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7년을 바쳤는데, 내가 떠나자 미쳐버렸네: Chapter 91 - Chapter 100

146 Chapters

제91화

병원에 입원해 있던 이틀 동안, 강서이는 거의 붙어 있다시피 하면서 하정민의 곁을 지켰다. 말동무도 해 주면서, 아이의 마음도 다독였다.그 시간을 지나면서 하장현은 뒤늦게 알아차렸다. 문제가 하정민이 아니라, 하장현의 방식에 있었다는 걸.그 뒤로 강서이는 하정민을 데리고 직접 심리상담을 받으러 다녔고 틈틈이 공부도 봐 줬다. 하정민이 지치지 않도록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으면서 하나씩 조절해 갔다.하정민은 강서이의 도움으로 조금씩 살아났다. 그리고 마침내 하정민이 원하던 고등학교에 합격했다.하정민은 강서이를 정말 좋아했다. 속마음을 누구에게도 말 못 하던 때, 강서이에게는 다 털어놨다. 그러다 보니 강서이의 사정도 꽤 알게 됐다.강서이에게 남자친구가 있고, 그 남자친구가 강서이의 상사라는 것까지도.그리고 하장현의 마음도 하정민의 눈을 속이기는 어려웠다.하정민은 하장현에게 여러 번 말했었다. 하장현이 늦었다고, 인연이 아니었던 것 같아서 아쉽다고.하장현은 인성이 제대로 된 사람이었다. 강서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자, 하장현은 마음을 접었다. 스스로를 다잡으면서 선을 지켰다. 단 한 번도 선을 넘지 않았다.그런데 오늘, 하장현은 민도하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직접 봤다.게다가 강서이는 프라임로드투자를 떠난 상태였다.하장현은 많은 걸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조금만 엮어 보면 결론은 하나였다.‘강서이 씨랑 민도하는 끝났구나.’그 결론이 떨어진 그때, 하장현의 심장이 이상하게 들떴다.그리고 하장현은 그 기분을 숨기지 못한 채, 바로 동생 하정민에게 전화를 걸어 그 소식을 전했다.기숙사에 있던 하정민은 2층 침대 위에 엎드린 채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전화를 받고 그 얘기를 듣는 순간, 하정민은 벌떡 뛰어올랐다. 그러다 머리를 천장에 그대로 부딪쳤다.[아야!]아팠지만, 하정민은 머리부터 잡지 않았다. 통증 따위는 뒷전이었다. 하정민은 숨도 안 고르고 하장현을 몰아붙였다.[그럼 뭐해!][오빠,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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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화

예전에 강서이가 민도하의 비서로 일할 때도, 이런 투자자 모임에 따라간 적이 있었다. 운 좋게 끼어들 수 있었던 자리였다.하지만 그때의 강서이는 ‘테이블에 앉는 사람’이 아니었다. 대부분은 옆에서 민도하 대신 술을 받아내는 역할이었다. 술을 안 마시는 타이밍이면, 문 밖에서 대기하라는 말도 들었다.그런 자리에서 오가는 건, 일반인은 접근조차 못 하는 이야기들이었다. 자본이 몰리는 방향, 인수합병, 지분 구조, 아직 밖으로 나가면 안 되는 정보들.그런데 민도하는 노아리를 당당하게 데리고 들어왔다. 그냥 데리고 온 게 아니라 민도하가 직접 연결해 주고, 민도하가 직접 길을 깔아줬다. 사람을 소개하면서 말할 기회를 주고, 관계망을 만들어 줬다.강서이는 문득 생각했다.‘민도하는 노아리를 얼마나 사랑하길래... 저렇게까지 다 꺼내서 깔아 주는 거지.’고창규는 강서이의 사업계획서에 관심이 있어 보였다. 그렇지만 고창규는 어디까지나 사업가였다. 감정이 아니라 손익으로 움직이는.고창규는 계획서를 덮더니, 돌려 말하지 않았다.“저는 솔직히 이 프로젝트가 꽤 괜찮다고 봅니다. 그런데 아시잖아요. 요즘 경기가 너무 안 좋아요.”“자본시장도 뒤숭숭하고요. 다들 리스크 줄이려고... 결국 뭉쳐서 가는 걸 택합니다. 제가 무슨 말 하는지 아시죠?”강서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해합니다.”고창규가 바로 물었다.“이 프로젝트를 민 대표님께도 한번 보여줄 생각은 없으세요?”강서이는 대답이 막혔다.고창규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민 대표님이 투자하면, 저는 무조건 따라가겠습니다. 무조건요.”그리고 고창규는 말끝을 낮추며 덧붙였다.“강서이 씨, ‘큰 나무 아래가 편하다’는 말, 강서이 씨가 더 잘 알 겁니다. 자원으로만 보면... 저는 노 본부장님 쪽이 더 유리하다고 봐요. 노 본부장님 뒤에는 민 대표님이 있잖아요.”그 말은 결국 이거였다.노아리의 프로젝트는 민도하가 받쳐준다. 그래서 안전하다.강서이의 프로젝트는 강서이 혼자다. 그래서 위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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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화

