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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화

“예전엔 아픈 거 많이 싫어했잖아요.”주승현이 조심스레 물었다.예전에 발목을 삐었을 때, 중현이 업어서 데려왔었다.그때는 별것 아닌 통증에도 강솔은 눈물까지 흘리며 아프다고 난리였었다.하지만, 지금 그녀의 손바닥은 깊게 갈라지고, 피는 멈출 기미도 없는데, 입술조차 흔들리지 않았다.“예전은 예전이고, 지금은 지금이에요.”강솔은 더 말하고 싶지 않았다.소독이 끝나자, 스스로 약을 바르고 거즈를 꺼내 상처를 감기 시작했다.그 모습에서 억지로 아무렇지 않은 척 버티는 기색이 보여,주승현은 결국 그녀 손에서 거즈를 빼앗았다.“제가 할게요.”그는 차분하게 손바닥을 받쳐 들고 조심스럽게 한 겹 한 겹 감아올렸다.그렇게 단순한 동작이었는데, 강솔은 문득 시선이 멍해졌다.‘...이렇게 누군가에게 조심조심 다뤄진 게 얼마 만이지.’거즈를 다 감았을 때, 주승현의 핸드폰에서 알림음이 울렸다.그가 잠시 화면을 보더니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중현에게서 온 메시지였다.[상처 감쌀 때 너무 세게 하지 마세요.][그리고 드레싱 마무리되면, 흉터 연고 챙겨줘요.][네, 알겠습니다.]메시지를 보낸 이후 중현은 더 이상 답장을 하지 않았다....아연은 남자의 무표정한 옆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중현 씨... 나 솔이 만나러 간 거 때문에 또 화난 거 아니지?”“하지만 아줌마 문제는... 그냥 못 본 척하고 있을 수가 없어서... 나한테 화내도 괜찮아.”중현은 그녀를 보지 않았다.대신 물었다.“상처는 아직 아파?”“응...”아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치 더 불쌍해 보이려는 듯 표정을 일그러뜨렸다.중현은 큰 손을 들어 그녀의 붕대 감긴 무릎 위에 올렸다.손바닥이 상처 위에 얹히는 순간, 그는 무의식적으로 거즈를 쓰다듬었다.그런데, 거즈를 마주한 시선은 염려보다는아까 손바닥에서 피를 흘리던 강솔의 모습에 더 신경이 쓰였다.‘그 작은 손으로... 어떻게 주저 없이 그렇게 그었지.’아연이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의사 말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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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화

주승현은 중현이 던진 그 한마디가 단순한 안부인지, 속내를 떠보려는 질문인지, 아니면 경고에 가까운 말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그래서 한참 고민 끝에 가장 사실적인 대답을 골랐다.“꽤... 깊습니다. 다른 부위였으면 몇 바늘은 꿰맸을 겁니다.”중현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럼에도 그의 표정은 늘 그렇듯,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바다 같았다.그 눈빛이 그대로 자신에게 향하자, 주승현은 겉으론 침착한 척했지만, 속으로 한탄했다.‘아이씨... 오늘 또 내가 두 사람 일에 꼈네?’잠시 후 중현은 일어섰다.“수술 잘 부탁해요.”그 말은 명령 같았고, 경고 같았고, 또 어떤 감정의 흔적도 담겨 있지 않았다.중현은 다시 주변을 훑었다.쓰레기통의 피 묻은 솜, 옆의 의료 가위, 의약품 한 병.“오늘 같은 일, 두 번은 보고 싶지 않네요.”짧은 한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병실의 공기를 그대로 짓눌렀다.“명심하겠습니다.”주승현은 황급히 의료 도구들을 정리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중현은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 뭐 하고 있어?”강 비서는 준비한 듯 바로 대답했다.[집 알아보고 계십니다.]중현의 눈빛이 더 짙게 가라앉았다.그는 몇 마디를 더 지시했고, 비서는 즉시 움직였다....강솔은 자신이 실시간으로 감시당하고 있는 걸 전혀 모른 채,수술비를 마련하자, 곧바로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그리고 다행히도 지안의 학교와 멀지 않고, 가격도 적당하며, 환경도 꽤 괜찮은 작은 아파트를 찾았다.