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애걸복걸! 도련님의 고백: Chapter 411 - Chapter 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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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1화 참 아쉽네

서인준은 본채 안으로 들어가 느릿느릿 계단을 올랐다.막 2층 복도에 발을 들이려는데 마침 침실에서 나오던 성문영과 정면으로 마주쳤다.성문영은 화려하게 치장한 상태였다. 얼굴에는 방금 공들여 마친 화장이 역력했고 입고 있는 옷 또한 낮에 본 것과는 달랐다.아들이 이 시간에 돌아올 줄은 몰랐던 모양인지 성문영은 당황한 기색으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서인준은 어머니를 쓱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상황을 단번에 파악했다. 이 늦은 시간에 나간다는 건 보나 마나 심태진을 만나러 가는 길일 터였다.그는 굳이 아는 척하지 않고 몸을 돌려 제 방으로 들어갔다.성문영은 민망함에 얼굴을 붉히며 잠시 머뭇거리더니 결국 아들의 방 문을 두드렸다.서인준은 침대에 잠옷을 던져두며 대꾸했다.“들어오세요.”성문영은 문을 밀어 열었지만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저 문가에 서서 아들에게 물었다.“형네 집에 간다더니 어째 이렇게 일찍 돌아왔어?”그러고는 묻지도 않은 말을 덧붙이며 변명을 늘어놓았다.“집에 아무도 없으니 너무 적적해서 바람이나 좀 쐬러 나가려던 참이었어.”누가 들어도 빤한 거짓말이었고 본인도 민망한지 말끝을 흐렸다.서인준은 굳이 그 속이 훤히 보이는 거짓말을 들춰내지 않았다.“형네 집에서 저녁 먹고 딱히 할 일이 없어서 왔어요.”성문영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렇구나.”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말을 붙였다.“시내에 좀 나갔다가 올 생각인데 먹고 싶은 거나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올 때 사다 줄게.”“됐어요.”서인준이 무심하게 답했다.“그냥 즐겁게 놀다 오세요.”아들의 뼈 있는 말에 성문영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몇 번인가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는 결국 짧은 인사만 남기고 돌아섰다.“그럼... 나 먼저 가 볼게.”문이 닫히고 나서야 서인준은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씻고 나와 창가에서 담배 한 대를 태우고 있자니 저 멀리 복도 끝에서 서경민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서경민이 거실 앞 공터에 이르렀을 때 고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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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2화 죽음

하시윤은 밤새 뜬눈으로 지새웠다. 잠이 든 것도, 그렇다고 완전히 깬 것도 아닌 혼탁한 의식 속에서 한참을 뒤척였다.아침이 밝자마자 아이가 몸을 뒤척이며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하시윤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서지혁 역시 기민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는 하시윤보다 한발 앞서 침대 밖으로 나가 분유를 탔고, 그 와중에도 아이를 능숙하게 토닥이며 달래주었다.하시윤은 옆으로 누운 채 서지혁의 바쁜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서툰 듯하면서도 거침없는 그 움직임에 하시윤이 입을 열었다.“아주머니들 깨셨을 텐데 들어오시라고 할까?”“됐어.”서지혁이 무심하게 대답했다.“이 정도쯤이야 나 혼자서도 충분해.”분유가 준비되자 그는 아이에게 젖병을 물리는 동시에 기저귀까지 확인했다. 한 손으로 아이를 다독이며 다른 한 손으로 뒷수습까지 마치는 모습이 꽤 그럴싸했다.하시윤은 잠시 더 누워 있다가 몸을 일으켜 씻고 나왔다.“병원에는 언제 갈 거야? 나도 같이 가려고.”하시윤은 서정우를 돌보던 조인경 생각에 말을 덧붙였다.“인경 아주머니도 같이 가기로 했어. 정우 걱정에 밤잠도 설치시는 분이라 가능하다면 얼굴이라도 보여드리고 싶어서.”서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자.”