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애걸복걸! 도련님의 고백: Chapter 361 - Chapter 370

565 Chapters

제361화 자극

최씨 가문 남매가 떠난 뒤에도 하시윤의 머릿속에는 그 마지막 말이 마치 잔상처럼 남았다.사실 그녀와 서지혁이 지나온 그 험난한 세월을 생각하면 이제는 누가 누구에게 상처를 주고 말고 할 단계를 이미 지났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그런 단순한 잣대로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고 복잡하게 얽혀 있었으니까.하지만 타인의 입에서 나온 그 순수한 걱정은 굳어있던 그녀의 마음을 속절없이 녹여버렸다. 그 온기가 가슴 한구석을 다정하게 파고들었다.병실에 잠시 머물던 하시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정우를 보러 갔다.아이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고 곁을 지키던 가정부는 그녀를 보자 얼른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하시윤 씨, 오셨어요?”하시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정우가 꽤 오래 자네요?”가정부가 대답했다.“든든히 먹여서 그런지 평소보다 좀 더 깊게 자는 것 같아요.”다행히 지금은 고통스러운 증상이 없었다. 발작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평범한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아이를 지켜보던 가정부가 덧붙였다.“조금 전에 심연정 씨가 다녀갔어요.”심연정.예상치 못한 이름은 아니었기에 하시윤은 그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가정부가 말을 이었다.“정우가 한창 자고 있을 때라 옆에서 잠시 머물다 가셨어요.”심연정이라는 인물이 딱히 곱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가정부의 어조에는 묘한 감회가 섞여 있었다.“정우 선물도 사 오셨더라고요.”가정부가 옆에 놓인 물건을 가리켰다. 아이가 며칠 전부터 갖고 싶다며 입에 달고 살던 장난감이었다. 그걸 심연정이 사 올 줄은 몰랐다.하시윤은 한숨을 내쉬며 그것을 집어 들었다. 꽤 커다란 인형이었는데 이번에는 저번처럼 흉측하지 않고 제법 귀여운 모양새였다.“심연정 씨가 참 많이 변했어요.”곁에서 지켜본 가정부가 느끼는 온도 차는 확실했다. 예전에 본가로 서정우를 보러 왔을 때의 심연정은 늘 건성으로 아이의 안부를 묻곤 했다. 사람을 대할 때도 특유의 오만함이 깔려 있었고 시선 역시 늘 차가웠다.하지만 오늘은 달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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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2화 잠 못 이루는 밤

서지혁은 고개를 끄덕여 알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려 연씨 가문과의 협력 건을 꺼냈다.연상훈이 드디어 태도를 누그러뜨렸으나 협력 프로젝트의 책임자는 다른 사람으로 교체된 상태였다. 연재윤이 다리를 놓아 이 일이 성사된 거지만 정작 그는 판에서 밀려나 버렸다.서경민 역시 이 사정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담담하게 대답했다.“연재윤이 워낙 제멋대로라지. 연상훈이 워낙 보수적인 사람이라 부자 사이가 통 안 맞는 모양이야. 아비 입장에서 버릇 좀 고쳐주겠다고 잠시 내친 모양인데 어쨌든 자식이라고 제 자리에 앉힌 걸 보면 기대를 걸긴 하겠지. 그러니 아주 포기하진 않을 거야.”하지만 서지혁의 생각은 달랐다.“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닙니다.”그가 말을 이었다.“새로 협력 프로젝트를 맡은 연성 그룹 쪽 담당자가 문제예요. 제가 알기로 그 친구, 결코 깨끗한 사람이 아니거든요.”서지혁은 소파에 몸을 기대며 하시윤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녀의 약지 끝에 걸린 반지를 부드럽게 매만지는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도 느릿했다.“연재윤이 연성 그룹에서 어떤 대접을 받든 저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제가 신경 쓰는 건 프로젝트 자체예요. 파트너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언제 뒤탈이 생길지 모른다니까요.”“오호, 그래?”서경민은 그 사실까지는 몰랐던 모양이었다.“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지?”그가 덧붙였다.“내 알기로 그 담당자는 연성 그룹에서 꽤 오래 일한 인재야. 정말 문제가 있다면 그쪽에서 진작 눈치를 챘겠지.”“얼마 전 연성 그룹 프로젝트팀에서 직원 하나를 잘랐는데 그게 좀 이상하더라고요. 평범한 직원이 혼자서 그 거액의 자금을 횡령하고 데이터까지 조작하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뒤를 봐주는 윗선이 있다는 소리죠.”거기까지 말한 서지혁이 말을 멈췄다.“뭐, 우리랑 아주 깊이 얽힌 일은 아니니 상관없습니다. 아빠만 괜찮으시다면 계속 진행하시죠. 다만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저한테 책임을 묻지만 마십시오.”서경민이 별일 아니라는 듯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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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3화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다

