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파혼 후 시작된 그의 집착: Chapter 301 - Chapter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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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1화

육가희는 완전히 혼이 빠져버린 상태였다.갑자기 차창을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에 고개를 확 돌리자, 차창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방주헌을 마주할 수 있었다.순간, 심장이 그대로 내려앉는 것 같았다.“사람은 어때?”육남혁이 차에서 내리며 물었다.“아직 숨은 붙어 있어요.”방주헌은 여전히 차창을 두드리며 낮게 웃었다.“안 죽은 거 다 알고 있으니 그만 나오지? 내가 직접 끌어내리기 전에.”육가희는 나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하지만 사고 충격으로 잠금장치가 망가져 있었는지, 방주헌이 문을 잡아당기자, 차 문이 그대로 열려 버렸다.육가희는 다리가 후들거리는 상태로 비틀거리며 차에서 내려왔다.조금 전까지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던 탓에, 온몸에 힘이 풀려 그대로 눈 위에 주저앉았다.온몸이 떨렸다.“육가희.”육남혁이 위에서 내려다보았다.“대단하네. 대낮에, 그것도 백화점에서 사람을 밀어?”그는 안경을 벗어, 렌즈에 묻은 눈을 천천히 닦았다.안경을 벗는 순간, 그의 눈빛이 돌변했다.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주변의 공기마저 날카롭게 갈라졌다.안경은 그저 그를 억누르던 장치였다.지금의 육남혁은 차갑고, 무자비하고, 한 치의 여지도 없었다.육강민을 누를 수 있는 사람, 그는 결코 평범할 리 없었다.펜을 들고 사람을 가르칠 수도 있지만 필요하다면 냉혹하게 사람을 부술 수도 있는 남자였다. “큰, 큰 아빠… 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어서…”육가희는 기어가듯 다가가 그의 바짓자락을 붙잡으려 했지만 육남혁은 망설임 없이 발로 걷어찼다.“퍽!”너무도 거센 힘에, 육가희는 그대로 차량에 부딪혔고, 고통에 숨이 턱 막혀 눈물이 반사적으로 터져 나왔다.“손대지 마.”육남혁이 눈썹을 치켜올렸다.“더러워.”방주헌은 혀를 차며 차에 기대선 채, 그저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이건 육가희가 알던 육남혁이 아니었다.육남혁은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일어나.”차분한 그의 목소리에 담긴 압박감은 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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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2화

육가희의 차량이 발견됐을 때, 차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망가져 있었다.차는 남아 있었지만, 사람은 사라졌다.폭설이 내린 탓에, 주변의 모든 발자국과 흔적은 눈 아래 완전히 묻혀버렸다.도망칠 때를 대비해 일부러 CCTV가 없는 길을 골랐기에 육가희는 마치 이 세상에서 증발이라도 한 사람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육광진은 이성을 잃었다.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맥을 총동원했지만, 딸을 찾을 수 없었다.아들은 미쳤고, 딸은 행방불명.대대로 혈통과 자손을 그 무엇보다 중시해 온 그에게, 설마 이대로 대가 끊기는 건 아닐까 하는 공포가 밀려왔다. *육가희가 서은주를 밀친 사건은 명확한 CCTV 증거가 있었기에 경찰은 서은주의 회복을 방해하지 않았다.병원에서 사흘간 몽롱한 상태로 각종 검사를 받았지만, 그녀의 두통은 가라앉지 않았다. 임신 중이었기에 쓸 수 없는 약이 너무 많았다.결국 그 고통은 오로지 그녀가 견뎌야 했다. 통증이 너무 심해 서은주는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고, 눈은 점점 충혈되었지만, 머리는 여전히 지독하게 쑤셨다.