그가 시계를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병원 소식을 좀 기다려 보자. 별일 없으면 오전 중에 연락이 올 거야.”얼마 지나지 않아 배를 든든히 채운 아이가 침대 안에서 발길질하며 옹알이를 시작했다.서지혁과 하시윤은 서둘러 아침 식사를 마치고 대기하던 중, 마침내 병원에서 걸려 온 연락을 받았다.서시은 역시 외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겉싸개에 꽁꽁 싸인 채 가정부의 품에 안긴 아이는 한효진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할 채비를 끝냈다. 서정우뿐만 아니라 이 집안의 새로운 핏줄인 증손녀 또한 마지막 인사는 올려야 했으니까.병원에 도착하니 중환자실 앞에는 서경민과 성문영, 그리고 서인준이 도착해 있었다.미리 손을 써둔 덕에 가족 모두가 함께 들어갈 수 있었으나 허락된 시간은 야박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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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3화 드디어

서지혁은 하시윤을 등진 채 서 있었다. 하시윤은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서지혁의 손은 이동식 침대 위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 동안 미동도 없이 그곳을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서인준은 밀려오는 슬픔을 견디기 힘든 듯 결국 몸을 돌려버렸다.고작 30초 정도 지났을까. 의사가 시신을 안치실로 옮겨야 한다고 알리며 누가 동행할 것인지 물었다.서지혁이 입을 뗐다.“제가 가겠습니다.”그 말고는 적임자가 없었다.한효진의 침대가 밀려 나가자 서지혁이 그 뒤를 따랐다.떠나기 전 그는 뒤를 돌아 하시윤을 바라보았다.“금방 올게.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하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서지혁이 의료진과 함께 사라지자 하시윤은 서인준 쪽으로 다가갔다.서인준은 성문영에게 이끌려 의자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성문영은 아들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다독였다. 하시윤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지극히 다정하고 온화한 목소리였다.비극적인 죽음 앞에서야 그녀는 비로소 어머니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너무 슬퍼하지 마. 할머니 입장에서는 차라리 이게 해방일 것이다. 방금 봐서 알잖니. 온몸에 장치를 주렁주렁 달고 말 한마디 못 한 채 누워만 계셨는데.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건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야. 차라리 이렇게 떠나시는 게 깔끔한 뒷마무리가 될 수도 있어.”한참이 지나서야 서인준이 꽉 막힌 목소리로 대답했다.“알아요.”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서인준은 소매로 얼굴을 훔치고는 고개를 들었다.방금까지 울었던 흔적이 역력했지만 다행히 금방 안정을 되찾은 모습이었다.그는 하시윤을 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화제를 돌렸다.“방금 정우 얼굴도 봤는데, 이제 좀 마음이 놓이죠?”“네.”하시윤이 답했다.“상태가 훨씬 좋아 보여서 다행이에요.”서인준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게 말이에요. 그 녀석, 무균실 안에서 아주 살이 포동포동하게 올랐더라고요.”말은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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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4화 나이

