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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주문춘귀: Chapter 361 - Chapter 370

558 Chapters

제361화

방 안은 고요했고 창을 때리는 비바람 소리만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이번에는 드물게도 심서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계연수를 한 번 바라보았다.따뜻한 촛불 아래 그녀는 희미한 빛에 싸여 있었다. 온몸에서 은은한 온기가 감돌았고 단정한 자태와 가늘게 스미는 향기가 숨결처럼 번졌다. 고개를 낮춘 채 고요히 앉아 있는 모습은 부드럽고도 평온했다.그의 시선이 그녀의 도톰한 입술 위를 스쳤다.입 맞추고 싶었다.매일, 매 순간.이미 제어하기 어려운 욕망이 가슴 깊은 곳에서 자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의자 팔걸이를 짚고 일어섰다.“이만 가겠습니다.”계연수가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옷은 갈아입지 않으십니까?”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붙들었다.“말을 타고 비를 맞으며 왔습니다. 갈아입어도 다시 젖겠지요.”그 말에 계연수의 마음이 묘하게 흔들렸다. 그가 마차가 아닌 말을 타고 왔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온몸이 흠뻑 젖은 이유가 그 때문이었던 건가.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비가 이렇게 쏟아지는데 어찌 마차를 타지 않으셨습니까?”심서준은 짧게 답했다.“당신이 떠날까 두려워서요.”계연수는 순간 말을 잃었다. 그의 눈빛은 농담이 아니었다. 진지했고 단단했다.그녀의 손끝이 조용히 움켜쥐어졌다.“비가 이렇게 많이 내리는데 어찌 가시려고요? 절에 빈 객방이 있을 겁니다. 하룻밤 묵고 가시지요.”심서준은 입술을 한 번 다물었다.“깊은 밤에 폐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그리고 덧붙였다.“걱정하지 마십시오.”그러나 계연수의 마음은 여전히 편치 않았다. 폭우 속에서 말을 달리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었으니까.“혼자 오셨습니까?”촛불빛 속 그의 눈동자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예.”잠시 생각에 잠긴 계연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그렇다면 이 방에 머무십시오. 저는 옆 객방에서 용춘과 함께 지내겠습니다.”그 말에 심서준의 시선이 낮아졌다. 그녀가 올려다보는 눈빛을 마주한 순간, 목울대가 미세하게 움직였다.잠깐의 망설임 끝에 낮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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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2화

객방의 수건은 모두 거친 무명천이었다.계연수는 잠시 고개를 숙인 채, 심서준의 길고 단정한 손이 제 손에서 수건을 받아 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순간 현실감이 옅어졌다.늘 가장 정교하고 값진 것만 쓰던 사람이라 이런 거친 천을 내심 꺼릴 줄 알았는데 아무 말 없이 받아 드는 모습이 오히려 낯설었다.예전의 계연수였다면 그녀 또한 이런 것을 못마땅해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이미 어디에든 스며드는 법을 배워버렸다.심서준은 수건을 받아 들고 고개를 들었다. 계연수가 눈을 내린 채 멍하니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가 아닌 다른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그 무심한 표정이 이상하게도 더 사람을 흔들었다.지금 이 방 안에는 오직 두 사람뿐이었다. 밖에서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고 안에서는 콩알만 한 촛불 하나가 어둠을 밝혀주고 있었다.그는 그녀가 방금까지 누워 있던 침상에 앉아 있었다. 침상에는 여전히 부드럽고 은은한 향이 남아 있었다.숨이 조금 가빠졌다. 꿈속에서 수없이 반복되던 그 장면처럼, 머릿속에는 눈앞의 사람을 품에 안는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심서준은 눈을 내리깔았다. 수건을 옆에 두고 천천히 속옷의 매듭을 풀었다. 젖은 옷 아래 드러난 피부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드러났다.자신의 몸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은 있었다. 적어도 사옥현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계연수 역시 싫어하지는 않으리라.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올렸을 때, 그의 상반신은 이미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그의 눈이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그 눈동자 안에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계연수는 본능처럼 뒤로 물러났다. 등이 뒤편 책상에 닿자, 탁자 위의 은 촛대가 충격에 흔들렸다.급히 돌아 손을 뻗었으나 그와 동시에 심서준이 다가왔다. 등 뒤로 그의 체온이 느껴졌다.손이 미끄러지자 촛대가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짧은 금속성 울림 뒤, 방 안은 순식간에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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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3화

