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잃고서야 알았던 사랑: Chapter 31 - Chapter 40

145 Chapters

제31화

출근한 첫날부터 혼자만 남아서 초과 근무를 해야 했다. 지나윤이 모든 일을 마쳤을 때는 이미 퇴근 시간에서 한 시간이나 지난 뒤였다.“미안, 미안해. 많이 기다렸지?”지나윤은 거의 뛰다시피 해서 FY 사옥에서 나왔을 때, 길가에는 고아라의 차가 비상등을 켠 채 기다리고 있었다.“일단 타고 얘기해.”고아라가 손짓하며 말했다. 평소였다면 당연히 지나윤이 조수석에 탔겠지만, 오늘은 이미 이준혁이 타고 있었다.지나윤이 FY라는 이런 좋은 회사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이준혁과 고아라는, 저녁을 먹으면서 제대로 축하해주자고 약속했다. 하지만 첫날부터 초과 근무를 시킬 줄은 몰랐다.지나윤은 뒷좌석의 이준혁 옆에 나란히 앉았다. 고아라는 자신이 두 사람의 기사라도 된 것 같다면서 장난스럽게 투덜거렸다.세 사람의 웃고 떠들자, 울적했던 지나윤의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러시아워라 도로가 꽉 막혀 있어서, 식당에 도착하는 데 거의 한 시간이나 걸렸다. 이미 날은 완전히 어두워진 상태였다. 배가 고파서 쓰러질 것 같다면서 고아라가 배를 부여잡고 호들갑을 떨자, 그 모습에 지나윤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두 사람이 축하해 준다고 하기에, 지나윤은 그냥 피자집처럼 평범한 곳에서 식사하는 걸로 생각했다. 그 정도만 돼도 충분히 고마웠을 것이다.하지만 고아라와 이준혁이 데리고 간 곳은 ‘골든 하버’였다.‘골든 하버’는 채연서가 점심때 직원들에게 배달 음식을 대접했던 바로 그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으로, 미슐랭 3키 호텔인 ‘골든 하버’ 안에 있는 식당이다.“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마음이 불편해진 지나윤은 거절하려고 했다. 고아라와 이준혁도 평범한 직장인이라 월급도 많지 않을 텐데, 자기 때문에 이런 고가의 식당까지 올 필요는 없었다.정 여기서 먹고 싶다면 자신이 사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고아라와 이준혁은 이미 예약까지 마쳤다면서 완강하게 밀어붙였다.자리에 앉은 세 사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하면서 대화도 끊이지 않았다.“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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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화

유시진을 본 순간, 지나윤은 움찔했다.유시진의 기세는 원래부터 강했다. 그저 서 있기만 할 뿐인데도, 고아라와 이준혁은 끽소리도 내지 못했다.지나윤이 보기에도, 우연히 여기서 마주친 게 아니라... 애초부터 자신을 찾으러 온 것처럼 보였다.유시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날카롭게 그녀만을 응시했다. 바늘처럼 찌르는 남자의 시선에 지나윤의 심장이 불안하게 요동쳤다.“나를... 사적으로 조사했더군.”유시진의 싸늘한 목소리에서는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그리고 지나윤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여자의 팔을 거칠게 잡고 의자에서 일으켰다.고아라와 이준혁은 눈앞에서 지나윤이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내 아내와 단둘이 얘기할 때는... 다른 사람은 끼어들지 말았으면 합니다.”유시진이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지만, 그 말에 두 사람은 그대로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두 사람은 앞서가는 유시진과 지나윤의 속도를 점점 따라잡지 못했다.지나윤을 끌고 간 유시진은 곧바로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 넣었다.남자의 손 힘이 어찌나 센지 지나윤은 도저히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와서도 유시진은 여전히 지나윤의 팔을 놓지 않은 채 곧바로 77층 버튼을 눌렀다.그 위층이 호텔이라는 건 지나윤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가 뭘 하려는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어차피 답을 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에.잠시 후 77층에 도착하자, 유시진은 카드키로 문을 열고 그녀를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객실은 깜짝 놀랄 정도로 컸다. 이 미쉐린 3키 호텔에서도 가장 비싼 로열 스위트룸인 게 분명했다.지나윤은 자신도 모르게 재채기를 했다. 그때 옆에서 유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FY는 직원 채용 기준이 아주 까다로운데... 네가 어떻게 들어간 거지?”지나윤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서 그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했다.“그냥... 정상적으로 지원해서 들어간 거야.”유시진이 비웃음을 흘리면서 말했다.“어떤 인사 담장자가 고졸 지원자를 뽑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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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화

