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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1화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 해인은 유호의 깊은 눈매를 바라봤다. 유호의 눈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기색만 어려 있어서, 정말 해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듯했다.그 모습을 보던 해인의 머릿속에 문득 한마디가 떠올랐다. ‘모르는 척하네.’해인은 아예 대놓고 물었다.“심 대표가 아까 하다 만 말이 뭐야? 당신 대체 뭘 그렇게 긴장하는데?”유호는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가볍게 문질렀다.그러고는 해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여보, 나 오늘 술을 좀 많이 마셨나 봐. 머리가 어지러워. 어깨 좀 빌릴게.”금세 잠이라도 든 사람처럼 눈을 감더니, 이내 고른 숨소리까지 들려왔다.유호가 저렇게 나오자 해인도 더 캐물을 수가 없었다.이상하게도 이런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유호는 자꾸 피하려 들었다.‘왜 그러지?’‘체면 때문인가?’해인은 유호와의 만남이 처음부터 우연이었다고 줄곧 생각해 왔다.하지만 요 며칠 유호가 보인 반응을 떠올리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닌 듯했다.아까 대현은 생각나는 대로 말을 내뱉었지만, 유호는 분명 뭔가를 숨기려고 했다.유호와 처음 만났던 일을 떠올린 해인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설마... 그날 공장에서 유호가 나를 구한 게 우연이 아니었던 건가?’‘처음부터 계획된 일이었다고...?’...수아는 단숨에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온 뒤에야 복잡한 마음을 겨우 가라앉혔다.해인의 성격이라면 오늘 밤 있었던 일을 그냥 넘길 리 없었다.수아가 무거운 마음으로 집에 들어섰을 때, 마침 한밤중에 잠이 깬 오기홍이 거실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짙은 화장을 한 딸이 들어오는 걸 보고 오기홍은 못마땅한 듯 중얼거렸다.“또 술집 갔다 왔어? 수아야, 아빠가 진작부터 말했지. 밤늦게 그런 데 드나들면 좋게 보는 사람 없어.” “이제 좀 철들어. 만약 소문이라도 나면 누가 너랑 결혼하겠다고 하겠어?”수아의 미간이 꿈틀했다. 안 그래도 오늘 밤 일 때문에 속이 뒤집혀 있는데, 집에 오자마자 오기홍에게 한바탕 잔소리까지 듣자 화가 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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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2화

오기홍이 버럭 소리쳤다. “수아야 철이 없어서 그렇다 쳐도, 당신까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한숙미도 더는 참지 않았다. “내가 틀린 말 했어? 그때 당신 절친이 죽기 전에 강 회장님한테 당신을 추천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쉽게 공장장 자리에 앉지도 못했을 거잖아.”“하종민이 죽기 전에 자기 아내 김수원을 당신한테 부탁했는데, 당신은 뒤로 그 여자랑 잠자리까지 하고 애까지 만들었잖아...”감추고 싶었던 과거를 정면으로 들춰내자 오기홍의 표정이 험악하게 굳어졌다.“말이 점점 선을 넘네!”그것이 누구에게도 알려지고 싶지 않은 추문이었다.공장 사람들은 지금까지 그 아이를 하종민의 유복자로 알고 있었다. 실제로 오기홍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하지만 늘 오기홍 앞에서 참고만 살았던 한숙미는 한번 입을 연 이상 멈출 수가 없었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가슴속에 쌓인 억울함을 토해 냈다. “내 말이 틀렸어?”“진짜 피곤하게 하네. 그렇게 싸우고 싶으면 혼자 벽 보고 실컷 해.”그 말을 남긴 오기홍은 신발을 갈아 신은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갔다.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한숙미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그때 방에서 나온 수아는 우는 엄마를 보고도 한심하다는 생각부터 들었다.한숙미는 너무 약했다. 이렇게 짓밟히면서도 제대로 맞서 본 적이 없었다.조금만 더 일찍 결단을 내리고 모질게 나갔다면 그때 그 아이가 태어나는 일도 없었을 테고, 지금처럼 눈엣가시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수아는 그 시절 자신이 너무 어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원망스럽기만 했다.수아를 본 한숙미가 서러운 마음을 털어놓았다. “수아야, 네 아빠 이 시간에 나간 거 보면 분명 또 그 여자한테 간 거야.”수아가 냉소했다. “그럼 안 가고 집에서 엄마 우는 얼굴이나 보고 있으라고?”한숙미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수아를 바라봤다. “너 어떻게 엄마한테 그런 말을 해?”수아는 태연하게 받아쳤다. “내가 틀렸어? 엄마는 울고 원망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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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3화

