بيت / 로맨스 / 아주버님이 남편으로 / Chapter 201 -الفصل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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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1화

그들은 이해리에게 차와 디저트를 내왔다.사치스럽게 꾸며진 VIP 대기실은 널찍한 적색 벨벳 카펫 덕에 한층 더 엄숙해 보였다.방음 또한 완벽해 이곳에 앉아 있는 한 바깥의 시끄러운 소음은 단 한 자락도 닿지 않았다.마치 바깥세상과 완전히 유리된 공간 같았다.정지안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이해리는 겨우 안도하며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다만 그들이 내온 음식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는데 혹시 먹거나 마셨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반 시간 남짓 흘렀을 무렵, 허겁지겁 도착한 정지안이 문을 열었다.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단정하게 앉아 있는 이해리의 모습이었다.그를 보는 순간 이해리는 눈시울이 붉어지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많이 놀랐어?”이해리의 눈가가 미약하게 붉어진 것을 본 그가 다가와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눈꼬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물었다.“왜 혼자 온다고 나한테 말 안 했어?”“연락하고 싶었는데 허락하지 않을 게 뻔해서... 그냥 저 혼자 와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여기가 지하 도박장일 줄은 정말 몰랐네요.”이런 곳은 난생처음 와보았기에, 그녀로서는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알 턱이 없었다.말을 하는 와중에도 옅은 떨림을 머금은 이해리는, 거의 정지안의 품으로 파고들 듯 안겨 왔다.그 가녀린 모습이 못내 안쓰러웠던 정지안은 참지 못하고 그녀를 품으로 끌어당겨 안으며 나직하게 달랬다.“그래, 그래. 이제 무서워할 것 없어. 다음부터는 절대 이렇게 혼자 위험한 짓 하지 마.”“하지만 정도원이 여기 올 거라는 얘길 들은 건 확실해요. 그 사람이 뭘 하려는지 아는 게 있어요?”이해리가 소리를 낮추어 묻자 정지안이 고개를 저었다.“글쎄, 나랑 같이 CCTV나 확인하러 가자.”“좋아요.”두 사람은 나란히 모니터실로 걸음을 옮겼다.이동하는 길에 이해리는 제각각 다르게 꾸며진 방들을 보며 지하 카지노가 이토록 거대하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울 따름이었다.“여긴 언제부터 다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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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2화

두 사람이 가온 카지노 밖으로 나오자 이해리는 찬 바람에 몸을 움츠렸다.그리고 자연스럽게 정지안의 손아귀에서 손을 빼내며 가녀린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괜찮아요.”정지안은 멀어진 두 사람의 손을 내려다보며 장난스레 핀잔을 주었다.“이거 완전히 토사구팽인데? 조금 전까지 날 이용해 먹더니 바로 모르는 척하기야?”“모르는 척이라니요...”억울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이해리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아예 몸을 돌려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그것보다는, 사실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말해봐.”정지안도 입가에 띠고 있던 미소를 거두었다.이해리가 조금 전 카지노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물으려 한다는 것쯤은 그도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그 대상이 자신일지, 정도원일지, 아니면 그 숙적일지 확신이 서지 않을 뿐이었다.이해리는 그를 바라보며, 자신이 정지안 앞에서 이토록 말을 망설인 적이 있었나 싶었다.언제나 든든한 보호자처럼 곁을 지켜주던 그였고 오늘도 마찬가지였지만, 지금 그녀의 눈에 비친 그는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베일에 싸인 듯 속을 알 수 없는 사람, 그리고 그녀가 아직 알지 못하는 수많은 비밀을 간직한 남자로 느껴졌다.