“은주야…”육강민은 그녀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하지만 함께 밤을 새우며 버티는 것 말고는, 그녀의 고통을 대신해 줄 방법이 없었다.“우리 오빠한테는 말하지 마요.”서은주는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통증이 극심해질 때마다, 손톱이 그의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알겠어.”대답은 했지만, 서은주의 상태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육강민의 불안은 점점 커졌다.‘대체품’이니, ‘눈동자’이니 하던 문제는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두 사람 모두 입에 올리지 않았다.그러다 이틀 뒤, 유주만이 육강민을 사무실로 불렀다.방 안에는 서은주의 주치의도 함께 있었다.그 순간, 육강민의 가슴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책상 위에는 각종 검사 결과가 수북이 쌓여 있었지만 전문 용어들뿐이라 그는 알아볼 수 없었다.“교수님, 은주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건가요?”육강민이 미간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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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3화

서은주는 세상이 끝났다고 생각할 수 있다.육씨 가문과 사적인 인연이 있었고 무엇보다 서은주를 각별히 아꼈던 유주만은 눈가가 붉어져, 목소리까지 잠겨 있었다.“시간이 길어질수록 산모에게 불리해요. 하루라도 빨리 약을 써야 하니, 신중하게 생각해야 해요.”육강민은 넋이 나간 채로 사무실을 나섰다.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무력감이 온몸을 휘감아 그를 통째로 삼켜 버릴 것만 같았다. 정말로 두 사람 모두 살릴 방법은 없는 걸까?왜 하필 그에게 이런 선택을 맡기는 걸까?그는 담배 한 갑을 샀다.불을 붙이긴 했지만 피우지 않았다.손가락 사이에 낀 채로, 불씨가 깜박이다 사그라지고 모조리 타들어 갈 때까지 그대로 두었다.“아빠, 여기서 뭐 해요?”두툼한 패딩을 입은 육민찬이 통통한 몸을 흔들며 달려왔다.모자를 푹 눌러쓴 모습이 꼭 작은 눈사람 같았다.서은주의 끼니를 챙기러 온 한주미와 함께 오는 길이었다.한주미는 먼저 병실로 들어가고, 그 자리에 부자만 남았다.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려 발로 비벼끄던 육강민은 아들이 품에 안고 있는 장난감을 힐끗 봤다.“이번엔 또 누가 사줬어?”눈이 붉게 충혈돼 있었지만, 아들 앞에서는 어떻게든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이건 내 거 아니고 동생 거예요”육민찬은 자랑하듯 장난감을 내밀었다.그리고 진지하게 물었다.“아빠, 동생이 좋아할까요?”“당연하지.”육강민은 잠긴 목소리로 답하며 아이를 살며시 끌어안았다.“민찬이는 남동생이 좋아, 여동생이 좋아?”“난 다 좋아요!”아이가 눈을 반짝였다.“한 번에 둘은 안 돼요? 내 친구 기준이네 엄마는 한 번에 남동생 둘을 낳았는데 엄마는 안 돼요?”육강민은 희미하게 웃었다.“엄마는 아마 힘들 거야.”“엄마가 아파서죠?”“…그래.”“그래도 유주만 할아버지가 있잖아요! 그 할아버지 엄청 대단해서 못 고치는 병도 없대요! 그러면 엄마도 곧 나을 테니 해낼 수 있을 거예요. 그때면 난 남동생도 있고 여동생도 있는 거죠.”녀석은 확신에 차 있었다.육강민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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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4화