하시윤은 방에서 나오다가 거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재윤 씨는? 벌써 갔어?”밖에서 한참을 기다리더니 고작 몇 마디 나누고 가버린 게 이상했던 모양이다.서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하시윤을 이끌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신경 쓸 거 없어.”서지혁이 덧붙였다.“잠시라도 좀 눈 붙여. 어젯밤에 한숨도 못 잤잖아.”그렇다. 하시윤이 밤새 뒤척이는 동안 서지혁 역시 단 1초도 깊게 잠들지 못했다.새벽녘에는 아예 침대에 앉아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쉴 새 없이 검색하다가 동이 틀 무렵에야 겨우 몸을 뉘었던 그였다.하시윤은 거실 쪽을 한 번 더 힐끗 살피고는 입을 다물었다.방 안으로 들어와 잠옷으로 갈아입은 하시윤은 목이 타는 기분이 들어 물을 마시러 다시 나갔다.거실에 다다랐을 때, 밖에서 연재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못 들어가게 하는 건데? 어이없네, 정말!”연재윤이 씩씩거리며 목소리를 높였다.“조금 전까지 안에 있었는데 뒤돌아서자마자 출입 금지라고?”그는 억지로 밀고 들어오려는 기세였으나 경호원들에게 가로막힌 모양이었다.결국 연재윤은 목청을 높여 소리를 질러댔다.“서지혁! 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이제 네 집에도 못 들어오게 하겠다고?”서지혁이 방에서 나와 하시윤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물 마시러 나온 거야? 내가 떠다 줄게.”그는 물 한 컵을 받아 하시윤에게 건넸다. 하시윤은 단숨에 잔을 비우고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갑자기 왜 그래? 정말 재윤 씨를 쫓아낸 거야?”“너무 시끄러워.”서지혁이 무심하게 답했다.“듣고 있으면 머리 아파서.”그 말도 일리가 있었다. 한효진이 막 세상을 떠난 참이라 심란해 죽겠는데 옆에서 연재윤이 쉴 새 없이 재잘거리니 누구라도 질색할 법했다.눈치라고는 약에 쓰려도 없는 인간이라 분명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실없는 소리를 지껄였을 게 뻔했다.하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긴 하네.”그녀는 서지혁을 따라 다시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피로가 한계에 다다랐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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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5화 지옥

서경민은 서지혁을 데리고 별채 2층 건물 앞으로 향했다. 창문에 덧대어 놓았던 나무판자들은 이미 뜯겨 나갔고 깨진 유리창 사이로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드나들고 있었다. 굳게 잠겨 있던 세 개의 자물쇠도 진작에 사라진 뒤였다.서지혁은 가늘게 눈을 뜨고 건물을 응시했다. 십수 년 만에 빛을 보게 된 칠흑 같은 건물은 세월의 풍파에 그 모습이 변해 있었으나 서지혁의 눈에는 예전 그날의 풍경이 겹쳐 보였다.“이 건물도 이제 쓸모가 없으니 허무는 게 낫겠다 싶다. 여길 치우면 뒷마당 활동 공간도 훨씬 넓어질 테고 말이야.”서경민이 덤덤하게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뒷마당은 이미 충분히 넓었고 굳이 이 자리를 탐낼 이유는 전혀 없었다.서지혁은 대답 없이 느릿하게 건물 쪽으로 다가가 대문이 아닌 창가 앞에 섰다. 창틀이 다소 높았지만 성인이 된 서지혁은 이제 까치발을 들지 않아도 안쪽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어린 시절의 그는 달랐다. 키가 작아 담벼락을 붙잡고 발끝을 바짝 세워야만 겨우 안을 엿볼 수 있었다.당시 서무열이 위독했을 때, 서경민은 병균이 옮는다는 핑계로 가족들의 문안을 철저히 금지했다. 집안 사람들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으나 오직 서지혁만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서무열은 방에서 요양 중인 게 아니었다. 그는 뒷마당 창고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이 개처럼 방치되어 있었다.그때 서인준은 아주 어렸다. 서경민을 무서워하면서도 할아버지를 보겠다며 떼를 쓰곤 했다. 서무열은 유독 입담 좋고 애교 넘치는 막내 손주 서인준을 아꼈다. 무뚝뚝한 서지혁에 비하면 서인준은 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아이였다.서인준이 보이지 않던 어느 날 밤, 성문영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한마디를 던졌다.“할아버지 보러 갔나 보지. 아버님 도대체 왜 면회도 못 하게 하는 건지 원. 얼굴 한 번 보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성문영은 몰랐지만 서지혁은 알고 있었다. 그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는 순간 모든 게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라는 사실을.서지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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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6화 서류 어디 있어

