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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1화

민하윤은 숨 막히던 그곳을 빠져나와 홀로 계단에 걸터앉았다.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두 무릎에 얼굴을 파묻자, 앙상한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부감독이 헐레벌떡 쫓아와 다가서려는 순간, 커다란 손이 부감독 손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부감독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칠흑처럼 검고 음산한 눈빛이 정면으로 박혔다.“꺼져.”주민혁은 노골적으로 혐오를 드러내며 차갑게 훑어보고는 부감독의 손목을 억지로 뒤로 꺾어 눌렀다. 부감독이 목을 빳빳이 세우고 맞서려 했다.“넌... 도대체 누구야!”말끝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덩치 큰 남자 둘이 부감독을 양팔로 들어 올리듯 붙잡아 끌고 갔다.주민혁은 그 자리에 남아서 멀어지는 민하윤의 가느다란 뒷모습을 바라봤다. 눈빛이 서서히 바뀌었다.‘원수의 아내라... 민하윤을 손에 넣고 부숴버리는 건, 원수의 목숨을 빼앗는 것보다 더 짜릿하지 않을까.’주민혁은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가까이서 보면 주민혁은 왼쪽 몸이 미세하게 어긋나 있었고, 오른발로 디딜 때마다 몸이 아주 조금 기울었다.깊게 한숨을 내쉬던 민하윤은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뭐가 그렇게 서러운 거야? 도진 씨의 마음속에는 끝내 내려놓지 못한 전 여자 친구가 있으면서 나한테만 자꾸 착각을 심어 줬던 거야. 마치 내가 운 좋게도 행복을 움켜쥔 사람인 것처럼 말이지.’그때, 한 사람의 그림자가 비스듬히 빛을 덮었다.민하윤은 다급히 눈가의 눈물을 훔치고 숨을 고르며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들었다.“민하윤 씨, 혼자 여기 앉아서 우는 건... 무슨 속상한 일이라도 있나요?”머리 위에서 내려오는 목소리와 함께 반듯하게 접힌 은회색 비단 손수건이 내밀어졌다. 뼈만 남은 듯 창백한 손과 손등 위로 지렁이처럼 도드라진 혈관이 기괴하게 꿈틀거렸다.낯설지만 이상하게 또 익숙한 목소리였다.민하윤은 목소리의 주인공과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고 숨을 들이켜며 몸이 굳어버렸다. 입이 열렸는데도 도움을 청하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 어디쯤에서 찢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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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2화

‘저 변태가 입에 올린 말은 대체 무슨 뜻이었을까?’“그 자식은 미하윤 씨한테 잘해 줘요?”주민혁은 애처로운 척 민하윤을 내려다보며 시선을 천천히 훑었다. 민하윤의 허리뿐만 아니라 더 아래로 향하더니 민하윤의 두 다리 사이로 노골적으로 내려앉았다.“민하윤 씨, 그 자식이 하윤 씨를 만족시켜 주긴 해요?”주민혁은 입꼬리를 비틀더니 갑자기 웃음이 터진 사람처럼 크게 웃었다. 붉어진 눈가가 섬뜩했다.“명원시 바닥에서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하도진이 그 방면에서는 보기만 번지르르하지 쓸모가 없잖아요. 애도 못 만드는 한심한 놈이죠.”처음 보는 남자가 그런 은밀한 얘기를 대놓고 들춰내자 민하윤은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귓불까지 뜨끈해지고 숨도 괜히 가빠졌다.‘아... 저 사람이 말한 그 자식은 하도진을 뜻하는 거였구나.’‘그런데 저 남자는 대체 어떻게 도진 씨와 내 관계를 알고, 심지어 도진 씨를 저런 식으로 입에 올릴 수 있는 거지?’주민혁은 민하윤이 수치심과 공포로 얼어붙은 얼굴을 보는 게 즐거웠다. 민하윤이 놀라서 털이 곤두선 고양이처럼 겁에 질린 눈동자가 커지는 그 표정이 마음에 든다는 듯했다.겉으로는 말라 보이는데 이상하게도 민하윤의 몸매는 살아 있었다. 허리는 부드럽게 휘고, 눈은 또 지나치게 맑았다. 그야말로 사람 속을 뒤흔드는 눈이었다.‘진짜 요물이네. 그래서 하도진이 7년이나 만난 전 여자 친구를 두고도 이런 아무런 배경도 없고, 말도 못 하는 여자를 아내로 들였나?’