말을 하던 하정민은 끝내 눈시울이 붉어졌고 목소리 끝도 떨렸다.“오빠가 진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우리 엄마는 어떡해. 나는 어떡해?”하장현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하정민은 아직 초등학생이었다. 그때도 어머니는 원래 몸이 좋지 않았다. 집안의 무게가 한꺼번에 하장현에게 쏟아졌다.하장현은 자연스럽게 집안의 버팀목이 됐다. 하정민과 어머니가 의지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사람이었다.그래서 하정민이 저렇게 무너지는 건 당연했다.강서이는 하정민을 안아 품어 주며 조용히 달랬다.“괜찮아. 언니가 옆에서 봐줄게. 언니가 너희 오빠 제대로 쉬게 만들 테니까 걱정하지 마.”하정민이 조금 진정하고 나서야, 강서이는 상황을 제대로 물어볼 수 있었다. 강서이의 표정이 단호해지면서 말도 차가워졌다. 평소의 부드러운 톤이 사라지자, 묘하게 사람을 긴장시키는 기운이 생겼다.“정민이가 그러던데요.” 강서이가 하장현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하 사장님 혼자 열 사람 몫 일을 한다는 게, 그게 무슨 말이에요?”하장현은 이 상황에서도 얼버무리려 했다.“그 정도는 아니에요.”하정민이 바로 끼어들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왜 그러는지 알아? 돈 아끼려고 그러는 거잖아. 비용 줄이려고!”그 말에 강서이 가슴이 묘하게 쓰렸다.하정민이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강서이는 대강 그림이 그려졌다.하장현은 강서이가 가진 자금이 넉넉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강서이가 아직 새 투자자도 못 잡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거다. 그래서 하장현은 ‘아끼자’ 쪽으로 혼자 결론을 내리고, 그 부담을 자기 몸으로 감당한 거였다. 강서이에게 돈을 덜 쓰게 해 주려고.강서이의 표정이 굳어지자, 하장현도 슬슬 불안해졌는지 더는 숨기지 않고 설명했다.“요즘 개발자 인건비가 너무 높아요. 한 명 뽑으면 연봉이 기본이 억 단위로 시작하잖아요. 돈이 너무 많이 들어요. 프로젝트가 아직 새 투자도 못 받았는데, 제가 할 수 있으면... 제가 좀 더 하면 되니까요.”하정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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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화

