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여보, 이제 그만해!”“맞아!” 누군가 오기홍 편을 들기 시작했다. “남편이 저렇게까지 당신 챙겨 주는데 왜 은혜를 원수로 갚아? 몇십 년 동안 남편 돈으로 살았잖아!”“내가 보기엔... 하종민 공장장님의 아내분이 예쁘고, 혼자서도 아들 잘 키운 게 질투가 나서 그러는 거 아니야?”여론은 완전히 한쪽으로 기울었다. 한숙미는 있는 힘껏 주먹을 휘둘렀는데, 푹신한 솜방석에 박힌 것 같은 허탈함을 느꼈다.사람은 한번 믿기 시작한 생각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 한숙미는 해명하고 싶었지만, 모두 오기홍의 말에 휩쓸려 어떤 설명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였다.곁에서 지켜보던 해인은 차갑게 웃었다.지난 몇 달 동안 오기홍과 부딪힐 때마다 이런 위선적인 태도 때문에 해인도 번번이 곤란을 겪었다. 너무 익숙한 방식이었다.해인은 일부러 구경꾼처럼 가볍게 끼어들었다. “오기홍 공장장과 하종민 공장장님의 아내분이 정말 아무 관계도 아닌지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지 않나요? 그 아이와 친자 확인을 하면 되잖아요.”“영상이 전부 조작이라고 하셨지만 그 주장도 말뿐이죠. 공장장님이 아니라고 하신다고 전부 사실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전문 기관에 영상 감정을 맡기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요.”그제야 오기홍은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해인을 발견했다. 미간을 찌푸린 오기홍은 뭔가를 깨달은 듯 표정이 확 변했다.“설마... 강 대표님이...”한숙미가 혼자 이런 수를 생각해 냈을 리 없다고 오기홍은 판단했다. 20년 넘게 참아 왔던 사람이 갑자기 김수원과의 일을 세상에 터뜨릴 이유가 없었다. 딸 수아까지 생각한다면 더더욱 이렇게까지 일을 키우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었다.‘누가 옆에서 부추긴 거야.’그제야 오기홍의 머릿속에 해인이 떠올랐다.‘분명 강해인이 한숙미를 움직인 거야.’‘수아 엄마 혼자서는 이런 일을 벌일 배짱이 없어.’‘내 평판을 무너뜨리고 공장 의사결정권을 되찾으려고 이 일을 터뜨린 거지.’조금 전 자신이 해인에게 전화해 도움까지 청
사람들 맨 뒤에 서 있는 한숙미를 본 해인은 눈으로 조용히 물었다. ‘괜찮으세요?’한숙미는 창백한 얼굴로 힘없이 웃었다.평생을 함께한 남편에게 배신을 당했는데 괜찮을 리 없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하면 오히려 이번 일이 한숙미에게는 잔인한 현실을 깨닫게 해 준 계기이기도 했다.예전에는 아무리 미워도 자신이 오기홍과 가정을 이루고 딸까지 낳았으니, 수십 년 부부로 산 정만큼은 남아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계속 참았고, 모르는 척하며 넘어갔다.이제야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이 애틋하게 붙들고 있던 그 정은 오기홍에게 아무 가치도 없었다.수십 년 동안 가족을 위해 희생한 세월은 차라리 남에게 베푼 것보다 못했다. 오기홍은 아내를 헐뜯으면서도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았다. 결국 한숙미가 믿어 왔던 부부의 정은 혼자만의 착각이었다.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 한숙미를 발견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공장장님 아내분도 오셨어요!”그 말이 떨어지자 공장 직원들이 일제히 주변을 둘러보다 한숙미에게 시선을 모았다. 바라보는 눈에는 묘한 거리감이 섞여 있었고, 손가락질을 하거나 낮은 목소리로 수군대는 사람도 있었다.오기홍의 말에 넘어가서 이미 한숙미를 의심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기자들도 한숙미가 나타났다는 걸 알고 곧바로 몰려왔다.“오기홍 공장장님의 배우자가 맞으십니까? 남편분은 부인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떤 입장이십니까? 병원에서 실제 진단을 받으신 적이 있습니까?”“지난 20 몇 년 동안 전업주부로 지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전에는 연구팀을 이끄신 경력도 있다고 하는데요.” “남편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된 지금, 가족을 위해 일을 그만둔 것을 후회하십니까?”수많은 카메라 렌즈가 한꺼번에 한숙미를 향했다. 평생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적도, 얼굴 가까이 카메라가 들이닥친 적도 없었다. 모두 오기홍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한숙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오기홍이 빠르게 다가왔다. 뜻
