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날, 나는 태자가 아닌 황제를 선택했다: Chapter 81 - Chapter 90

336 Chapters

제81화

“죄도 밝혀졌으니, 엄중히 벌을 내려주시옵소서. 여기가 지금 어떤 곳입니까? 작산 행궁 안에서도 이런 불길한 짓을 저지르다니, 간덩이가 부은 것이 아니고서야 이럴 수가 없습니다!”배경천이 이를 악물며 상황을 결론짓듯 말했다.최근에 불미스러운 일들이 많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태자비 자리에 금영이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긴 적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 일을 겪고 나서, 생각이 달라졌다.금영은 그 말을 듣고도 조금도 놀란 표정을 짓지 않았다. 왜 배명월이 저주술을 이용해 자신에게 누명을 씌우려 했는지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현 황제 때문이었다. 황제는 저주술을 매우 혐오했다. 작산 행궁에서 벌어졌던, 밖에서 벌어졌던, 중요하지 않았다. 금영이 저주술을 이용해 동생을 해치려 했다는 소문이 퍼지는 순간, 황제는 바로 혼례 교지를 거뒀을 것이다.금영은 입가에 옅은 비웃음을 띠었다. 배명월이 자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누구의 소행으로 끝나든지 간에, 두 사람 모두 영안후의 딸이라는 사실을 잊은 것이다.이건 한 명의 명성만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었다. 소문이 퍼지는 순간, 모두가 함께 가라앉게 되는 수가 있었다. 자기 발등을 자기가 찍는 꼴이었고, 금영을 해치기 위해 스스로 흙탕물에 빠진 셈이었다.“주인어른, 부디 저희 아가씨의 억울함을 밝혀 주십시오.”진주가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애원했다.그런데 막 영안후가 입을 열려던 순간,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곧이어 송정희가 다급하게 들어서며 금영을 불렀다.“금영아.”그러더니 슬픔과 걱정이 가득 묻어나는 얼굴로 말했다.“대인, 경천아, 너무 금영이를 다그치지 마세요. 명월이가 쓰러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 일이 금영이와 연관되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금영아, 두려워하지 마라. 어미가 여기 있으니, 아무도 널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다.”송정희는 그렇게 말하며 금영의 손을 부여잡았고, 그녀는 고개를 숙여 차갑게 그 손을 바라봤다. 그 다음, 겉으로는 티 내지 않고 착한 딸처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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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화

그 광경을 본 배경천은 분통을 터뜨렸다.“어머니, 어찌 이리도 분별력이 없으십니까? 저 아이는 명월이를 진심으로 해치려 했습니다. 두둔할 상황이 아니였단 말입니다!”하지만 송정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옆에 있는 금영에게 말했다.“금영아, 어서 무릎을 꿇고 죄를 빌거라. 나도 함께 무릎을 꿇었으니, 중한 벌은 내리지 않으실 것이다.”그러나 금영은 그 자리에 선 채 조금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배금영, 어머니가 이렇게까지 하시는데, 아직도 잘못을 깨우치지 못했느냐?”배경천이 실망 어린 눈으로 금영을 바라보며 다그쳤다.그제야 금영은 입을 열었다.“이 물건이 제 방에서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전 제가 하지 않은 일에 잘못을 빌 생각은 없습니다.”“이래도 인정 못 하겠다는 말이냐?”배경천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그럼 이 흉측한 물건에 발이라도 달려 네 방에 스스로 걸어 가기라도 했단 것이냐!”금영은 대꾸하지 않고 말없이 앞으로 걸어 나가더니, 다짜고짜 진주 손에 들린 나무 인형을 빼앗듯 낚아챘다.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진주는 뒤늦게야 정신 차리고 소리쳤다.“설마, 증거를 훼손하려고 그러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어차피 모두가 보는 앞입니다. 그거 하나 망가뜨린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될 수 없습니다!”금영은 손바닥만 한 나무 인형을 내려보다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경자년, 오월 초닷새, 자시 삼각.”“뭐라고?”배경천은 처음에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곧 익숙한 날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바로 그때, 금영의 손이 미세하게 흔들리더니, 인형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이내 얼굴이 창백해지며 힘이 빠진 듯 바닥에 주저앉았다.“이제야 잘못을 깨달았느냐?”배경천이 물었다.“대인, 부디 제 체면을 봐서라도 이번 한 번만 금영이를 용서해 주십시오.”송정희가 다시 간청했다.“주인어른, 부디 저희 아가씨의 억울함을 풀어주세요.”이번엔 진주가 옆에서 호소했다.그 순간, 갑자기 고개를 든 금영은 영안후를 바라보며 또렷한 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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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화