서지혁이 정원에 도착했을 때, 연재윤은 벤치에 앉아 엉성한 손놀림으로 화관을 엮고 있었다.그 모습을 보던 서지혁은 문득 배가 부른 채 벤치에 앉아 있던 하시윤을 떠올렸다. 하시윤은 손재주가 좋아 화관도 빠르고 예쁘게 잘 만들곤 했었다.서지혁이 다가가더니 한마디 던졌다.“멀쩡한 꽃들 좀 그만 괴롭히지?”연재윤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손에 든 작업에만 열중했다.그는 장미꽃을 따다 가시에 찔렸는지 짧게 비명을 지르며 숨을 들이켰다.“이제야 알겠네. 시윤 씨가 왜 이걸 좋아했는지 말이야. 은근히 중독성 있네.”연재윤이 말을 이었다.“화관 만드는 게 재밌다는 소리가 아니야. 이렇게 비싼 꽃들을 잔뜩 꺾어대는 게 재미있다는 거지. 누군가 아끼는 걸 난도질해 놓으면 속이 다 시원하거든.”한참을 낑낑대던 그는 형편없는 결과물을 들어 올리더니 제 눈에도 한심했는지 인상을 찌푸렸다.“참 불공평하네. 똑같은 사람 손인데 왜 내 건 이 모양이지?”서지혁이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같이 갈 거야, 말 거야?”“가야지.”연재윤이 답했다.“네 차 타고 왔는데 안 타고 가면 뭐 걸어서 가라는 소리야?”그는 볼품없는 화관을 손에 쥔 채 서지혁의 뒤를 바짝 쫓았다.차에 올라탄 연재윤은 화관을 뒷좌석에 대충 던져버리며 물었다.“네 아버지랑은 무슨 얘기를 했어?”서지혁은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너 어머니한테 전화했다며. 할머니 돌아가셨다는 소식 들으시고 꽤 기뻐하셨겠지?”그 질문에 연재윤은 입을 다물었다.그는 간병인에게 부탁해 원보라의 귀에 휴대폰을 대고 그 소식을 전했었다.하지만 원보라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울부짖을 뿐이었다.연재윤은 혹시나 그 소식에 어머니의 정신이 맑아질까 싶어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했었다.하지만 모두 소용없는 짓이었다.결국 간병인이 휴대폰을 떼어놓으며 난처하게 말했다. 의사가 진정제를 투여해야 할 것 같다고, 밧줄에 묶여 있긴 해도 너무 발버둥을 치면 다칠 수도 있다는 설명이 뒤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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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7화 화풀이

하병우는 아무 말도 없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조경순과 그 젊은 남자는 조경순의 집으로 가려는 게 아니었다. 두 사람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을 보니 바로 옆 동으로 들어가려는 모양이었다.하병우는 헛웃음을 흘렸다.‘저놈의 집이 바로 옆이었나 보군.’하병우의 웃음소리를 들은 조경순이 고개를 돌렸다가 멈칫했다.하지만 조경순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황을 파악하더니 얼굴에 노골적인 우월감을 띄웠다.자신도 얼마든지 젊은 남자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듯한 표정이었다.하병우가 그녀를 늙었다며 싫증 냈던 것처럼, 그녀 역시 그를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조경순은 남자의 팔에 교태를 부리며 매달린 채 걸음을 멈추고 하병우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당신이 여길 웬일이야?”조경순이 비웃음을 섞어 물었다.“설마 나 찾아온 거야?”하병우는 조경순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그래, 당신 찾아온 거 맞아.”조경순은 턱을 치켜들며 기세등등하게 굴었다.“찾아와서 뭐 어쩌려고? 이 영감탱이가 정말. 아직도 내가 자기 없으면 못 사는 줄 아나 보네. 당신 그 어린 애인이 당신 버리고 부모 따라 튀었다며?”조경순이 혀를 쯧쯧 찼다.