서지혁은 오늘 회사를 가지 않고, 대신 서정우의 주치의를 찾아갔다.검사 결과가 모두 나왔는데 이식 수술에 들어가기에 앞서 항암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었다.서지혁은 최종적으로 확정된 치료 계획을 확인하기 위해 의사를 찾아가기로 했다.하시윤은 당연히 그 길에 동행하고 싶었다. 하지만 병실 문턱까지 서지혁을 따라나섰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서정우는 가정부의 품에 안겨 있었는데 상태가 많이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작고 가녀린 모습이었다.어른들이 자신의 병에 대해 의논하러 간다는 걸 눈치챘는지 서정우는 입술을 꾹 다문 채 겁에 질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하시윤은 마음이 약해져 발길을 돌렸다.“지혁 씨 혼자 다녀와. 어차피 의사 선생님이 하는 전문적인 얘기는 내가 들어도 잘 모르잖아. 지혁 씨가 알아서 잘 듣고 오고 난 여기서 정우랑 같이 있을게.”서지혁도 고개를 돌려 아이를 보더니 짧게 대답했다.“그래, 그러자.”하시윤은 만삭의 몸이라 아이를 안아줄 수 없었다. 그래서 가정부에게 아이를 침대에 눕히게 한 뒤, 곁에 앉아 녀석을 품에 끌어안았다.서정우는 그녀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뺨을 맞대더니 작고 가냘픈 목소리로 말했다.“엄마, 저 이제 주사 맞아야 해요?”하시윤이 아이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이번에 주사만 잘 맞으면 몸속에 있는 나쁜 병균들이 거의 다 사라질 거야. 그다음에는 아주 작은 수술 하나만 하면 돼. 우리 정우 몸에 몰래 들어온 괴물을 싹 쫓아버리는 거지. 그럼 이제 우리 정우도 건강한 어린이가 될 수 있어.”“정말 나을 수 있어요?”서정우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그럼 저도 다른 친구들이랑 똑같아지는 거죠?”아이가 덧붙였다.“예전에 할머니도 주사 다 맞으면 나을 거라고 그러셨는데...”뒷말은 잇지 않았지만 하시윤은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동안 병이 낫기는커녕 지루하게 이어지며 아이를 괴롭혀왔기 때문이다.하시윤은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엄마는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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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4화 어디 얼마나 버티나 보자고

