결국 심유빈을 살리는 데 쓰이게 된다면, 소예지가 과연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방금 전 고이한의 말투를 떠올려보니 그는 소예지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했다. 강준석 역시 이 일을 소예지에게 털어놓아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미 고이한이 실험실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했고 정식 서류까지 완벽히 준비한 이상 소예지가 이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모든 과정은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강준석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그때, 그의 조수 민소연이 문틈 사이로 머리를 살짝 들이밀었다.“매곡 마을로 출발할 시간이에요.”“소예지 씨도 부르세요.”“알겠습니다!”소예지는 이미 약속한 대로 짐을 챙겨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민소연과 나란히 서 있는 그녀에게 강준석이 다가와 안쓰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내 차로 같이 가자.”주차장 한쪽에 세워진 검은색 롤스로이스가 유독 눈에 띄었다. 차 안에서 통화를 하던 고이한 옆자리의 심유빈은 친구와 문자를 주고받다가 고개를 들었다. 멀리서 강준석과 소예지가 다정히 이야기를 나누며 차 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심유빈이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고이한을 향해 말했다.“소예지 씨랑 강 선생님, 같이 외출하나 봐.”마침 전화를 끊던 고이한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맞은편 차량으로 강준석과 소예지가 올라타고 있었다.안전벨트를 매던 소예지의 시선이 비스듬히 보이는 롤스로이스에 닿았고 뒷좌석에 희미하게 비친 고이한과 심유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같은 장면을 본 강준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가서 인사라도 할래?”소예지가 냉담하게 고개를 저었다.“아니, 그냥 출발해.”강준석은 말없이 가속 페달을 밟아 주차장을 빠져나갔다.고이한의 차량 역시 그 뒤를 따라 주차장을 나섰다. 그러나 강준석의 차가 시내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것을 본 고이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휴대폰을 꺼내 소예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어디 가는 거야?」소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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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화

“나 지금 일하는 중이야. 별일 아니면 방해하지 마.”소예지는 평소보다 한층 차가운 목소리로 짧게 대꾸하고는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정말이지 지금은 한눈팔 여유조차 없었다. 꼬박 두 시간을 쏟아부어 겨우 배양해 낸 생체 샘플이었고 자칫 한순간이라도 놓치면 그동안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그녀는 귀찮다는 듯 휴대폰을 실험대 위에 툭 던져놓고 다시 연구에 몰두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모니터 속 데이터를 꼼꼼히 체크하던 소예지는 어느덧 새벽이 되어서야 비로소 연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이쯤에서 그만하고 쉬어.”강준석이 직접 실험실까지 찾아와 그녀를 말렸다. 소예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데이터를 넘겼다.“예상했던 결과랑 똑같아.”강준석이 데이터를 빠르게 훑어본 뒤 입을 열었다.“메틸수은은 분자 크기가 작아서 혈액을 타고 쉽게 뇌까지 침투해 뇌세포를 점진적으로 잠식하지. 오랜 시간이 지나면 혈액-뇌 장벽마저 붕괴해 환자의 증상이 나타나는 거고.”그는 짧은 시간 동안 그녀가 이렇게 또 하나의 난제를 풀었다는 사실에 감탄했지만 그녀의 충혈된 눈과 창백한 얼굴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이제 좀 쉬어.”소예지는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선배도 얼른 쉬어.”연구동을 나서자 시원한 밤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스쳤다. 가볍게 기지개를 켜며 숨을 고르던 그때, 다시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은 역시나 고이한이었다. 소예지는 짧은 망설임 끝에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언제 들어와?”감정을 읽기 어려운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오늘 연구소 기숙사에서 잘 거야.”소예지는 짧게 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더 이상 그에게선 연락이 오지 않았고 그녀는 간단히 샤워를 마친 뒤 침대로 들어가 곧바로 잠들었다.다음 날 아침, 소예지는 최현숙의 전화를 받았다.“예지야, 오늘 저녁에는 집에 와서 밥 먹으려무나.”따뜻한 할머니의 목소리에 소예지의 마음도 덩달아 포근해졌다. 며칠째 시어머니가 그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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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화