확인 후, 바로 임대 계약서를 작성했고, 보증금과 내고, 이사 준비를 시작했다.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거의 반나절을 청소와 정리에 썼다.작지만 깔끔한 집, 강솔에게는 새로운 시작이고, 출발이었다.그리고 모든 걸 마무리한 뒤, 중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예담아파트 1동 1802호. 지안이 짐 여기로 보내.]답장은 오지 않았다.강솔은 더 말하지 않았다.오후 네 시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문을 열자, 완벽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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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화

하지만 이런 것들은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지금 강솔에게 가장 중요한 건, 돈을 버는 것이다.며칠 전 넣었던 정규직 이력서들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중현이 막고 있다는 건 뻔히 알았다.그래서 강솔은 현실적인 선택을 했다.파트타임.그리고 그중에서도 중현이 간섭하기 힘든 1:1 개인 레슨.그날, 오후 바로 면접을 잡았다.강솔은 결혼 후 전업주부로 지냈지만,어릴 때부터 해온 무용과 미술은 단 한 번도 놓지 않았다.면접 장소는 J시에서도 손꼽히는 부촌.그곳에 사는 부모들은 대부분 아이에게 1:1 개인 교습을 붙인다.그래서 오히려 안심했다.이런 동네 사람 중에 중현이 직접 엮인 사람이 있을 리 없다.그렇게 생각했다.하지만 실제로 약속 장소에 도착해 집사에게 안내되어 들어간 순간, 정원이 보였다.그리고 그 정원에서 네댓 살 남짓 아이와 놀아주는 은은한 미소를 띤 한 남자가 있었다.하도현.강솔의 머릿속은 쿵, 울렸다.“어, 아주버님?”중현의 형이었다.‘하도현이 왜 여기 있는 건데?’“왔군요. 안으로 들어오시죠.”도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강솔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그 미소가 유순하고, 따뜻하고, 사람 좋게 보일수록 강솔의 심장은 더 빨리 뛰었다.‘큰일 났다.’분명한 건, 이 남자는 겉모습이 온화할수록 뒤는 더 잔인하다는 것.강솔은 기계처럼 목을 끄덕였다.도현은 아이를 도우미에게 넘기고, 강솔과 함께 실내로 들어갔다.오늘 하도현은 연한 회색 정장 차림에 얇은 은테 안경을 썼다.겉모습만 보면, 부드럽고 교양 있는 집안의 장남이다.하지만 강솔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겉과 속이 정반대인 남자란걸.“앉아요.”도현은 소파를 가리켰다.“뭐 마실래요? 주스 괜찮아요? 집에서도 생과일주스 좋아했잖아요.”“...뭐든 괜찮아요.”강솔은 온몸이 굳어 있었다.도현은 바로 사람을 시켜 주스를 가져오라고 했다.잠깐의 정적.공기가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강솔은 견디지 못해 먼저 말을 꺼냈다.“아주버님 아이가 무용 레슨을 받을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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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화

“괜찮아요. 부담 갖지 말고 받아요.”도현은 더 이상 강솔의 거절을 듣지 않겠다는 듯, 카드를 그녀의 손에 쥐여 넣었다.“내 동생이 이렇게 개판으로 굴었는데, 형인 내가 손 놓고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나요?”강솔 몸속의 피가 스르르 식어 내려갔다.손에 쥔 그 얇은 카드 한 장이 온몸의 피가 영하의 얼음처럼 차갑게 느껴졌다.‘...돌려줄 수도 없고, 그냥 들고 가는 건 더더욱 안 되고.’도망치고 싶은데 도망칠 곳도 없었다.도현은 더 말하지 않고 부드럽게 화제를 바꿨다.“은하는 매주 토요일 아침 아홉 시부터 열두 시까지 레슨을 원해요.”“레슨비는 회당 삼십만 원.”