[해인아, 오늘 아침에 오기홍이 엄청 눈치를 보면서 그 여자 집에서 나오는 걸 봤어. 둘이 뭔가 있는 게 틀림없어. 아니면 오기홍이 왜 밤새 집에 안 들어갔겠어?]이른 아침부터 승아는 승합차 안에 몸을 웅크린 채, 망원 렌즈가 달린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밤새 잠복해 찍은 사진들을 곧바로 해인의 핸드폰으로 전송했다.밤을 꼬박 새운 탓에 눈 밑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내려앉았지만, 피곤한 기색은커녕 얼굴에는 흥분이 가득했다.절친의 골칫거리를 해결할 결정적인 단서를 잡았다는 생각에 승아는 진짜 신이 났다. [이 늙은이 약점까지 잡았으니까 이제 공장을 되찾는 것도 시간문제 아니야?]해인이 사진을 열어 봤다. 날이 막 밝기 시작한 때, 오기홍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김수원이 사는 건물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김수원이 직접 1층까지 내려와서 배웅하는 모습도 찍혀 있었다. 누가 봐도 평범한 사이로는 보이지 않았다.해인이 말했다. “이 사진이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아. 승아야, 정말 고마워.”[우리 사이에 뭘. 네가 준 수고비도 꽤 되니까 나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고. 근데 너 사람도 많잖아. 이런 일을 굳이 나한테 맡긴 이유가 뭐야?]승아도 해인이 유호에게서 사람을 지원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미행이나 사진 촬영 정도라면 그 사람들에게 맡겨도 충분했다.해인이 웃으며 답했다. “전문적인 일은 전문가한테 맡겨야지. 이런 건 네가 해야 내가 제일 안심돼.”승아는 기자였다. 예전에 연예부에서 일할 때는 한밤중부터 호텔 앞에서 잠복하며 사진을 찍는 일도 흔했다.그 시절 이야기가 나오자 승아가 감회 어린 표정을 지었다. [전 직장 사장한테 잘려서 나온 뒤로는 이런 잠복 촬영도 진짜 오랜만이다.]해인이 웃었다. “옛날 생각나?”[그건 아니고. 그냥 새삼스럽네.]해인이 물었다. “너 심대현 대표랑은 어떻게 됐어?”승아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뭐가 어떻게 돼?]해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심 대표가 너 좋아하는 거 몰랐어?”그 말을 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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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4화

하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 아닐까 고민하던 참이었다. 쉬는 날이면 누구나 늦잠을 자고 싶을 테니까. 그렇다고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가기는 아쉬워서, 결국 건물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그런데 뜻밖에도 승아가 단지 밖에서 들어온 것이다.대현이 바로 물었다. “어디 갔다 왔어?”대현은 승아의 눈 밑에 내려앉은 짙은 다크서클부터 알아차렸다. “제대로 못 잔 거야? 아니면 아예 밤을 샜어?”장난기가 동한 승아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클럽 갔다 왔지. 방금 끝났어.”대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승아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그대로 믿는 눈치였다. “클럽도 다녀?”승아가 진짜인 듯 아닌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대현의 호흡이 조금 무거워졌다. “어디 갔길래 밤새 놀아? 해가 중천에 떴잖아. 혼자 있었어, 친구랑 있었어?”혼자서 밤새 클럽에 있을 리는 없었다. 대현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승아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당연히 혼자는 아니지. 친구랑 있었어.”“남자야, 여자야?”승아는 망설이지 않았다. “남자.”대현은 아무 말도 못 했다.잠시 뒤, 다급해진 기색으로 물었다. “너... 혹시 남자친구 생겼어?”“응.”밤을 꼬박 새우고 차까지 30분 넘게 몰아 집에 온 터라, 이제는 정말 눈꺼풀이 무거웠다.승아는 하품을 하며 대충 대답했다. “졸려. 나 올라가서 잘래.”그대로 몸을 돌려 공동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대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승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장난스럽던 표정은 어느새 온데간데없었다.곧바로 승아를 뒤쫓아가면서 다급하게 물었다. “언제부터야? 그 남자 네 직장 동료야? 둘이 언제부터 만난 건데?”승아는 졸음을 억지로 참으며 대현을 돌아봤다. 반쯤 장난으로 던진 말인데 대현이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조급함이 고스란히 드러난 눈을 보고 있으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장난을 너무 심하게 쳤나?’대현의 표정은 누가 봐도 몹시 심란해 보였다.승아가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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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5화