조경순의 이야기가 나오자 서지혁의 말투에도 장난기 어린 웃음이 섞였다.“그 사람도 하병우 씨랑 마찬가지야. 요즘 아주 살맛 나게 지내고 계시더라고.”조경순이 하병우에게 품었던 감정이 한때나마 진심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명확한 사실은 새로 나타난 젊은 남자가 하병우에게 입은 해묵은 상처 따위는 깨끗이 잊게 할 만큼 압도적인 자극이었다는 점이다.아마 조경순 스스로도 깨달았을 것이다. 하병우의 그 못된 버릇을 고쳐서 억지로 재결합해 봐야 이미 엎질러진 물이며 예전처럼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말이다.게다가 하병우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인간이라 평생 의심하고 감시하며 사느니 차라리 각자 갈 길 가는 게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녀에게는 하민지가 있으니 앞날이 크게 걱정될 것도 없었다.생각을 고쳐먹자마자 그녀의 상태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얼굴의 상처는 화장으로 가려질 만큼 회복되었고 머리도 새로 하고 염색까지 마쳤다. 옷차림 역시 훨씬 젊고 세련된 스타일로 바뀌었다.딸인 하민지와 같이 살다 보니 연하남을 집에 들이기는 껄끄러웠던지 밖으로 집을 따로 한 채 얻어주기까지 했다.이제 연하남은 더 이상 단순한 소년이 아니었다. 조경순에게 있어서만큼은 제법 구실을 갖춘 남자가 된 그는 찻집 일까지 그만두고 오로지 그녀를 보필하는 데만 전념했다.그 남자는 나이가 어려도 생각보다 영악했고 계산기 두드리는 속도도 빨랐다. 조경순에게 기생하며 산다는 사실에 대해 처음에는 꽤나 거부감을 드러내며 자존심을 세우기도 했다. 사지 육신 멀쩡한데 왜 남의 돈을 쓰냐며, 찻집 일이 마음에 안 들면 좀 더 번듯한 직장을 구해보겠다고 큰소리를 쳤다.실제로 그는 새 직장을 찾아 나섰고 하루는 조경순이 퇴근 시간에 맞춰 그를 데리러 간 적이 있었다.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차를 세워두고 기다리던 찰나, 조경순의 눈에 그 남자가 동료 여직원과 함께 밖으로 나오는 모습이 들어왔다.두 사람이 대놓고 웃고 떠드는 건 아니었지만 분위기만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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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5화 서지혁 씨가 부럽습니다

서인준은 서지혁의 말을 도통 알아듣지 못했다.“무슨 소리야? 누가 누구한테 인상이 좋다는 건데?”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되물었다.“설마 형수님?”서지혁이 신경 쓸 만한 여자라면 하시윤밖에 떠오르지 않았다.“형수님이랑 최승우 씨랑 진짜 아는 사이야?”“아니.”서지혁이 대답했다.“전혀 몰라.”그는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더니 말을 돌렸다.“쓸데없는 생각 마. 그냥 물어본 거니까.”그러고는 연재윤이 두고 간 서류 뭉치를 집어 들었다.“아빠 일은 네가 신경 쓸 거 없어. 나도 안 쓸 거고. 지난 수십 년간 늘 그래오지 않았냐. 무슨 일이 생기든 그 양반은 스스로 해결할 사람이야. 우리가 자식 노릇 하며 걱정할 필요 없다는 뜻이지.”“그건 그렇지.”서인준이 수긍하면서도 묘한 감회를 내비쳤다.“그런데 형도 느끼지 않아? 예전에는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최근 1년 사이에 아빠 주변에 일이 너무 많아진 것 같아.”“못 느끼겠는데.”서지혁이 무심하게 말을 잘랐다.“그 양반은 원래 일이 많았어. 늘 이랬다고.”서인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번에는 성문영의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고 했다. 워낙 갑작스럽게 떠나는 바람에 미처 인수인계하지 못한 업무들이 남았으니 대신 좀 처리해달라는 부탁이었다.“주변이 꽤 시끄럽더라고. 누가 옆에서 울고 있던데 누군지는 모르겠어. 누구한테 단단히 찍힌 모양인데 일이 좀 복잡하게 꼬인 것 같았어.”서지혁은 침묵을 지켰다.서인준은 형의 눈치를 살피며 씁쓸하게 덧붙였다.“알아. 엄마 일도 우리가 나설 문제 아니라는 거.”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어. 엄마가 밉다가도 또 가엽기도 하고.”서경민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기에 지난 세월 성문영이 겪었을 억압과 울화가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갔다. 차라리 심태진이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그는 어머니의 이혼을 전적으로 지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필 상대가 남도 아닌 심태진이라는 점이 문제였다.“미워하려니 끝까지 미워지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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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6화 부작용