주민혁은 메마른 입술을 혀로 쓸었다. 숨이 미세하게 거칠어지더니 민하윤의 턱을 손가락으로 걸어 올리며, 입에 담기에도 더러운 말을 내뱉었다.“하도진이 못 해 주는 건, 제가 대신 해 줄까요? 저라면 분명히 민하윤 씨를 만족시켜 드릴 수 있어요.”하지만 민하윤은 반사적으로 주민혁의 손을 쳐냈다. 그대로 비틀거리며 일어서려 했지만 발목이 시큰하게 찌르며 중심이 무너졌다. 민하윤은 이를 악물고 서서 뒤로 물러났다.주변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스태프들은 정원 반대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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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3화

임형섭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민하윤이 무사히 서 있는 걸 확인하는 순간, 가슴을 짓누르던 숨이 한꺼번에 풀렸다.임형섭은 민하윤의 얼굴빛이 심상치 않은 걸 보자마자 곧장 걸음을 재촉했다.민하윤은 흰색 롱 트렌치코트에 먼지랑 풀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하이힐 한 짝은 잔디밭에 떨어져 있었고 민하윤은 두 팔로 몸을 끌어안은 채 엉망이 된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임형섭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대신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고 맨발로 드러난 민하윤의 발목을 바라봤다. 발목은 벌써 시뻘겋게 달아올라 조금 부어 있었다.“아파?”임형섭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눈가에 차오르는 물기를 들킬까 봐, 손이 먼저 나갔다가 허공에서 멈춰 섰다.멀찍이서 지켜보던 백누리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사람들이 괜히 사랑은 참는 게라고 말하는 게 아니었다.결국 이런 결과를 만든 건 남이 아니라 임형섭이었다. 수없이 망설이고, 끝도 없이 참고, 또 참은 탓이었다.민하윤은 그렇게 사랑을 원했었다. 누군가 뜨겁게, 숨기지 않고 사랑해 주길 바랐었다. 예전에 임형섭이 조금만 더 용기를 냈다면, 이만큼이나 오래 돌아왔을까. 어쩌면 진작에 풋풋한 신혼부부가 되어 있었을지도 몰랐다.당사자는 모르지만 옆에서 보는 사람만 선명할 뿐이다.백누리는 다시 한번 작게 숨을 쉬고는 임형섭 쪽으로 두 걸음 다가갔다. 임형섭이 움직일 구실을 만들어 주듯 일부러 말을 얹었다.“발목이 삐었어요. 저 정도면 혼자 못 걸어요. 형섭 씨, 어서 하윤이를 업어줘요.”민하윤은 얼굴이 확 굳었다. 하도진의 눈에 띌까 봐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손사래까지 쳤다.“고집부리지 마.”백누리는 민하윤한테 버럭 소리를 질렀다.“발목이 이렇게 부었잖아.”백누리는 성질이 올라 그대로 하이힐 한 짝을 툭 차서 멀리 보내 버렸다가, 임형섭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는 걸 보자마자 순식간에 기세가 죽었다. 백누리는 억울한 표정으로 하이힐을 다시 주워들었다.“저도 급해서 그래요. 하윤한테 화낸 거 아니라고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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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4화

하지만 임형섭이 준 생일 선물은 분명 민하윤 이름의 이니셜이 새겨진 팔찌였다. 임형섭이 직접 민하윤의 손목에 채워 줬다.그런데 팔찌는 어디로 간 걸까.민하윤은 마음이 걸렸다. 그날 밤을 있는 힘껏 더듬으며 조각난 기억 사이에서 단서라도 건져 올리려 했다.민하윤은 분명히 임형섭과 함께 권상미의 가게에 가서 만둣국을 먹었다. 민하윤은 매실주를 큰 항아리째 거의 혼자 비웠다.그 뒤부터는 또렷하게 기억에 남은 게 별로 없었다. 권상미가 담근 술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민하윤은 별장에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기억이 흐릿했다. 대충… 어렴풋이, 임형섭 씨가 데려다준 것 같기도 했다.‘선배도 술을 마셨나?’