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난 결코 무너지지 않아: Chapter 81 - Chapter 90

100 Chapters

제81화

아연은 여러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오자, 갑자기 ‘명분’이라는 게 미친 듯이 갖고 싶어졌다.그래서 조심스럽게, 그러나 피할 수 없다는 듯 중현을 불렀다.“중현 씨.”“응, 말해.”중현은 고개를 돌려 아연을 바라봤다.“자기... 혹시 솔이랑 완전히 이혼하고 나면, 나랑... 결혼할 생각이 있어?”아연이 이 말을 내뱉을 때 심장은 터질 듯 뛰었다.긴장이라기보다 불안.그리고 듣고 싶지 않은 대답이 돌아올까 봐 겁나는 마음.중현의 잘생긴 이목구비에 아주 잠시 진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그 역시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뻔한 질문인 거 알아.”아연은 중현의 반응을 기다리다 스스로 말을 이어갔다.“그냥... 미리 알아 두고 싶어서 그래. 그래야 마음의 준비를 하지.”그때야 중현이 입을 열었다.“답은 처음부터 정해졌어.”중현은 돌려 말하지 않았다.“과정이 어떻든 결과는 변하지 않아.”아연의 얼굴에서 미세하게 웃음이 흘렀다.상처를 감수한 채 억지로 지어내는 웃음.“그렇구나.”“응.”“그럼... 다른 사람을 아내로 맞을 생각은 있어?”아연은 아주 조심스레 다시 물었다.중현의 시선이 정확하게 아연에게 꽂혔다.그녀가 무엇을 묻고 싶어 하는지, 왜 불안해하는지, 그의 눈에는 이미 다 보였다.하지만 원한다고 해서, 그가 원하는 대답을 줄 수는 없다.한참 동안 기다려도 중현은 아무 말이 없었다.아연은 스스로 깨달았다.중현은 절대 자신을 아내로 맞지 않는다는 걸.그래서 급히 이유를 덧붙였다.제 체면마저 챙기려는 듯.“아... 그냥 걱정돼서. 혹시 중현 씨가 다른 여자랑 결혼하면...”“그 여자가 나 같은 존재를 이해 못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면 서로 피곤하잖아.”그제야 중현이 답했다.“나, 하중현의 아내는 오직 강솔 한 사람뿐이야.”강솔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의 ‘배우자’란 칸은 평생 그 이름밖에 적지 않을 것이다.“그럼 됐어.”아연은 가슴 깊은 곳이 찔리는 듯 아팠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혹
Read more

제82화

“면접 때 들었겠지만, 들어오자마자, 굉장히 중요한 신규 프로젝트를 맡게 될 거예요.”박예찬은 강솔을 바라보며, 조건을 아주 명확하게 설명했다.“노동계약서 작성할 때 기밀 유지 계약도 같이 써야 합니다.”“알고 있어요.”강솔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비록 사회 경험이 많지 않지만, 이런 종류의 조항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박예찬은 옆에서 기밀 유지 계약서를 꺼내 강솔에게 내밀었다.“이걸 한번 보고, 괜찮으면 내일 바로 출근 준비하시고요.”“못 받아들이겠다 싶으면...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인 거고요.”강솔은 계약서를 받아 꼼꼼히 읽었다.[입사 후 정당한 사유 없이 자진 퇴사 금지.][위반 시 위약금 10억 원.]이런 조항은 가끔 매우 중요한 프로젝트에 붙는 경우가 있다.10억이 아니라 100억에 달하는 곳도 있다.핵심 프로젝트의 기술이나 기밀을 유출하려고 잠입하는 산업 스파이를 막기 위해서.“어때요?”강솔이 한번 쭉 훑어본 듯 보이자, 박예찬은 바로 물었다.“집에 가서 조금만 더 생각해 봐도 될까요?”강솔은 중현에게 당한 것들이 떠올라 조심스러워졌다.토니가 해당 회사는 중현과 아무 상관없다고 했지만,입사라는 큰 결정을 앞두고는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었다.“오늘 밤 여덟 시 전에 답 드릴게요.”“네. 그래요. 원래 이런 건 쌍방 선택이니까요.”박 부장은 시원시원했다.“결정되면 연락 주세요.”강솔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약서를 돌려주고 회사를 나섰다.건물을 나오자마자, 바로 토니에게 전화해 약속을 잡았다.중현이 더는 간섭하지 않겠다고 말했으니, 토니를 만나 정보를 확인하는 정도는 문제될 게 없었다.그리고 이건 이익이 얽히는 일도 아니었다.두 사람은 카페에서 마주 앉았다.강솔이 상황을 설명하자, 토니는 눈썹을 모으며 말했다.“위약금이 10억이라고?”토니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응.”강솔이 고개를 끄덕였다.“아무리 그래도 신입한테 10억은 너무 과한데?”토니 회사도 위약금 조항이 있긴 하지만, 그건
Read more