도현의 말투는 여전히 차분했고, 상대방이 어떤 표정을 짓든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다.“일급제, 월급제 모두 가능합니다. 원하는 대로 해줄 거예요.”“애가 나중에 재미를 붙이면, 추가 수업도 할 생각이에요.”“그땐 상진이랑 직접 상의해서 결정하면 되고요.”강솔은 입술을 깨물었다.솔직하게는, 이 일도 피하고 싶었다.하도현이 있는 공간에서 단 일 초라도 머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러나 도현은 마치 강속 속을 보고 있는 듯한 타이밍에 말했다.“걱정할 필요 없어요.”도현은 느릿하게 미소 지었다.“제수씨는 은하만 보면 돼요. 평소엔 집에 애하고 집사들뿐이에요.”강솔의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그 말 한마디가 강솔의 거절하고 싶은 마음을 조금씩 무너뜨렸다.“그렇군요.”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문제없으면 지금 상진이한테 전화할게요. 계약은 간단해요.”강솔은 한 번 더 망설였다.“저... 조금만 더 생각해 봐도 될까요?”“무슨 걱정인데요? 말해봐요. 같이 생각해 보자고요.”도현은 마치 친한 오빠처럼 말했다.하지만 강솔은 속으로 외쳤다.‘내가 왜 당신한테 고민을 털어놓냐고... 말하는 순간, 난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인데...’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엄마 수술 때문에... 시간이 겹칠까 봐...”“그건 걱정 안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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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화

“근데 나 하나 궁금한 게 있긴 하다.”시후가 옆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며 말했다.눈빛엔 100% 순도 높은 구경꾼의 흥미가 서려 있었다.“너희 형은 누굴 좋아해도 절대 티 안 내잖아?”“너한테 이용당할까 봐 사람 붙이는 것도 극도로 경계하고. 근데 넌... 반대더라?”시후가 코웃음을 쳤다.“온 세상이 다 알아야 직성이 풀리게 티를 내더라. 네가 강솔 좋아하는 거.”중현은 창밖으로 스며드는 어둠을 바라보며, 숨길 마음 따위 한 톨도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좋아한다는 건, 다 알게 하고 싶다는 거지.”“그래서 지금도 강솔 좋아하냐고.”“나는 쓸데없는 인간한테 시간 안 써.”중현의 대답은 단순했고, 그러나 대답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좋으면 왜 이혼하는데?”중현은 잠깐 시후를 스쳐보았다.답할 생각 없다는 눈빛이었다.시후는 포기하지 않고 더 파고들었다.“아연이 너한테 그 정도로 중요해? 그렇게 오래 같이 살던 사람을 버릴 만큼?”중현은 잠시 숨을 고르고,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연이 없었으면 지금의 나도 없고, 내가 강솔을 저렇게 키우는 일도 없었어.”“뭐? 대체 뭘 했다는데? 네 목숨이라도 살려줬냐?”“아니면 네가 어릴 때, 어둠 속에서 꺼내준 은인이라도 되냐?”시후는 더 궁금해졌다.하지만, 중현은 묵묵부답이었다.방 안에는 짧은 정적만이 맴돌았다.그렇다.중현이 말을 꺼냈다.“반지는?”시후는 기다렸다는 듯 고급 벨벳 상자를 내밀었다.중현은 그것을 받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나갔다.차에 올라탔을 때, 집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지안을 데려가겠다는 강솔의 연락이었다.중현은 단 한마디만 했다.“예담아파트로.”반 시간 뒤.강솔은 지안을 데리고 새로 구한 작은 집에 도착했다.아이 손을 잡고 동네 케이크 가게에서 지안이 좋아하는 작은 케이크도 샀다.작은 방, 작은 식탁, 작은 부엌.케이크에 촛불을 꽂고, 아이를 품에 안았다.지안이랑 함께 있자, 모든 불안이 조금씩 가라앉았다.강솔은 부드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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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화