“할머니, 전 정말 괜찮아요...”“이한아, 들었니?”최현숙이 옆에 있던 손자를 향해 명령하듯 말했다.“네, 들었어요.”고이한은 딸아이의 손을 잡은 채 담담히 대답했다. 그제야 최현숙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소예지에게 말했다.“만약 이 녀석이 너한테 안 사주면 할머니가 사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소예지는 더는 거절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저녁 식사를 마친 후, 어린 딸 고하슬이 아빠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아빠! 엄마한테 엄청 커다란 보석 사줘야 돼요! 하린이 엄마도 큰 보석 반지 끼고 왔는데 진짜 예뻤어요!”“그래, 알았어.”고이한은 딸을 향해 미소 지으며 약속했다.남편과 함께 집을 나선 소예지는 적당히 작은 물건 하나만 사서 최현숙을 설득할 생각이었다. 제대로 선물을 고르기 시작하면 큰돈이 드는 건 뻔했다.근처의 한 보석 가게에 들어섰을 때 고이한의 전화가 울렸다. 그는 휴대폰 화면을 확인한 뒤 소예지에게 말했다.“먼저 골라봐.”소예지가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여성 직원이 밝은 미소로 다가왔다.“어서 오세요! 혹시 고 대표님 비서분이신가요?”소예지는 순간 당황했지만 아무 말 없이 가볍게 미소만 지었다.직원은 계속 말을 이었다.“실례지만, 고 대표님께 좀 전해주시겠어요? 지난번 심 선생님께서 주문하신 보석 여섯 세트가 현재 항공편으로 배송 중이라고요. 선생님 연주회 일정에 맞추느라 차질 없도록 신경 많이 썼습니다.”‘여섯 세트의 보석이라.’소예지는 속으로 차갑게 비웃었다.‘정말 자상한 남자네. 심유빈의 연주회에 쓸 보석까지 미리 완벽하게 준비해 놓다니.'“알겠습니다, 전할게요.”소예지가 담담히 대답하자 직원은 자랑스러운 듯 덧붙였다.“정말이지 심 선생님 안목이 워낙 뛰어나셔서 이번엔 전부 한정판으로 골라주셨어요. 모두 본사 컬렉션에 있던 제품들이라 정말 어렵게 구했습니다.”소예지는 문득 궁금해져 물었다.“그 여섯 세트 가격은 얼마쯤 하나요?”“총 사백삼십억 원입니다.”소예지는 속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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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화

“안 돌아가면 나 혼자 택시 타고 갈게.”소예지는 그 말을 내뱉자마자 곧장 길가로 나와 택시를 잡기 위해 손을 들었다.“알았어, 가자.”고이한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제야 소예지는 그의 뒤를 따라 차에 올라탔다. 차 안에서 그녀는 아까 샀던 팔찌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하나를 골라 손목에 걸었다. 가늘고 하얀 손목 위에 올려진 4천 원짜리 싸구려 팔찌가 뜻밖에도 우아하고 예뻐 보였다.고이한은 이미 흥미가 식었는지 더 이상의 말없이 차를 몰아 저택으로 향했다. 소예지는 나머지 팔찌들을 잘 챙긴 후 손목에 찬 팔찌만을 그대로 두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왔구나. 뭘 샀는지 한번 보자꾸나.”최현숙은 손자가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확인하고 싶어 했다. 소예지는 팔찌를 낀 손목을 살짝 들어 보이며 미소 지었다.“할머니, 팔찌를 샀어요.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에요.”“어머나! 우리 예지는 피부가 하얗고 예쁘니 뭘 걸쳐도 참 잘 어울리는구나.”노안 탓인지 최현숙은 소예지의 팔찌를 값비싼 명품으로 착각하는 듯했다.고이한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한 손으로 이마를 지그시 눌렀다. 피곤한 건지 아니면 상황 자체가 귀찮은 건지 그의 표정은 읽기 어려웠다.“오늘은 다들 여기서 쉬고 가거라.”할머니의 말에 소예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아니에요, 할머니. 저희는 집에 가서 잘게요.”“여기도 너희 집이야!”최현숙은 완고하게 고집을 부렸다.“어서 올라가서 쉬도록 해!”“할머니...”“할머니 말 들어. 둘 다 어서 올라가 쉬거라.”더 이상 말하면 할머니가 언성을 높일 것 같아 소예지는 결국 얌전히 대답했다.“할머니, 그럼 먼저 주무세요.”“둘 다 방으로 들어가.”최현숙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이 같은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봐야만 마음이 놓일 듯했다. 이미 증손녀에게서 이들 부부가 줄곧 따로 방을 써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참이었다. 부부가 계속 따로 지내면 정이 떨어지는 법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녀는 부부 사이를 돈독히 만드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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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화