제83화

“그럼, 월급 들어오면 꼭 밥 사라.”토니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그의 존재는 강솔에게 또 하나의 옵션이 늘어나는 것뿐이었다.“회사 들어가면 지금만큼 여유 없을지도 몰라.”“야근하면 나한테 문자해. 지안은 내가 데리러 갈게.”“응.”강솔도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둘의 관계는 차갑게 거리를 둘 필요 없는, 어릴 때부터 서로를 챙겨주던 사이다.이런 부탁을 거절하는 건, 오히려 그 긴 세월을 부정하는 일 같았다.두 사람은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눴고,강솔은 바로 화인게임즈 박 부장에게 입사 의사를 전했다.박 부장은 거의 바로 답장을 보냈고, 입사 준비물을 정리한 리스트도 함께 보내왔다.강솔은 정규직으로 일할 회사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하지만, 앞으로도 엄마 병원비가 계속 들어갈 걸 생각하면, 여전히 넉넉하지는 않았다.집에 돌아오자마자, 강솔은 소규모 계정에 며칠간 새로 그린 일러스트 몇 장을 올렸다.일러스트를 의뢰자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대규모 계정에는 대회 수상작들이 많아서 의뢰가 들어오면 기본이 수백만 원대.하지만 그런 의뢰는 매달 꾸준히 들어오는 것이 아니었다.반면, 소규모 계정은 몇만 원에서 몇십만 원 사이의 그림들이라,의뢰량이 많고, 지금의 강솔에게는 푼돈 정도 벌기엔 딱 적당했다.목요일.지안을 학교에 바래다주고 난 뒤, 강솔은 바로 회사로 향했다.10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다.예상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강솔을, 박 부장이 직접 나와 맞이했다.그리고 계약서 서명, 노동 조건 안내, 프로젝트 설명까지 일일이 챙겨주었다.솔직히 좀 이상했다.보통 이런 입사 절차는 인사팀이 나서서 처리하는 편이었다.부장이 나서서 모든 걸 챙기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화인게임즈에 온 걸 환영합니다.”박 부장은 계약서가 마무리되자, 밝게 웃었다.“강솔 씨가 와줘서 정말 든든하네요. 이번 신작 프로젝트, 이제 문제없겠어요.”“열심히 하겠습니다.”강솔도 미소로 답했다.박 부장은 그녀를 8층 신작 프로젝트
Read more

