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키워온 장미를 숙적에게 빼앗긴 밤: Chapter 521 - Chapter 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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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1화

오랫동안 목마름에 시달리며 사막을 걷던 사람이 눈앞의 오아시스가 신기루일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뛰어드는 것과 같았다.“해인 씨, 제 아버지가 해인 씨 어머니를 해쳤고, 간접적으로 해인 씨 아버지의 죽음까지 불러왔잖아요. 제가 무슨 낯으로 해인 씨의 지원을 받겠어요?”태상은 여러 차례 해인에게 직접 사과하고 싶었지만 해인은 받아 주지 않았다.그 사이에 해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상처는 이미 커졌다. 태상이 사과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죽은 사람이 다시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그래서 태상은 오래전에 해인의 용서를 구하는 데만 매달리는 일을 멈췄다.그런데 해인이 갑자기 태상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해인의 눈이 맑게 빛났다. “예태상 씨는 저를 좋아하잖아요. 제가 가까워질 기회를 주겠다는데, 싫어요?”태상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해인의 말은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 “해인 씨, 지금...”해인이 말했다. “어쩌면 우리... 친구부터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하지만 전에 해인 씨가...”“그건 그때였죠. 사람 생각은 바뀌기도 하잖아요.”해인이 태상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악수 한 번으로 묵은 감정은 덮는 거, 어때요?”태상은 해인이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해인의 손은 예뻤다. 길고 하얀 손가락은 마디마디가 가늘고 곧았다. 손목에는 얇은 은팔찌가 걸려 있었다.태상이 해인의 호의를 직접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드문 기회였다. 태상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얼른 손을 내밀었다.두 사람의 손은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해인은 아주 짧게 손을 잡고 곧바로 거두었다.하지만 태상의 입가에는 웃음이 번졌다. 그제야 태상은 자신이 생각보다 해인을 더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그동안 마음을 덮고 있던 어두운 기운도 조금 걷힌 듯했다.태상은 엄지로 손끝을 살짝 문질렀다. 손끝에는 아직 해인의 온기가 남아 있는 듯했다.해인이 말했다. “가까운 시일 안에 사람을 보내 실험실 실사를 진행할게요.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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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2화

엘리베이터 고장 자체는 아주 드문 일은 아니었다.하지만 고장이 난 상황에서 통화 버튼을 눌러도 관리실과 연결되지 않는 건 이상했다.게다가 엘리베이터는 정기적으로 전문 업체가 점검하며 고장을 확인한다. 이 엘리베이터도 점검을 마친 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다.사방은 어두웠다. 태상은 핸드폰 손전등을 켜서 비좁은 공간을 밝혔다.좁은 공간 안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비쳤다. 태상은 걱정 어린 눈으로 해인을 바라보았다.“괜찮아요?”해인은 눈썹을 찌푸렸다. 경계심이 어린 눈빛이었다. “예태상 씨가 일부러 그런 거예요?”태상이 해인을 좋아한다면, 이런 기회를 빌려 단둘이 갇히는 상황을 만들고 구해 주는 사람인 척하려 했다고 해도 말이 아주 안 되는 건 아니었다.태상이 곧장 말했다. “아니에요. 해인 씨, 저는 그런 비열한 짓은 하지 않아요.”해인은 태상의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하지만 단지 해인과 잠깐 갇혀 있으려다가 잠재적인 투자자를 잃는다면 분명 손해가 클 것이다.다행히 해인은 실험실에 들어오기 전에 우진에게 미리 말해 두었다. 30분 뒤에도 연락이 되지 않으면 신고하라고 했다.그러니 해인이 여기서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길어야 30분이었다. 곧 누군가 구하러 올 것이다.그 생각에 해인은 조금 안심했다.엘리베이터 안은 서늘했다. 태상이 자기 겉옷을 벗으면서 물었다. “춥지 않아요? 괜찮으면...”해인은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안 추워요.”그때 엘리베이터 광고 화면이 깜빡거리더니 다시 켜졌다.안에서 기괴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듣는 사람의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들 만큼 섬뜩했고,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했다.“강해인, 오랜만이네.”해인은 바로 화면을 바라보았다.흰 배경이 흔들리면서 목소리가 왠지 익숙했다. ‘하예주인가?’역시나 다음 화면에 예주의 얼굴이 엘리베이터 모니터에 나타났다.해인은 놀란 얼굴이 됐다.고작 1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뿐인데, 20살을 갓 넘긴 예주는 훨씬 늙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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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3화