민하윤은 이마를 찌푸렸지만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심지어 그 말도 안 되게 엉망이었던 밤도 민하윤은 간신히 기억의 몇 조각만 붙잡을 수 있었다. 하도진의 침실에서 땀과 눈물을 잔뜩 흘렸었고, 하도진이 물을 먹여 줬고, 잠깐 정신이 든 것 같다가 다시 하도진의 욕실로 안겨 들어간 게 전부였다.그리고 욕실에서 민하윤은 완전히 술이 깼다.그 뒤로는 평생 잊을 수 없었다.희뿌연 수증기와 숨이 막힐 만큼 눅진한 공기, 숨을 쉬기조차 버거운데도 하도진은 배고픈 짐승처럼 끝까지 민하윤을 몰아붙였다.바깥에서는 바람이 삐걱삐걱 창을 긁었고 벚꽃이 우수수 떨어져 바닥을 덮었다.한밤을 통째로 넘기고, 물이 완전히 식을 때까지 민하윤의 손끝은 쭈글쭈글해졌다. 누가 물에서 건져 올린 건지도 흐릿한 채로 민하윤은 겨우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하도진의 방 침대는 흠뻑 젖어 있었다.욕실도 마찬가지였다. 새하얀 대리석 바닥에는 물 자국이 가득했고 욕조 안의 물은 출렁이며 가장자리로 넘쳐흘렀다.민하윤과 하도진은 온 하루 동안 몸을 섞었다. 하도진의 방에서 민하윤 방으로, 민하윤 방에서 또 황혼이 다가올 즈음, 하도진이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릴 때까지 함께 있었다.민하윤은 얼굴이 확 달아올라서 입술을 꾹 다물었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어떻게든 지워 보려 애썼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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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5화

하도진은 천천히 시선을 거뒀다.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얼굴이라 속을 도무지 읽을 수 없었다.고은율은 고개를 떨군 채, 눈치껏 하도진의 팔에서 손을 뗐다. 입가에는 씁쓸한 웃음이 걸렸다.“도진아,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잖아. 넌 나한테 뭐든 맞춰 줬고... 우리 사이가 너무 완벽해서 다들 부러워했어. 우리는 교복에서 웨딩드레스까지 갈 커플이라고, 명원시에서 한동안은 전설처럼 떠돌기도 했어.”‘정말 그랬었나?’너무 오래전의 일이었다. 어림잡아도 7~8년은 지난 것 같았다. 솔직히 하도진은 고은율과 어떻게 시작했는지조차 선명하지 않았다.하도진의 시선이 창밖으로 멀어졌다. 굳게 다듬어진 턱선 위로 미세하게 미간이 찌푸려졌고 생각은 열일곱, 열여덟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국제 고등학교 옥상.노을보다 더 붉게 달아오른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열여덟의 하도진은 집안 사람 몰래 담배를 배웠다. 매일 저녁, 옥상으로 올라가 혼자 있는 시간을 챙겼다. 짙푸른 하늘 끝에서 구름이 풀렸다가 모였다가를 반복했다. 하도진은 느릿하게 흐르는 구름을 보면서 담배를 피웠다.바람이 불어오자 고은율의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주름치마가 살짝 들렸다. 고은율은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얼굴로 손을 덜덜 떨며 분홍색 편지봉투를 내밀었다.“버려.”하도진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젊고 거침없던 시절, 하도진은 그냥 존재 자체가 소란 그 자체였다. 외모, 키, 집안... 어느 하나만 꺼내도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우월한 조건이었다.사방에서 쏟아지는 고백의 목소리는 4월에 만개한 벚꽃보다 더 많았다. 하도진의 책상은 초콜릿과 수제 쿠키로 가득했고 고은율의 가방에는 다른 여학생들이 부탁한 편지들이 매일 쌓였다.하도진은 그런 상황에 이미 익숙해졌다. 하지만 그는 의미 없는 일에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았다. 하도진은 청포도 향 민트사탕을 입에 넣더니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하도진은 고은율이 든 편지봉투를 한 번 흘끗 보기만 하고 하얀 연기 사이로 무심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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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6화