제84화

부장실 안, 중현은 맞춤 수트 차림으로 대표 의자에 여유롭게 앉아 있었다.고개를 들고나오며 사람들을 훑어보는 시선에는 평온한 듯한 하면서도 누구도 쉽게 맞설 수 중현의 시선은 마지막으로 강솔에서 멈췄다가 다시 스쳐 지나갔다.그 순간, 강솔의 하루치 좋은 기분은 산산조각 나버렸다.이런 결말은 상상조차 못 했다.“이쪽은 HS그룹의 하 대표님이십니다.”“앞으로 두 달 동안 우리 화인게임즈의 새 대표로, 이번 프로젝트를 총괄하실 겁니다.”박 부장은 밝은 목소리로 소개했다.“신작 프로젝트 관련 사항은 전부 하 대표님께 직접 보고하시면 됩니다.”“네.”사람들이 일제히 대답했다.박 부장은 긴장감이 비치는 얼굴로, 중현에게 팀원들을 한 명씩 소개하기 시작했다.강솔은 그 순간부터 시선을 단 한 번도 다른 곳으로 옮기지 못했다.‘퇴사... 퇴사해야 하나?’머릿속에 그 단어만 무한 반복되었다.화인게임즈가 상장사라는 것 따위는 의미 없었다.중현이 가진 계열사는 백 개가 넘었다.자기 회사들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랄 텐데, 굳이 여기까지 들이닥친 이유...‘목적이 없다는 게 말 돼?’강솔은 단 1도 믿지 않았다.“이분은 오늘 새로 입사한 일러스트레이터 강솔 씨입니다.”박 부장이 밝게 말했다.“경력도 뛰어나고 실력도 탄탄합니다.”중현은 잠깐 눈을 올렸다가 곧바로 시선을 거둬들였다.“네.”그의 목소리는 미동조차 없는 담담함뿐이었다.박 부장은 송 대표에게 미리 중현의 정체에 대해 들었기에 조심스레 물었다.“대표님 혹시 더 궁금한 점이 있으신가요?”“지금은 없습니다.”중현이 느긋하게 말했다.“저는 진행 상황만 지켜보면 됩니다.”그 말과 함께 박 부장은 직원을 모두 돌려보냈다.강솔은 당장이라도 중현을 붙잡고 묻고 싶었지만, 사람들 눈이 너무 많았다.회사 전체에 가십거리가 될 게 뻔했다.자리로 돌아오자마자, 곳곳에서 속삭임이 터져 나왔다.“와... 새로 오신 대표님 미쳤어. 레알 잘생겼다. 개취 저격.”“그래도, 일 못 하면 그 남자가
Read more

제85화

강솔의 온몸이 굳어졌다.박 부장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창가 쪽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있던 하중현이 잡지를 손에 들고 있었다.강솔의 시선이 닿자, 중현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바라봤다.“하 대표님, 강솔 씨 계약서 아직 가지고 계신가요?”박예찬이 먼저 입을 열었다.중현의 시선이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박예찬은 그 눈빛을 정면으로 맞받아칠 자신이 없어, 괜히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강솔에게 물었다.“계약서는 왜요?”“조금 더 확인하고 싶은 조항이 있어서요.”강솔은 박예찬이 있는 자리라, 말을 최대한 완만하게 했다.“혹시 아직 도장이 안 찍혔다면... 저도 요구 사항 하나를 더 추가하고 싶어서요.”그 말이 끝나자, 밖에서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법무팀 직원이었다.직원의 손에는 도장까지 깔끔하게 찍힌 계약서 원본이 들려 있었다.그는 중현 앞에 서서 공손하게 말했다.“하 대표님, 계약서 결재 완료됐습니다.”“강솔 씨에게 드리세요.”중현의 시선이 그대로 강솔을 향했다.목소리는 나른할 정도로 부드러웠지만, 아주 또렷했다.법무팀 직원이 계약서를 강솔에게 건넸다.그걸 받아 드는 강솔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종이 한 장이 이렇게 무거웠단 말인가?이건 단순한 계약서가 아니라, 그녀에게 족쇄나 다름없었다.정신을 다잡고 계약서를 펼치자, 회사 인감도, 법인 인감도 모두 찍혀 있었다.계약은 이미 정식 발효.즉 이제부터 퇴사하면, 위약금 10억을 지급해야 한다.박예찬은 그런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말했다.“요구사항이 있으시면 저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합리적이면 다 반영됩니다.”“굳이 계약서에 넣지 않아도 되고요.”“아... 괜찮습니다.”강솔은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손발은 얼음처럼 차가웠다.“그럼, 이만 가볼게요.”말만 하고 바로 부장실을 걸어 나왔다.박예찬은 강솔의 뒷모습을 보며, 어렴풋이 의문을 품었다.“하 대표님, 방금 그건...”조심스레 말을 꺼내려 했다.중현이 천천히 시
Read more