영안후는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줄 예상치 못해 골머리를 썩이고 있던 상황에, 송정희가 몸을 일으키려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이내 옆에 있던 배경천이 서둘러 그녀를 부축하며 나섰다.자리에서 일어난 송정희는 참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금영을 바라보았다."금영아, 역시 네가 이런 일을 저지를 리가 없지. 내가 널 잘못 키운 게 아니었구나."하지만 금영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모녀로서 쌓였던 정은 과거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던 순간, 모두 없어졌다.금영은 지금 송정희가 보여주는 모습이 연기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하지만 송정희는 개의치 않으며 말을 이었다."대인, 이 일은 분명 엄중히 조사해야 합니다. 하지만 조정일만으로도 바쁘신 분을 이런 일로 신경 쓰이게 할 수는 없지요. 집안일은 아녀자인 저에게 맡겨주십시오."송정희는 다시 부드러운 얼굴로 금영을 바라보며 말했다."금영아,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반드시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밝혀내서 네 억울함을 풀어주겠다."금영은 그제야 차가운 표정을 거두고 고분고분하게 송정희를 바라봤다."감사합니다, 어머니."송정희가 다시 말을 이었다."이 일이 금영이와 무관하다는 것이 밝혀졌으니, 이만 저희도 명월이를 보러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직도 의식을 되찾지 못하는 것이,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그러자 영안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송정희는 배경천에게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그 순간, 금영이 맑은 목소리로 그들을 멈춰 세웠다."잠시만요."모두의 시선이 다시 그녀에게 쏠렸을 때, 그녀가 다시 차갑게 입을 열었다."이 일에 대한 조사는 어머니께 맡기겠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저에게 한 약속은 지켜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영안후가 미간을 좁혔다."약속이라니, 무슨 말이냐?"금영이 다시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제 방 수색을 허락할 때, 분명히 저에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명월이를 해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 저를 모함한 이들을 모두 엄중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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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화

“게다가 오라버니는 영안후부의 자제라는 신분을 가졌으면서도 불구하고, 공을 세워 가문을 빛낼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가문의 체면을 해치는 언행으로 분란을 일으키며 저를 모함하려 했습니다. 지금이라도 엄히 다스리지 않는다면, 훗날 더 큰 화로 돌아올지도 모릅니다.”금영의 말이 끝나자, 영안후의 안색도 점점 굳어졌다.앞서 했던 말까진 어떻게 지나갔지만, 마지막으로 한 말은 그의 아픈 곳을 정확히 찔렀다.영안후에겐 아들이 셋이 있었다.첫째는 이미 외지에서 관직을 맡아 제 몫을 하고 있었지만, 둘째인 배경천은 늘 그의 기대에 못 미쳤다.셋째는 어차피 서자라 그의 안중에도 없었으니, 말할 것도 없었다.영안후는 아비로서 배경천이 제 역할을 해 주길 바랐다. 또한 형제자매끼리 우애 좋게 지내길 바랐다."네 동생의 말도 일리가 있다. 경천아, 요즘 보여준 네 모습, 정말 실망스럽구나. 오라비로서 동생을 다독이지 못할망정, 왜 자꾸 분란을 만들고 다니는 것이냐!"영안후는 노기를 억누르지 못하고 호통쳤다.배경천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는 금영이가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망신 줄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네 동생이 한 말들, 너도 인정하느냐?"영안후가 낮게 말했다. 배경천은 얼어붙은 분위기에,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제가 잘못했습니다.""잘못을 알았다면, 벌을 받아야지. 한 시진 동안 무릎 꿇고 있어라."영안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명령했다.그 말을 들은 금영이 옆에서 조용히 말을 꺼냈다."아버지, 분명 저에게 엄히 처벌하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잘못을 저질렀을 땐 가법까지 들어 올리시려고 했지요. 그런데 오라버니는 왜 달리 취급하시는 겁니까?"그러면서 영안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물론 아버지를 탓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나라에 국법이 있듯이, 집에는 가법이 있지요. 하지만 아버지께서 편파적으로 벌을 내리신다면, 이 사실이 밖에 알려져 폐하께까지 들어간다면... 어찌 아버지를 조정의 신하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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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화