그 순간, 고은율의 목소리가 살짝 울먹였다. 고은율은 숨까지 가빠진 채, 고개를 끝까지 치켜들고 눈물을 삼켰다.“도진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 우리가...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넌 왜 바로 다른 사람이랑 결혼했어?”고은율이 조심스럽게 하도진의 손을 잡으려 했다.“도진아, 너... 민하윤을 사랑해? 난 정말 못 믿겠어. 우리 7년이 너랑 민하윤의 1년보다 가벼울 리가 없잖아?”하도진은 차갑게 손을 빼냈다. 터널 끝에서 강한 빛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차는 속도를 줄이며 터널을 빠져나갔고, 하도진은 고은율을 아예 보지도 않았다. 창밖만 바라볼 뿐, 고은율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의사가 민하윤의 발목을 조심스럽게 눌러 보았다. 민하윤은 얼굴이 창백해졌지만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아프세요?”민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의사는 CT와 MRI 필름을 임형섭에게 건네며 말했다.“골절은 없어요. 가벼운 염증으로 보이고요. 일단 요 며칠은 무리하지 말고 쉬세요. 당분간은 격한 활동을 피하고, 안정을 취하셔야 해요. 체온도 정상이라 발열은 없어요. 말씀하신 열 증상은 확인되지 않습니다.”임형섭은 짧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리고 민하윤 쪽으로 시선이 갔다. 민하윤 얼굴은 여전히 붉었다....백누리는 정형외과 진료실 밖에서 몸을 바짝 웅크리고 있었다. 마스크에 선글라스, 샤넬 숄까지 머리부터 반쯤 덮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벽에 붙어 있었다.익숙한 두 사람이 복도 끝에서 나타나자 백누리는 반사적으로 손을 흔들었다가 주변 눈치를 보더니 급히 뛰어갔다.“의사 선생님이 뭐래요? 왜 깁스도 안 한 거예요?”백누리는 민하윤의 발목을 보자마자 미간을 확 찌푸렸다.“발목 이렇게 부었는데...”임형섭은 민하윤을 부축해 차에 태우며 말했다.“가벼운 염증이래요. 며칠 휴식하면 된대요.”백누리는 차 안으로 쏙 들어가더니 장비처럼 걸친 것들을 우르르 벗어 던졌다. 선글라스를 빼자 또렷하고 화려한 얼굴이 드러났다. 백누리는 거울 보며 립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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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7화

백누리는 팔짱을 낀 채 창밖으로 시선을 박았다. 창밖의 건물은 백누리가 묵는 호텔이었다. 백누리는 표정이 차갑게 굳은 채, 입을 열었다.“임형섭 씨, 하윤이를 먼저 집에 데려다주기로 했잖아요.”임형섭은 대답 대신 담담하게 되물었다.“백누리 씨는 파파라치한테 다른 남자 차를 타고 숙소 들어가는 모습을 찍히고 싶은 건 가요?”사실 임형섭은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다. 백누리가 민하윤이 땅값이 비싼 르네 별장에 산다는 걸 알게 되면, 백누리의 성격상 끝까지 캐물을 게 뻔했다. 그러면 민하윤이 하도진과 결혼했다는 사실도 결국 숨길 수 없게 된다. 임형섭은 시선을 내리깔고 일부러 화제를 틀었다.백누리는 순간 말이 막혔지만 그대로 질 수는 없었다. 선글라스를 한 손으로 툭 내리더니 여우처럼 매끈한 눈매를 드러내며 말했다.“왜요? 저랑 엮이는 게 그렇게 무서워요? 괜찮아요. 저를 열받게 하지 말고 솔직히 말해. 제가 화가 나면 내일 연예 뉴스 1면은 이거로 갈지도 몰라요. 제목은 백누리, 정체불명의 남성과 호텔 출입...”“저는 우리 셋이 친한 줄 알았더니 결국 아니네요. 제가 괜히 낀 거죠.”백누리가 차 문 손잡이에 손을 얹는 순간, 임형섭이 낮게 불렀다.“잠깐만요.”임형섭이 조수석 쪽에 두었던 하이힐 한 켤레를 백누리에게 내밀자 백누리는 미간을 찌푸렸다.“이건 또 뭐예요?”“하윤이가 발목 삐었잖아요. 백누리 씨는 운동화니까... 하윤이랑 신발 바꿔 신어줄 수 있어요?”임형섭의 말투는 공손했지만 요구는 딱 잘랐다.백누리는 속이 뒤집혔지만 결국 자기 신발을 벗고 민하윤이 신었던 하이힐에 발을 욱여넣었다. 마지막까지 자존심은 지키겠다는 듯 선글라스를 다시 올려 쓰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차에서 내려버렸다.