예주는 절뚝거리며 걸었다. 당시 부러진 두 다리를 제때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후유증이 남은 듯했다.“나는 이 망가진 다리로 도망치려고 꼬박 이레 밤낮을 걸었어. 두 발에는 물집이 잡히고 피가 나고 딱지가 앉았지.” “그렇게 B시까지 걸어오면서, 또 차비를 벌 방법을 찾으면서 버텼어.”“강해인, 그때 나를 버티게 한 단 하나의 생각은 너에게 복수하는 거였어. 너도 나처럼 고통스럽게 만들겠다는 생각. 내가 겪은 고통을 너도 맛보게 하겠다는 생각!”예주의 눈에는 끝없는 증오가 넘쳤다.비를 맞은 사람이 다른 사람도 우산을 못 쓰게 하려는 악감정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 예주는 분명 그런 사람이었다.해인은 태상을 바라보았다. “하예주가 왜 예태상 씨 실험실에 있는 거예요? 예태상 씨가 숨겨 준 거예요? 둘이 한패예요?”태상은 잔뜩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제 잘못이에요. 한 달 전 실험실에서 임금을 제대로 못 주는 상황이 됐어요.”“청소 직원이 그만뒀는데, 마침 하예주가 찾아왔어요. 숙소만 제공해 주면 월급은 반만 받아도 된다고 했어요.”태상과 예주는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지금 예주는 완전히 달라져 젊은 여자의 모습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태상은 예주를 오래전에 잊었고, 예주의 진짜 신분도 알아보지 못했다.게다가 예주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가짜 신분증까지 갖고 있었다. 그걸로 면접에 합격한 것이다. 당시 태상은 빚을 갚느라 정신이 없었고, 일이 너무 많아 세세하게 확인하지 못했다.그 부분에 대해서 해인은 태상이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고 느꼈다.해인도 예주를 처음 봤을 때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강해인, 너 임신했구나.” 예주의 목소리는 차갑고 가벼웠다. “마침 잘됐네. 오늘 엄마와 아이가 같이 죽으면 되겠어. 엄마하고 아이가 내 인생이 망가진 대가를 치러야지.”태상의 얼굴이 굳어졌다. “뭘 하려는 거야?”“대표님, 저를 실험실에 채용해 주셔서 감사했어요. 일자리와 잘 곳까지 주셨잖아요. 하지만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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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4화

태상이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해인 씨, 다 제 잘못이에요. 이 안에 문제가 있다는 걸 진작 눈치챘어야 했는데... 출입문이 조작된 것 같아요.”해인이 태상을 보았다. “무슨 뜻이에요?”태상이 설명했다. “실험실은 얼굴 인식으로 출입해야 합니다. 그런데 방금 해인 씨는 출입문으로 그냥 들어오셨습니다. 아무도 막지 않는 것처럼요.” “해인 씨가 실험실 안에 나타났을 때 저도 꽤 놀랐어요.”그 말은 누군가 일부러 해인을 들여보냈다는 뜻이었다.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왜 진작 말 안 했어요?”해인은 여러 가능성을 계산했다. 태상이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지만, 대놓고 해인에게 손을 댈 용기는 없을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예주가 태상의 실험실에 숨어 있을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예주는 태상과 완전히 달랐다. 잃을 게 없는 사람인 데다가 거의 미친 인간이었다.엘리베이터는 다시 맨 위층으로 올라갔다.예주가 웃으며 말했다. “강해인, 나한테 빌어 봐. 무릎 꿇고 살려 달라고 하면, 내가 봐서 기분이 좋으면 한 번 봐 줄지도 모르잖아?”해인의 얼굴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하예주, 오늘 나를 여기서 죽일 거면 확실히 죽여. 아니면 내가 나가면 죽는 건 네가 될 거야.”해인이 예주에게 무릎을 꿇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예주는 해악 그 자체였다. 고마움도 모르고 은혜를 원수로 갚고, 마음속에는 악의만 가득한 인간이었다.예주가 말했다. “아직도 입만 살았네. 내가 너무 착했나 봐. 네가 나를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는 걸 보니까.”예주는 망설임 없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 버렸다. 막 위층에 도착했던 엘리베이터는 놀이공원의 자유낙하 기구처럼 다시 빠르게 아래로 떨어졌다.완충 장치도 없이 엘리베이터는 승강로 아래쪽으로 처박혔다. 해인의 몸이 거의 떠오를 뻔했다. 다행히 옆에 있던 태상이 해인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해인은 입술을 깨물고 한 손으로 배를 꼭 감쌌다.예주가 물었다. “한 번 더 할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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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5화