서정우의 항암 치료가 시작되었다.지난 1년간 몸 관리를 잘해온 덕에 병세가 안정적이었고 투여되는 약물 또한 최대한 보수적으로 처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암제의 부작용은 가혹했다.치료 이틀째에 접어들자 서정우는 어지럼증과 구역질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온몸에 기운이 빠진 아이는 가슴이 답답한 듯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평소라면 매일같이 나가 놀고 싶다며 보챘을 아이였지만 치료가 시작되자마자 그런 의욕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하지만 기특하게도 서정우는 아무리 괴로워도 울거나 떼를 쓰지 않았다. 그저 침대에 누워 시든 꽃처럼 힘없이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하시윤은 그 모습을 보며 가슴이 미어져 눈물을 쏟았다. 이 어린것이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험난한 길을 걸어왔는지 잘 알고 있었다.서지혁이 지나가듯 건넸던 짧은 이야기들로 그간의 고생을 대략 짐작은 했었지만 직접 눈앞에서 마주하니 자신이 했던 생각들이 얼마나 얄팍하고 단편적이었는지 뼈저리게 느껴졌다.나름대로 조심스럽게 진행하는 치료조차 아이의 작은 몸을 이토록 망가뜨리는데 예전에 거쳤던 혹독한 치료들은 오죽했을까. 차마 상상조차 하기 싫은 고통이었다.다음 날 오전, 최예원이 간식과 장난감을 잔뜩 사 들고 병원을 찾아왔다.얼마 전 서정우와 마주쳤을 때만 해도 아이는 마스크를 쓰고 안색이 조금 좋지 않았을 뿐, 기력은 넘쳐 보였다. 그래서 최예원은 병실 문을 열 때만 해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안녕, 우리 꼬마 정우!”하지만 침대에 누워 있는 서정우를 본 순간, 그녀의 미소는 서서히 굳어버렸다. 당혹감과 함께 왈칵 솟구치는 안쓰러움이 그녀의 얼굴을 덮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허리를 숙였다.“정우야, 이모 기억하니?”서정우는 한참 동안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목소리는 심하게 쉬어 있었는데 목구멍이 너무 아파 말을 내뱉는 것조차 버거워 보였다.“기억나요.”최예원이 고개를 끄덕였다.“이모가 정우 응원하러 왔어. 우리 링거 다 맞고 수술 한 번만 딱 하면 이제 다 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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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7화 내 눈에는 안 차서

산소 공급이 끝나고 간호사가 다시 한번 태아 심음을 측정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모든 수치가 정상이었다.간호사는 하시윤의 붉어진 눈시울을 보고 그 이유를 짐작한 듯 위로를 건넸다.“사실 기뻐해야 할 일이에요. 정우 군과 같은 병을 앓는 환자들 중에 이 단계까지 오고 싶어도 못 오는 경우가 태반이거든요. 이제 거의 다 성공하신 거예요. 이건 정말 축하할 일이죠.”하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닦아냈다.“네, 알겠어요.”간호사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머지않아 정우 군 수술도 성공할 거고 곧 아이도 태어날 거잖아요. 겹경사죠, 겹경사.”그녀가 덧붙였다.“멀리 앞날만 바라보세요. 울지 마시고요.”간호사가 나가자 서지혁이 침대 곁에 앉아 하시윤을 품에 안았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이마에 닿았고 이내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시윤아, 네가 잘 버텨줘야 해.”하시윤은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품속으로 파고들었다.“응, 그럴게.”얼마 지나지 않아 본가에서 정성껏 준비한 식사가 도착했다. 서지혁은 식탁을 정갈하게 차리며 그녀를 챙겼다.“먼저 밥부터 먹자. 먹어야 버틸 힘도 생기지.”하시윤은 무거운 배를 받치고 자리에 앉았다. 사실 목구멍으로 음식이 넘어갈 리 없었지만 뱃속의 아이를 생각하며 억지로 한술씩 떠 넣었다.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흐르던 중, 서지혁의 휴대폰이 짧게 두 번 진동했다. 메시지 알림음이었다.서지혁은 힐끗 확인만 할 뿐 답장을 하지 않고 묵묵히 식사를 이어갔다.하시윤은 더는 남의 일에 참견할 기운조차 없었다. 더 이상 밥을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할 지경이 되자 그녀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지혁 씨, 나 좀 피곤해. 잠깐 누울래.”밥을 절반 정도 비웠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서지혁은 알았다며 남은 음식을 비우고 조용히 뒷정리를 마쳤다.그는 침대로 올라와 하시윤을 뒤에서 안아주었다.“잠깐 눈 좀 붙여. 마음 편하게 먹고.”하시윤은 눈을 감고 몸을 돌려 누웠다. 잠이 들긴 했지만 깊지 않았다. 서지혁이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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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8화 설계된 사고