대현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승아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고 문이 서서히 닫히기 시작한 뒤에야 뒤늦게 그 말의 뜻을 알아챘다.“방금 그 말 무슨 뜻이야? 너 나 받아 주겠다는 거야?”가장 좋은 모습으로 자기 고백을 다시 듣겠다는 건 결국 받아 주겠다는 뜻 아닌가.대현의 눈이 환하게 빛났다. 거의 닫힌 엘리베이터 버튼을 정신없이 눌렀다.승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차분하게 대현을 바라보며 문이 닫히는 걸 그대로 지켜봤다.동작이 조금 늦었던 대현은 결국 층수 표시가 위로 올라가는 것만 바라봐야 했다.대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승아가 방금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한 거지?’‘어젯밤에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했잖아.’‘그런데 나한테 다시 고백하라고?’대현은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몇 분 뒤, 주머니 속 핸드폰이 울렸다.발신자를 확인한 대현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제수씨.”해인이 말했다. [심 대표님,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물론이죠. 무슨 일인데요?”[보름쯤 전에 중년 남녀 두 명이 16, 17살 정도 된 남자아이와 대표님의 식당에서 생일을 보낸 적이 있어요. 그날 CCTV 영상을 받을 수 있을까요?]대현은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 “손님들 사생활이 걸린 문제라 확인 자체는 어렵지 않은데, 자칫하면 저희 식당에도 영향이 갈 수 있어요. 제수씨, 영상은 어디에 쓰시려고요?”해인도 그 점은 잘 알고 있었다. 상대가 문제 삼지 않으면 괜찮지만, CCTV 제공 사실이 알려져서 일이 커지면, 심씨 집안이 운영하는 식당에도 적지 않은 타격이 갈 수 있었다.해인이 짧게 답했다. [골치 아픈 문제 하나를 처리하려고요.]해인의 일을 돕는다는 말에 대현은 시원스럽게 승낙했다. “알겠습니다. 조금 있다가 사람을 시켜서 보내드릴게요.”해인이 약속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영상은 밖으로 유출하지 않을게요. 나중에 당사자가 문제를 삼더라도 대현 씨한테서 받은 거라고는 절대 말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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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6화

[네.]평소에는 눈치도 빠르고 영리한 대현이 승아 앞에서만 이렇게 허술해질 줄은 몰랐다.사랑에 빠지면 판단력이 흐려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해인은 핸드폰을 꼭 쥔 채 진지하게 말했다. [심 대표님, 승아한테 잘해주세요. 정말 좋은 애예요.]대현도 평소의 가벼운 태도를 거두었다. 눈빛을 굳힌 채 또렷하게 대답했다. “제수씨, 걱정 마세요. 제가 유호랑 어울리는 놈인데, 유호보다 못하게 굴지는 않을 겁니다.”대현은 일을 빠르게 처리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보름 전 오기홍이 김수원 모자와 함께 식사하던 날의 CCTV 영상을 해인의 핸드폰으로 보내왔다.해인이 영상을 열어 확인했다. 식당의 고화질 카메라에는 오기홍이 직접 김수원의 목에 보석 목걸이를 걸어 주고, 뺨에 입을 맞추는 장면까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불륜을 저지르면서 저렇게 대놓고 행동하다니, 보기만 해도 눈살이 찌푸려졌다.그때 유호가 곁으로 다가와서 해인의 핸드폰 화면을 슬쩍 내려다봤다.“끝났어?”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증거면 공장에서 오기홍의 신뢰도는 바닥까지 떨어질 거야.”하종민이 교통사고로 죽어 가던 때, 마지막으로 자기 아내 김수원을 절친 오기홍에게 맡겼다.그런데 오기홍은 친구의 아내를 돌봐 주는 건 고사하고, 불륜 관계를 맺고 사생아까지 낳았다.그 아이가 벌써 17살이었다. 누가 들어도 충격적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공장이 처음 세워질 무렵 사람들을 직접 모아 온 것도 하종민이었다. 직원들과 같은 숙소에서 지내고 같은 밥을 먹으며 현장을 일궜다.초창기에는 공장 환경도 열악했지만, 하종민은 공장장이라고 거들먹거린 적이 없었다. 늘 직원들 처우부터 챙겼다.하종민이 세상을 떠난 뒤, 직원들은 그에게 가졌던 믿음과 정까지 그의 절친 오기홍에게 이어줬다.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나오던 해인을 유호가 뒤에서 끌어안았다.유호는 해인의 귓가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여보가 일에 몰두하는 모습 진짜 매력적이야. 나 그냥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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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7화