“네가 어떤 인맥을 써서 FY에 들어갔든 상관없어. 하지만 날 배신한다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입으로는 잔혹한 말을 뱉으면서도, 유시진은 손에 든 꽃다발을 지나윤에게 내밀었다.“네가 분홍 장미가 싫다고 해서 이번엔 빨간 걸로 샀어... 그리고 굳이 연서하고 비교할 필요도 없어.” “연서는 능력이 뛰어나서 FY에 들어간 거니까, 네가 걔보다 못한 건 당연해. 난 애초에 너무 뛰어난 여자가 아내인 걸 바라지도 않아.”지나윤이 꽃을 받지 않자 억지로 꽃다발을 안겨준 뒤, 유시진은 자연스럽게 어깨를 감싸면서 스위트룸 안쪽으로 이끌었다.그 순간, 지나윤의 몸은 본능적으로 굳어졌다.그녀는 급히 꽃을 돌려준 뒤 고개를 돌리면서 나가려고 했다.하지만 유시진이 그런 기회를 허용할 리 없었다.곧바로 지나윤을 벽으로 몰아붙이더니, 고개를 숙이면서 억지로 키스하려고 했다.지나윤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유시진의 기억 속에서, 지나윤이 이렇게까지 거칠게 저항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우리 이미 이혼하자고 했어! 이런 식으로 하지 마!”지나윤의 입에서 다시 ‘이혼’이라는 말이 나온 순간, 유시진의 김이 팍 샌 표정이었다.“이런 수법도 너무 반복되면 지루해져, 난 이혼 안 해. 내 욕구를 채워주는 건... 법적으로 아내인 네 책임이고.”유시진이 한두 번 한 말이 아니다.집안일을 하는 것도 지나윤의 ‘책임’.남편의 욕망을 받아주는 것도 지나윤의 ‘책임’이었다.자신이 유산하던 그날 밤에도 같은 말을 하면서 자신을 밀어붙였다는 걸, 지나윤은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그리고... 내 아이는 사라졌지.’짝!로열 스위트룸이 순간 숨막힐 듯한 정적에 잠겼다.자신이 뺨을 맞았다는 사실조차 곧바로 인지하지 못했던 유시진은, 얼굴에 화끈한 느낌이 번지고 나서야 비로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그는 충격이 가득한 눈으로 눈시울을 붉히면서 노려보는 지나윤을 바라보았다.새하얀 지나윤의 피부와 대비되는 붉어진 눈가와 불꽃처럼 강렬한 눈빛.고개를 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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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화