민하윤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민하윤의 눈빛에는 임형섭을 향한 작지만 분명한 책망이 담겨 있었다. 민하윤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사실... 일부러 숨길 필요 없어요. 저도... 도진 씨랑 관계를 다시 정의해야 할 것 같아요.]‘관계를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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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8화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민하윤은 표정을 바꿨다. 민하윤은 억지로 하도진의 품에서 벗어났고 얼굴에 옅은 분노를 띠었다.그러자 하도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입에서 나온 말은 유난히 듣기 싫었다.“재밌어? 남자 둘 사이에서 왔다가 갔다가 하면서... 그런 과정이 그렇게 즐거워?”민하윤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말하기 힘든 감정이 차올랐다. 실망인지, 아니면 이미 무감각해진 건지는 민하윤도 잘 몰랐다.이런 불평등한 관계에서 민하윤이 얻은 게 대체 뭐가 있겠는가. 하도진은 늘 가장 못 된 말, 가장 아픈 말부터 내뱉었다.하도진이 던지는 질문은 사실 민하윤이 마음속에 오래 묻어 둔, 끝내 꺼내지 못한 질문이기도 했다.‘도진 씨는 어때요? 이 결혼을 계속 이어 갈 이유가 있어요? 우리 관계에서 감정이라는 게 존재하긴 해요? 도진 씨도 두 여자 사이를 오가고 있잖아요. 한쪽에는 7년을 사랑한 전 연인이 있고, 서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7년을 차지했잖아요. 다른 한쪽에는 또 도진 씨가 사랑하지 않는 제가 있고...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왜 저에게서 사랑을 받아내려 하는 건데요?’민하윤은 차갑게 하도진을 바라봤다. 하지만 차마 그런 말들을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말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대체 무슨 변명이 가능하겠는가.하도진은 손을 뻗어 민하윤의 턱을 들어 올렸고 눈가에 옅은 물기가 어렸다.“민하윤, 이제는 수어도 하기 싫어진 거야?”하지만 대답 대신 두 사람 사이에는 쥐 죽은 듯한 침묵만 남았다.어두운 조명 아래서 수없이 봐 온 얼굴이었다. 그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도 하도진은 본 적이 있었다..그런데도 이상하게 지금의 민하윤은 낯설고 멀게만 느껴졌다.두 사람은 서로 잠자리도 가졌고, 뜨거운 밤도 함께 보냈는데 정작 하도진은 민하윤의 마음에 한 번도 발을 들여놓지 못한 기분이었다.민하윤의 마음에는 항상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하도진이 아무리 부르고 아무리 두드려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하도진은 숨을 고르며 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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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9화

민하윤은 차갑게 얼굴을 굳힌 채, 하도진을 거칠게 밀쳐 냈다. 민하윤의 표정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손을 치켜들더니 망설임 없이 하도진의 뺨을 후려쳤다.하도진은 고개를 비스듬히 돌린 채 멈춰 섰고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입안으로 피 비린내가 번졌다. 하도진은 혀로 입꼬리를 눌러 보더니, 핏기 섞인 침을 한 번 뱉어냈다.민하윤을 올려다보던 하도진은 전혀 감정이 읽히지 않는 얼굴로 낮게 물었다.“왜? 찔렸어? 내가 맞는 말을 하니까... 열받은 거야?”하도진은 민하윤의 손목을 움켜쥐고 앞으로 끌었다.발목에서 송곳처럼 날카로운 통증이 치고 올라왔다. 민하윤은 숨을 들이켜며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민하윤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자신이 더 서러웠다.