“왜 그래? 아니면 돌아가서 제대로 얘기해 볼까?”정지안은 이해리를 차에 태우고 먼저 한적한 곳으로 향했다.“거기서 얘기하다간 남들 눈에 띌까 봐 그랬어.”그 말에 이해리는 결국 참았던 감정을 터뜨렸다.“그래서 평소엔 얼굴도 거의 안 비춘 거예요? 그동안 나한테 그 미스터리한 신분들에 대해 털어놓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던 거고요? 게다가 그 숙적이라는 사람, 난 이미 얼굴까지 봤는데 이름조차 말해줄 수 없다는 건가요?”만약 정도원이 그 혼혈 남자와 결탁해 무언가를 도모한다 한들, 그 구체적인 내막을 알 수 있는 이는 정지안뿐이었다.이번 싸움에서 이해리에게는 의지할 인맥도, 추적할 단서도 없었기에 그 어떤 주도권도 쥘 수 없었다.“당신이 날 도우려 한 방식이, 결국 나만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로 만들어 늘 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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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3화

하지만 막상 자료들을 열어보니 이해리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수두룩했다.실무에서 손을 뗀 지 너무 오래된 탓도 있었지만, 지금의 정도원 회사에는 그녀가 알지 못하는 낯선 구석이 너무 많아 재무제표가 이렇게까지 난해할 줄은 미처 몰랐다.화면을 한참 째려보던 이해리는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오늘 하루는 정말이지 사사건건 뜻대로 풀리는 일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그녀는 심통이 난 듯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마시러 방을 나섰는데, 문을 열자마자 서재의 불이 여전히 환하게 켜져 있는 것이 보였다.‘이 늦은 시간까지 정지안이 아직 일하고 있는 걸까.’물컵을 든 채 서재 문 앞에 서 있던 이해리의 머릿속에 번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이 복잡한 서류들을 정지안이라면 단번에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를 냉대했던 기억이 스치자 이해리는 내심 양심이 찔리기 시작했다.하지만 어차피 잠도 오지 않는 마당에 그녀는 결국 그를 찾아가기로 했다.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린 그녀는 USB를 손에 꼭 쥔 채 긴장된 마음으로 문 너머 남자의 대답을 기다렸다.“들어와.”정지안은 낮에 있었던 앙금 같은 건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 듯 평소와 다름없이 나직하고 온화한 목소리로 답했다.문이 열리자 이해리는 문간에 멈춰 선 채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오늘 챙겨온 자료를 보면서 장부 정리를 좀 하려는데, 혹시 같이 봐줄 수 있어요?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어서요.”정지안은 피로한 듯 미간을 짚었지만 이해리를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차분하고 따뜻했다.“이리 와.”기꺼이 돕겠다는 다정한 손짓이었다.이해리가 USB를 쥔 채 다가가자 정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가 앉을 의자를 제 곁으로 한 걸음 당겨주었다.넓은 서재 책상은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도 전혀 좁지 않았다.정지안의 유려한 몸짓을 자연스레 좇던 이해리의 눈길은, 마디가 선명한 그의 손가락이 책상 위를 스치듯 지나 컴퓨터에 USB를 꽂는 장면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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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4화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자마자 즉각 사과하는 정지안의 태도는 확실히 정도원과는 달랐다.과거에 이해리 역시 회사 경영에 참여해 볼 생각을 안 했던 것은 아니다.