“결국 돈 잃고 사람 잃으니 이제야 나한테 용서라도 빌고 싶은 모양인데 난...”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병우의 손바닥이 조경순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조경순은 방어할 틈도 없이 그대로 타격을 입었다. 그녀의 몸이 휘청거리더니 옆에 있던 남자 쪽으로 고꾸라졌다.남자 역시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그녀를 붙잡았고 두 사람은 몇 걸음이나 비틀거리고서야 겨우 중심을 잡았다.조경순이 얼굴을 감싸 쥐고 상황 파악도 하기 전, 하병우의 발길질이 다시 그녀의 몸에 꽂혔다.“이 천박한 년이! 내 아들을 죽여놓고 네가 무사할 줄 알았어? 오늘 내가 네 목숨을 끊어놓으마!”하병우는 병원에서 자신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던 조경순과 똑같이 변해 있었다. 그는 눈에 뵈는 게 없는지 손에 든 용 머리 지팡이를 휘둘러 조경순을 사정없이 내리쳤다.발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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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8화 작별을 고하다

서지혁은 동이 트기 무렵, 아주 이른 새벽부터 몸을 움직였다.서지혁이 씻는 소리에 잠이 깬 하시윤은 몸을 뒤척이며 아기 침대부터 살폈다. 다행히 서시은은 깨지 않고 새근새근 단잠에 빠져 있었다.욕실에서 나온 서지혁을 보며 하시윤이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뭐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애도 아직 안 깼는데.”“병원에 가봐야 해. 오늘 할머니 화장하는 날이야.”그제야 하시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결에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일정이었다.창밖을 내다본 하시윤이 눈을 가늘게 떴다.“지금이 몇 시인데 벌써 가? 너무 이른 거 아니야?”서지혁은 침대 머리맡으로 다가와 허리를 숙여 하시윤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첫 번째 타임이 좀 빠르더라고.”보통 화장을 서두르기 마련이지만 서경민은 그 시간을 남들보다 더 앞당기라고 유독 재촉했다.하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올렸다.“그래. 오래 걸릴 것 같아?”“글쎄. 납골당에 모실지 아니면 바로 산소로 갈지 모르겠네. 산소까지 가려면 시간이 꽤 걸릴 거야.”하시윤은 다시 눈을 감으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알았어. 나 방해하지 말고 얼른 가. 잠 좀 더 자게.”서지혁은 픽 웃으며 하시윤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그러고는 잠든 딸 서시은에게도 조심스레 입을 맞춘 뒤 발소리를 죽여 방을 나섰다.서지혁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가족들이 모두 모여 화장장을 지키고 있었다. 정식 업무 시작 전인 이른 시간이었으나 서경민이 미리 손을 써둔 덕에 직원 몇몇이 나와 분주히 움직였다.안치실에서 한효진의 시신이 운구되어 나왔다. 화로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시간이었다.시신을 덮고 있던 흰 천이 걷히자 곁에 서 있던 성문영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한효진은 생전에도 뼈만 남을 정도로 야위어 안쓰러운 몰골이었는데 밤새 냉동 안치된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했다. 검푸르게 죽은 안색에 입은 벌어져 있었고 반쯤 뜬 눈은 기괴한 서늘함 그 자체였다.성문영이 겁에 질려 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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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9화 신고