민하윤의 이상한 기색을 알아챈 하도진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부어오른 발목을 확인한 순간, 굳어 있던 미간이 조금 느슨해졌다. 하도진은 말없이 민하윤을 번쩍 안아 올렸다.민하윤은 이를 악물고, 하도진의 품에 그대로 몸을 맡겼다.하도진의 뺨 한쪽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도진은 발로 침실 문을 툭 차 열더니, 민하윤을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아니, 거의 던지듯 올려놓았다.민하윤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때 시선이 침대 끝 러그 위로 향했다. 포장까지 번듯한 쇼핑백과 선물 상자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하도진도 민하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하도진이 그중 하나를 대충 집어 들고, 민하윤 앞에서 가방을 열어 내용물을 꺼냈다.하도진의 손끝에 걸린 건 선명한 붉은색의 얇은 천 조각이었다. 하도진의 시선이 민하윤에게 느리게 내려앉았다. 하도진은 목울대가 한 번 꿀렁이더니 입을 열었다.“이걸로 갈아입어.”하도진은 얇은 천쪼각을 민하윤의 발치로 툭 던졌다.얼굴이 확 달아오른 민하윤은 이를 꽉 깨물고 시선을 돌렸다. 그건 대답조차 없는 거절이었고, 민하윤이 늘 써오던 방식이었다.하도진은 참을 만큼 참았다는 듯 숨을 낮게 내쉬었다. 하도진이 다시 한번 아까와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번에 하도진의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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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0화

하도진은 여자의 표정과 반응을 읽는 데 능했다.민하윤에 대해서는 거의 속속들이 꿰고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민하윤은 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한 채, 눈만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눈물과 땀이 뒤섞여 민하윤의 두 볼을 타고 흘렀다.“하윤아....”“민하윤...”“하윤아...”하도진은 숨을 삼키듯 짧게 신음하며 흐트러진 숨결 사이로 민하윤의 이름을 집요하게 불렀다.“민하윤...”다급하게 잡아당기는 힘과 함께 속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방 안을 갈랐다.민하윤은 구석에 길게 찢겨 떨어진 붉은 천 조각을 힐끗 봤다.‘직접 입혀 놓고, 또 찢어 버릴 거면... 처음부터 왜 나한테 입힌 걸까?’어느새 밖은 완전히 어두워지고 있었다.멀리 보이는 도심의 빌딩들이 하나둘 불을 밝혔고, 겹겹이 포개진 불빛이 커다란 통유리 창에 번져 비쳤다.민하윤은 침대에 누운 채, 아랫배 쪽이 묵직하게 욱신거리는 통증을 억지로 참았다.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를 들으며 팔이 저릴 만큼 당기는 통증을 견디다가 이불을 끌어 올려 몸을 덮었다.땀에 젖을 만큼 지친 뒤에도 이상하게 잠은 오지 않았다.침대 끝에는 선물 주머니들이 수두룩했다.민하윤은 굳이 열어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하도진은 이미 마음을 정한 사람처럼 보였고 민하윤과의 관계를 오래 끌고 가겠다는 듯했다.민하윤이 손등으로 눈을 가리자 마음이 무뎌지는 느낌이 들었다.‘이 관계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두 사람은 법적으로는 부부지만 현실은 단지 서로가 필요한 게 있다는 핑계로 버티는 관계였다.겉만 번지르르한 하도진의 아내라는 자리였다.결국 민하윤은 누군가의 욕구와 기분에 맞춰 움직이는 사람일 뿐이었다.하도진이 내뱉었던 말이 하필이면 민하윤의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민하윤, 어차피 나도 착한 척할 필요 없어. 우리는 서로 필요한 게 있으니까 여기까지 온 거잖아.”욕실 물소리가 잦아들자, 문이 열리더니 하도진이 나왔다.뒤로 하얀 김이 밀려 나왔고 물기 어린 숨결이 아직도 몸에 남아 있는 듯했다.“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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