비록 부모님이 남겨주신 흔적들을 마주하는 것 자체가 커다란 슬픔이었지만, 그래도 그 유산들이 어떤 방향으로 굴러가고 있는지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녀가 회사 일에 관여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칠 때마다 정도원은 매번 짐짓 놀란 표정을 지은 뒤, 그럴싸한 감언이설로 얼버무리며 그녀를 밀어내곤 했다.“이런 장부들을 보면 또 부모님 생각에 가슴 아플 텐데, 내가 당신 보호하려고 일부러 멀리하게 둔 거야.”“이제 회사도 자리를 잡았으니, 당신이 나 도운답시고 사서 고생할 필요 전혀 없어.”“당신은 그저 집에서 마음 편히 인생을 즐겨줘, 알았지?”이렇듯 위하는 척 포장된 위선적인 말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이해리의 귓가에 쟁쟁하게 맴도는 듯했다.지끈거리는 두통이 밀려왔다.정지안의 온기가 닿는 공간에 머무르면서도, 과거의 질식할 것 같은 트라우마는 쉽사리 털어낼 수 없었다.정지안은 이해리의 안색이 점점 파리해지자 자신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실언을 했다고 오해했다. 초조해진 그는 서둘러 그녀의 차가운 손을 두 손으로 꼭 쥐었다.“내가 다 잘못했어, 다신 입 함부로 안 놀릴게... 그나저나 이 자료들, 지금 계속 볼 수 있겠어?”만약 그녀의 마음이 너무 무너진 상태라면 차라리 일찍 방으로 들여보내 쉬게 할 작정이었다.하지만 이해리는 고개를 저었다.“지안 씨 때문에 슬픈 거 아니에요. 그냥 옛날 일이 좀 생각나서 그래요. 그러니까 제발, 딴생각 안 나게 서류 얘기 좀 계속해 줘요. 나 진짜 집중해서 들을게요.”그 뒤로 정지안은 시종일관 이해리의 안색과 심기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설명을 이어갔다.그러면서도 제 능력만큼은 확실하게 발휘하며, 이해리가 막혔던 까다로운 대목들을 명쾌하게 풀어주었다.마침내 서류 작업을 모두 마치고 제 방으로 돌아왔으나, 이해리의 마음 한구석에는 채 가시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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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5화

눈앞의 완벽한 문서를 바라보던 이해리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그녀는 입을 살짝 벌린 채 정지안을 올려다보았다.“이걸 하느라 밤을 새운 거예요?”“어젯밤에 보니 네 정신이 딴 데 팔려 있더라고. 내 뒷얘기는 거의 듣지 못하는 눈치길래 차라리 내가 직접 정리해 주는 편이 훨씬 빠르겠다 싶었어.”정지안은 말을 마치며 고개를 살짝 숙여 그녀와의 거리를 좁혀왔다.“너도 어젯밤에 잠을 설친 모양이네?”‘어째서 여전히 이토록 기운이 없어 보이는 걸까.’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이해리의 처연한 모습은, 정지안의 잔잔하던 마음에 작은 돌멩이 하나를 툭 던져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이해리는 자신을 휘감은 묘한 감정이 그에게 전달되지 않도록 슬며시 한 걸음 물러섰다.“이렇게까지 날 도우면, 동생과 완전히 원수가 될 텐데 두렵지 않아요?”이해리는 진심으로 이 부분이 궁금했다.그러자 정지안은 담담하게 대꾸했다.“그럼 넌? 내가 이 서류에 딴마음을 품고 장난을 쳤을까 봐 두렵진 않고?”이해리는 눈을 크게 떴다.“그럴 리가 있겠어요? 지안 씨는 지금 나한테 적극적으로 대시하는 중이잖아요. 내 이혼이 물거품이 되면, 불륜이니 뭐니 엮여서 우리 둘 다 진흙탕에 구르게 될 텐데, 굳이 그런 미련한 짓을 하겠어요?”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자는 나지막이 웃음을 터뜨렸다. “손해는 절대 안 보려 드는군.”이해리는 그를 가볍게 밀치고 바로 서서 태블릿 문서들을 재차 꼼꼼하게 검토했다.마침내 서류 정리를 완벽하게 끝마친 그녀는 그제야 전담 변호사에게 자료를 전송했다.“어찌 됐든 고마워요. 조만간 제가 밥 한 끼 대접할게요.”이해리가 던진 빈말에 이미 익숙해진 정지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언제든 좋아.”정지안이 밤새 새로 정리해 준 서류 덕분에 이해리는 이혼 재산을 더 많이 챙길 수 있게 되었다.이 정도 결과만으로도 이해리는 충분히 만족스러웠다.변호사에게 자료를 넘기고 숨을 돌리던 그날 오후, 이해리는 시어머니인 심여진이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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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6화