소각로 안의 불꽃이 단 한 점의 불씨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사그라들었을 때야 서경민은 몸을 돌려 가족들을 바라보았다.“이제 그만 흩어지자. 다들 가서 각자 할 일들 봐.”서인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부고는 올려야 하지 않을까요?”“안 올린다.”서경민의 대답은 단호했다.한효진이 얽힌 사건은 아직 종결되지 않았고 임씨 가문 사람들은 하이에나처럼 결과만 노려보고 있었다. 이쪽에서 조금이라도 움직임을 보였다가는 그들이 이 기회를 틈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를 일이었다.그들이 큰 풍파를 일으킬 급은 아니었으나 여론을 선동하는 데에는 선수들이었다. 괜한 번거로움을 피하려면 부고 따위는 생략하는 편이 나았다.게다가 한효진은 생전에 외부 활동이 거의 없었다. 집안 친척들과도 왕래를 끊다시피 하여 세상과는 사실상 단절된 상태였다.그녀를 기억해 주는 사람도 없는데 이제 와서 떠났다는 소식을 알려봐야 남들의 입방아에나 오를 뿐이었다. 서경민은 그런 소모적인 일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묫자리에 묻는 과정조차 이토록 서둘렀으니 부고를 생략하겠다는 서경민의 결정이 서인준으로서도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는 더는 말을 얹지 않았다.묘원을 빠져나온 가족들은 각자의 차에 올랐다. 한동안 줄을 지어 달리던 차들은 갈림길에 들어서자마자 뿔뿔이 흩어졌다.성문영은 우선 회사로 돌아가 밀린 업무를 처리했다.그 뒤에 잠시 거래처 사람을 만나기도 했으나 만남은 길지 않았다. 이미 조율이 끝난 협력 건이라 적당히 이야기를 나누고는 금세 자리를 마무리했다.성문영이 다음으로 차를 몰아 향한 곳은 심태진의 거처였다.심태진은 분명 온종일 성문영만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현관문 도어록에 성문영이 손가락을 갖다 댔으나 지문 인식이 제대로 되지 않아 오류 음이 울렸다.그런데 두 번째 시도를 하기도 전에 문이 안쪽에서 벌컥 열렸다.심태진은 성문영이 신발을 벗고 들어오기도 전에 다급하게 물었다.“어르신을 바로 땅에 묻은 거야?”성문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거실 소파에 가서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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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0화 계획이 다 있다

서지혁이 집을 나선 지 십여 분쯤 지났을 때, 하시윤의 휴대폰이 울렸다.휴대폰은 그녀의 바로 옆에 놓여 있었다. 하시윤은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발신인을 확인했다.저장되지 않은 번호였으나 하시윤은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상대방이 입을 열었다.“나예요.”하시윤은 멈칫했다. 서경민이었다.하시윤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서경민이 다시 말을 이었다.“하시윤 씨, 사람을 시켜서 물건을 하나 보냈어요. 지혁이가 문 앞에 경호원들을 깔아놨더군요. 지금은 아들과 얼굴 붉히고 싶지 않으니 조금 이따가 직접 나와서 받아 가세요.”하시윤이 물었다.“그게 뭔데요?”“좋아할 만한 겁니다.”서경민이 덧붙였다.“잠시 후면 알게 될 거예요.”서경민은 그 말만 남긴 채 하시윤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하시윤은 휴대폰을 쥔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거실로 나갔다.몇 분 지나지 않아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경호원이 밖에서 하시윤을 불렀다.안에 있던 가정부가 서둘러 다가가 문 너머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경호원은 하시윤이 주문한 배달 음식이 도착했다며 확인을 요청했다.하시윤은 당황했으나 자신을 돌아보는 가정부의 시선을 느끼고 얼른 표정을 정리하고는 대답했다.“아, 제가 시킨 거 맞아요.”하시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갑자기 입이 좀 심심해서요.”가정부는 손사래를 치며 안타까워했다.“아니, 드시고 싶은 게 있으면 말씀하시지 그랬어요. 제가 직접 해드리면 되는데. 파는 음식은 몸에도 안 좋고 조미료도 많이 들어가잖아요.”가정부가 문을 열자 하시윤도 현관 쪽으로 걸어 나갔다.문밖에는 여러 명의 경호원이 서 있었고 엘리베이터 앞에는 배달원이 봉투를 들고 서 있었다.배달원은 짜증이 잔뜩 섞인 얼굴로 휴대폰을 들여다보더니 배달 시간이 지났다며 투덜거렸다.“아휴, 빨리빨리 좀 받아주세요. 여기 두고 갑니다.”가정부가 미처 받기도 전에 그는 배달 봉투를 옆 선반에 툭 내려놓고는 다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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