눈이 빛에 익숙해지고 나서야 해인은 천천히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태상이 본능적으로 해인을 부축하려고 했다. 그런데 옆에서 손 하나가 불쑥 들어오더니 태상을 밀어냈다.해인은 누군가의 품에 안겼다. 그제야 해인은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했다.유호였다.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 여기 있어?”해인은 알지 못했다. 정수가 사고를 당한 뒤로 유호가 사람을 붙여 몰래 해인을 보호하게 했다는 사실을.해인이 실험실로 들어간 뒤 한참 동안 나오지 않자, 유호는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유호는 안으로 들어와 상황을 확인하려 했다. 그런데 예주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혼잣말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유호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되물었다. “왜 나면 안 돼? 누구를 기다렸는데?”바로 뒤이어 우진이 숨을 헐떡이며 1층 출입문으로 뛰어 들어왔다. 청년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누나.”유호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아래층의 우진을 보았다가 해인 옆에 서 있는 태상까지 훑었다. 이어 입가에는 비꼬는 웃음이 걸렸다.‘좋아, 아주 좋아.’‘아직 이혼도 안 했는데, 하나같이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한다 이거지?’유호가 해인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조금 더 주었다. “여보, 왜 여기까지 왔어? 남편인 나한테 말 한마디도 없이. 덕분에 내가 이제야 오게 됐잖아. 내가 너무 무능한 남편처럼 보이게.”해인은 입술을 다물었다. 유호가 일부러 힘주어 말하는 단어들을 해인이 알아듣지 못할 리 없었다. 거의 이를 악물고 내뱉는 말 같았다.이 말투는 질투하는 사람의 말투였다.하지만 정수는 유호가 칩 때문에 둘의 과거를 이미 잊었다고 했다. ‘과거 기억도 없는 사람이 대체 무슨 질투를 해?’그때 태상이 갑자기 놀라 말했다. “해인 씨, 다리가...”그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해인의 다리로 향했다.해인의 하반신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허벅지 안쪽을 타고 내려온 피가 바닥으로 떨어졌다.해인의 안색이 변했다. 두려움이 밀려오면서 해인은 곧장 배를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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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6화

우진은 동문들과 창업한 지 이제 겨우 반년 된 젊은 벤처기업 대표였다.작업실에서 첫 게임을 내놓았지만, 초기 비용도 아직 회수하지 못한 상태라 차를 살 만한 여유는 없었다.유호의 말에 우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지금 해인의 상황은 지체할 수 없었다. 우진은 한 걸음 비켜서며 두 사람에게 길을 내주었다.유호는 다시 해인을 엘리베이터에 태울 엄두를 내지 못했고, 바로 해인을 안은 채 비상계단으로 내려갔다. 두 사람의 모습은 곧바로 실험실에서 사라졌다.우진도 오래 머물 이유가 없어서 곧바로 뒤를 따랐다.주헌이 남아서 뒤처리를 맡았다. 바닥에 쓰러진 채 한참 동안 일어나지 못하는 예주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태상에게 돌렸다.“예 대표님, 오늘 일은 이 실험실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대표님이 신고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저희 쪽에서 처리할까요?”태상이 말했다. “제 잘못입니다.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하예주를 여기 들였으니, 제가 신고하겠습니다.”주헌이 웃었다. “그냥 두시죠. 남에게 맡기는 것보다 제 손으로 확인하는 쪽이 마음이 놓입니다.”말이 끝나자 경호원들이 다가와 예주를 제압했다. 예주는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밖으로 끌려 나갔다.일행이 실험실을 빠져나가자 태상은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굳게 다문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태상은 해인이 흘린 피가 고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몸을 숙이고 손끝으로 붉은 핏자국을 조금 찍어 보았다.제법 많은 양이었다. 이렇게 배가 부른 상태에서 유산이라도 하면, 해인은 상당히 힘든 일을 겪게 될 터였다.그런데 유호에게는 칩이 이식된 상태였다. 방금 보인 태도를 떠올리면, 해인을 완전히 마음에서 밀어낸 것 같지는 않았다.역시 칩 기술이 아직은 완벽하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통제하는 수준에는 한참 모자랐다.그때 태상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하자 태상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지안아, 겁먹지 마. 오빠가 바로 갈게.”...병원.해인은 오는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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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7화