오후가 되어 친정에 들른 한숙미는 식탁 가득 차려진 음식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곧 아흔인 아버지가 혼자 준비했을 리 없는 상차림이었다. “아버지, 이거 다 아버지가 하신 거예요?”한정동이 손을 내저었다. “내 몸으로 지금 이런 걸 어떻게 다 해.”한숙미가 의아해했다. “그럼 이건 누가...”“아주 괜찮은 아가씨가 하나 있어. 전에 비 온 뒤 골목 입구에서 내 휠체어 바퀴가 진흙탕에 빠졌는데, 마침 지나가다가 꺼내 줬어.”“내가 여기 혼자 사는 걸 알고는 그 뒤로도 자주 찾아와서 말동무도 해 주고. 나이는 수아랑 비슷한데 네 딸보다 훨씬 살갑고 철도 들었어.”한숙미가 걱정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모르는 사람을 집에 함부로 들이시면 어떡해요. 나쁜 마음을 먹은 사람일 수도 있잖아요.”그 말을 들은 한정동은 금세 기분이 상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나쁜 사람? 곧 흙으로 돌아갈 늙은이한테 뭘 뜯어 가겠다고.” “나는 그 애가 마음에 들어. 인상도 선하고 음식도 부드럽게 잘해서 이 다 빠진 늙은이가 먹기에도 딱 좋아.”한숙미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그래도 걱정을 놓지 못했다. “아버지도 그 아가씨가 수아랑 비슷한 나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렇게 젊은 사람이 왜 굳이 아버지랑 계속 어울리겠어요? 이상하잖아요.”“아버지 뉴스도 자주 보시잖아요. 나이 차 많이 나는 사람한테 일부러 접근해서 재산을 노리는 경우도 있잖아요. 혹시 아버지 재산을 보고 그러는 거면 어떡해요.”한정동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한편 차까지 갔던 해인은 가방을 한정동의 거실에 두고 왔다는 걸 깨닫고 서둘러 다시 발길을 돌렸다.집 앞에 도착했을 때 마침 한숙미의 말을 듣게 된 해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저 결혼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말씀을 너무 심하게 하시는 것 아닌가요?”한숙미는 흠칫했다. 해인을 알아본 뒤 표정이 확 굳어졌다.해인은 거리낄 것 없다는 듯 한숙미를 향해 가볍게 웃었다.한정동이 말했다. “해인아, 저 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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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8화

해인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방금 직접 말씀하셨잖아요. 아버님이 곧 아흔이라고요. 제가 그분께 뭘 바라고 곤란하게 만들겠어요?” “연금이요? 아니면 텃밭에서 기르는 채소라도 탐낸다고 생각하세요?”한숙미는 말문이 막혔다.해인은 한숙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또 제가 일부러 여사님을 곤란하게 하러 왔는지, 오히려 도우러 온 건지는 어떻게 아시죠?”한숙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눈앞의 해인은 자신보다 한 세대나 어렸지만, 이상하게도 그 앞에 서면 속마음이 전부 들여다보이는 것 같았다.한숙미가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강 대표님이 무슨 목적으로 아버지께 접근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협박에 굴복하지도 않을 거고 남편을 배신하지도 않을 겁니다.”해인이 담담하게 받아쳤다. “저는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보아하니 여사님도 남편인 오기홍 공장장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는 잘 알고 계시네요.”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 아들이 있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계시겠죠.”가장 감추고 싶었던 비밀을 해인이 정확하게 짚어내자, 한숙미는 안색이 창백해지면서 뒤로 물러났다.해인이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께 들으니 여사님도 예전에는 상당히 뛰어난 인재였다고 하더군요. 공장 초창기 기술의 연구 개발도 직접 이끄셨고 성과도 좋았다고요.”“오기홍 공장장과 결혼하고 딸을 임신한 뒤, 아이를 돌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을 그만두신 거고요.”한숙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사람들은 한숙미를 나약하고 소심한 사람이라고 했다. 친딸조차 엄마를 무시했다. 하지만 아주 오래전의 한숙미는 분명 팀의 중심에서 일하던 사람이었다.결혼 뒤 집에서 남편과 아이를 돌보며 경력이 끊어졌고, 그렇게 수십 년이 흘렀다. 가족을 위해 포기한 것이 너무 많았다. 나중에는 다시 일하고 싶어도 선뜻 걸음을 내딛기 어려웠고, 그렇게 사람들과도 점점 거리를 두게 됐다.한숙미는 고개를 숙이고 더 이상 해인을 바라보지 않았다.하지만 해인은 한숙미의 눈가가 붉어진 것을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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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9화