경비는 난감한 표정으로 해인을 바라봤다. “대표님, 저 이제 큰일났습니다.”오기홍은 수상한 사람은 절대로 들이지 말라고 단단히 지시했다. 그런데 한두 명도 아니고 취재 차량 여러 대가 연달아 들어와 버렸다.해인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오기홍 공장장이 경비 아저씨를 마음대로 자르지는 못할 테니까요.”말을 마친 해인은 그제야 차를 움직여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사무동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여러 대의 취재 차량이 세워져 있었다. 방금 들어온 차량들의 안은 텅 비어 있었다.해인은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10분쯤 차 안에서 기다린 뒤에야 느긋하게 사무동으로 향했다.엘리베이터를 타고 오기홍의 공장장실이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도 전부터 바깥의 소란이 들려왔다.기자들의 질문과 비서들이 사람들을 내보내려는 목소리가 뒤엉켜 있었다. 그 사이로 오기홍의 분노 섞인 고함이 터졌다. “누가 당신들 들여보냈어? 당장 나가! 여긴 공장 안이야. 계속 이러면 신고하겠어!”하지만 기자들도 그런 말에 겁먹을 사람들이 아니었다. 마이크를 오기홍 앞으로 내밀고 쉬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공장장님, 온라인에 공개된 내용이 사실입니까?”“사모님께서 직접 폭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불륜 의혹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상대가 세상을 떠난 절친의 아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고인이 마지막에 아내를 부탁했는데 두 사람 사이에서 아이까지 태어났다는 내용이 사실이라면, 고인에게 죄책감은 없으십니까?”오기홍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한숙미가 일을 터뜨린 뒤 공장의 오래된 직원들이 이미 여러 차례 사실을 확인하러 찾아왔다. 이제는 그들까지 한곳에 모여 있었다.생전에 하종민을 따르던 직원들도 한쪽을 지키면서, 오기홍이 납득할 만한 설명을 내놓기를 기다리고 있었다.하지만 제대로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한숙미는 증거까지 전부 공개했다. 며칠 전 오기홍이 김수원의 생일을 함께 보내고 직접 보석을 선물하는 모습까지 사진으
한숙미가 공장에서 일을 폭로한 뒤부터 오기홍은 오전 내내 비슷한 질문에 시달렸다. 확인하러 오는 사람이 끊이지 않아서, 이제는 그 말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다.그렇다고 사실이라고 인정할 리는 없었다.오기홍은 바로 부정했다. [온라인에 떠도는 건 전부 근거 없는 소문입니다. 그래서 대표님께 부탁드리는 겁니다.] [회사 홍보팀에서 이 여론을 좀 정리해 주셔야 합니다. 일이 더 커지면 본사 이미지에도 부정적인 영향이 생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이런 상황까지 와서도 오기홍은 해인을 속여 넘길 생각이었다.해인은 속사정을 전부 알고 있었지만 굳이 바로 들춰내지 않았다. “공장장님, 사실이 아닌 소문이라면 떳떳하게 그대로 계시면 되지 않나요?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결국 사실이 밝혀질 텐데요.”“굳이 회사 홍보 인력까지 써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직원들 업무도 업무인데 불필요한 일을 더 얹을 필요는 없잖아요.”오기홍에게도 속사정은 있었다. 공장에는 오래전부터 일해 온 고령의 직원들이 많았다. 학력도 높지 않고 외부 사람들과 접촉할 일이 적었던 이 사람들은 복잡한 사정을 따져 보기보다 익숙한 사람의 말을 믿는 경우가 많았다.