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시윤은 서지혁의 말에 흠칫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사실 그 사람 사과가 그렇게 필요하지는 않은데.”입만 열면 나오는 형식적인 사과 따위는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는다.그럴 바에는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나을 듯했다.게다가 막상 사과를 받으면 또 괜찮다는 말까지 해야 하니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하시윤은 곁에 앉은 서정우를 바라봤다.“그래도 정우한테는 제대로 이야기해 줬으면 좋겠어.”그날 정경란의 말투는 꽤 날이 서 있었던 것 같다.아이는 어른들의 미묘한 속내를 다 헤아리진 못해도 말 속에 담긴 감정만큼은 금세 느끼는 법이니까.그날 이후 정우는 여러 번 물었었다. 왜 그날 외할머니가 그렇게 화내셨냐고 말이다.그런 정경란 때문에 정우는 많이 겁이 났던 모양이다.정경란이 자신을 싫어하는 건 알겠지만 하시윤은 그 감정을 아이에게까지 끌어다 쓰는 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했다.그때 서지혁이 조용히 말했다.“너는 신경 안 쓸지 몰라도, 난 신경 쓰여. 그 사람, 너에게도 분명 사과해야 해.”하시윤은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그래, 뭐. 나한테 사과하는 게 자존심 상하긴 하겠지. 그런 굴욕 한 번쯤은 겪어도 나쁘진 않겠네.”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그런데, 지혁 씨. 그렇게 하면 그 사람 기분 상할 텐데 괜찮아? 눈치 안 보여?”“그 여자가 먼저 시비를 걸었잖아.”서지혁이 태연히 대답했다.“내가 왜 눈치를 봐야 하는데?”하시윤은 의자에 앉고는 편하게 등을 기대었다.“사실 조금 궁금했어.”그녀는 서지혁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4년 전에 심연정 씨를 좋아한 건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싫어하지는 않았잖아.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 혹시 중간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일이야 많지.”서지혁이 말했다.“그런데 그걸 다 말하긴 좀 그렇다.”서지혁은 말을 아끼는 태도였다.하시윤도 그 뜻을 눈치채고 더는 캐묻지 않았다.잠시 후, 복도 쪽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서인준이 문 앞에 나타났다.그는 방 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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