그의 체구는 워낙 컸고 젖은 몸은 온전히 그녀에게 기대어 있어 계연수는 숨이 막힐 듯한 압박을 느꼈다.그러나 초봄 밤비의 냉기를 떠올리자 이를 악물고 심서준을 부축해 침상으로 옮겼다.생각만큼 힘겹지는 않았다. 몸은 무거웠지만 그는 비틀거리면서도 어느 정도는 따라주고 있었다.문제는 침상 가장자리에 이르렀을 때였다. 어둠 속에서 그의 장화에 발이 걸렸고 순간 균형을 잃은 두 사람은 함께 침상 위로 쓰러졌다.그의 몸이 그대로 그녀 위로 내려앉자 계연수의 숨이 거칠어졌다. 손을 들어 밀어내려 했지만 손끝이 그의 맨가슴에 닿는 순간 멈칫했다.따뜻한 피부와 그 아래서 힘차게 뛰는 심장. 그 박동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자 그녀의 손까지 떨렸다.신뢰는 있었지만 친밀함은 아니었다. 이렇게 가까워지는 일은 그녀에게는 낯설고도 부끄러운 일이었다.떨리는 손끝으로 조심스레 밀어내며 낮게 불렀다.“심 대인…?”대답 대신 뜨거운 숨이 얼굴 위로 떨어졌다.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젖은 머리카락이 뺨을 스쳤다. 그의 얼굴이 바로 가까이에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심서준은 그녀의 미약한 밀침을 느끼고 있었다. 힘은 크지 않았으나 거부의 뜻은 분명했다.그녀는 이 거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몸은 이미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었다.비를 맞고 찾아온 순간부터 의도는 분명했다. 이렇게라도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었다.품 안의 체온, 숨결, 향기. 꿈속에서 그려온 것보다 더 또렷하고 부드러웠다.자신을 설득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는 낮게 신음했다.입술이 그녀의 귓가를 스치자 한순간 목덜미를 타고 내려가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그녀의 숨을 빼앗듯 입 맞추고 싶다는 갈망이 치밀었다.목에 닿는 숨결이 간질거려 계연수는 몸을 움츠렸다. 그의 몸은 점점 더 무겁게 내려앉았다.술 냄새가 짙어졌다.“심 대인… 심 대인!”이번에는 조금 더 큰 목소리였다.그러나 그는 듣지 못했다. 아니, 들으려 하지 않았다.이성은 마지막으로 저항했지만 이미 본능이 한 발 앞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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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4화

방금 전까지 그런 아슬한 자세로 마주하고 있었어도 계연수는 일이 이렇게까지 번질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늘 고결하고 냉정하던 사람. 칠정육욕과는 거리가 먼 듯 보이던 심서준이, 자신에게 입을 맞추다니.젖은 숨결이 길게 얽혀들었다. 입술이 얼얼하게 아팠고 혀끝은 그에게 붙잡혀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으며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놀람과 당혹, 믿기 어려운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짙은 술기운이 두 사람 사이를 가득 메웠다. 계연수는 고개를 틀어 피하려 했고 손끝에도 더 분명한 거부의 힘을 실었다.그러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심서준은 그녀가 어디로 피하든 정확히 찾아냈다. 그녀가 알던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그녀 역시 세상 물정 모르는 규방의 아가씨는 아니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든 주도권을 빼앗긴 듯했다. 손목마저 머리 위로 단단히 붙들린 채, 숨결만이 얽혀 흐르고 있었다.결국 그녀는 어떻게 그의 아래에서 벗어났는지 기억조차 또렷하지 않았다.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했고 허둥지둥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밖에서는 여전히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빗물을 머금은 찬 바람이 얼굴을 스치자 비로소 흐릿했던 정신이 또렷해졌다.입술 끝이 아직도 미세하게 아렸다. 거기에 그의 체온과 숨결이 남아 있는 듯했다.문은 이미 닫았지만 돌아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소매로 입술을 급히 훔친 뒤, 흐트러진 발걸음으로 용춘의 방으로 향했다.방 안에 남은 심서준은 침상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문밖에 잠시 멈춰 서 있던 가느다란 그림자가 옆으로 사라지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몸의 열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 그녀의 향이 스며 있는 침상 위에 몸을 눕혔다. 등은 미세하게 굽어 있었고 거친 숨에 눌린 상태로 밤을 새웠다.*새벽녘, 아직 동이 트기 전 문하가 깨끗한 옷을 들고 문 밖에 서 있었다.후작이 안에서 몸을 씻고 나오자 옷을 들고 들어갔다.심서준은 옷을 갈아입고 문하를 한 번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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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5화

