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길가의 가로수와 네온등들이 빠르게 차창을 스치고 지나갔다. 운전기사는 핸들을 잡고서 뒷좌석을 힐끔거렸다.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하이석은 온씨 가문의 장녀를 집까지 데려다준다고 나온 것이 아이러니했다.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그들은 차에 오르기 전에 간단히 몇마디 나눈 것이 전부였고 오는내내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잠시 후, 결국 하이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성함이….”“온유란입니다.”“하이석입니다.”경성에 사는 사람 치고 하이석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온유란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하이석 씨, 오늘 일은 정말 감사했습니다.”“별말씀을요.”그 뒤로 또 한참의 침묵이 이어졌다.온유란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차창에 비친 하이석의 모습에 자꾸 눈길이 갔다.경성에 올라온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하씨 가문의 악명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 집안은 호랑이 소굴이라고들 말하는데 오늘 밤 보여준 하이석의 모습은 매너 있고 무척 신사다웠다. 그녀는 차에 오르기 전 상황을 떠올렸다.하이석이 직접 온유란을 차로 집까지 데려다준다는 얘기를 듣고 온유정도 따라서 차에 올랐다.그녀는 뒤늦게 나온 하이석을 향해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하 대표님, 안녕하세요.”하이석은 순간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넌 누구지?”“저는….”“누가 함부로 내 차에 타라고 했지?”“저는 온유정이고 유란 언니 동생이에요. 언니를 집까지 데려다 주신다면서요. 저희는 가족이라 같이 사니까 같이 가려고 탔죠.”“둘이 같이 살든지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난 온유란 씨만 모셔다드린다고 했지 너까지 차에 태운다고는 안 했어.”하이석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주인 허락도 없이 남의 차에 올라타는 건, 온씨 가문의 교양인가?”“내 차는 아무나 태우지 않아.”그 말을 끝으로 온유정은 차에서 쫓겨났다.예쁜 드레스를 입고서 호텔 입구에 버려진 그녀의 얼굴이 험하게 일그러졌다.생각에 잠긴 온유
하이석이 피식 웃더니 말했다.“사람들 앞에서 옷 벗는 게 별거 아닌 장난이라면, 네가 벗지 그래?”“예… 예?”동지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왜? 벗기 싫어?”하이석이 눈짓하자 경호원들이 몰려왔다.동지철은 겁에 질려 소리쳤다.“버… 벗겠습니다!”곧이어 그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외투를 벗고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하이석은 묵묵히 그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주변에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기골이 장대한 경호원들이 호시탐탐 노려보고 있자, 동지철은 부들부들 떨며 허리띠로 손을 가져가더니 하이석의 눈치를 살폈다.“하 선생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방금 몸에 반점이 있다고 한 거, 전부 거짓말이었어요. 온유란 씨와는 오늘 처음 만났습니다.”“계속해야지.”하이석이 싸늘하게 말했다.동지철은 평소 자기네끼리 있을 때는 오만하게 굴었지만, 하이석이나 육강민 같은 권력자들을 만나면 그저 겁쟁이에 불과했다.달칵!허리띠가 풀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정장 바지가 아래로 내려갔다.그리고 눈꼴 사나운 붉은색 사각팬티가 눈앞에 드러났다.푸흡!누군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어린 여자들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온유란은 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하 선생님, 계속할까요?”동지철이 당장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물었다.