저녁 무렵, 퇴근한 서지혁이 병원을 찾았다. 서정우는 깨어 있었지만 안색은 여전히 파리했다.서지혁은 아이를 달래보려 장난감 몇 개를 사 왔지만 기운이 하나도 없는 아이는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침대 머리에 힘없이 기대어 있던 아이는 갑자기 몸을 수그리더니 쓰레기통을 붙잡고 구역질을 시작했다.먹은 게 없어 나올 것도 없었다. 아이는 뱃속의 생수만 연신 게워 냈다.서지혁은 다급히 다가가 아이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주고 물로 입안을 헹구게 한 뒤, 젖은 수건으로 입가를 닦아주었다. 능숙한 손길에서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음이 묻어났다.조금 진정이 된 서정우가 쉰 목소리로 아빠를 불렀다.“아빠...”서지혁은 평소 아이를 재울 때처럼 녀석을 품에 안았다. 아이를 제 어깨에 기대게 하고는 가볍게 등을 토닥이며 병실 안을 천천히 거닐었다.그제야 조금 편안해졌는지 서정우는 눈을 감고 아빠의 어깨를 베개 삼아 고른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옆에서 지켜보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물었다.“힘드실 텐데 제가 교대해 드릴까요?”“아니요.”서지혁이 짧게 답했다.“괜찮습니다.”소파에 앉아 있던 하시윤의 곁으로 다가와 앉으며 그가 나직이 덧붙였다.“내 자식 안고 있는 건데 힘들 게 뭐 있어요.”하시윤은 그의 팔 위에 손을 얹고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어떤 말도 필요 없는 위로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한효진이 다시 병실을 찾았다. 잠든 서정우를 확인한 그녀는 짧게 몇 마디를 묻더니 서지혁을 따로 불러냈다.“너 잠깐 나와 봐. 물어볼 게 있다.”서지혁은 아이를 조심스레 눕혀두고 밖으로 나갔다.하시윤도 잠시 뒤 몸을 일으켜 문가로 다가갔다. 하지만 문밖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문을 살짝 열어보니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아마 한효진의 병실로 자리를 옮긴 모양이었다.한효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던 터라 하시윤은 또 무슨 일이 터졌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 일은 분명 서경민과 관련이 있을 터였다. 한효진이 그토록 예민하게 구는 대상은 오직 그 종잡을 수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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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9화 대치