계연수가 심서준을 본 순간, 심장이 두어 번 크게 떨렸다.어머니가 머무는 객방은 그의 쪽이 아니었기에 그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짙은 먹빛에 가까운 녹색 옷으로 갈아입은 그는 길게 뻗은 몸을 곧게 세운 채 서 있었다.여전히 냉정하고 귀한 기품이 서려 있었지만 간밤에 빗속에 젖어 있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계연수는 그를 보자마자 무의식적으로 한발 물러섰다.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린 채 감히 그의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어젯밤의 일을 그가 모두 잊어버렸으면 했다.심서준은 그녀의 물러남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어젯밤, 잘 잤습니까?”그 한마디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계연수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어둡고 깊어 예전처럼 속내를 헤아리기 어려웠다.그가 정말 기억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아무것도 모른 채 무심히 던진 말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잘 잤습니다.”심서준은 짧게 대답하고 그녀를 깊이 바라보았다.“어젯밤 제가 말한 일에 대한 답을 기다리겠습니다.”계연수의 입술이 잠시 벌어졌다가 닫혔다.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간밤에 자신을 부인으로 맞이하겠다고 했던 말을.그렇다면 그 뒤에 발생한 일까지 기억하고 있는 걸까?생각이 뒤엉켜 어지러워지자 그녀는 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심서준은 그녀가 시선을 피한 채 산만해 보이는 모습을 보고 낮게 소리 없이 웃었다.사실 그는 조금 후회하고 있었다. 어젯밤, 자신의 욕망에 이끌려 결국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은 아닌지.그녀가 두려워하며 밀어냈던 순간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당연한 반응이고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전부 알고 있었지만 그는 기다릴 수 없었다.한 걸음 다가서며 고개를 숙여 그녀의 하얀 얼굴을 바라보았다. 가는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고 연기처럼 번지는 눈매가 가슴을 뜨겁게 했다.무심코 간밤의 부드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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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6화

심서준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사미 하나가 쟁반을 들고 찾아왔다.절집 음식답게 담백했고, 고기 기운은 없었지만 가지 수가 제법 많았으며, 맛 또한 정갈했다.밖으로 나가 보니 과연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계연수가 다가서자 검을 찬 호위 하나가 앞으로 나와 공손히 승차를 청했다.그 모습을 본 고씨는 잠시 불안한 기색을 보였으나 계연수가 몇 마디 다독이자 겨우 마음을 놓았다.이미 심서준이 마련해 둔 일이라면 무사히 돌아가는 편이 나쁠 것도 없다고 계연수는 생각했다.*무사히 집으로 돌아오자 고씨는 곧장 춘화를 시켜 짐을 챙기게 했다.그러나 계연수는 어머니를 붙잡고 하녀들에게 잠시 문밖에서 기다리라 이른 뒤 조용히 마주 앉았다.딸의 표정이 지나치게 진지하자 고씨는 의자에 앉으며 조심스레 물었다.“연수야,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계연수는 고개를 저으며 어머니 곁에 앉았다.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뒤, 간밤 심서준과 나눈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그녀는 말을 마친 뒤 조용히 덧붙였다.“제가 사옥현의 집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심 대인 덕분이었어요. 그분이 아니었다면 저는 평생 그 집을 떠나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가게에 모욕을 당했을 때도 심 대인께서 나서 주셨습니다. 그분은 제 억울함을 풀어 주셨고 손해도 돌려받게 해 주셨으며 악한 자를 벌하기도 하셨죠. 지금 어머니께서 드시는 약도 귀하고 효과가 좋은 약인데 그것 역시 심 대인께서 주신 겁니다.”계연수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앉았다.“저는 그 은혜를 늘 마음에 두며 갚을 길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심 대인께서 꼭 제 대답을 강요하신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저는 마음이 편치 않아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이것뿐인 것 같아서요.”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이틀 생각해 보라 하셨어요. 저도… 잘 생각해 보고 싶어요.”잠시 숨을 고른 뒤, 솔직한 속내가 흘러나왔다.“만약 제가 응한다면 아마 평생 심가에서 살아야 할 거예요. 어떤 날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고 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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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7화

