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끝나기 무섭게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정석주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태윤아, 시연이 말 못 들었니?”구태윤은 정루아의 손등을 엄지손가락으로 슬쩍 쓸어내리더니, 정석주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아버님, 시간이 너무 늦었어요. 지금 이런 얘기 해봤자 좋은 소리 안 나옵니다. 루아 데리고 먼저 들어갈 테니까, 내일 아침에 다시 어머님 뵈러 올게요.”그러고는 시선을 돌려 정시연을 빤히 쳐다보았는데, 그 눈빛이 어딘가 모르게 더 깊고 서늘해졌다.“급하게 나오신 것 같은데, 하준이는요?”정시연은 입만 벙긋거릴 뿐, 순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내가 지금까지 그 난리를 쳤는데, 고작 구하준 안부나 묻고 있다고?’하지만 대놓고 악을 쓰거나 안달복달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기에 간신히 감정을 추스르며 말했다.“나올 때 이미 잠들어 있었어요.”“얼른 가보세요. 애가 깼는데 엄마 없으면 자지러지게 울 겁니다. 이제 겨우 세 살인데, 형수님이 더 신경 쓰셔야죠.”구태윤의 말투는 지나칠 정도로 차분했다.정시연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하지만 엄마가 아직 정신도 못 차리고 계시는데...”“형수님이 여기 있는다고 어머님이 깨어나시는 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방해만 되니까 그냥 가세요.”구태윤의 목소리가 한층 더 가라앉았다.그가 뿜어내는 보이지 않는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안 그래도 무겁던 분위기가 전보다 훨씬 더 서늘하게 얼어붙자, 누구도 감히 토를 달 엄두를 내지 못했다.구태윤은 정루아의 손을 잡고 병실을 나섰다.이번에 그녀는 반항하지 않았다.그 순간 구태윤의 싸늘한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이 스쳤으나,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정루아는 구태윤을 구한 사람이 자신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하지만 구태윤이라는 남자는 믿지 못했다.그는 정시연에게도 다정했고, 그 여자의 아이에게도 극진했다.‘만약 구태윤이 날 의심하기라도 한다면?’자신이 쏟아부은 헌신을 전부 부정당한다면, 대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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