톡을 보내자마자, 단톡방에서 누가 강서이를 태그했다.강서이는 손끝이 스치듯 알림을 잘못 눌렀고, 그대로 단톡방이 열렸다. 들어가서야 강서이는 그 방이 프라임로드투자에서 예전에 진행했던 워크숍 조별 단톡방이라는 걸 알아챘다.‘아... 이 방 나간 줄 알았는데...’저장도 안 해 둬서 존재를 잊고 있었다.글을 올린 사람이 서주미였다. 서주미는 단톡방 전원을 태그해 놓고, 들뜬 문장들을 쏟아냈다.[여러분, 제가 누구 만난 줄 아세요? 민 대표님이랑 노 본부장님을 봤어요! 두 분이 일부러 첫눈 보러 오셨대요. 이거 너무 로맨틱한 거 아니에요?]바로 밑에 반응이 우르르 달렸다.[진짜요? 민 대표님이랑 노 본부장님은 진짜 사이가 너무 좋다...][인터넷에서 그러던데요. 남자가 여자랑 같이 첫눈 보자고 하면, 그거 애정 표현이라던데... 민 대표님 이거 노 본부장님한테 고백하는 거 아니에요?][축하합니다!][축하드립니다!][...]채팅창은 순식간에 축복으로 가득 찼다.태그가 찍힌 노아리도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 노아리는 과하게 들뜨지도, 차갑지도 않게 답했다. 딱 예의 바른 선에서.[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그리고 노아리는 방금 찍었다는 첫눈 사진을 단톡방에 공유했다.강서이는 무심코 사진을 눌러 확대했다.사진 오른쪽 위에 낯익은 실루엣이 걸려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을 보고 있는 남자였다. 화면 빛이 어렴풋하게 남자의 옆선을 밝혀서 윤곽이 더 또렷해 보였다.민도하였다.‘공개하는 거네.’강서이가 예상한 것보다 빠르긴 했다. 그래도 이상하진 않았다. 부모까지 만난 사이였다. 공개는 결국 시간이 문제였을 뿐이다.단톡방 사람들은 앞다퉈 축하를 이어갔다.강서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단톡방을 나왔다. 그리고 다시 민도하와의 대화창을 열었다. 방금 보냈던 메시지 하나.[혹시... 시간이 있어?]강서이는 그 메시지를 삭제했다.민도하 쪽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바빠서일 수도 있고, 못 봐서일 수도 있다.하지만 강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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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화

여전히 답이 없었다.강서이는 미련 없이 민도하를 ‘최근 대화’ 목록에서 지웠다. 그리고 집을 나섰다. 다시 투자 유치를 위해 뛰어야 했다.오전에는 두 군데를 더 돌았다. 결과는 똑같았다.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점심엔 간단히 먹을 걸 사서 병원으로 갔다. 하장현을 보러 간 거였다. 그런데 병실 문을 열자마자 강서이는 바로 알아차렸다.하장현은 링거를 달고도 노트북을 붙들고 있었다. 집중하느라 링거가 거의 끝난 것도 몰랐다. 주사 바늘 쪽으로 피가 역류해 있었다.“하 사장님!”강서이는 급히 다가가 하장현의 손부터 잡았다. 그리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조치를 했다. 새 수액을 연결하고, 라인 안에 남아 있는 공기를 빼고, 흐름을 확인했다. 동작은 빠르고 정확했다.하장현이 그걸 보며 묻지 않을 수 없었다.“이런 것도 할 줄 아세요?”“엄마가 몸이 안 좋아서요.” 강서이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옆에서 챙기다 보니 손에 익었어요.”“아...”하장현이 짧게 반응했다. 그 뒤로는 무슨 말을 이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기색이었다.하장현은 전형적인 기술자 타입이라 사람을 상대하는 데 능숙하지 않았다. 특히 여자와 어떻게 대화를 이어가야 하는지도 잘 몰랐다. 하정민은 그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하정민은 하장현에게 ‘여자를 어떻게 꼬시는지’ 계속 가르쳤다.방법도 많이 알려줬다.그런데 하장현은 그걸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몰랐다.머릿속에서 말이 한 바퀴 돌다가 입 밖으로 나오면 늘 일 얘기가 됐다.“오늘은... 좀 어땠어요? 잘 됐어요?”“괜찮아요.” 강서이가 가볍게 대답했다.“오후에 두 군데 더 가요.”말투는 가벼웠지만, 강서이의 발뒤꿈치가 까져 있었다. 하이힐에 쓸려 살이 벗겨진 상처가 난 걸 하장현이 보고 말았다.하장현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호출 벨을 눌렀다. 간호사가 들어오자 하장현이 조용히 부탁했다. 상처를 소독할 약이랑 밴드 같은 걸 달라고.강서이는 하장현이 어디 아픈 줄 알고 하장현을 살펴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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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화