육강민은 의료진에게 부탁해 당분간 그녀에게 정확한 상태를 알리지 말아 달라고 했지만, 서은주는 이미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있었다.회진이 있을 때마다 에둘러 묻곤 했기에 의대 수석 출신인 그녀를 속이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았다. 육강민은 집안 인맥을 총동원해 국내외 권위자들에게 자문했다. 그러나 돌아온 결론은 하나같이 낙관적이지 않았다.두뇌를 쪼개는 듯한 그 통증은 보통 사람이 버티기 힘든 수준이었다. 설령 두통을 참아낼 수 있다고 해도, 뇌에 고인 어혈은 장기간 압박을 지속할수록위험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게다가 아이 역시 충격을 받은 만큼, 당장은 별다른 이상이 없어 보여도, 건강한 출산을 장담할 수는 없었다.무엇보다 서은주는 장기 입원이 불가피했다.이 사실을 더는 숨길 수 없었다.소식을 들은 강정한이 도착했다.이 상황을 강씨 가문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 그는 혼자 먼저 경성으로 왔다.병실에서 서은주를 본 순간, 그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여동생이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고 몸 여기저기에 충돌의 흔적들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오빠.”서은주는 여전히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여전히 부드러운 눈매였다.“나도 아기도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요.”강정한은 가슴이 저렸다.이게 어떻게 괜찮은 상태란 말인가!“서은주 씨, 검사하러 가셔야 합니다.”그때, 간호사가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그 말에 침대에서 내려오던 서은주는 흐릿한 시야 때문에 슬리퍼에 발을 제대로 넣지 못해 맨발이 그대로 바닥을 밟고 말았다. 얼굴이 굳어버린 강정한이 육강민을 바라봤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허리를 굽혀 바닥을 딛고 있던 그녀의 발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조심해야지.”그는 휴지를 꺼내 발을 닦아 주고, 슬리퍼를 다시 신겨 주었다.“고마워요.”서은주는 웃으며 말했다.“같이 갈까?”강정한이 물었다.“괜찮아요. 조금 흐릿할 뿐이지, 아예 안 보이는 건 아니에요.”서은주가 나가자, 병실에는 무거운 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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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5화

서은주의 허리는 예전처럼 가늘지 않았다.육강민은 한때 자신이 가는 허리를 유난히 좋아한다고 생각했었다.하지만 외모 따위는 전혀 상관없이 그 사람이 서은주라면 된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그의 손길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불룩한 배 위에 머물렀다.그 순간, 아이는 마치 반응이라도 하듯 몇 번 꼼지락거렸다.“은주야, 녀석이 방금 나 찬 거지?”“네…”서은주는 낮게 대답했다.이건 초음파 사진 속 검은 점 하나가 아니라 분명 살아 숨 쉬는 생명이었다.이 생명의 존재를 몸으로 느낀 적이 있었는데 포기하라고?육강민은 그럴 수 없었다.하지만 서은주의 상태는 더는 미룰 수 없었다.그는 반드시 결정을 내려야 했다.육강민은 그녀를 품에 안은 채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가볍게 지분거렸다.턱에 자란 옅은 수염에 서은주는 눈살을 찌푸리며 작게 투덜거렸다.그러다 잠시 후, 그녀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밖에 아직 눈 와요?”“응, 내리고 있어.”올해 경성의 겨울은 유난히 빨리 찾아왔다.눈은 며칠째 그쳤다가 내리기를 반복했고, 최근 병문안을 왔던 방주헌은 길이 너무 미끄럽다며 투덜댔다.“눈 보고 싶어요.”“지금?”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육강민은 말없이 그녀를 부축해 침대에서 일으켰다.두 사람은 함께 창가로 걸어갔다.시야가 완전히 보이지 않는 건 아니었다. 다만, 눈송이의 형태가 흐릿할 뿐이었다.그녀는 창문을 더듬어 살짝 열어젖혔다.그 순간, 차가운 바람이 눈발을 몰아 얼굴로 들이쳤다.실내의 온기가 순식간에 흩어지고, 눈송이가 그녀의 뺨에 닿았다.서은주가 손을 밖으로 내밀어 눈을 받아보려 하자 육강민이 황급히 그녀를 막으며 창문을 닫았다. “감기 들면 어쩌려고 그래.”육강민은 그녀 얼굴에 묻은 눈을 닦아냈다.“안 추워?”“안 추워요. 그냥 눈 갖고 놀고 싶었어요.”“너 왜 이렇게 애 같아.”“강민 씨…”서은주는 그의 얼굴을 더듬었다.차가운 손끝이 이마에서, 코끝으로, 천천히 내려왔다.그녀의 눈이 붉어졌다.“이렇게 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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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6화