윤유나는 심여진 앞에서 엄연히 몸이 무거운 임산부 콘셉트일 텐데, 겁도 없이 직접 도시락 배달까지 자처하다니 참 낯짝도 두꺼웠다.거짓 임신이라는 꼬리가 밟힐까 봐 염려스럽지도 않은 건가.이해리는 속으로 혀를 찼지만 시어머니 앞에서는 어찌 되었든 모르는 척 내버려 두기로 했다.그런데 잠시 후, 병실 밖에서 요란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코를 훌쩍이는 윤유나의 우는 소리와 함께 말이다.“도원 오빠, 난 그저 어머니께 따뜻한 밥 한 끼 챙겨드리고 싶어서 온 것뿐인데, 해리 씨까지 여기 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내가 여기 나타나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직접 정성껏 준비한 밥만이라도 전해드리고 싶었단 말이에요.”가련한 척 피해자 행세를 하는 윤유나 특유의 징징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무섭게, 정도원이 병실 문을 거칠게 밀치고 들어왔다.그의 얼굴은 잔뜩 화가 나 살기등등했다.정도원은 이해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윤유나를 이끌고 침대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엄마, 교통사고가 났으면 나한테 먼저 연락을 했어야지, 왜 엉뚱하게 딴 사람한테 소식을 전하고 그래요?”방금 회사 사무실로 복귀했다가 뒤늦게 심여진의 입원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만 해도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었다.그런데 부랴부랴 병원으로 달려와 보니 역시나 이해리와 윤유나가 대치하듯 모여 있었던 것이다.심여진이 헛기침을 했다.“네가 지금 엄마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방금 사고를 당한 사람 병실에 들어오자마자 고함부터 지르다니, 자식으로서 도리가 아니지 않니?”그제야 자신이 무례했다는 것을 깨달은 정도원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이해리를 쳐다보았다.정작 이해리는 지극히 태연한 자태로 병상 옆에 걸터앉아 손에 든 귤을 느긋하게 까고 있었다.그러자 윤유나가 주눅 든 표정으로 정도원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난 밥만 두고 바로 갈 테니까 나 때문에 두 분 싸우지 말아요.”억울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처량하게 구는 윤유나를 보며 정도원은 대뜸 역정을 냈다.“내가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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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7화

마지막 경고는 명백히 윤유나를 향한 것이었다.말을 마친 이해리는 정도원을 의미심장하게 쏘아본 뒤 미련 없이 병실을 나섰다.이해리는 정도원이라는 남자에게 이미 그 어떤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렇기에 지금 윤유나가 펼친 처량한 생쇼를 눈앞에서 목격하고도 가슴이 아프기는커녕 아무런 감흥조차 일지 않았던 것이다.집으로 돌아온 이해리는 자신의 USB 메모리를 정지안의 서재에 두고 온 것을 떠올리고 서둘러 문을 밀고 들어가 그것을 챙기려 했다.변호사에게서 몇 가지 세부 조항을 보완해야 하니 가급적 오늘 안으로 추가 자료를 전부 제출해 달라는 연락이 온 터였다.책상 앞으로 다가간 그녀는 정지안의 컴퓨터 모니터가 여전히 켜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그리고 무심코 화면을 힐끗 본 순간, 이해리는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모니터에 뜻밖에도 두 사람의 다정한 투샷이 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구도로 보아 누군가 몰래 찍은 파파라치 컷 같았다.이해리는 그와 정식으로 기념사진을 찍은 기억이 없었기에 화면을 더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지난번 회사 야유회 때, 사진사가 나란히 밀착해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순간 포착한 컷이었다.묘한 카메라 각도 때문에 마치 이해리가 정지안의 품에 다소곳이 안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이런 낯간지러운 사진이 정지안의 모니터 한가운데를 장식하고 있다니...이해리는 마우스를 쥔 손에 힘을 주며 폴더를 뒤적였고 정지안이 두 사람의 투샷을 몰래 잔뜩 수집해 둔 사실을 알게 되었다.대부분 야유회 행사 사진 중 사진사가 찰나를 잡아낸 것들이었는데, 각도상의 착시로 연인처럼 다정해 보이는 장면이 수두룩했다.