금영은 옅은 미소와 함께 다시 한번 말했다."그러니까, 가법 대신... 제가 화가 풀릴 때까지 밖에서 무릎 꿇으시라고요."배경천의 이마에 다시 핏줄이 돋아났다."지금 나더러 밖에서 무릎을 꿇은 채 너에게 잘못을 빌라는 것이냐?"매를 맞는 것보다 무릎 꿇는 것이 더 고역이었다.금영은 온화한 얼굴로 다시 한번 말했다."다 오라버니를 위하는 일입니다. 스스로 돌아볼 기회를 드릴게요."금영은 그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배경천은 무엇보다 자신의 체면을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잘못을 빌기 위해 눈 내리는 마당에서 여동생에게 무릎 꿇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매를 맞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송정희의 얼굴이 굳어졌다."금영아, 경천이는 네 오라비다."그러자 금영이 눈썹을 올리며 송정희를 바라봤다."맞아요, 제 둘째 오라버니시지요. 그런데 오라버니께서는 절 모함할 때, 여동생으로 여겼을까요?"금영은 냉소를 지었다."정말 저를 친동생으로 여겼다면, 제 성격이 어떤지 알고 계실 것입니다. 설령 제가 명월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저주술 같은 수단으로 해칠 정도의 사람은 못 된다는 것도 알아차렸을 테지요."사태는 이미 걷잡을 수 없게 커벼 버렸기에, 금영은 조금도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더 이상 그 누구에게도 만만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금영은 말을 이었다."만약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이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지 않고 오라버니를 감싸려 하신다면, 저도 이 일이 어디까지 새어 나갈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그녀는 잠시 말을 멈춘 뒤, 송정희를 지긋이 쳐다봤다."그렇게 되면, 두 분도 더 이상 감당하시기 어려우실 겁니다."그러자 옆에 있던 영안후가 금영을 노려보며 말했다."지금 우리를 겁박하는 것이냐?"금영은 다시 얌전한 얼굴로 돌아와 대답했다."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있는 사실을 알려드렸을 뿐입니다. 저도 영안후부가 잘못되길 바라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이 사건을 엄중히 보는 것이고요. 그저 더는 저희 집안이 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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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화

진주는 두려움에 몸을 벌벌 떨었다. 만약 자신의 매매 문서가 진짜 금영에게 넘어간다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매를 맞는 정도까진 어떻게든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금영이가 문서를 기루 같은 곳에 넘기기라도 한다면, 정말 끝장이었다.송정희가 낮게 말했다.“그 문서를 지금 줄 수는 없다.”금영이가 되물었다.“지금 이 시비를 감싸는 것입니까?”송정희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나도 주고 싶다. 허나... 여긴 행궁이지 않느냐? 문서는 후부에 있다.”금영은 물러서지 않고 다시 말했다.“사흘 안에 문서를 제 앞에 내놓지 못한다면, 폐하께 제 억울함을 호소하겠습니다.”“이런, 방자한! 폐하께 네가 원한다고 그렇게 쉽게 만날 수 있는 분이더냐!”영안후가 노기를 참지 못하고 호통쳤다. 그는 이 일이 밖에 알려지길 원치 않았다.금영은 가볍게 웃었다. 그녀에겐 황제를 만나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그 미소를 본 영안후는 노골적인 협박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송정희에게 말했다.“겨우 계집 하나, 원하는 대로 해주시오. 사흘 안에 금영에게 문서를 가져다주시오.”송정희는 속이 들끓었지만, 이 자리에서는 일단 참을 수밖에 없었고 미소를 띤 채 달래듯 말했다.“금영아, 이제 그만하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 테니, 더는 소란 피우지 말거라.”하지만 금영은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겨우 이 정도 가지고 소란이라고 부르다니,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많이 참았는지 알지 못할 것이었다. 그래도 일단 목적은 모두 이루었으니, 여기서 물러나기로 했다.그녀는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요즘 유난히 몸이 좋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네요. 이 물건 때문이었군요. 해수야, 이 나무 인형 좀 태워버리거라.”그러자 해수는 곧바로 바닥에서 인형을 주워 옆에 있던 화로에 던졌다.금영은 이번에 영안후 부부를 향해 말했다.“아버지, 어머니, 제가 몸이 아직 좋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 주셨으면 합니다.”그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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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화