사방에서 등을 돌렸을 때 찾아온 아이였다.예상치 못한 임신이었지만, 아이를 포기하려 한 적 없었다. 그러니 언젠가 잃게 될 거란 것도 그녀의 사전에는 있을 수 없었다.핏줄로 이어진 이 아이의 움직임 하나하나까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초음파 사진 속에서 조금씩 자라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녀는 아이의 성장 과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기록했다.그 기분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경이로웠다.엘리베이터에서 사고를 당했을 때조차, 아이는 끝까지 살아남으려 애썼다.그 정도의 충격이라면 아이에겐 너무나 치명적이다.그럼에도 이렇게 완강하게 버티고 있었다.서은주는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자신의 목숨과 바꿔서라도 이 아이의 안녕을 지켜주고 싶었다.모성애가 위대하다고들 하지만, 엄마가 되기 전인데도 자신이 이렇게까지 아이를 위해 희생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서은주는 육강민의 품에 기대 소리 없이 울었다.눈물이 그의 옷을 적시고, 천천히 피부로 스며들었다.육강민은 그녀를 더 꼭 안았다.“그래, 포기하지 않을게.”서은주는 그제야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리고 일주일이 흘렀다.새해가 가까워질수록 서은주의 두통은 점점 잦아졌다.밤을 꼬박 새우는 날이 늘었고, 몸은 눈에 띄게 야위어 갔다.시력도 계속 나빠졌지만, 그녀는 억지로라도 밥을 먹으려 애썼다.이 병의 실상을 알고 있는 사람은 육강민과 강정한, 단 두 사람뿐이었다.주변 사람들은 아이를 낳고 약 쓰면 금방 나아질 거라고 막연히 믿고 있었다.그 무렵, 진백현이 병문안을 왔다.육가희가 실종된 후, 육광진이 그를 찾아온 적이 있었고, 서은주의 상황도 자연히 전해 들었다.서은주는 너무 야위어 안쓰러울 정도였다.하지만 이제 진백현은 그녀를 안아줄 자격도, 위로할 위치도 아니었다.손리정은 방학을 맞아 잠시 강성으로 내려갔다가 곧 다시 경성으로 돌아왔다.그녀가 침대 쪽으로 다가가서야 서은주는 그녀를 알아본 듯했다.“리정이야? 언제 돌아왔어?”손리정은 눈가가 붉어졌지만 애써 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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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7화

의사로서, 그들 역시 가능한 한 서은주가 아이를 무사히 낳길 바랐다.하지만 현실적인 조건은 한쪽만 지킬 수 있었다.“만약 제가 반드시 아기를 살리기로 했을 때, 출산 후 아내가 수술을 받게 된다면, 두 사람 모두 무사할 가능성은 어느 정도입니까?”유주만이 먼저 입을 열었다.“10퍼센트도 안 됩니다.”고개를 조용히 끄덕이는 육강민은 이를 악물었다.그의 얼굴은 어둡게 굳어있었다.“두 분 다 아직 젊으시니 아이는 앞으로도 다시 가질 수 있지만 지금 수술 시기를 놓치면 산모와 뱃속 아이 모두 지키지 못할 수도 있어요.”의사는 3일 이내엔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덧붙였다.육강민이 사무실을 나섰을 때, 복도 끝에 강정한이 서 있었다.눈이 마주치자, 서로의 마음을 이해한 듯,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와 잠시 걸었다. 한겨울의 칼바람 속, 거리마다 새해를 맞을 준비로 분주했다.“이제 더는 미룰 수 없는 거지?”강정한의 목소리 역시 심하게 잠겨 있었다.“네.”“결정은 했나? 아이를 잃으면 은주랑은 끝장일 수 있어.”“저는 은주가 무사하길 바랍니다.”육강민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며 차가움 바람에 흩어졌다.그 후 이틀 동안, 서은주는 연달아 각종 검사를 했다.그날 밤, 불현듯 잠에서 깬 육강민은 병상에 서은주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다행히 그녀는 병실 창가에 서서 가만히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육강민은 외투를 들고 그녀에게 다가갔다.