오랜 세월 쌓은 신뢰까지 있으니 공장 안에서는 어떻게든 둘러댈 자신이 있었다.문제는 누군가 이 일을 온라인에 퍼뜨렸다는 점이었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까지 오기홍의 변명을 쉽게 믿어 줄 리 없었다.계속 논란이 커진다면, 자칫하다간 밖에 나다니기도 어려워질 판이었다.오기홍이 서둘러 말했다. [추가로 생기는 야근 수당은 제 개인 돈으로 지급하겠습니다.]해인은 여전히 단정적인 답을 주지 않았다. “돈만의 문제는 아니니까요.”통화를 마친 해인은 차를 몰고 공장으로 향했다.평소와 달리 공장 정문 앞에는 여러 대의 승합차와 취재 차량이 세워져 있었다.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태세였다.공장 안으로 들어가서 취재하려는 기자들이 분명했다.하지만 공장 정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경비도
유호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지만 말에는 여러 뜻이 담겨 있었다. 해인이 무슨 일을 하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자신이 늘 지켜보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해인은 유호를 깊이 바라봤다. “내가 한숙미 여사님을 통해 오기홍을 끌어내리려고 한 것도 알고 있었어?”유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뿐이야? 밖은 지금 난리가 났고, 다급해진 오기홍이 당신한테 살려 달라고 매달리는 중인 것도 알아.”예전에는 해인이 아무리 압박해도 오기홍은 좀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강하게 밀어붙이면 오히려 더 버티는 사람이라, 화가 나면서도 손쓸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이제 일이 터져서 자기가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는 걸 알게 되자, 그제야 회사에 매달리며 도움을 구하려는 모양이었다.그렇다고 해인이 쉽게 끌려다닐 리는 없었다.해인이 받지 않자, 전화는 결국 자동으로 끊어졌다.유호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잘했어, 여보. 전에 자기를 그렇게 괴롭혀 놓고 이제 와서 급하다고 찾는 거잖아. 그 정도는 당해도 싸. 일단 혼자 애 좀 태우게 둬.”말을 하던 유호가 몸을 숙였다. 해인의 목덜미에 입술이 닿더니 가장 부드러운 피부를 천천히 스치면서 입을 맞췄다.해인은 몸을 가볍게 떨며 중심마저 잃을 뻔했다.예상하지 못한 다정한 접촉에 해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유호를 바라봤다. “유...”이름도 다 부르기 전에 유호의 입술이 해인의 입술을 덮었다.유호의 큰 손이 허리 뒤쪽으로 내려가면서 해인을 품 안으로 당겼다. 해인은 넓은 가슴에 바짝 붙은 채 유호의 품에 기대게 됐다.피할 틈이 없었다.해인이 겨우 입을 열었다.“나 조금 있다가 나가야 하는 거 당신도 알잖아.”유호는 입맞춤을 이어 가면서 흐릿한 목소리로 답했다. “뭐가 급해. 기다리라고 해.”해인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아기는...”유호가 소리 없이 웃었다. “우리 꼬마 방해꾼은 잘 자고 있어.”창밖에는 거센 비바람이 몰아쳤고, 방 안의 공기는 뜨겁게 달아올랐다.유호의 뜨거운 품에 안겨 있으니 해인
전화한 사람은 한숙미였다.[강 대표님, 대표님이 주신 증거를 공장 게시판에 붙였습니다. 언론에도 제보했고요. 곧 온라인에도 이 일이 퍼질 겁니다.]한숙미가 예상보다 훨씬 과감하게 움직였다는 사실에 해인도 놀랐다.처음에는 오기홍이 스스로 물러나게 만드는 정도를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한숙미는 아예 퇴로마저 끊겠다는 듯이 언론에 직접 제보까지 했다.해인이 예상했던 범위를 훨씬 넘어선 행동이었다.해인은 포털의 화제 뉴스 순위를 확인했다. 예상대로 관련 기사가 이미 온라인에서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관심도가 아주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인기 기사 목록 끝자락에 이름을 올렸다. 일반 사회면 사건으로는 이례적으로 빠른 확산이었다.해인은 화면을 닫고 조용히 답했다. “네, 알겠습니다.”