하이석은 그런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말했다.“팬티 취향 괜찮네.”사람들은 웃음을 참느라 어깨를 들썩였다.말을 마친 그는 온유란의 앞으로 다가갔다.“불쾌한 경험을 하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온유란은 위급한 상황에 나서준 하이석이 고마워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드려야죠.”하이석은 시계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기사 불러서 집까지 모시겠습니다.”“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아니요. 꼭 그래야 합니다.”말을 마친 하이석은 부하를 시켜 온유란을 대동해 파티홀에서 내보낸 뒤, 2층 휴게실로 돌아갔다.그가 사라지자, 동지철은 다급
웃음기가 싹 사라진 하이석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육수린 때문에 흐트러진 옷매무시를 정돈했다.“소란을 피운 자가 누구야?”“동지철이라고 동씨 가문 장남입니다.”하이석은 잠깐 머리를 굴리더니 물었다.“그게 누군데?”경호원은 말을 아꼈다.“그런 일이 있는데 너희는 다 뭐 했어?”“워낙 성격이 까탈스러운 분이라 저희도 말렸는데 소용이 없었어요.”“그럼 그냥 내쫓으면 되잖아.”“이번 일이 온씨 가문 장녀의 결백과 이미지에 관련된 일이라서요.”하이석이 계단을 내려가 파티홀 문앞에 도착했을 때, 동지철은 여전히 온유란에게 옷을 벗어서 엉덩이에 반점이 없는 걸 증명하라고 선동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웃음소리가 자자했다.하이석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사람들 틈에 선 한 여자를 바라보았다.이십대 초반에 한창 예쁠 나이였다. 반짝이는 등불 아래, 단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하지만 그렇게 예쁜 사람 눈에는 빛이 없었다.마치 영혼을 잃은 인형처럼 분노도, 서러움의 감정도 읽을 수 없고 공허하기만 했다.그녀는 혼자 힘으로 주변의 악의를 감당할 수 없었다.“저분이 온씨 가문 장녀인 온유란 씨입니다.”하이석의 부하가 옆에서 조용히 귀띔했다.하이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동지철은 여전히 방자하게 웃으며 목소리를 높였다.“온유란 씨, 다들 바쁜 사람이야. 그래서 벗을 거야, 말 거야? 시간 낭비하지 말고 스피드하게 가자고.”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등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동지철 씨는 사람 옷 벗기는 걸 좋아하나 봐?”부드러운 듯하지만, 어딘가 싸늘함이 감도는 목소리였다.조금 전까지 웃고 떠들던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고 허둥지둥 길을 비켰다.하이석이 줄곧 등장하지 않고 현정민 여사도 미리 퇴장해서 이들은 하씨 가문 사람들이 이곳에 없는 줄 알고 난동을 부렸던 것이다.하이석에게서는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고귀하고도 싸늘한 기운이 풍기고 있었다.그냥 보고만 있어도 거리감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떠들던 사람들이
“언니, 멍하니 서서 뭐 해? 발리 동 대표님께 사과드리지 않고?”온유정이 재촉했지만, 온유란은 가만히 서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사람들 가득 모인 곳에서 귀뺨을 맞았으니 동지철도 모욕감이 들었다.재벌가의 도련님으로 태어나 모두에게 떠받들리며 살아온 그였다. 그가 사람을 짓밟을 수는 있어도 이런 모멸감은 당한 적이 없었다.‘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날 원망하지 마.’남자들의 입은 더 거칠어졌다.“온씨 집안은 참 희한하단 말이야. 아무하고나 잤을 것 같은 딸을 내세워 정략결혼 상대를 물색하다니!”“얼마 전에 술집에서 어떤 여자를 봤는데 온유란이랑 엄청 닮았더라고.”“나도 기억나. 그 여자 엉덩이에 붉은 반점이 있었지? 온유란 씨, 정곡을 찔려서 당황했어?”온유정은 다급히 나서서 말했다.“우리 언니 술집 같은데 안 가요. 분명 사람을 잘못 봤을 거예요. 언니 엉덩이에 점도 없고요.”동지철은 인형 같은 온유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증명할 거야?”그 말인즉 결백을 증명하고 싶으면 벗으라는 얘기였다.주변에서 다시 한번 웃음이 터졌다.