고이한이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왔다. 부드러운 조명 아래 느슨하게 걸친 목욕가운 사이로 그의 날렵한 쇄골과 탄탄한 가슴 근육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는 그의 몸에서는 특유의 건강한 생기가 느껴졌다.“가서 씻어.”소예지는 시선조차 들지 않은 채 무심히 대꾸했다.“먼저 자. 난 좀 이따 나갈 거야.”“이 밤에 어딜 간다고?”고이한이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친구네 집.”소예지는 짧게 답했다. 그때 박시온의 메시지가 마침 도착했다. 소예지는 바로 가방을 챙겨 방을 나서서 고씨 가문의 저택을 벗어났다.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빠르게 걸어가 박시온의 차에 올라탔다.“고 대표 집에 있는 거야?”박시온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있어.”소예지가 무덤덤하게 답했다.“집에 있는데 널 내 집에서 자게 그냥 둬?”박시온이 놀란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아직도 내가 그 사람하고 같은 침대에서 잔다고 생각하는 거야?”소예지가 반문하자 박시온이 피식 웃었다.“하긴, 그런 남자는 아무리 씻어도 깨끗해질 리 없지.”두 사람은 박시온의 집에 도착해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박시온은 심유빈이 곧 연주회를 열 예정이라는 소식을 전하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만약 그때 네 딸이 가겠다고 하면 어쩌려고?”“내가 데리고 나갈 거야.”소예지의 목소리엔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딸이 심유빈을 더 이상 동경하는 것을 절대 두고 볼 수 없었다.“이번 연주회에 고 대표가 엄청 힘썼다는 소문이 자자해. 울림 체육관이잖아! 거긴 만 명이 들어가는 경기장인데 보통 사람은 예약조차 힘들대.”소예지는 문득 오늘 보석 가게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박시온은 스킨을 바르다 말고 입을 떡 벌린 채 경악했다.“뭐? 여섯 세트? 그거 얼마나 든 건데?”“오백억 가까이 될 걸?”소예지가 담담히 말했다.“세상에! 누구 염장 지르려고 오백억짜리 보석을 사?”박시온은 어이없다는 듯 얼굴을 두드리며 소예지를 바라봤다.“솔직히 너 기분 어때? 질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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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화

다음 날 아침.소예지와 박시온은 이른 아침부터 보석 가게로 향했다. 정장 차림의 소예지가 직원에게 다가가자 직원은 역시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소예지는 자신을 고이한의 비서라고 소개하며 보석 구매 영수증을 찍어서 경비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고 자연스럽게 말했다. 직원은 곧바로 그녀를 매니저실 문 앞까지 안내했고 잠시 후 소예지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직원이 심유빈이 구매한 여섯 세트의 보석 영수증을 꺼내 보여주자 고객 서명란에는 분명히 고이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소예지는 즉시 휴대폰을 꺼내 재빨리 사진을 찍은 뒤 이어 직원에게 부탁해 영수증 사본을 받아서 밖으로 나왔다.보석 가게 밖으로 나오자 박시온이 소예지가 찍은 사진을 바라보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이 정도 증거라면 법정에서 분명히 너한테 유리한 협상 카드가 될 거야.”정오가 가까운 시각, 소예지가 저택으로 돌아오자 최현숙이 궁금한 표정으로 다가와 물었다.“어젯밤엔 어디 있었니?”“친구한테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도와주고 왔어요.”소예지는 태연하게 대답했고 최현숙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노인은 평소에도 소예지를 깊이 아끼고 관대하게 대했다.한편, 최근 학교에서도 빨리 등교하라는 연락이 있었기에 고이한은 딸을 집으로 데려와 다음 날부터 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했다.이튿날 아침, 소예지는 딸의 손을 잡고 고이한의 차에 올라 학교로 향했다. 학교 입구에 도착하자 고하슬이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나 이안이 보고 싶어요.”“이안이 외국에서 잠시 머물다 금방 돌아올 거야.”소예지가 딸을 부드럽게 달래주었다.딸이 교문 안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본 소예지는 고이한에게 말했다.“난 걸어서 집으로 갈 테니 당신은 회사로 가요.”고이한은 별다른 말 없이 시내 방향으로 차를 몰았고 소예지는 천천히 산책을 하듯 별장으로 걸음을 옮겼다.하지만 봄날의 날씨는 예고 없이 변덕을 부렸다. 갑자기 빗방울이 굵어지더니 순식간에 거센 폭우로 바뀌었다. 피할 틈도 없이 비를 맞게 된 소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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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화