“왜 일어난 거야?”“잠이 안 와요.”서은주는 전보다 훨씬 야위어 있었다.“머리가 또 아픈 거야?”“아니요.”그가 다시 말을 이으려는 그때, 서은주가 먼저 물었다.“어떻게 하기로 했어요?”너무나도 예민한 그녀의 반응에 숨이 턱 막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나 의사예요. 요즘 이렇게 자주 검사 받는 거, 다 수술 준비를 위한 거잖아요.”그녀는 단지 시력에 문제가 있을 뿐, 바보는 아니었다. “아이를 지키겠다고 했잖아요.”“은주야.”육강민이 그녀를 품속에 안았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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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8화

육강민은 손을 뻗어 그녀의 몸을 천천히 돌려세웠다.시선을 마주하며 육강민은 그녀의 야윈 얼굴을 쓰다듬었다. “은주야, 난 너를 사랑해.”아마도 아주 오래전부터 그는 이미 서은주를 사랑하고 있었다.단지 자신도 모르게 사랑했을 뿐이다.서은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육강민은 한층 더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그녀를 품에 안았다.그렇게 부드럽게, 깊숙이 탐하며 속삭였다. “은주야, 아주 오래전부터 널 사랑하고 있었어.”그러나 서은주는 가벼운 웃음을 터뜨릴 뿐이다.“하지만 난 이제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고 싶지 않아요.”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하고 싶지 않은 거였다.그녀는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덧붙였다.“내 몸 상태는 내가 제일 잘 알아요. 아마 눈은 평생 회복되지 않을 거예요. 다시는 그 사람이 될 수 없고요.”육강민의 심장이 바늘에 찔린 듯 아려왔고 억눌린 통증이 숨통을 막았다.“내가 너를 사랑하는 건 그 사람을 닮아서가 아니야.”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지금만큼은 온전히 그녀를 사랑한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이 눈동자 때문이 아니라, 서은주이기 때문이다.“이젠 중요하지 않아요.”서은주의 목소리는 담담했다.함께한 세월을 통해 그녀가 목소리는 부드러워도 고집은 쉽게 꺾이지 않는 사람이란 걸 육강민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육강민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늦었으니, 일단 자고 나중에 얘기하자.”“그냥 하는 말이 아니에요.”“……”다음 날, 육강민은 다시 서은주의 주치의를 찾았다.그 사이 병실에는 강정한이 남아 서은주를 지키고 있었다.병실로 돌아왔을 때, 그곳엔 한주미만 남아 있었고 보온병에서 따끈한 생선국을 그릇에 담고 있었다.“은주는요?”“강정한이랑 검사하러 갔어.”한주미는 국을 식히며 말했다.“몸에 좋은 북엇국이야.”“검사요?”육강민의 몸이 순간 굳었다.“응.”한주미는 고개를 끄덕였다.요즘 서은주는 검사가 잦았기에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하지만 오늘은 어떤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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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9화

서은주가 사라진 후, 그녀에 대한 소식은 조금씩 들을 수 있었다. 사실 두 사람 모두 틀린 건 아니었다.다만 모두가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아이를 지키고 싶어 했던 서은주의 마음을 과소평가했을 뿐이다. 육강민은 침실로 돌아왔다.방 안에는 그녀가 늘 쓰던 물건들이 그대로였고, 커튼도 그녀가 좋아하던 색 그대로였다.모든 것이 예전과 같았다.딱 하나, 그녀만 없었다.책상 위에는 임신 노트가 놓여 있었다.그는 조심스럽게 한 장, 한 장 넘기며 가지런하게 적힌 글씨들을 읽어 내려갔다.몸 상태에 대한 기록뿐 아니라, 느낀 마음들도 함께 적혀 있었다.태동을 처음 느꼈을 때, 그녀는 이렇게 써 두었다.