통화를 마친 지 몇 분도 지나지 않아 YD그룹 홍보팀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공장장의 사생활 문제라고 해도 회사와 연결된 인물의 추문이었다. 일이 크게 번지면 YD그룹까지 함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수 있었다.[대표님, 온라인에 올라온 기사 확인하셨습니까? 대표님께서는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해인도 홍보팀장의 입장을 이해했다. 회사 이미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부정적인 이슈는 미리 대응 방향을 준비해야 했다. 그러니 대표의 뜻을 확인하는 것 역시 당연한 절차였다.해인은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여론에는 대응하지 마세요. 당분간 그대로 두고 더 퍼지게 하죠.”홍보팀장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사안이 더 커지면 회사 이미지에도 좋지 않은 영향이 생기지 않을까요?]해인이 담담하게 답했다. “계열 공장 공장장의 개인적인 품행 문제일 뿐입니다.”YD그룹은 오랫동안 업계에 뿌리를 내린 큰 기업이었다. 이 정도의 온라인 여론만으로 흔들릴 정도라면, 애초에 지금의 규모까지 성장하지도 못했을 것이다.오히려 조직에 새 살이 돋으려면 썩은 부분부터 도려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 대가를 치르는 건 피할 수 없었고, 지금의 손실은 감당하지 못할 수준도 아니
말을 꺼낸 사람은 윤준이었다.태겸의 오래된 친구였고, 오늘 이 자리를 만든 당사자이기도 했다.윤준이 웃으며 말했다.“무슨 일이 있든 오늘만큼은 잠깐 접어 둬. 오늘은 내 여자친구 생일이잖아. 내 체면 좀 세워줘.”곧바로 맞장구가 이어졌다.“맞아. 태겸이 마음속엔 늘 해인 씨밖에 없는 거 다들 알잖아. 둘 사이가 얼마나 좋은데. 해인 씨랑 조금만 삐걱해도, 나중에 태겸이 술 취하면 친구들 붙잡고 난리 나는 거 다들 봤잖아.”“야, 그런 소리 하지 마. 태겸이 언제 울어. 술병 안고 ‘여보, 사랑해’만 반복하지.”“...”
예주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미묘한 빛이 스쳤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오빠가 해인 언니한테 너무 잘해 주는 거죠. 언니가 그걸 몰라주는 거예요.”그 말에 태겸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예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아까 그 진주 목걸이 말이에요...”태겸은 대답하지 않고 해인 옆자리에 앉았다.곧 첫 번째 경매 물품이 무대 위에 올려졌다.진주 목걸이였다.윤기 좋은 진주들이 조명 아래에서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해인은 한눈에 마음이 갔다.시작가는 4억 원. 해인은 망설임 없이 패들을
이소정의 안색이 단번에 굳어졌다.“사설탐정? 사설탐정을 써서 태겸이를 조사했다는 거야? 해인아, 그런 건 하면 안 되지. 부부 사이에 상처만 남겨.”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란이 서재 안까지 전해졌다.문이 열리며 고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해인을 보자 자연스럽게 음성이 누그러졌다.“해인이, 왔구나.”고민건을 바라보던 해인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우리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지금쯤은 저분처럼 머리가 희끗해졌을까?’그해, 두 회사가 공동으로 추진하던 대형 프로젝트가 있었다. 원래는 고민건이 직접 협력사와 만나기로 되어
밖에서 차가 멈추는 소리가 들려왔다.해인은 더 말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잠시 뒤, 현관문이 열리며 태겸이 들어왔다.실내로 스며든 발소리는 조심스러웠고, 점점 가까워지다가 해인 등 뒤에서 멈췄다.이어 단단한 남자의 팔이 해인 뒤에서 감겨 왔다.해인의 허리가 갑자기 조여 들었다.“여보...”태겸의 입술이 머리칼 위로 내려앉았다.낮고 거친 숨이 섞인 남자의 목소리였다.“여보, 나 진짜 보고 싶었어.”밤공기를 머금은 태겸의 체온이 전해지자 해인의 몸이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다.해인은 그대로 굳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