제86화

강솔은 이제 막 들어온 신입일 뿐이다. 게다가 위약금 조항 때문에 스스로 퇴사할 수도 없다.“박 부장이 뭐라던데요?”백지연이 다가와, 강솔의 굳은 얼굴을 보고 먼저 물었다.“잠시 뒤에 같이 밥 먹자고요.”강솔은 표정을 바로잡으며, 다른 사람에게까지 자신의 기분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신입 환영한다는 자리래요.”백지연의 미간이 잠깐 움직였다.강솔은 그 기색을 놓치지 않았다.“혹시 문제라도 있어요?”“아마 회사 윗분들한테 얼굴 트게 하려는 자리일 거예요. 강솔 씨를 좀 집중적으로 키워볼 생각인가 보죠.”백지연은 담담하게 말했다.“식사 자리에서는 알아서 각 상사분께 먼저 한 잔씩 올려요.”강솔의 표정이 난감하게 굳었다.그녀에게는 너무 어려운 자리였다.“안 가면 찍혀요?”어쩐지 백지연에게는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마치 동네 언니 같은 느낌에, 저도 모르게 경계가 풀려 있었다.백지연은 강솔을 보며 단정적으로 답했다.“응, 찍혀요.”강솔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너무 걱정하진 마요. 회사 윗사람들도 사람은 사람인지라...”백지연의 말투엔 묘하게 다정함이 섞여 있었다. 마치 여동생을 챙기듯이.“괜히 일부러 곤란하게 하거나 이상한 짓 하는 사람들은 아니에요. 말이 좀 많을 뿐이지.”그 말을 듣고 나니, 강솔은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걸 인정했다.지안을 부탁한다는 메시지를 토니에게 미리 보내놓고, 시간을 맞춰 호텔로 향했다.비록 팀장이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긴 했지만, 강솔은 이런 자리에 대한 경계심이 컸다.과거 중현과 함께한 자리에서, 우연히 옆 룸에서 벌어진 더러운 장면을 본 적도 있었으니까.도착하기 전, 그녀는 호텔 주소를 토니에게도 보내놨다.별일 없으면 다행이지만, 정말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그래도 토니가 있으니까.“부장님.”차에서 내리기 직전, 갑자기 아주 중요한 게 떠올랐다.박 부장이 고개를 돌렸다.“왜요?”강솔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돌려 말하지 않았다.“하 대표님도 오
Read more

제87화

강솔도 이런 상황을 잠깐 생각해 보긴 했다.하지만 오늘 하루 종일, 중현은 그녀에게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심지어 스쳐 지나가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마치 강솔이 그냥 평범한 화인게임즈 직원 중 한사람인 듯.회사에서 별 탈 없었는데, 술자리에서 굳이 문제를 만들 이유는 없었다.[지안 데리러 갔다가 바로 너한테 갈게.]토니는 강솔 혼자 있는 게 마음에 걸렸는지 단단히 못 박았다.[그동안 최대한 핑계 대면서 들어가지 마. 버텨.]강솔이 무언가 말하려는데, 박 부장이 걸어왔다.“강솔 씨, 아직 왜 안 들어가요?”“친구 전화예요.”강솔은 폰을 들어 보이며 서둘러 핑계를 댔다.“급한 일이 있어서요.”“아무리 급해도, 이제 막 들어온 직장보다 중요하진 않아요.”박 부장은 진지한 얼굴로 말하면서도, 입가엔 얕은 미소를 띠었다.“회사 임원분들 곧 도착하니까, 신입이 먼저 들어가서 기다리는 게 예의죠. 그렇지 않나요?”강솔의 손이 휴대폰을 더 꽉 쥐었다.예전, 중현과 함께 있을 때는 언제나 마지막에 들어갔다.그 어떤 자리에서도 누구도 무슨 말을 하지 못했다.그땐 사람 눈치도 안 봐도 되고, 상사 기분 맞출 필요도 없었다.그저 자연스럽게 모든 게 해결됐다.하지만 지금은 박 부장 말대로였다.강솔은 이제 그저 일개 평직원에 불과했다.이런 일로 잘리는 건 괜찮다 쳐도, 뒤에서 욕먹고 업무에서 괴롭힘당하면 진짜 끝장이다.강솔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금방 들어갈게요.”“얼른요.”박 부장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이 블루투스로 연결된 토니에게도 전부 들렸다.토니는 운전대와 핸즈프리 사이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저 사람 말 듣지 마. 그냥 거기서 기다려.]“지금은 예전이 아니잖아. 나 먼저 들어갈게.”강솔은 단호했다.[너 도착하면 알려줘.][혹시 이상하면 핑계 대고 전화할게. 그때 데리러 와.]토니는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강솔은 짧게 정리했다.“일단 끊을게. 이따 연락해.”전화를 끊은 뒤, 강솔은 박
Read more