온유란은 주먹을 꽉 쥐고 허리를 폈다. 상황은 안 좋게 돌아갔지만 그녀는 여전히 꼿꼿하게 서 있었다.하지만 그런 그녀도 사람이 이 정도로 악의를 품을 수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그녀는 붉은 반점 따위가 없었다.이들은 없는 얘기를 지어내어 그녀에게 망신을 주려 하고 있었다.그녀가 옷을 벗지 않을 것을 알아서 떠들어대는 것이다.“온유란 씨, 결백을 증명하려면 옷을 벗어야겠네요.”한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정말 너무들 하네요. 언니가 술집 좀 나간 게 그렇게 죄가 되나요?”온유정이 온유란의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겉으로는 돕는 것 같지만 사실 상 온유란의 입장을 더 곤란하게 만들고 있었다.“그 술집 나가는 여자들 뭐 하는 애들인지 누가 몰라? 온씨 집안에서는 저런 여자를 누구에게 주려고 데리고 나온 거야? 누굴 바보로 아나?”“그러니까! 어차피 본다고 살점 떨어지는
서은주 일행이 파티홀을 떠나자, 사람들은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존재감 강한 사람들이 버티고 있으니 자꾸 눈치가 보이고 하이석도 나타나지 않아 의논이 분분했다.현정민 여사는 축사만 하고 바로 퇴장했고 미혼 남녀들은 각자 마음에 드는 짝을 물색하기 시작했다.온유란은 미모 덕분에 다가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비록 얼굴과 몸매에 홀려 다가온 사람들이지만 적지 않은 여자들의 질투를 유발했다.그중에는 그녀의 동생인 온유정도 포함이었다.그녀는 오늘밤 허경빈을 목표로 삼고 왔는데 그가 2층으로 올라가면서 허탕을 치고 말았다.2층으로 향하는 계단은 하씨 가문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어서 올라갈 수 없었다.화가 난 그녀는 언니가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모습과, 그녀가 목에 걸고 있는 목걸이를 보고 질투가 치밀었다.특히나 곤란한 상황에서 서은주가 나서서 온유란을 도와준 것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었다.서은주는 거의 공식적인 자리에서 누구에게 친근감을 표현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온유란을 바라보는 시선이 남달랐다.누군가는 그녀가 운이 좋다고 부러워했고 또 누군가는 그녀가 일부러 불쌍한 척해서 육 대표 사모님의 주의를 샀다고 했다.서은주가 있을 때는 아무 말도 못하던 사람들이었지만 그녀가 퇴장하자, 온유란의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언니는 운도 좋아. 처음 참석한 연회에서 육 대표 사모님의 눈에 들다니 말이야.”온유정이 비아냥거리듯 말했다.온유란은 입씨름하기 싫어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로 파티홀을 나가려 했다.그런데 얼마 못가 누군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조금 전 그녀에게 억지로 술을 권하던 동지철이었다.“유란 씨, 한잔 할래요?”그가 술잔을 들며 말했다.조금 전 육민찬의 방해 때문에 실패했지만 이제 육씨 일가가 자리를 떴으니 자신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해 더욱 방자해졌다.게다가 조금 전 그의 행동이 육씨 가문 사람들에게 분명히 안 좋은 인상을 남겼을 테니, 화풀이 대상이 필요하기도 했다.“죄송하지만 제가 술을 안 마셔서
버럭 화를 내려던 동지철은 육강민의 아들인 것을 알아보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괜찮아.”“그런데 왜 다들 여기 모여 있어요? 뭐 재미난 일이라도 있어요?”아이가 발꿈치를 들며 물었다.“아… 아무것도 아니야.”육민찬의 방해로 무리는 흩어지고 말았다.아이는 온유란을 향해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인 뒤, 엄마에게 달려갔다.서은주가 고개를 들었더니 온유란이 감격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한번 도와줘도 평생 못 도와줘.”그녀의 마음을 알아챈 육강민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알아요.”“그리고 어쩌면 당신 도움이 저 여자에게는….”육강민은 말을 하려다가 도로 삼켰다.“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거예요?”서은주가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야.”