주헌이 멈칫했다. “대표님, 예전 일이 기억나십니까?”“아니.”“그런데 어떻게...”“대현이 필요한 이야기는 전부 해 줬어. 그러니 말해 봐. 하예주가 왜 다시 나타나서 해인을 해치려고 한 거야? 내가 네 능력을 너무 높게 봤던 건가?”상사에게 능력을 의심받자 주헌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하예주는 밟아도 안 죽는 바퀴벌레 같은 여자입니다. 두 다리를 망가뜨려 놨는데도 독기 하나로 산에서 빠져나올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지만 이번엔 다릅니다. 다시는 세상에 못 나올 겁니다. 이번에는 확실히 경찰에 넘기겠습니다.”사람이 너무 물러도 문제였다. 예주에게 가장 어울리는 곳은 경찰서뿐이었다.유호가 코웃음을 쳤다. “네 한 번의 방심이 해인에게는 목숨을 건 위험이 돼. 내가 어떻게 다시 믿겠어?”그 말에 주헌의 가슴도 철렁했다. “사모님이랑 아이는... 괜찮겠죠?”아이 이야기가 나오자 유호의 속이 더 답답해졌다.병원으로 오는 동안 유호는 계속 해인을 안고 있었다. 해인이 얼마나 긴장했는지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해인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굳어 있었고, 손바닥은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처음부터 끝까지 유호가 해인의 손을 잡고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 주려 했지만, 해인의 얼굴은 창백했다.유호는 가슴이 아파서 해인에게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예전 기억이 없는데도 본능처럼 해인을 걱정했다.그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이게 사랑이라는 건가?’유호는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물었다.“괜찮을 거야.” 복도 벽에 기댄 유호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짙게 드리웠다.주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만약 아이를... 지키지 못하면 어떻게 합니까?”“입 닫아.” 유호가 주헌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내가 널 어떻게 뽑았는지 모르겠네. 차라리 인사팀 찾아가서 사직서 내.”주헌은 말을 잃었다.유호가 화를 내는 이유를 주헌도 알고 있었다. 해인 걱정에 속이 타는데, 무사하다는 소식이 좀처럼 들려오지 않는 탓이었다.주헌은 바로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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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8화

유호가 말을 바꿨다. “됐어. 너는 여기 지키고 있어. 내가 직접 다녀올 테니까.”종안사까지는 왕복 두 시간이 걸렸다. 유호가 절에서 돌아왔을 때는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진 뒤였다.마침 병실에서 나온 애리가 뻐근한 목덜미를 손으로 두드리고 있었다.유호가 바로 다가갔다. “제 아내는 어떻습니까?”애리가 말했다. “마취가 아직 덜 깼어요. 지금은 안정이 가장 중요해요. 들어가서 보시더라도 조용히 봐 주세요. 깨우면 안 됩니다.”“마취요?” 유호의 눈썹이 구겨졌다. “왜 마취를 했습니까?”“방금 자궁경부봉합술을 했어요.”유호는 숨이 턱 막혔다. “수술까지 했다고요? 왜 저한테 미리 알리지 않았습니까?”애리가 담담하게 말했다. “요즘은 산모 본인이 서명할 수 있으면 수술 동의도 직접 합니다. 남편이 꼭 필요한 존재는 아니에요.”애리는 유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오늘 크게 놀라면서 자궁경부가 조금 열렸어요. 아이를 지키기 위한 처치였고, 수술 뒤 태아의 수치는 안정적입니다.”유호는 애리가 일부러 뼈 있는 말을 한다는 걸 알았다.그래도 따지지는 않았다.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가족이자 남편이니, 옆에서 잘 돌봐 주고 지켜 주면 됩니다.”애리는 유호보다 몇 살 위인 데다가 의사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말투에는 겪어 본 사람만이 낼 수 있는 무게가 있었다.“해인이는 좋은 아이예요. 우리 태겸이는 해인이를 아내로 맞을 복이 없었죠. 한 대표까지 해인을 실망시키면... 그건 정말...”한 사람에게 한 번 상처받는 것도 아픈 일이다. 그런데 두 번 연달아 버림받는다면...그건 상처 위에 다시 소금을 뿌리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유호가 곧바로 말했다. “저는 고태겸과 다릅니다. 그런 사람과 비교하지 마십시오.”애리는 유호를 잠시 바라보더니 더 말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유호는 복도에 서서 몸에 남은 담배 냄새가 완전히 빠졌는지 확인한 뒤 병실로 들어갔다.병실 안에는 소독약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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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9화