금영은 다시 한번 나무 인형을 집게로 건드렸다.배명월이 그녀의 방에 저주술에 쓰이는 나무 인형을 숨겨 둔 것은 사실이었다.하지만 진주가 찾아낸, 그녀의 생년월일이 적힌 그 인형은 배명월의 것이 아니었다.해수가 금영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아가씨, 그럼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금영은 해수를 바라보았다. 요 며칠 동안의 태도만 보아도, 해수가 송정희의 사람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했다. 조금 전에도 해수는 송정희의 눈 밖에 날 것을 감수하고 나서 주었다. 쉽게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과거를 돌아보아도, 해수가 금영을 해친 적은 없었다. 다만 변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회귀 전의 기억 속에서 해수는 훗날 첫째 오라비의 첩이 된다. 그러나 이런 집안에서, 그 선택이 해수, 그녀의 뜻이었을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였다.금영은 잠시 고민을 마친 뒤에야 입을 열었다.“배명월이 날 해치려 했던 건 맞아. 하지만 자기 발등을 자기가 찍은 꼴이 되었지.”배명월은 병든 척하며 저주술로 금영을 모함하려 했다. 그러나 금영은 그대로 당할 인물이 아니었다. 요 며칠 사이, 연아가 수상쩍게 금영의 방을 드나드는 모습이 여러 차례 목격되었다. 금영은 아무 말 없이 연아가 다녀간 자리를 살폈고, 그곳에서 배명월의 생년월일이 새겨진 나무 인형을 찾아냈다.금영은 인형에 새겨진 글자를 지우고, 자신의 생년월일을 다시 적었다. 그 결과, 상황은 그녀의 뜻대로 흘러갔다.금영의 설명을 들은 해수는 얼굴이 굳어지더니, 급히 무릎을 꿇었다.“아가씨, 저도 벌을 내려주십시오...”그러자 금영이 의아해하며 물었다.“벌을 내려달라니?”해수가 다급히 말했다.“제가 좀 더 신경을 썼더라면, 이런 여지를 주지 않았을 텐데. 괜히 저 때문에 아가씨께서 큰 곤욕을 치르게 한 것 같아, 너무 죄스럽습니다.”금영은 담담히 말했다.“네 잘못이 아니다.”그러고는 꾸러미 하나를 내밀었다.“이걸 연아에게 전하거라.”해수는 받자마자 안에 장신구와 은자가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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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화

금영의 처소를 나온 뒤, 송정희의 발걸음은 한결 무거워졌다. 상황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오히려 연이어 금영에게 주도권을 내주고 말았다.본래 금영의 잘못으로 마무리되어야 했던 저주 인형 사건은, 도리어 배명월에게로 옮겨 갔다. 송정희는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애썼으나, 흐름은 좀처럼 되돌릴 수 없었다.그 사이, 의문스러운 점들이 하나둘 떠올랐다.만일 배명월이 직접 인형을 만든 장본인이라면, 진주를 시켜 금영을 범인으로 지목하게 할 이유가 없었다. 누구의 눈으로 보아도 불리한 선택이었다. 진주의 태도 또한 석연치 않았다. 노비 매매 문서를 요구한 일까지 떠올리자, 그 의문은 더욱 짙어졌다.송정희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그대로 배명월의 처소로 향했다.“부인께서 오셨습니다!”취옥이 목소리 높이며 알렸다.송정희는 취옥을 잠시 힐끔 쳐다본 뒤,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곧바로 시선을 배명월에게 두었는데, 배명월은 아무 말 없이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송정희는 다시 방안을 훑다가, 순간 바닥에 떨어진 밥알 한 개를 발견하게 되었다.그녀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모두 물러나거라. 명월이와 단둘이 있겠다.”사람들이 물러가자, 송정희는 입술을 깨문 채 배명월에게 말했다.“언제까지 그렇게 누워 있을 셈이냐!”하지만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릴 뿐, 배명월은 일어나지 않았다. 송정희가 다시 말을 이었다.“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느냐? 내가 제때 막지 못했다면, 금영의 화살은 너에게 쏘아졌을 것이다.”그제야 배명월은 막 정신을 차린 듯, 급히 눈을 뜨며 말했다.“어머니?”“이제야 깨어났느냐?”송정희가 차갑게 한마디 던졌다.배명월이 몸을 일으키며 서둘러 물었다.“어머니, 방금 그게 무슨 뜻이에요? 설마 언니가 저를 모함했나요?”송정희가 배명월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딱 하나만 묻겠다. 저주 인형, 네가 사람을 시켜 금영의 방에 둔 것이 맞느냐?”배명월의 눈에 불안이 비쳤다.“어머니… 그게…”그 반응을 본 송정희가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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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화