‘그럼 노아리도 여기 있겠네.’둘은 늘 붙어 다녔다. 강서이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강서이는 서태우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서태우 같은 사람과 말싸움을 하는 건, 길에서 개 짖는 소리와 맞받아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시간만 버리는 일이었다.강서이는 서태우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그런데 서태우가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일부러 강서이를 긁는 말만 골라 던졌다.“강서이, 진짜 눈치가 없냐? 도하가 아리 다시 잡으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알아? 1년 전에 아리가 한승 형이랑 사이 틀어졌을 때, 도하가 바로 따라붙었어.”“그 뒤로 1년 내내 비행기 타고 다니느라 하늘에 사는 사람 됐다고. 이제야 겨우 일이 풀렸는데, 너는 좀 알아서 도하 인생에서 사라지면 안 돼?”강서이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봤다. 목소리는 차가웠다.“그럼 네가 둘이 같이 하늘로 올라가게 해 줘. 태양 옆에 붙여 놓든가. 거기가 제일 조용하잖아. 누구랑든 지키고 싶은 거 지키고, 같이 재로 변해서 영원히 붙어 살면 되겠네.”서태우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강서이가 이렇게 날을 세우는 모습을 서태우는 처음 봤다. 대꾸가 바로 나오지 않았다.강서이는 더 이상 쳐다보지 않고 돌아섰다.강서이가 사라지고 나서야 서태우는 뒤늦게 열이 올라왔다. 서태우는 욕을 내뱉으며 옆에 있던 화분을 발로 차 넘어뜨렸다. 쨍그랑 소리가 크게 울렸다....서태우가 룸으로 돌아왔을 때도 표정이 풀리지 않았다.“아, 진짜 존나 재수없네.”서태우는 감정을 숨기는 타입이 아니다.노아리가 물었다.“왜 그래? 누가 너 그렇게 열받게 했어?”서태우는 누가 물어봐 주길 기다린 사람처럼 바로 쏟아냈다.“밖에서 더러운 거 봤어.”노아리가 눈을 깜빡였다.“오늘 오픈한 곳인데 무슨 더러운 게 있어?”오늘은 원래 서태우가 새로 연 업소를 축하하러 온 자리였다. 서태우가 몇몇 금수저 친구들이랑 같이 투자해서 만든 곳이었다. 규모가 EVERYDAY만큼은 아니어도, 딱히 뒤처질 수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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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화

심진호는 애초에 강서이에게 다른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강서이가 도착하자마자, 심진호는 어떻게든 술을 권했다. 잔을 비우게 만들고, 분위기를 흐리게 만들려고 했다.그런데 강서이는 술이 강했다. 반대로 심진호는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먼저 취기가 올라왔다. 말끝이 느슨해지면서 눈이 풀렸다.심진호는 결국 조급해졌다. 강서이가 프로젝트 이야기를 차분히 이어가려는 걸, 심진호가 성급하게 끊었다.“난 강서이 씨 비즈니스 감각이나 프로젝트 끌고 가는 능력,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어. 강서이 씨라면 이거 잘 해낼 거라고 믿어.”강서이는 돌려 말하지 않았다.“그럼 심 대표님, 투자해 주실 건가요?”심진호가 웃었다.“투자는 해줄 수 있어. 대신 조건이 있어.”심진호가 말을 마치자마자, 심진호 손이 강서이 손등 위로 덮였다.“강서이 씨는 똑똑하잖아.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강서이가 담담하게 말했다.“네, 압니다.”심진호는 그 말에 기세가 확 올랐다. 강서이가 드디어 ‘생각이 바뀐’ 줄 알았다. 심진호가 손을 더 움직이려던 때였다.그때 룸 문을 누군가 열어제쳤다.심진호의 흐름이 끊어지면서 분위기가 확 망가졌다.심진호는 속이 확 뒤집혔다. 누가 눈치도 없이 들어오냐고, 욕부터 튀어나오려던 참이었다.그런데 옆에서 강서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서이는 티 나지 않게 손을 빼내면서도, 입가에는 환한 웃음을 걸었다. 바로 들어온 사람에게 먼저 인사했다.“사모님, 이제 오셨네요. 저희가 얼마나 기다렸는데요.”웃고 있던 심진호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지면서 그제서야 깨달았다.‘아... 강서이가 이렇게 해놨네.’강서이가 미리 보험을 걸어둔 거였다.심진호는 속으로 욕을 삼켰다.‘내가 너무 쉽게 봤네.’민도하 옆에서 그렇게 오래 굴렀던 사람이었다. 강서이가 이런 상황에서 아무 준비 없이 들어올 리가 없었다. 혼자 온 것처럼 보여도 강서이는 이미 판을 짜놓고 온 거였다.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석아령이었다.석아령은 심진호를 보지도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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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화