제88화

“괜찮아요...”강솔은 끝까지 사양하려 했지만, 혼자서 여러 사람의 권유를 버티기엔 역부족이었다.마지못해, 온몸이 긴장한 채로 상석 바로 옆자리로 떠밀리듯 앉았다.고위층 인사들이 강솔에게만큼은 유난히 친절했다.강솔은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편했다.“저는 그냥 평범한 직원인데... 여기 앉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요.”“뭐가 아니에요. 원래 이 자리가 당신 자리예요.”그들은 계속 말했다.“필요한 게 있으면 말만 해요. 우리가 다 해결해 줄 테니까.”이 정도면, 강솔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상장회사 주주들이 신입 직원에게 이렇게까지 상냥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하중현.그가 이들에게 무슨 말을 한 건지, 아니면 이 사람들이 스스로 오해한 건지는 몰랐다.하지만 지금 상황만 보면, 그녀의 입사가 중현의 계획 안에 있었다는 게 구십 퍼센트 확신으로 다가왔다.손이 힘이 절로 들어갔다.강솔은 일어나 말하려 했다.중현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고.하지만 입을 떼기도 전에, 문이 다시 열렸다.연한 그레이 컬러의 수제 정장을 입은 중현이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들어왔다.도자기같이 하얗고 매끄러운 얼굴은 늘 그렇듯 완벽했고, 긴 다리는 맞춤 정장 바지 아래 날렵하게 뻗어 있었다.그가 들어오자, 넓었던 룸조차 갑자기 좁아진 듯했다.중현의 존재감 자체가 모든 것을 압도했다.그 뒤로 화인게임즈의 실제 소유자인 송 대표와 그의 비서가 따라 들어왔다.“하 대표님.”“여기 앉으세요.”모두가 벌떡 일어나 환한 얼굴로 맞이했다.강솔도 분위기상 일어나야 했지만, 마음은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박 부장은 분명히 ‘하 대표는 오지 않는다’고 했었다.그런데 지금 그는 송 대표와 함께 가장 마지막에 등장했다.이 상황을 함정이 아니라고 믿는 게 더 이상했다.중현이 자리에 앉자, 다른 사람들도 앉기 시작했다.박 부장이 바깥에 신호를 보내자, 음식들이 줄줄이 들어왔다.“하 대표님, 제가 먼저 한 잔 올리겠습니다.”주 이사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
Read more