[아가야, 너는 모르겠지만 아빠랑 엄마가 네가 태어나길 얼마나 기다리고 있는지 몰라. 아빠는 네가 처음 움직이는 걸 느꼈을 때 놀라서 한참을 멍하니 있었어. 그 표정이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몰라.][아빠는 참 좋은 아빠가 될 거야.][분명 널 아주 많이 사랑해 줄 거야.]육강민의 심장이 또다시 아려왔다.그는 아이를 포기했고, 좋은 아빠도 아니었다. 서은주가 이혼을 말하고, 그를 피한 이유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아이를 낳고 싶어 했다.어릴 때부터 결핍 속에서 자란 그녀였기에, 그 누구보다 이 아이의 존재를 갈망하고 있었다.어쩌면 아이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그래서 서은주는 더 이상 그의 곁에 머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선택의 기로에서 육강민은 서은주를 택할 것이란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이번 헤어짐은 어쩌면 영원한 안녕일 지도 모른다.‘서은주, 너 정말 매정하다.’‘우린 부부 아니었어? 부부라면 기쁠 때도, 괴로울 때도 함께 버텨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런데 왜 나만 남겨 두고 떠나? 떠나더라도 얼굴은 보고 가야 하는 거 아니야?’그는 노트를 덮고 눈을 감았다.머릿속엔 서은주의 모습뿐이었다.이 방엔 그녀의 흔적이 너무 많았다.옷도 그대로였고, 아이를 위해 사 둔 옷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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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0화

서은주가 사라지고 한 달쯤 지났을 무렵, 육강민은 손리정과 함께 강성으로 돌아와청산묘를 찾았다.그곳에는 그녀의 부모가 잠들어 있었다.“아버님, 어머님… 부디 은주를 지켜 주세요. 제발 아무 일 없게 부탁드립니다.”손리정은 끝내 참고 있던 눈물을 쏟아냈다.“서은주, 너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 나 하나도 안 보고 싶어?”목이 멘 채 말을 잇지 못하다가,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그런데 말이야, 우린 너 정말 많이 보고 싶어.”한켠에 서 있는 육강민에게서는 감정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청산묘를 떠난 뒤, 육강민은 홀로 위미든으로 향했다.그와 서은주가 함께 살았던 곳이다.예전엔 모델 하우스처럼 차갑던 공간이 이제는 사람 사는 기운이 남아 있었지만, 그녀만 없었다.이 집에서 바쁘게 움직이던 서은주의 모습이 육강민의 눈앞에 겹쳤다.그녀는 직접 요리하는 걸 좋아했고, 책은 꼭 소파에 웅크린 채 읽곤 했다.온순한 성격 탓에 화가 나도 그저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그녀가 그렇게 감정을 숨길수록 육강민은 더 괴롭히고 싶어졌다.밀려오는 공허감이 한순간에 그를 덮쳐 눈시울이 붉어졌다.강성에 머무는 동안 진백현도 우연히 만났다.두 사람은 말없이 술을 마셨다.대화는 거의 없었지만, 서로가 같은 사람을 떠올리고 있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방주헌을 비롯한 사람들 역시 서은주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기로 한 듯했다.다만, 한주미는 너무 크게 상심한 탓에 육남혁의 맞선 일정을 모두 취소했다.덕분에 육남혁은 한숨 돌릴 수 있었다.양이나는 성세로 찾아가 육강민을 만나려 했다.서은주가 사라졌으니, 이제야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것이다.하지만 그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 채 육지성의 지시로 사람들에게 쫓겨나고 말았다.“육지성, 너 미쳤어? 감히 나를 쫓아내? 이거 강민 오빠한테 말하면—”“상관없어요.”육지성은 어깨를 으쓱하며 전혀 대수롭지 않아 했다.“어디 만날 수나 있다면요.”“너…!”양이나는 분통이 터졌다.육지성이 서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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