해인이 말했다. “여자 간병인 불러 줘.”마침 우진이 병실 밖에서 들어왔다. 손에는 방금 끓인 듯 김이 나는 흰죽 보온도시락을 들고 있었다.우진은 해인의 침대 옆 탁자에 보온도시락을 내려놓은 우진은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우진은 의자를 끌어와 병상 옆에 앉았다. “누나, 방금 끓였어요. 배고프세요?”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우진은 말을 하며 보온통을 열었다. “그럼 제가 먹여 드릴게요.”유호가 우진을 힐끗 보았다. “지금은 먹을 수 없어. 네 죽은 헛수고가 됐네.”애리가 수술 후 두 시간은 금식이라고 했는데 아직 30분밖에 지나지 않았다.우진은 입술을 다물고 다시 보온통 뚜껑을 닫았다. “그럼 여기 둘게요. 조금 있다 드세요. 누나, 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내일도 가져다 드릴게요.”“그럴 필요 없어.” 해인이 대답하기 전에 유호가 말했다. “이쪽에서 영양식을 따로 준비할 거야.”우진이 의아한 듯 물었다. “밖에서 사 오는 음식보다 직접 만든 게 더 마음이 담기지 않나요?”유호가 그제야 우진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이 어린 녀석이 지금 나한테 맞서는 건가?’유호가 말했다. “이렇게 밍밍한 흰죽은 영양도 별로 없어. 네 마음은 꽤 특이하네.”우진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해인이 서둘러 끼어들었다. “우진아, 늦었어. 내일 아침에 출근해야 하잖아. 오늘은 먼저 가서 쉬어.”우진은 멈칫하면서 자연스럽게 유호를 한번 바라보았다. “그런데 누나, 제가 가면 누가 누나를 또 다치게 하진 않을까요?”그 ‘누가’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병실 안의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자신을 비꼬는 걸 알아차린 유호가 우진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내 아내랑 아이까지 해칠 만큼 제정신이 아닌 사람은 아니야.”해인은 방금 유호가 나타나 자신을 엘리베이터에서 구해 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해인은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다.“우진아, 집에 들러서 고양이들 사료 좀 챙겨 줘. 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 우리 집 애들 좀 부탁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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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0화

유호는 해인이 일부러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유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팔짱을 낀 채 내려다보았다. “입은 작아도 먹고 싶은 건 아주 많네. 기다려. 만들어 줄게.”그 말과 함께 유호는 주방으로 향했다.해인은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유호가 정말 만들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기대가 없으면 실망할 일도 없었다.40분 뒤, 유호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수 한 그릇을 들고 나왔다.“이 국수 이름은 궁중신선로, 구절판, 전복갈비찜, 어만두, 대하잣즙채, 타락죽 국수야.”해인은 할 말을 잃었다.유호는 침대 옆에 앉아 식탁 판을 올린 뒤 국수를 해인 앞에 놓았다.해인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유호가 설명했다. “지금 네 몸이 너무 약해. 한꺼번에 기름지고 무거운 보양식을 먹을 상태가 아니야. 조금 나아진 뒤에 천천히 다 해 줄 기회는 많아.”해인은 속으로 생각했다.‘남자의 말은 믿을 게 못 되지.’‘핑계야. 전부 다 핑계야.’유호는 제법 세심하게 젓가락으로 국수를 집어 입가에서 식혔다. 뜨겁지 않은지 확인한 뒤 해인의 입가로 가져갔다.‘먹여 주겠다는 건가?’해인은 잠시 멍해졌다.유호가 이렇게 다정했던 건 꽤 오래전 일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했던 따뜻한 장면들이 거의 흐릿해질 만큼 오래전이었다.유호의 맑고 깊은 눈이 해인의 입술에 머물렀다. 거절을 허락하지 않는 조용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입 벌려.”유호는 생각보다 요리를 잘했다. 국수 냄새가 은근하게 퍼지며 허기를 자극했다.반나절 가까이 아무것도 먹지 못한 해인은 확실히 배가 고팠다. 그래도 유호에게 먹여 달라고 하지는 않으려고 했다. 해인은 몸을 일으켜 직접 젓가락을 들려고 했다.하지만 유호가 곧바로 해인을 다시 눕혔다.“의사가 절대 안정하라고 했어. 당분간은 바닥에 발을 딛는 건 물론이고, 몸을 일으키는 것도 안 돼. 계속 누워 있어야 해.”배가 많이 부른 해인이 갑자기 몸을 일으키면 복부에 압박이 갈 수도 있다. 아이에게도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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