당분간 이틀은 떠나지 않기로 하면서 계연수는 용춘에게 다시 짐을 정리하게 했다. 이미 싸 둔 것들은 그대로 두고 당장 쓰는 것들만 꺼내 놓으라 일렀다. 혹시라도 상황이 바뀌면 허둥지둥 다시 싸지 않아도 되도록 미리 대비해 두려는 마음이었다.잠시 뒤, 계연수가 문방구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 용춘이 급히 들어와 알렸다.“고하운 아기씨와 큰 외숙모께서 오셨습니다.”뜻밖의 방문에 계연수는 조금 당황했다. 그녀는 곧바로 용춘에게 모셔 오라 했다.고하운은 들어서자마자 얼굴 가득 기쁜 기색을 띠고 있었다.계연수를 보자마자 언니라고 부르며 곧장 다가왔다.계연수가 무슨 일인지 묻기도 전에 고하운이 수줍게 먼저 입을 열었다.“심가에서 내일 시회가 열린다며 저와 언니를 초청하셨어요. 저는 심가 규수들을 하나도 모르니 언니가 함께 가 주면 든든할 것 같아요.”계연수는 잠시 멈칫했다. 예전에 심정우가 시회를 연다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 분명 자신은 사양했던 듯한데 왜 다시 자신의 이름이 오르내리는지 알 수 없었다.게다가 얼마 지나지도 않아 또다시 고하운을 초청했다는 점과 지난번 심가 큰 마님의 극진한 태도까지 겹쳐 떠오르자 심가의 속내가 쉽사리 읽히지 않았다.황제가 하사 혼인을 내리려 한다 하지 않았던가? 혹시 고하운을 심서준과 혼인시켜 이를 피하려는 것일까?생각이 복잡하게 얽혔다.만약 그렇다면 심서준은 왜 자신에게 혼인을 청했단 말인가?계연수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뒤 조용히 말했다.“내일은 나는 가지 않겠다. 어머니를 돌봐야 하니 함께 하지 못할 것 같구나.”그 말이 떨어지자, 고하운의 얼굴에 금세 실망이 번졌다. 그녀는 계연수의 소매를 붙잡고 낮은 목소리로 애원했다.“언니, 같이 가 주세요. 저 혼자 가려니 무서워요.”그 두려움은 과장이 아니었다. 고하운이 이토록 매달린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심가의 규수들은 하나같이 출신이 빼어나다 했다. 심가 어르신은 첩들조차 홍려시 소경의 딸들이라 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서녀라 해도 몸에 걸친 것 하나하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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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8화

계연수는 사실 한 번쯤은 심서준에게 직접 묻고 싶었다. 요즘 들어 왜 심가에서 유독 고하운을 각별히 대하는지.곁에서 말없이 지켜보던 장씨는 계연수가 쉽게 답하지 않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연수야, 하운이와 함께 가 주렴. 심씨 노부인께서 하운이를 아낀다는 걸 알지 않느냐. 저 애는 어려서부터 겁이 많고 심가 규수들과도 낯이 익지 않다. 네가 곁에 있으면 그나마 마음이 놓일 거야.”장씨는 딸의 눈빛을 보고 이미 속내를 짐작하고 있었다. 문재를 따지자면 고하운은 솔직히 뛰어나다고 할 수 없었다. 만에 하나 자리에서 망신이라도 당한다면 차라리 죽고 싶을 만큼 수치로 여길 아이였다.이번 시회는 기회이기도 했다. 이 고비만 무사히 넘기면 심가 며느리로 들어가는 일은 거의 기정사실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장씨는 다시 한 번 말했다.“심가에서 너도 초청했다 하지 않느냐. 함께 가면 서로 의지라도 할 수 있지.”그리고 낮게 덧붙였다.“이 외숙모가 무릎 꿇고 청하는 셈 치고 가 주렴.”계연수는 그 말에 순간 멈칫했다.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외숙모께서 그러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심가에서 부른 자리라면… 하운이와 함께 가겠습니다.”그녀의 속마음에는 다른 생각도 있었다. 혹시 심서준을 마주치게 된다면 직접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장씨는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계연수가 진짜로 그 절을 받게 두지는 않으리란 걸 알았기에 더 밀어붙이지 않았다.고하운은 계연수가 승낙하자 얼굴이 환해졌다. 그러고는 이내 조심스럽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시회에서 혹여 어려운 상황이 생기면 조금 도와달라는 부탁이었다.말을 마친 뒤, 미안한 눈빛으로 계연수를 바라보았다. 스스로도 염치없는 부탁임을 알고 있었다.계연수는 그제야 고하운이 그토록 자신을 붙들었던 이유를 분명히 이해했다.그러자 그녀의 표정이 조금 단정해졌다.“다른 일이라면 도울 수 있는 건 돕겠다. 헌데 그건 어려워. 시회에서 제비를 뽑아 차례로 나서는 식이라면 그렇게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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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9화