한 장 한 장 사진을 넘겨보는 이해리의 마음속에 묘한 감정들이 교차했다.‘이 남자, 정말 나한테 진심인 걸까.’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이런 사진들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그녀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바로 그 순간, 바깥 복도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정지안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발걸음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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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8화

하지만 이해리는 말을 내뱉자마자 후회가 밀려왔다.이건 유도신문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만큼 전혀 정교하지 못한 질문이었다.정지안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잔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은은하게 휘어지는 눈매 속에 담긴 속내는 깊은 심해처럼 아득해 보였다.“갑자기 그게 왜 궁금할까?”서재에 들어섰을 때부터 낌새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그는 이해리가 컴퓨터의 사진들을 보았으리라 짐작하고 있었다.그러니까 지금 이 술자리는 그의 심중을 떠보려는 그녀 나름의 귀여운 공작인 셈이었다.이해리는 와인을 가볍게 한 모금 들이켜고 조심스레 잔을 내려놓았다.“그날은 말해주기 곤란하다고 했으니, 며칠 지나면 얘기해 줄 줄 알았죠.”사실 오늘 특별히 술까지 준비한 것은 그를 적당히 취하게 만들어 속내를 불게 할 속셈이었다.그런데 어째서인지 판이 꼬여 자신이 오히려 덫에 걸려든 기분이었다.그런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치는 찰나, 정지안이 입을 열었다.“약속했잖아, 절대 널 해치지 않는다고. 그러니까 굳이 그렇게 세세하게 파헤치지 않아도 괜찮아.”‘하지만 이해리가 이토록 저의를 품고 다가오는 것은 나에게 조금이나마 신경을 쓰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적어도 예전처럼 나를 방관자로만 대하진 않는다는 의미겠지.’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정지안의 심장 깊은 곳에서 고요한 파문이 일었다.만약 그녀가 자신에게 정말로 호기심을 느끼는 거라면, 오히려 더 애간장을 태우며 애를 먹이는 게 마땅했다.그렇게 마음을 굳힌 정지안은 한층 더 모호한 태도로 질문을 피해 갔다.“나한테 다짜고짜 카지노만 물어보면, 내가 어디서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해?”이해리는 입술을 삐죽였다.“아무거나 상관없어요. 대체 어떤 상황인지만 알 수 있게 해주면 돼요.”“그래도 유독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하나쯤은 있을 텐데?”몇 번이고 핑퐁 같은 유도신문이 오간 끝에, 참다못한 이해리가 버럭 한마디를 내뱉었다.“당신 일부러 그러는 거죠! 내가 뭘 묻고 싶어 하는지 뻔히 알면서!”그녀가 가장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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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9화

그러더니 불과 몇 초 지나지 않아 그를 세차게 밀쳐냈다.“나 졸려, 잘 거야. 나쁜 놈이랑은 말 안 해.”거의 응석에 가까운 투정이었다.정지안은 그녀가 익숙한 몸짓으로 이불에 쏙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침대맡에서 일어섰다. 문득 아랫배에서 뜨거운 열기가 훅 치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조금 전의 살갗을 비비던 밀착 탓인지, 아니면 그녀의 치명적으로 사랑스러운 투정이 가슴속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인지 알 길은 없었다.침대에 누운 이해리를 한참 동안 빤히 바라보던 정지안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차가운 물줄기를 온몸으로 맞고 나서야 머리가 맑아졌지만, 남은 것은 가슴 한구석을 짓누르는 씁쓸한 실소뿐이었다.이튿날 아침, 이해리는 머리가 깨질 듯한 숙취를 느끼며 눈을 떴다. 