사람 마음은 원래 변한다.강서이는 이미 민도하에게 기대를 접은 지 오래였다. 그러니 민도하가 강서이를 위해 나서서 ‘정리해 줄 거다’ 같은 기대도 없었다. 강서이는 애초에 그런 걸 바라지 않았다.그녀는 시선을 금방 거뒀다. 표정도 담담했다.이어서 서태우를 바라보는 눈은 말 그대로 더러운 걸 보는 것 같았다.서태우는 원래 강서이에게 몇 마디 더 던져서, 아까 입구에서 강서이한테 밀린 체면을 되찾고 싶었다. 그런데 강서이의 반응이 예상과 달랐다.그녀는 당황하지도 않았다. 들킨 사람처럼 움츠러드는 기색도 없었다. 오히려 뻔뻔할 만큼 차분했다. 그리고 그 눈빛엔... 서태우를 내려다보는 듯한 냉소가 담겨 있었다.술까지 들어간 서태우는 더 쉽게 끓어올랐다. 말은 이제 그저 비꼬는 수준이 아니었다.“지금 나를 왜 쳐다봐? 내가 틀린 말 했어? 너 원래 그런 애잖아. 겉으로만 멀쩡한 척하고. 그리고 너, 인성도 별로고, 돈 되면 뭐든 하는 타입이고, 이익이면 수단 방법 안 가리는...”“그만해.”끝까지 무표정이던 민도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서태우는 아직도 성이 덜 풀렸지만, 민도하가 말했으니 더는 밀어붙일 수 없었다. 서태우는 이를 악문 채 입을 다물었다.옆에서 노아리가 난처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말했다.“강서이 씨, 죄송해요. 태우가 술을 좀 마셔서요.”강서이는 차갑게 대답했다.“그럼 민 대표님이 개 좀 잘 묶어 두세요. 여기저기 물고 다니게 하지 말고요. 누구나 민 대표님처럼 그 개를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서태우가 발끈했다. “강서이, 너...”노아리가 재빨리 서태우의 팔을 잡아당겼다.“태우야, 됐어. 우리 다 말 좀 줄이자.”강서이는 더 얽히지 않고, 심진호와 함께 그대로 자리를 떴다.노아리는 강서이가 멀어지는 동안, 민도하를 한 번 바라봤다. 강서이가 저렇게 나가는 걸 보고 민도하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그런데 민도하의 표정은 끝까지 같았다.민도하는 정말 낯선 사람을 보는 것처럼 무심했다. 강서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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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화