고아라와 이준혁이 77층에 도착했을 때, 복도 끝 한 객실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둘이 재빨리 그 방으로 달려가자, 예상한 대로 룸 안에는 지나윤이 있었다.지나윤은 이미 옷매무새와 머리까지 다시 정리한 상태였다.하지만 고아라와 이준혁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바닥 곳곳에 널려 있는 장미꽃을 보자,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지나윤이 걱정이 된 두 사람이 전화를 걸자, 지나윤은 77층에 있다는 말만 했다.지나윤이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두 사람은 스피커폰으로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나윤아, 그 찌질한 새끼는?”고아라는 당장이라도 한바탕 해 볼 듯한 기세였다.지나윤은 담담하게 말했다.“갔어... 채연서한테.”“X발...!”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내내 고아라는 유시진을 욕했다. 지나윤은 혹시 이준혁이 듣기 거북할까 봐 걱정했지만, 이준혁은 오히려 시원하다는 듯이 말했다.“계속해요. 들을수록 시원한데요?”그날 밤 고아라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지나윤의 집에 있기로 했다. 친구를 계속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지나윤은 굳이 함께 있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오늘 유시진에게 받은 충격과 상처가 적지 않다는 건 알고 있지만, 하지만 어린애도 아닌데 자신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게다가 고아라는 내일 출근도 해야 하는데, 여기서 자고 출근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하지만 지나윤이 뭐라고 해도 고아라는 완강했다. 게다가 이준혁까지 고아라가 있는 게 낫겠다고 설득하자, 결국 지나윤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삼호거리의 오래된 집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방은 두 개지만 침대는 하나뿐이었다.“아라야, 불편할 텐데 미안해.”“너하고 같이 자는 게 뭐가 불편해? 난 좋은데?”고아라의 장난기 어린 말에 지나윤은 피식 웃었다.두 사람 모두 내일 출근해야 했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에 나란히 누워서 수다를 떨자, 마치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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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화

“그러니까, 고등학교 때 왜 그렇게 백이천을 안 받아주나 했더니... 이제야 알겠네. 유시진 때문이었어.”고아라가 백이천 이야기를 꺼내자, 지나윤의 가슴이 답답해졌다.‘그 이름은... 지금 듣고 싶지 않았는데.’방 안이 잠시 조용해지자, 고아라가 이마를 탁 치면서 말했다.“아 미안, 미안해. 내가 괜한 소리를 했네. 우리 딴 얘기하자... 예를 들면 이준혁? 그 친구도 꽤 잘생겼잖아? 유시진만큼은 아니라도 완전 상큼한 영계인데?”“유부녀한테 영계를 유혹하라는 거야?”지나윤은 자기도 모르게 실소할 수밖에 없었다.“그게 뭐 어때서? 네 남편도 유부남인데도 맨날 그 여우 같은 년하고 찰싹 붙어서 다니잖아! 남편의 의무는 개나 주고 말이야!”일단 유시진 이야기가 나오면, 고아라의 입에서는 절대 좋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시간을 보려고 핸드폰을 든 지나윤은 습관처럼 SNS를 열었다.유시진은 SNS를 거의 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오늘은 드물게 글을 올려놓았다.사진 속은 낯선 방이었다. 방 인테리어도, 가운데 커다랗게 놓인 킹사이즈 침대도 지나윤은 전혀 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그 아래 우원재의 댓글을 보고 곧바로 알 수 있었다.[나랑 술 약속은 미루더니, 알고 보니 연서하고 있었네? 나보다 연서가 먼저야?]“네 쓰레기 남편이 또 뭐라고 했어?”지나윤의 얼굴만 보고도 고아라는 단번에 알아차렸다.“별거 아니야. 그냥... 유시진이 채연서 집에서 SNS를 올렸어.”“와 진짜... 양심도 없네? 너한테 대놓고 시위하는 거야?”“아마도... 그런 모양이야!”지나윤은 한숨을 내쉬면서 호텔에서 있었던 일을 간단히 설명했다.“내가... 그냥 채연서한테 가라고 했어. 그러니까 일부러 나한테 보여주려고 SNS에 올린 걸지도... 모르지.”마지막으로 갈수록 지나윤의 목소리는 점점 흔들렸다.‘일부러 내게 보이려고 SNS에 올린 거라고 했지만, 정말 내 반응을 신경이나 쓸까?’‘아니야, 아닐 거야.’“아, 진짜 너도... 답답하네.”참다 못한 고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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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화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문혜윤 팀장 책상 위에 놓인 쇼핑백이 지나윤의 눈에 들어왔다.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그 쇼핑백은 오늘 아침 채연서가 들고 들어온 것이었다.샤넬 실크 스카프 전용 쇼핑백이었다.“무슨 일이지?”지나윤을 보자마자 문혜윤은 짜증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팀장님, 제가 제출한 디자인 시안에 대해 여쭤보고 싶어서요...”지나윤은 조심스럽게 말을 골라 이어갔다.“제 디자인 열 가지 중에 하나도 선정되지 않은 게... 좀 의아해서요. 제 디자인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조언을 좀 듣고 싶습니다.”지나윤의 태도는 공손했지만, 문혜윤은 오히려 눈을 흘겼다.“나한테 따질 시간에 자기 실력이나 더 끌어올리지 그래. 채연서 씨 좀 봐. 그쪽하고 나이도 비슷하고 둘 다 신입인데, 왜 걘 셋이나 뽑히고 넌 하나도 못 뽑혔겠어?”“그래도 좋은 마음으로 어떤 문제가 있는지 물었겠지만, 내가 네 대학 선생이야? 떨어진 이유를 자신이 찾지 못한다면, 채연서 씨한테 배워서 미적 감각을 좀 키우던가.”“팀장님...”“내 점심시간 뺏지 마. 점심 동안 스스로 반성이나 해.”문혜윤은 지나윤을 향해 손사래를 쳤다.그리고 그 말만 남긴 뒤,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지나윤은 사실상 쫓겨난 것이나 다름없었다....점심시간이 되자 직원들은 각자 어울려서 식사를 하러 나갔고, 근처에서 가볍게 쇼핑을 즐기기도 했다.하지만 지나윤은 사무실에 혼자 남아 있었다.밥이... 도저히 넘어가지 않았다.팀장에게 혼난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열 개의 디자인 중 하나도 통과하지 못한 이유를 스스로 찾지 못하는 게 더 큰 문제였다.채연서의 세 가지 디자인을 다시 살펴봐도, 자신의 디자인이 그것보다 떨어진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하... 정말 내 미적 감각이 뒤처진 걸까?”지나윤은 깊은 자책의 늪에 빠져들었다.“밥도 안 먹고 이렇게 열심히 하는 거예요?”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피터가 서 있었다.“디자인에서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표정이 잔뜩 구겨졌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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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화