“대문 비밀번호는 네 생일이야.”중현은 지안에게 말을 건네며 부드럽게 웃었다.“안에는 집이랑 똑같이 꾸며놨어.”“엄마가 있는 곳이 집이에요.”지안은 애처럼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그 한마디는 누가 들어도 강솔 편이었다.중현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올라가고, 그 시선이 강솔에게 옮겨갔다.강솔은 그 시선이 바늘이 찌르는 것같은 느낌이었다.그걸 무시한 채 의자를 빼고 앉으며 말했다.“일 없으면 나가. 우리 밥 먹어야 하니까.”“아까 집에서 먹고 왔다고 하지 않았어?”중현은 지안을 보며 물었다.지안은 입에 밥을 물고 고개를 들었다.“엄마가 해준 밥이 더 맛있어요.”중현의 시선이 식탁 위를 훑었다.정갈하게 놓인 반찬들, 따뜻해 보이는 국물, 의외로 맛깔스러워 보였다.“아무리 맛있어도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배탈 날 수도 있어.”그 말에 강솔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누구를 꼬집는 말이지?’“밤에 폭식하면 안 좋다.”중현은 강솔의 표정을 읽은 듯 덧붙였다.“알았지?”지안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숟가락질은 전혀 멈추지 않았다.결국 식사 내내 중현은 떠나지 않았다.지안이 방에서 공부하겠다며 들어간 뒤에도중현은 소파에 앉아 강솔이 설거지하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봤다.강솔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이 거품 사이를 드나들고,그 손끝이 기름기 묻은 접시에 닿을 때, 중현의 미간이 아주 천천히 찌푸려졌다.그 손은 원래 피아노 치고, 그림 그리는 손이었다.이런 데 써서는 안 되는 손이다.강솔은 묵묵히 설거지를 끝냈고, 행주까지 야무지게 짜서 제자리에 두었다.그제야 소파에 앉은 중현과 노골적으로 시선을 맞부딪혔다.“아직도 안 갔어?”강솔이 물었다.“사모님으로 살던 때 습관, 아직 있나 싶어서.”중현이 말했다.“충분히 익숙해.”강솔은 눈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중현은 웃지도 않았고, 공격하지도 않았다.하지만 그 침묵은, ‘네가 익숙할 리가 없지’라는 말보다 더 날카로웠다.“유상진 쪽 일, 빨리 그만둬.”중현은 오래 앉아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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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화

“아주버님한테 제대로 당해도... 내가 감수할게.”강솔은 담담하게 답했다.중현은 늑대라면, 하도현은 덫이다.앞은 불, 뒤는 절벽.둘 다 위험한 건 똑같았다.‘그렇다면... 지금 내게 필요한 쪽으로 선택하는 게 맞지.’지금 강솔에게 가장 급한 건 돈이었다.중현의 짙은 눈동자가 강솔의 표정을 저울질하듯 무겁게 내려앉았다.“게다가 아까 말한 건 전부 당신의 일방적인 해석일 뿐이잖아.”강솔의 시선이 똑바로 중현을 향했다.“나한테 무슨 이용 가치가 있다고? 날 노리고 함정까지 짤 이유가 없잖아?”중현의 눈빛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그는 말할 수가 없었다.그 함정의 목적이 ‘너’가 아니라 ‘나’라는 걸.“설령 나를 이용한다고 해도, 그건 날 통해 ‘다른 사람’을 건드릴 때 이야기지.”강솔은 가볍게 어깨를 올렸다.“이렇게 높은 시급에, 이렇게 편한 일자리인데... 조금 이용당하면 어때?”중현의 손등에 힘줄이 불거졌다.“그 ‘다른 사람’이 지안일 수도 있는데도?”중현은 상상 이상으로 차갑게 쏘아붙였다.강솔은 눈 하나 크게 뜨지 않았다.“아주버님 수단이 좀 과격하고, 일 처리 방식이 깔끔하지 못한 건 알지만...”“아이한테만큼은 절대로 손대지 않아.”강솔은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중현의 시야가 날카롭게 수축했다.“대체 그 사람을 얼마나 알고 있길래 그렇게 확신하는 거지?”하도현에 대해 말하는 강솔의 태도는 그냥 ‘신뢰’ 수준이 아니었다.강솔은 잠시 중현과 시선을 맞추다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아주버님은... 