펜을 받아 든 그때, 강서이 눈가가 뜨거워졌다.“미리 말해 둘게요.” 강서이가 조용히 말했다. “여기 사인하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어요.”하장현은 망설임이 없었다. 오히려 더 재촉했다.“그러니까 빨리 사인해요.”하장현은 강서이 손에 쥔 펜을 바라보며 덧붙였다.“그리고.” 하장현이 말했다. “강서이 씨가 처음 저 찾아왔을 때, 제 기술 믿는다고 했잖아요. 저... 도태될 사람 같아요?”자기 분야에선 하장현이 확실했다. 자신감이 아니라 근거 있는 확신이었다.강서이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계약서 위에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적었다. 손놀림은 망설임 없이 깔끔했다....일은 순조롭기도 했고, 순조롭지 않기도 했다.창업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문제를 한꺼번에 가져왔다. 강서이는 그걸 하나도 빠짐없이 마주쳐야 했다. 그래도 그녀는 버틸 수 있었다. 멘탈이 쉽게 꺾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지난 몇 년 동안 강서이는 이미 충분히 단련돼 있었다.강서이는 두 갈래로 움직였다. 한쪽은 투자 유치, 다른 한쪽은 은행 대출.그런데 대출은 절차가 복잡했고, 시간도 오래 걸렸다. 급한 불을 끌 수 있을 것 같아 보여도 실제로는 당장 도움이 되지 않았다.계좌에 남은 돈이 매일 줄어드는 걸 보면서 강서이도 불안해졌다.어느 날은 또 은행 한 군데를 다녀왔는데도 답을 못 받았다. 강서이는 지하철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봤다. 피로가 몸에 눌러앉는 느낌이었다.그때 핸드폰이 연달아 울렸다.‘안 봐도 알아.’김설이었다. 김설 아니면 이런 리듬으로 메시지를 보낼 사람이 없었다. 김설은 문장 하나를 쪼개서 보내는 버릇이 있었다. 한 번에 보낼 말을 세네 번으로 나눠서 보내는 식.강서이가 톡을 열었다.김설이 또 잔뜩 흥분해서 쏟아내고 있었다.[서이 언니.][사람이 사람을 보면...][진짜 열받을 때가 있잖아요!][언니, 아세요?][민 대표님이 방금...][노 본부장님 위해서...][돈을 그냥 쏟아부었어요.][‘골든빌’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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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화

그 메시지를 보는 강서이는 어이가 없었다.‘2주이나 지났는데, 이제 와서 묻는다고?’그래도 그 한 줄이 알려주는 게 있었다. 민도하는 그때도 메시지를 봤다는 것. 다만 일부러 못 본 척했을 뿐이라는 것.예전에 강서이가 보냈던, 답 없이 묻힌 메시지들도 아마 비슷했을 것이다.그때의 강서이는 눈 먼 봉사였다. 그래서 그걸 알아채지 못했다.강서이는 민도하 대화창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그 대화창을 치워버렸다.‘이제 와서도 민도하는 여전히 내가 예전처럼 자신에게 매달릴 거라고 생각하나?’‘메시지 오면 내가 바로 답하고, 전화 오면 내가 바로 받고...’‘하루 24시간 대기하던 멍청한 강서이로 돌아가길 바란 건가?’‘이제 절대 불가능해! 끝난 건 끝난 거야.’친구 삭제를 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그건 초등학생이거나 아직 못 내려놓은 사람이 하는 일이었다....다음 날, 강서이는 하장현의 회사에 들렀다.사무실에 들어서자, 사람 수가 더 줄어든 게 눈에 띄었다. 처음엔 ‘아직 출근 전인가’ 하고 넘겼다. 그런데 나갈 때 다시 보니, 그건 출근 여부 문제가 아니었다.자리가 비어 있었다.그 자리들은 정말로 비어 있었다.강서이는 슬쩍 하장현 비서에게 물었다.처음엔 비서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아무 말도 안 하려고 했다. 그런데 강서이가 계속 물어보자, 비서는 끝내 버티지 못하고 털어놨다.최근 하장현이 비용을 줄이려고 사람을 꽤 내보냈다는 거였다. 강서이 부담을 덜어주겠다는 이유로.그리고 그 사람들이 하던 일은... 대부분 하장현이 떠안았다.그뿐만이 아니었다. 하장현은 틈을 내서 외주도 받았다. 회사 운영비를 보태려고. 그 시간은 결국 하장현의 잠자는 시간을 갉아먹었다.비서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사장님 요즘 하루에 세 시간도 못 주무세요. 이렇게 계속 버티시면... 몸이 못 버텨요.”강서이는 그 말에 속이 내려앉았다‘투자, 어떻게든 붙여야 해.’자금 유치는 이제 ‘선택’이 아니라 ‘당장’이었다.강서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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