지나윤은 유시진이 뭘 하려는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아마 FY와 미팅이 있어서 왔거나, 혹은 채연서에게 주려고 분홍 장미를 들고 온 김에 일도 보러 온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이유가 뭐든, 굳이 자신의 앞에 나타날 필요는 없었다.지난번 호텔 일 이후로, 지나윤은 유시진과 밀폐된 공간에 단 둘만 있는 게 꺼려졌다.사실 두려움과 긴장감이 동시에 밀려왔다.뒷짐을 진 두 손은 꽉 깍지를 낀 채, 유시진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바닥만 내려다봤다.회의실 공기는 서늘했다. 에어컨 때문인지, 아니면 유시진 때문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유시진은 문을 막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지나윤의 불안감은 점점 커졌다.“다... 들었어.”마침내, 유시시진이 입을 열었다.고개를 든 지나윤이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뭘 들었다는 건데?”“너희 팀에서 유일하게 디자인 시안 하나도 통과하지 못 한 사람이 너라면서... 창피하지도 않아?”그녀는 유시진이 무슨 중요한 말을 하려나 싶었지만, 뜻밖에도 그런 얘기였다.“디자이너라면 자기 디자인이 인정 못 받는 일도 있지. 그 정도도 못 견딘다면... 차라리 직업을 바꾸는 게 나을 거야.”지나윤의 말에 유시진은 비웃듯 웃음을 흘렸다.“그건 자기 위로인가? 넌 애초에 디자인 체질이 아니라는 걸 사실이 증명하고 있잖아. 억지로 붙들고 있지 말고 그냥 재능이 없다는 걸 인정해.”그 말에 지나윤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대체 왜 유시진이 굳이 회사까지 와서 자신의 디자인을 깎아내리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둘 사이의 공기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 팽팽해졌다.갑자기 유시진이 그녀의 팔을 확 잡아챘다.“집으로 가자.”깜짝 놀란 지나윤은 그저 멍할 뿐.“기본적인 자존심이라도 남아 있다면 일을 그만두고, 얌전히 집으로 돌아와.”지나윤은 그의 손을 거세게 뿌리쳤다.유시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언제까지 이럴 거야? 너도 알잖아. 내가 인내심 많은 사람 아니라는 거.”지나윤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그 인내심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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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화