그런 사람 아니야.”중현의 손에 쥔 핸드폰이 서서히 뒤틀릴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강솔은 시계를 한번 보고 평온하게 말했다.“더 용건 없으면, 이제 나가 줘.”쾅!!!창밖을 찢는 번개가 내리 꽂히고, 거대한 천둥이 뒤따라 터졌다.우르릉-쾅!창문이 미세하게 흔들리자, 강솔의 어깨가 본능적으로 움찔했다.어릴 때부터 천둥을 무서워했는데, 그 습관은 아직도 고쳐지지 않았다.강솔은 급하게 창가로 가 커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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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화

“지안이가 걱정되어서 와 봤어.”중현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말을 마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게 뻗은 큰 키에서 뿜어져 나오는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그 눈동자가 강솔의 얼굴을 스치듯 바라본 뒤에야 다음 말을 이었다.“문이랑 창문 잘 닫아. 금방 갈게.”[자기야, 좀 빨리...]아연이 그렇게 말하려는데, 밖에서 번개가 크게 치며 천둥이 울렸다.[꺄악!]비명과 동시에, 강솔 역시 겁을 먹고 있었다.중현은 그 사실을 알아챘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화기 너머에서 일부러 겁먹은 척하는 아연을 달래며,아연의 감정이 진정되도록 다독여 준 뒤 전화를 끊었다.떠나기 전, 중현은 잔뜩 긴장한 강솔을 흘끗 바라보며 무심히 말했다.“무서우면 이어폰 껴.”“네가 신경 쓸 일 아니거든.”강솔은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두려움을 억눌렀다. ‘괜히 신경 쓰는 척하기는... 무서워도 내색하면 지는 거야.’“가서 네 사랑 소아연 님이랑 있으시라고요. 여기서 얼쩡대지 말고.”말이 끝나자마자 또 천둥이 크게 쳤다.강솔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중현은 더 이상 머물지 않았다. 손안의 휴대폰을 굴리며, 중현의 신분과는 어울리지 않는 협소한 공간을 나섰다.차에 올라타니, 하늘을 가르는 번개가 세상을 환하게 밝히고 지나갔다.중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강솔이 있는 층을 올려다봤다.“소담한테 전화해. 이유는 아무거나 붙여서... 오늘 밤 강솔 집에 잠깐 들르라고 해.”“소담 씨는, 대표님이 소씨 가문에 메시지 전한 뒤로, 바로 부모님께 잡혀서 해외로 보내졌습니다.”운전석의 강 비서가 진지하게 답했다.“오늘 안에 돌아오긴 어려울 겁니다.”중현은 휴대폰을 손끝으로 굴리며 잠시 고민한 끝에 메시지를 보냈다.[엄마 천둥치는 거 무서워하잖아. 오늘은 엄마랑 같이 있어 줘.]지안은 메시지를 봤지만, 답장하지 않았다.아빠가 자신에게 잘해주지 않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하지만, 엄마를 다른 사람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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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화

언젠가는, 아연이 강솔을 완전히 대체하게 될 것이다.창밖의 천둥은 여전히 크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연은 점점 잠에 빠져들었고,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그녀의 숨결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 있던 중현은 문득 예전의 강솔을 떠올렸다.천둥만 치면 꼭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었다.분명 이불 속은 덥고, 소리를 막아주는 것도 아닌데,그럼에도 강솔은 반드시 그 안으로 숨어들었다.중현이 품에 안아 귀를 막아주고 함께 누워 있어도, 반드시 이불을 뒤집어쓴 채여야만 안심했다.그 생각이 스치자, 중현은 휴대폰을 꺼내 지안에게 문자를 보냈다.