제89화

모두의 행동이 멈췄다.서로 눈치만 슬쩍 보며, 누구도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했다.대체 어디서 하 대표의 심기를 건드린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보아하니, 제가 화인게임즈를 잠시 맡는 게 여러분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네요.”중현은 느긋하게 소매를 정리한 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렇다면, 제가 더 있어 봐야 의미 없겠죠.”“아닙니다! 절대 그런 뜻이 아닙니다!”“하 대표님이 화인게임즈를 맡아주시는 건 저희의 큰 영광입니다!”“다른 회사들이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 아십니까?”“혹시 저희가 모시는 데 실수라도 있었다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순식간에 분위기가 긴장되었다.중현의 능력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형을 제치고 하씨 가문의 후계 자리에 오른 사람,몰락 직전의 회사들을 수차례 되살린 장본인,국내 재계가 인정한 ‘반등의 아이콘’.이런 인물을 모셔오기도 어렵지만, 일단 모셔다 놓으면 절대 놓쳐선 안 되는 존재였다.그런데 이제 와서 돌아간다니, 누가 봐도 이건 화인게임즈의 치명적 손실이었다.“혹시... 오해가 있는 건 아닐까요?”송 대표는 온화한 인상에 하얀 정장을 입어 더 부드럽게 보였다.중현의 짙은 눈동자가 천천히 강솔을 향했다.그 시선은 강솔의 얼굴을 따라 내려가 결국 손에 들린 찻잔에서 멈췄다.“오해는 아닙니다. 다만...”중현의 억눌린 목소리가 룸 안을 가볍게 울렸다.“여기 계신 분들이 꽤 시비를 잘 거시는 것 같길래.”그 한마디에 모두의 얼굴이 굳었다.속마음도 다들 조마조마해졌다.‘우리가... 언제 시비를?’그때 문득, 주 이사는 거의 유일한 단서를 떠올렸다.아까 자신이 강솔의 술을 차로 바꿔줬다.“하 대표님, 정말 오해십니다. 절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주 이사는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재빨리 강솔 손의 차를 다시 술로 바꿨다.그리고 바로 중현에게 고개를 숙였다.“제가... 강솔 씨가 하 대표님 쪽 사람인 줄 알고 착각했습니다.”“제가 삼배주로 사과드리겠습니다.”주 이사는 말이
Read more

제90화

중현이 그녀 손에 들린 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강솔은 본능적으로 잔을 움켜쥔 손을 뒤로 빼며 말했다.“뭐 하자는 건데요?”“확인 좀 해보려고. 이게 술인지, 아니면 새로 바꾼 생수인지.”중현의 손끝이 그녀의 차가운 손등을 스치며 잔을 잡았고,순간적으로 전류가 닿은 것처럼 강솔의 손이 툭 떨어졌다.그 짧은 터치, 그리고 그녀의 반응.화인게임즈 임원진 전원이 똑똑히 보았다.그리고 모두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다.이 둘이 아무 사이 아니라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중현 반대편에 앉아 있던 송 대표는 더 깊이 생각했다.‘설마... 이 친구가 소문으로만 들었던, 중현이 이혼 절차 밟고 있다던 그 아내인가?’중현과 강솔 사이의 일은 재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그 사건’이었지만,두 사람을 실제로 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특히 화인게임즈처럼 글로벌 500대 기업에도 못 들어가는 회사라면,실물은 고사하고 그림자조차 본 적이 없었다.게다가 중현은 언론에 자신의 사생활을 단 한 번도 노출하지 않았다.강솔의 사진이 외부로 유출될 가능성도 제로였다.지난번 소아연과의 열애설이 잠깐 떠올랐지만, 그것조차 중현이 직접 언론을 통제한 것이었다.아는 사람만 실루엣으로 알아보고, 모르는 사람은 절대 얼굴을 특정하지 못하는 방식으로.그러니 지금 이 방 안에서 각종 추측이 난무하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이렇게 많은 눈이 붙어 있는데, 내가 뭘 어떻게 바꿔요?”강솔은 괜히 트집 잡는다고 생각했다.중현의 시선이 천천히 옆자리 주 이사를 향했다.“아까는 잘만 바꾸던데요. 술에서 차로.”주 이사는 얼굴이 굳어지며 어색하게 웃었다.강솔은 속에서 뜨거운 뭔가가 치밀었다.중현이 잔을 들어 향을 확인하자, 강솔도 대꾸했다.“확인 끝났어요? 생수 아니죠?”“송 대표님.”중현은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놨다.“예, 말씀하십시오.”송 대표가 곧바로 자세를 고쳤다.중현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강솔에게서 단 한 번도 떨어지지 않았다.“화인게임즈 직원들은
Read more
PREV
1
...
5678910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