사람들이 하나둘씩 들어오더니 금세 회의실이 가득찼다.FY 각 부서의 고위급 임원들과 PO 부서 직원들이 모두 참석했다.외부 손님인 유시연에게 피터가 앞줄의 좌석을 준비했지만, 그는 채연서를 보자마자 곧바로 그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이를 본 장연지와 나미연은 곧바로 수근거렸다.채연서는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우쭐함을 감출 수 없었다.회사의 모든 사람들이 유시진이 자신의 남자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되길 바라는 눈치였다.피터가 블라인드를 내리자 회의실 안이 어두워지면서, 프로젝터 불빛만 공간을 밝혔다.지나윤이 프레젠테이션 화면 앞에 서자, 사람들 사이에서 채연서와 나란히 앉아 속삭이는 유시진의 모습이 유독 눈에 띄었다.이번 회의는 피터가 지나윤을 위해 따로 준비한 자리였다.지나윤의 열 가지 디자인 시안을 대형 스크린에 띄운 뒤, FY 고위층 모두가 직접 평가하는 방식으로.처음에 유시진은 지나윤의 디자인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그는 채연서로부터 지나윤의 디자인이 하나도 통과하지 못 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그런 주제에 뛰어난 엘리트들이 가득한 회사에 있는 것 자체가 굴욕을 자초한 거라고 여겼다.하지만 디자인이 하나씩 화면에 뜨자, 채연서는 유시진이 더 이상 자신에게 말도 걸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시선은 스크린에 고정된 채, 채연서가 여러 번 소매를 잡아당겨도 전혀 반응이 없었다.디자인 시안 공개가 모두 끝나고 피터가 블라인드를 올리자, 회의실이 다시 환하게 밝아졌다.“지금부터 평가하겠습니다. 90점 이상이면 통과입니다.”피터의 말에 PO 부서 디자이너들은 일제히 떠들썩해졌다.문혜윤 팀장은 원래 60점 이상이면 통과라고 했지만, 지나윤은 그 기준조차 넘지 못했다.그런데 90점이라니, 상상도 못할 점수였다.사람들은 처음엔 피터가 쇼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지나윤이 피터의 잠자리 상대라서 FY에 들어왔다는 소문이 회사 전체에 도는 중이었고, 그래서 아무 실력도 없는데 문혜윤이 막았다는 뒷말까지 있었다.그런데 지금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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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화