송정희는 이제야 모든 상황을 이해했지만, 때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인형은 이미 불에 타버려 숯이 되어버린 상황이었다.반면, 배명월은 여전히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송정희의 안색이 안 좋은 것을 보고, 이내 불안한 듯 물었다.“어머니… 제, 제가 잘못했어요. 애초부터 그런 일을 벌이지 말았어야 했는데…”배명월의 얼굴에 두려움과 긴장이 가득한 것을 본 송정희는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널 나무라는 것이 아니다.”배명월이 빨개진 눈가를 한 채 말했다.“어머니께서 저를 나무라지 않아도, 괜히 저 때문에 어머니까지 힘들게 만든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네요…”그러더니 울음을 터뜨리며 말을 덧붙였다.“저는 정말로 언니를 해칠 생각이 없었어요. 그저… 그저 태자 전하를 빼앗길까 봐… 제가 처음부터 어머니 곁에 있었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그 모습을 보자, 송정희는 마음이 또 한 번 무너졌다.“넌 잘못한 것이 없다. 암, 없고말고.”송정희가 배명월의 손을 꼭 부여잡으며 말했다.“다 어미의 잘못이다. 내가 제 역할을 제대로 못 한 탓이야.”송정희는 금영을 아끼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정이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배명월은 친딸이었다. 송정희의 태도는 자연스레 그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그동안 금영이 누려 온 것들 또한, 본래는 배명월의 몫이었다. 송정희에게 그것은 빼앗는 일이 아니라, 제자리를 되찾는 과정에 가까웠다.배명월이 흐느끼며 말을 이었다.“저는 태자비 자리를 탐낸 것이 아니에요. 그… 그저 태자 전하를 너무 좋아했을 뿐입니다.”송정희는 그런 그녀를 안타깝게 바라봤다.“명월아, 그동안 많이 힘들었겠구나.”하지만 이내 단호해진 목소리로 말했다.“너를 나무라는 것은 아니다.다만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좀 더 깊이 헤아리거라. 순간의 감정에 휩쓸리다 보면, 남의 계략에 쉽게 빠질 수도 있다. 오늘만 해도 그러하지 않았느냐? 금영은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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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화

송정희 곁을 지키던 나이 든 여 시종 이숙이 들어와서 보고했다.“부인, 둘째 공자께서 아직도 밖에서 무릎을 꿇고 계십니다. 벌써 두 시진 가깝게 지났습니다.”하지만 송정희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가늠이 안 되는 표정이었다.이숙이 다시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부인, 소인이 이런 말씀까지 드리고 싶지는 않았사오나… 큰아가씨의 처사가 너무 매정해 보입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제 오라비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이실 줄은 몰랐사옵니다. 부인께서 이 일로 마음 상하실 것을 알면서도, 저리 모질게 굴다니요…”이숙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말했다.“부인께서 큰아가씨께 들인 정성이 얼마인데… 이리도 몰라주다니, 부인께서도 이제 둘째 아가씨의 앞날을 위해 대비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말이 이어질수록, 송정희의 안색도 함께 어두워졌다.한편, 금영은 방 안에서 따뜻한 차를 한 잔 마신 뒤 밖으로 나와 배경천에게로 향했다. 처음에는 추위만 견디면 될 일이라 여겼으나, 배경천은 무릎을 꿇은 채 시간이 길어지자, 몸이 서서히 굳어 갔다.바로 그때, 발걸음 소리가 서서히 들려왔고, 배경천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눈보라가 몰아치는 가운데, 두 사람은 고요히 서로를 바라봤다.이때, 금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그런 눈으로 절 쳐다보지 마세요. 제가 매정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요, 이건 저나 아버지 때문이 아니라, 오라버니께서 자초한 상황이에요. 자초지종도 따지지 않고 무조건 그 아이의 편을 든 것에 대한 대가이죠.”“할 말 있으면 빙빙 돌리지 말고 그냥 해.”배경천이 추위에 이를 딱딱 부딪치며 힘겹게 말했다.금영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삼 년 만에 다시 만났더니, 더 멍청해지셨네요. 제 방에 저주 인형을 둔 사람이 누구인지, 아직도 모르겠어요?”배경천이 차갑게 되받아쳤다.“설마 그게 명월이라는 것이냐? 말도 안 되는 소리! 이 일은 네가 꾸민 거잖아!”“진주는 어머니께서 직접 명월에게 붙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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