[엄마 괜찮니?]지안은 그 시각, 강솔과 함께 소담과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다.어젯밤부터 지금까지, 강솔이 소담에게 보낸 메시지는 전부 답이 없었다.처음엔 밤새 일하다가 낮에 잠든 건가 했고, 그런 일이 워낙 많았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하지만 하루하고도 밤까지 지나자,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다행히 영상 통화는 곧 연결되었다.[타이밍 진짜 기가 막히네. 방금 우리 아빠가 폰 돌려줬거든. 그 순간 네 전화가 오네?]“응?”강솔이 눈을 깜빡였다.“돌려줬다고?”걱정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우리 아빠랑 엄마가 짜고 나를 여기로 끌고 온 거야.][비행기 내리자마자 여권이랑 폰 싹 뺏기고.]소담은 씩씩거리며 화를 삭이지 못했다.[와... 몇 년 만에 의기투합하나 했더니, 나 잡으려고 그러는 줄은 몰랐네.]강솔은 순간 멈칫했다.그리고 거의 동시에 깨달았다.이 일에 중현이 얽혀 있을 가능성을.[아, 맞다. 너한테 말할 게 하나 있어.]소담은 지안이 화면에 있는 것을 보고, 중현 이야기는 하지 않은 채 말머리를 바꿨다.“뭔데?”강솔이 물었다.[공항에서 너랑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봤거든? 사진 찍어놨는데 보여줄게.]소담은 사진을 전송하면서 말했다.[진짜 좀 닮았어. 한번 봐봐.]강솔은 사진을 열었다.사진 속 남자는 고급 맞춤 정장을 입은, 마흔 중반 정도의 세련된 인상이었다.잘생긴 데다 기품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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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화

“저랑 같은 반 친구 하나를 꼭 이기고 싶어서요.”은하는 아직 어린데도, 또랑또랑한 목소리에서 묘한 기세가 느껴졌다.“걔한테 증명할래요. 제가 뭐든 다 이길 수 있다는 거.”강솔은 살짝 놀랐다.아이치고 승부욕이 꽤 강했다.“선생님.”은하가 작고 따뜻한 손으로 강솔의 손을 잡았다. 반짝이는 눈동자가 기대를 품고 있었다.“저한테 좀 더 엄하게 가르쳐 주시면 안 돼요? 저... 최대한 빨리 배울 수 있게요.”“좋아.”강솔은 바로 대답했다.그 한마디에, 은하는 곧장 집중력을 끌어올려 열심히 배우기 시작했다.강솔은 전통 무용 분야에서 누가 봐도 정상급이었다.전성기 시절에는 국내에서 다수의 상을 받았고, 결혼 후에도 이 분야에 대한 열정만큼은 단 한 번도 놓지 않았다.둘이 본격적으로 수업에 몰입하자,서재에서 CCTV를 보고 있던 상진은 옆에 앉은 온화한 인상의 남자에게 말했다.“걱정 마. 은하한테 미리 말해 놔서 아무 말도 새어 나올 일 없어.”“게다가 얘가 요즘 고전무용 배우고 싶어 하긴 했잖아.”하도현은 모니터 속 화면을 바라보았다.안경 너머의 눈빛은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근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상진이 턱을 괴며 눈썹을 올렸다.도현이 시선을 돌리자, 상진이 조금 몸을 기울여 속삭이듯 말했다.“논리적으로 보면, 하중현이 밖에 숨겨놓은 그 소아연이라는 여자가 우리가 더 집중해야 할 대상 아니야?”“근데 너는 왜 계속 강솔만 보고 있어? 둘이 이혼한다며.”“이혼하겠다고 한 것뿐이야. 아직 서류 받은 건 아니고.”“그게 뭐가 달라? 결국 이혼은 이혼이지.”상진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중현이 원하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아.”도현은 친동생의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상진은 납득하진 못했지만,애초에 큰 관심도 없었기에 더 묻지 않았다. 자신에게 크게 영향 있는 일도 아니었고.두 사람은 서재에서 모니터를 조금 더 지켜보다,은하가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자연스럽게 별장 밖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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