승아는 소고기전골을 먹다가 해인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이 방법 진짜 좋다. 오기홍이랑 원래 사이가 안 좋았던 네가 직접 나서는 것보다 그 사람 아내가 본모습을 폭로하는 게 훨씬 설득력이 있잖아.”“이 일이 공장 안에서 퍼지면 직원들이 오기홍을 보는 눈도 달라질 테고, 넌 그때 가만히 있어도 이득을 보면서 주도권을 되찾을 수 있어.”승아가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근데 오기홍의 장인 쪽으로 접근할 생각은 어떻게 한 거야?”예전의 해인은 강인하면서도 여린 구석이 있어 저절로 보호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이었다.지금은 많이 성장해서 혼자서도 한 회사를 이끌어 가는 대표가 됐다. 경영에는 아직 서툰 부분이 있었지만, 자기 속도에 맞춰 차근차근 일을 풀어 가고 있었다.이렇게 달라진 해인을 보면서 승아는 절친이 대견하고 기뻤다. 해인이 웃으며 말했다. “우연이었다고 하면 믿을래?”승아가 의아한 듯 눈을 깜빡였다. “무슨 우연? 오기홍의 장인한테 일부러 접근한 게 아니었어?”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한정동을 도운 건 정말 우연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인연이 뒤늦게 뜻밖의 결과로 이어졌을 뿐이었다.“그날 골목 근처에 케이크를 사러 갔었어. 오래된 주택가에 있는 작은 케이크 가게가 맛있거든.”“지나가다가 어떤 할아버지 휠체어 바퀴가 비 온 뒤 진흙탕에 빠져 있는 걸 봤어.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꺼내 드리고 집까지 모셔다드렸지.”해인이 말을 이었다. “한정동 할아버지는 이야기할 때마다 참 따뜻하게 웃어 주셨어. 우리 아버지가 떠오를 정도로...”“그래서 그 뒤로 종종 찾아뵀는데, 그분이 오기홍의 장인, 한숙미 여사의 아버지인 줄은 몰랐어.”“한번은 댁에서 우연히 오래된 가족사진을 봤어. 거기에 젊었을 때 오기홍도 있었지. 그제야 할아버지가 늘 얘기하시던 딸이 오기홍의 아내 한숙미 여사라는 걸 알았어.”승아가 두 손으로 뺨을 감쌌다. “이게 무슨 인연이야! 네가 좋은 일을 해서 운까지 네 편을 들어주는 거 아니야?”해인은 딱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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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0화

승아는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람이... 나한테 키스했어.”해인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놓칠 뻔했다.대현이 천천히 관계를 진전시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적극적이었다. 해인이 알고 있던 이미지와는 너무 달랐다.승아가 얼굴을 붉힌 채 말했다. “아침에 좀 자고 일어나서 쓰레기 버리려고 문을 열었거든? 근데 아래를 보니까 심대현이 우리 집 문 옆에 앉아 있더라.”당시 일을 떠올리기만 해도 승아는 아직 현실감이 없었다.“진짜 길 잃은 강아지 같았어. 고개를 들고 나를 올려다보는데 그 눈이 얼마나 불쌍해 보이던지 몰라.”해인이 바로 물었다. “그래서?”승아는 말을 더듬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한 걸음씩 다가와서 나를 현관문 쪽으로 밀어붙였어. 양팔로 딱 가두고는, 그냥... 나한테 키스했어. 자기 여자친구 하라고도 하면서.”해인은 잠시 아무 말도 못 했다. 머릿속으로 당시 장면을 그려 보기만 해도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곧이어 짓궂게 웃었다. “그래서 심 대표의 얼굴에 넘어가서 여자친구 하겠다고 한 거야?”그 말에 승아의 뺨이 더 붉어졌다.승아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원래라면 대현을 그대로 업어치기를 해도 됐을 텐데, 입술이 닿자 이상하게도 손을 쓸 수가 없었다.객관적으로 봐도 대현은 잘생긴 편이었다. 유호처럼 눈에 띄게 빼어난 외모까지는 아니어도 학교 다닐 때 충분히 인기가 많았을 얼굴이었다.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승아도 외모에 마음이 흔들렸던 것 같았다.해인은 절친에게 연인이 생겼다는 사실이 기뻤다.해인이 진지하게 말했다. “심 대표는 괜찮은 사람이야. 유호 씨한테 사고가 났을 때 혼자 외국까지 가서 사고 현장 근처를 밤낮없이 지켰어. 반드시 유호 씨를 데리고 돌아오겠다고 했고.”“친구를 위해 그렇게까지 할 수 있다는 것만 봐도 의리가 있는 사람이잖아. 책임감도 강해서 오래 믿고 만날 수 있을 것 같아.”해인의 말이 끝나자 2층에서 유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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