어느새 회의실에서 다른 부서 사람들은 모두 빠져나가고, 심단비와 디자인 팀의 팀장들만 남아 있었다.모두 지나윤과 함께 신제품 라인의 공정 개선에 대해서 진지하게 논의하고 있었다.지나윤이 PO 부서 소속이지만, 정작 같은 팀의 동료들은 체면이 서기는커녕 하나같이 풀이 푹 죽어 있었다.채연서마저도.“왜 그래?”옆에 앉은 채연서의 침울한 표정을 눈치챈 유시진이 물었다.채연서는 유시진의 손을 잡고 회의실 구석으로 데려갔다.“시진아... 너한테만 말할게. 사실... 지나윤이 말한 그 새 가공 방식... 그건 내가 생각했던 거야.”“뭐?”유시진의 얼굴이 굳어졌다.채연서는 ‘쉿’ 손짓하며 고개를 숙였다.“지나윤이 자기 디자인을 좀 봐 달라고 해서... 별다른 생각 없이 내가 떠올렸던 새로운 공정 얘기를 했거든. 근데 그걸... 회의에서는 자기 아이디어인 것처럼 말해버린 거야...”채연서의 눈가가 붉어지자, 유시진은 바로 돌아서서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시진아, 어디 가?”채연서가 급하게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네 억울함을 풀어야지.”유시진의 목소리는 단호했다.“안 돼... 제발 그러지 마...”채연서는 거의 울먹이면서 필사적으로 붙잡았다.“너도 알잖아... 지나윤하고 피터 상무가 좀... 가깝거든. 회사에서도 둘이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어...”“오늘 점심 때 회사 동료가 피터 상무가 지나윤을 안고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어. 지금 네가 가서 말해도 아무도 안 믿을 거야...” “그리고 네가 가고 난 뒤에... 피터 상무가 날 어떻게 대할지도 모르잖아...”여자의 목소리는 갈수록 작아졌다. 그때 회의를 마친 지나윤이 회의실 문을 열고 나왔다.그리고 얼굴을 돌리는 순간, 구석에서 손을 잡고 있는 유시진과 채연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유시진 역시 지나윤을 보고 있었지만, 그 시선은 노골적인 경멸로 가득했다.지나윤은 오늘 자신의 디자인을 본 유시진이 몰라봤다고 말하지는 않더라도, 그래도 전업주부 말고도 잘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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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화

소문은 지나윤이 속한 PO 부서에서부터 퍼져 나갔다.동료들은 새로운 공정의 최초 아이디어는 채연서의 것이고, 지나윤이 그걸 훔쳐서 발표했다고 떠들어댔다.지나윤이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하지만 이미 소문이 굳어져서 손쓸 길이 없는 데다가, 그럴 듯하게 덧붙여져서 마치 사실처럼 굳어졌다.지나윤이 설명해도 오히려 변명처럼 보일 뿐, 아무도 믿지 않을 게 뻔했다. 괜히 더 구차해 보일 뿐이었다.사람 마음속의 편견은 거대한 산과 같아서,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가 없다는 말처럼.지나윤은 회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처음부터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그래도 어쨌든 PO 부서에서 내놓은 시리즈가 대히트를 쳤고, 피터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지나윤은 전혀 거리끼는 바가 없었다.오늘도 지나윤은 야근이었다.블루웨이브 엔터에서 투자한 현대 도시의 패션을 소재로 한 대작 드라마 쪽에서 주얼리 디자인이 필요해서 FY와 협력하고 있었다. 마침 FY PO 부서에서 내놓은 시리즈가 대성공을 거두자, FY에 적극적으로 협업을 제안하면서 프로젝트 책임자로 지나윤을 지목한 것이다.그녀가 밤 여덟 시가 넘도록 작업하고 FY를 나왔을 때, 이미 바깥은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빵빵!도로변에 있던 차에서 지나윤을 향해 경적을 울렸다.바로 최신형 페라리 스파이더였다.고전적인 레이싱 카의 레드 메탈 도장은 지나가는 사람도 한 번쯤 돌아보게 만들 정도로 강렬했다.지나윤이 아는 사람 중 이런 차를 모는 사람은 없었다.유시진은 이런 스포츠 카보다는 비즈니스 세단을 선호했다.그래서 유시진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차에 다가갔다.“지 선생님, 저예요.”차의 지붕이 열리면서 안에 앉아 있는 이준혁이 보였다.이준혁은 여전히 편한 운동복 차림에, 맑고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아무리 봐도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들여 놓은 대학생 같은 모습은... 페라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멍해진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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