소예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 우산은 잘 말려서 챙겨 놔요. 나중에 돌려줘야 하니까.”“네, 알겠습니다.”소예지는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4월 말이라 그런지 비에 조금 젖었다고 해서 감기에 쉽게 걸릴 날씨는 아니었다. 샤워를 마치고 가운을 걸친 채 나오니 강준석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오늘은 집에서 푹 쉬라는 그의 다정한 말이 그녀의 마음을 따스하게 했다.오후 세 시쯤 고이한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딸을 데리러 오겠다는 내용이었다.얼마 후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운 그가 딸 고하슬을 안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현관 앞에서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부녀를 반겼고 고하슬은 신이 나 강아지와 장난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고이한은 딸을 내려놓고 2층으로 올라가다가 현관 앞에서 소예지와 마주쳤다.소예지는 차라리 벽에 부딪히는 한이 있더라도 그와 닿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그녀의 태도에 고이한의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이 꽂혔다. 그 눈빛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묘한 원망이 서려 있었고 그는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아버렸다.소예지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딸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하슬의 맑은 웃음소리가 집안 가득 울려 퍼졌다. 양희순은 맛있는 저녁상을 차려주었고 밖은 먹구름과 천둥, 번개로 요란했지만 집안은 따스한 조명 덕분에 아늑하기만 했다.저녁 식사 무렵, 소예지가 막 현관을 지나가려던 찰나 고이한이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려왔다.“정전이 됐다고?”“알았어. 바로 갈게.”듣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심유빈이었다. 이런 궂은 날씨라면 분명 그의 품에서 위로받고 싶어 할 터였다.소예지도 천둥과 번개를 두려워했다. 과거엔 그녀 역시 두려움을 핑계 삼아 그의 품에 파고들곤 했고 그가 귀찮아하더라도 꼭 끌어안고 늘 그의 곁을 맴돌았었다. 지금도 천둥이 무서웠지만 딸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두려움도 견딜 수 있었다.밤이 되자 소예지는 딸과 함께 이불 속에 누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딸은 이야기를 듣다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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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화

이성열은 흐뭇한 미소로 소예지를 바라보았다.“예지야, 정말 날 실망시키지 않았구나.”소예지가 겸손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운이 좋았을 뿐이에요.”“내가 보기엔 강 선배가 많이 도와준 덕분이겠지?”안채린이 빈정거리는 말투로 끼어들었다.소예지는 자신의 연구 성과를 아버지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익히 알고 있었다.“운도 실력의 일부라잖아? 예지야, 너무 겸손할 필요 없어.”윤혁이 밝게 웃으며 말을 보탰다.이성열은 다시 진지하게 앞으로의 대응 방안에 대해 지시를 내린 후 회의를 끝냈다.오후가 되자 윤혁은 여러 군데로 연락을 돌린 끝에, A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자선단체가 내일 저녁 공익 자선 만찬을 개최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이 기회를 통해 물 자원 보호 캠페인의 중요성을 알리고 여론을 형성할 계획이었으며 정부와 공익단체가 힘을 합쳐 이번 수질 오염 사건을 해결하길 바랐다.“소예지도 데려가서 핵심 내용을 설명하게 하자. 홍보에 큰 도움이 될 거야.”이성열이 제안했다.윤혁은 곧바로 소예지에게 전화를 걸었다.마침 딸을 데리고 막 집에 도착한 소예지는 윤혁의 말을 듣고 좋은 생각이라고 판단하여 흔쾌히 승낙했다.“좋아요, 시간 맞춰 갈게요.”“강 박사님도 초대할 거야.”전화를 끊은 소예지는 딸과 함께 마당으로 나와 공놀이를 했다. 옆에서는 강아지 젤리가 신이 나서 뛰놀고 있었고 따스한 4월의 저녁, 가족이 함께하는 행복한 풍경이었다.저녁 여섯 시 반, 검은색 롤스로이스 한 대가 마당으로 들어왔다.정장을 차려입은 고이한이 차에서 내리자 고하슬은 작은 새처럼 파닥이며 아빠를 향해 달려갔다.고이한의 차갑던 얼굴이 순식간에 봄날처럼 부드러운 미소로 변했다. 그는 몸을 낮추고 딸의 머리에 입을 맞추며, 작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다정하게 닦아주었다.“오늘 재밌게 보냈어?”“네! 엄마랑 공놀이했어요. 아빠도 같이 해요!”고하슬은 아빠의 큰 손을 잡고 엄마가 있는 쪽으로 이끌었다.소예지가 딸에게 공을 차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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