고하운은 한 번도 시회라는 자리에 나가 본 적이 없었고 높은 가문의 규수들과 어울려 본 일도 없었다.어젯밤에는 겁이 나 거의 뜬눈으로 지새웠고 아침이 되었어도 졸음은커녕 가슴만 두근거렸다.시의 제제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하늘과 사계, 풀과 나무 같은 자연의 정취부터, 규방의 소소한 일상과 정교한 물건, 한가한 취미를 노래하기도 한다. 혹은 고사를 빌려 뜻을 전하고 제목 없이 감흥을 풀어내거나 역사를 읊으며 옛일을 추모하기도 한다.어느 쪽이든 그녀는 자신이 없었다.심가는 본래 서향문제라 불리는 집안이었다. 집안의 여인들 또한 남자와 다름없이 글을 읽었고 어려서부터 사서(四書)를 함께 배우며 이치를 익혔다. 그러니 재능이야 말해 무엇하랴.게다가 심가의 족학은 경성에서도 손꼽히는 곳이었다. 권문세가들조차 자식들을 그곳에 들이려 애쓰는데 그런 이들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능숙할 수 있을지, 고하운은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했다.계연수는 조용히 위로했다.“심가의 규수들은 일반 규방 여인들과는 달라. 견문도 넓고, 식견도 있어. 조금 모자라 보인다 해도 그리 흉이 되진 않을 거야.”그러나 고하운은 고개를 저었다.이번 자리는 그녀에게 단순한 시회가 아니었다. 심씨 노부인이 자신을 시험하는 자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이 고비만 넘기면 노부인의 마음을 확실히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심서준 후작을 두어 번 마주한 이후로 그녀의 마음에는 은밀한 상상이 싹텄다. 장차 후작 부인이 되어 경성에서 가장 부러움을 사는 여인이 되는 모습. 그처럼 고귀한 남자의 곁에 서는 자신. 그 상상은 어느새 밤낮없이 자라나 있었다.고하운은 말없이 자수를 놓은 손수건을 꽉 쥐었다. 입술도 모르게 질끈 다물었다.*이윽고 심가에 도착했다.하인들이 길을 이끌어 뒤뜰 쪽으로 안내했다. 수화문을 지나자마자 붉은 옷을 입은 젊은 사내가 문 앞에 서 있었다. 길고 단정한 몸에 환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심정우였다.장씨와 고하운은 갑작스레 튀어나온 그를 보고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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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0화

심정우는 잠시 생각했다. 어차피 남이 들어선 안 될 비밀도 아니었다. 게다가 방금 계연수의 말투에서 그녀가 괜한 오해를 피하려 한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막 화리한 몸이니 세간의 시선이 얼마나 날카로운지도 잘 알 터였다.그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걸어가며 이야기해도 되지.”심정우는 키가 크고 몸가짐이 곧았다. 심가에서 유일한 무장이어서 그런지 다른 형제들처럼 단정하고 학구적인 분위기와는 조금 달랐다. 몸에는 어딘가 호방한 기운이 배어 있어 오히려 거리감이 적고 말을 걸기 쉬운 사람처럼 보였다.고하운은 자신도 모르게 몇 번이나 그를 흘낏 바라보았다. 금빛 연꽃무늬가 수놓인 붉은 옷이 그의 얼굴을 더욱 희게 돋보이게 했다.심가의 남자들은 어찌 저리도 하나같이 빼어난지.그러나 곧 심정우가 고개를 숙인 채 계연수를 향해 웃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러자 고하운의 손가락이 다시 한 번 조여졌다.*심가의 후원은 길이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고 고요한 정취 속에 단정한 풍경이 겹겹이 놓여 있었다.그때, 심정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어제 큰일이 하나 터졌다. 사옥현의 집에서 사는 그 사촌 누이 말이다. 서역 상인한테서 자손을 끊는 약을 사서 사옥현을 해치려 했다더구나.”그는 웃음기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헌데 그 서역 상인이 돈을 다 못 받았다며 우리 오숙부께 고해바쳤다지. 약 값을 떼어먹었다고 말이다. 오숙부가 곧장 사람을 보내 그 사촌 누이를 사옥현의 집에서 끌어왔는데 난리도 아니었어.”계연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예전에 사옥현이 찾아와 흘렸던 이야기가 떠올랐다.그 일이 사실이었구나.“끌고 올 때 보니 이미 거의 죽기 직전이더라고. 장작방에 가둬 놓고 굶겨 죽일 참이었대. 사옥현의 집에서는 이미 진상을 알고 있었지만 이 일을 밖으로 알리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야. 뒤에서 조용히 처리하려 했던 거지. 헌데 하필 그 서역 상인이 오숙부께 들이닥쳤으니 일이 커질 수밖에.”계연수는 문득 의문이 스쳤다. 조용히 덮으려 했다면 그 상인에게 돈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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