서지혁은 머리가 깨질 듯 울려대는 통에 곧바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운전대에 엎드린 채 한참 동안 숨을 골랐다.온몸에 유리 파편이 박혀 있었지만 잠시 후 그는 몸을 가볍게 털어내며 팔다리를 살폈다. 다행히 참기 힘든 통증은 없었고 움직이는 데도 지장이 없었다. 어딘가 다쳤을지는 몰라도 거동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다.그는 안전벨트를 풀었다. 운전석 쪽 문은 처참하게 일그러져 열리지 않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몸을 빼내 운전석을 벗어나 조수석 쪽으로 옮겨갔다. 조수석 문 역시 변형되어 있었지만 온 힘을 다해 밀어붙이자 가까스로 열렸다.차에서 내린 서지혁은 옆에 있는 가드레일을 붙잡고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을 들이받은 차량이었다.차 머리가 가드레일을 들이받아 차체의 절반이 도로 밖으로 튀어 나가 있었다. 서지혁의 차만큼 파손이 심하지는 않았지만 운전석의 남자는 시트와 에어백 사이에 끼어 미동조차 없었다.서지혁은 그를 구하러 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누가 봐도 고의적인 사고였으니까.그는 가드레일에 등을 기대고 깊은 숨을 몰아쉬며 바닥으로 주저앉으려는 몸을 억지로 버텨냈다.인적이 드문 곳이라 이런 대형 사고가 났음에도 멈춰 서서 살피는 이 하나 없었다.그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려다 말고 시선을 들었다. 조금 전 차가 튀어나왔던 갈림길에 또 다른 차 한 대가 멈춰 서 있었다. 길가의 가로등이 뿜어내는 누런 불빛 아래로 차의 윤곽만이 흐릿하게 보였다.시동이 꺼진 채 검게 가라앉은 차량 내부의 상황은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자신의 시선을 의식한 것인지 30초쯤 지났을까, 멈춰 있던 차가 돌연 시동을 걸었다. 하향등이 켜졌지만 차는 움직이지 않았고 이내 실내등이 환하게 밝혀졌다.거리가 꽤 있었음에도 서지혁은 똑똑히 보았다. 운전석에는 낯선 남자가 앉아 있었고 조수석에 앉은 인물은 그가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서경민.그의 아버지였다.그는 평온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조수석에 앉아 아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부자는 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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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0화 가면

“뭐라고요?”서지혁이 되물었다.서경민은 아들을 돌아보며 미간을 찌푸리더니 돌연 말을 바꿨다.“얼굴을 다친 거야?”그리고 덧붙여 물었다.“다른 데는 다친 곳 없고?”서지혁은 웃는 건지 마는 건지 알 수 없는 미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운이 좋아서 다른 데는 멀쩡해요.”서경민의 시선이 아들의 얼굴에 몇 초간 머물렀다.그 짧은 찰나, 그의 머릿속에서는 수만 가지 계산이 오가는 게 분명했다.결국 서경민은 다시 한번 본론을 꺼냈다.“교외 창고, 네가 신고한 거냐고 물었다.”“그 창고가 아빠 거였어요?”서지혁이 되물었다.서경민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그 창고를 샅샅이 뒤진다고 해도 그와 연결될 고리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이런 폭탄이 터질 만한 일에는 늘 퇴로를 만들어두는 사람이니까. 어떤 식으로 조사가 진행되든 자신에게 불똥이 튀지 않게 철저히 손을 써뒀을 게 뻔했다.그는 대답 대신 거듭 추궁했다.“네가 신고했냐는 물음에나 답해.”서지혁이 아버지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아니요.”사실 그가 직접 한 일은 아니었다. 타인의 손을 빌렸을 뿐이니 거짓말은 아니었다.서경민은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그럼 아까 거긴 왜 가고 있었던 거지?”서지혁은 말없이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보여주었다. 화면에는 김성빈과 나눈 메시지 내용이 띄워져 있었다.김성빈은 하시윤이 예전에 입었던 드레스를 세탁해 둔 지가 한참 됐다며, 얼른 가져가지 않으면 다른 사람 옷이랑 섞일 수도 있으니 빨리 찾아가라고 재촉하고 있었다.이런 메시지가 몇 달 전부터 여러 통 와 있었고 가장 최근 메시지는 오늘 오후였다.지금 당장 안 찾아가면 이후 발생하는 문제는 책임지지 않겠다는 김성빈의 엄포에 서지혁은 오늘 밤에 가겠다고 답장을 해둔 상태였다.그리고 조금 전, 김성빈은 왜 아직도 안 오느냐며 다시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는 서지혁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전혀 모르는 듯했다.서경민은 그제야 김성빈의 한옥이 창고가 있는 방향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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