어젯밤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기억이 도통 가물가물했다.방을 나서자마자 정지안과 마주친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물었다.“지안 씨, 어젯밤에 우리 같이 저녁 먹으면서 술 마셨나요?”“설마 또 아무것도 기억 안 나는 거야?”정지안이 입가에 짓궂은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이 여자는 주량은 약해도 다행히 술버릇이 고약하진 않았다. 다만 매번 필름이 끊겨 제 행동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흠이었다.하지만 그 덕분에 정지안은 그녀를 더욱 놀려주고 싶어졌다.“어젯밤에 너 엄청 취했었어. 내가 입도 열기 전에 나한테 매달려 입을 맞추더니, 기어코 침대로 가자고 떼를 쓰던걸.”그 말을 들은 이해리는 소스라치게 놀라 제자리에 굳어버렸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거예요! 내가 왜 그런 짓을 해요?”“이제 와서 잡아떼는 거야? 어젯밤에 술판 벌인 것도 너잖아. 나 취하게 만들려고 작정했던 것 아니었어?”정지안이 콕 짚어 말하자, 이해리는 어제 제 손으로 직접 와인을 챙겼던 기억이 퍼뜩 떠올랐다.‘하지만 내가 술을 준비했던 건 단지 그의 비밀을 캐내고 싶어서가 아니었나... 원래 내 계획이 뭐였더라?’이해리는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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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0화

전화 너머의 남자는 기가 죽었는지 한동안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이 없었다.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에야 정도원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변명을 주절거렸다.“유나는 지금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처지야. 오늘 컨디션도 별로고. 그런데 원래 계획대로라면 오늘 사기로 약속했던 물건들이라...”“됐어. 그 구구절절한 사정은 나랑 아무 상관도 없고 들을 흥미도 없으니까.”이해리는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짚으며 전화를 움켜쥐고 침대 가장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내가 전화한 건 그쪽 행동거지 좀 조심하라고 경고하려던 것뿐이야. 바깥에 우리 두 사람 지켜보는 눈이 한둘이 아니라고!”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정도원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이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화가 치밀어 오르긴 했지만, 이성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그저 정도원과의 지긋지긋한 관계를 하루빨리 이혼으로 매듭짓지 못하는 현실이, 마음 놓고 자신의 솔로 복귀 소식을 세상에 널리 알리지 못하는 이 상황이 야속할 뿐이었다. 이런 와중에 타인에게 구구절절 해명 아닌 해명을 해야 한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묘한 수치심마저 안겨주었다.한편, 전화를 끊은 정도원은 짜증이 극에 달한 채 서둘러 고른 물건들을 계산하고 백화점을 나섰다.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눈에 불을 켜고 윤유나에게 화풀이를 해댔다.“앞으로 뭐 살 일 있으면 나한테 부탁하지 마. 내가 돈을 안 준 것도 아닌데, 대행을 쓰든 뭘 하든 알아서 처리하란 말이야!”이해리 앞에서는 한마디도 제대로 대꾸하지 못하고 꾹꾹 참아야 했던 분풀이를 지금 윤유나에게 고스란히 쏟아내고 있는 셈이었다.윤유나는 가식적으로 제 배를 쓰다듬으며 조심스럽게 안색을 살폈다.“도원 오빠, 왜 갑자기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래요? 나갈 때는 기분 좋았잖아요. 도대체 무슨 일 있었어요?”“말도 마. 아기용품 매장에서 아는 사람 눈에 띄었나 봐. 그 오지랖 넓은 사람이 대뜸 이해리한테 전화를 걸어 물어봤다잖아.”정도원은 씩씩거리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윤유나를 향해 비난을 몇 마디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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