육강민은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볼에 입을 맞추더니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당신 다른 사람한테 관심을 줄 시간에 당신 남편이나 더 챙기지 그래?”“설마 질투하는 거 아니죠?”서은주가 실소를 터뜨리며 물었다.이때, 현정민 여사가 등장하며 자선 연회의 정식 시작을 알렸다.비록 목적은 다른 데 있었지만, 자선 이벤트를 빼놓을 수는 없었다.무대에 오른 현정민 여사는 참가해 준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했다.방주헌이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남자 주인공은 왜 등장 안 해? 이석 이 자식, 설마 어디 숨은 건 아니겠지?”“이석이를 위해 준비한 연회인데 설마 숨기야 하겠어?”허경빈도 의문을 제기했다.현정민 여사의 축사가 끝나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그녀는 곧장 육강민 일행에게 다가왔다.하이석은 진작에 호텔에 도착했지만, 2층 휴게실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다.현정민은 친구인 그들이 아들을 설득해 주기를 바랐다.원래 떠들썩한 걸 좋아하는 방주헌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어차피 파티홀은 이미 미혼 남녀들만 모여 있어서 남아 있어도 재미가 없었다.일행은 곧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 그 시각 하이석은 느긋하게 차나 마시고 있었다.“이석아, 내려가서 맞선을 봐야지 여기 숨어 있으면 어떡해?”방주헌이 장난
“내가 너무 급했구나.”한주미는 웃으며 말했다.임신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일이었기에, 한주미는 더 묻지 않았고, 서은주가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옆에 서 있는 두 아들을 바라봤다.“너희 둘도 있었니?”아까 들어올 때, 아예 안 보이신 건가?그냥 공기 취급이었다.“어머니, 드릴 말씀이 있어요.”육강민이 입을 열었다.“말해봐.”한주미는 아까 너무 급히 들어오느라 흐트러진 드레스 자락을 정리하고 있었다.“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아요.”육남혁이 미리 경고했다.“웬만한 일들을 다 겪었는데 놀라울
온라인에는 온통 육강민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육강민때문에 내 심장이 고장 났어!][내가 찾던 이상형이야. 기꺼이 당신의 종이 되어 드리리라!]파티장에 들어서던 서은주는 댓글을 훑어보다가 육강민 사진을 몇 장 발견했다. 그 중 꽤 잘 나온 사진도 있어 자신도 모르게 저장 버튼을 눌렀다. 성세 기념일 파티는 회사 계열의 특급 리조트 호텔에서 열렸고 그 화려함은 실로 압도적이었다.고급진 장식물들이 우아하게 걸려 있어 곳곳에 돈의 향기가 가득 풍겼다.서씨 가문에서 잘 대해주지 않았지만, 이순옥은 선한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물 한 컵을 다 마신 뒤에야 서미진은 서은주를 바라보았다.“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난 늘 너를 질투했어.”“네가 나를 질투했다고?”서은주는 담담하게 되물었다.“처음 너를 봤을 때 꼭 공주님 같았어. 똑똑하고 예쁜 네가 하늘의 별을 따 달라고 해도 큰어머니와 큰아버지는 기어이 따다 주실 사람들이었지.”“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늘 그렇지는 않지.”서은주가 작게 웃었다.“그분들이 돌아가셨을 때, 솔직히 말하면 나 좀 기뻤어. 너도 더 이상 콧대 높은 공주가 아니게 됐으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늘 나랑 너를 비교했어. 나는 너
“나는 처리해야 할 일이 좀 남았고, 은주를 혼자 두긴 불안해서 그래요.”서진우 부부가 저지른 일은 서은주에게 큰 충격이었다.육강민은 혹시라도 서은주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이 컸다.“일 핑계로 나를 부려 먹겠다는 거냐? 나는 네 엄마야, 부하 직원이 아니라고.”한주미는 생각할수록 억울함이 치밀어 올랐다.그래도 마음 한편엔 늘 며느릿감 생각뿐이라 아들한테 불만이 가득해도, 결국 매일같이 찾아오고 마는 이유였다.아들의 결혼 문제로 한주미는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전화를 끊었을 때, 육강민의 차는 이미 낡은 다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