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8년의 짝사랑을 폐기 처분합니다: Chapter 111 - Chapter 120

124 Chapters

제111화

정시연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이 타이밍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단 한 마디조차도.심지어 자기 생각이 맞는지 의심마저 들었다.구태윤이 정말로 은혜를 갚으려는 걸까?왜 자꾸만 마음 한구석에 기묘한 이질감이 피어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정석주와 임혜숙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두 사람 역시 구태윤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5%는 확실히 좀 많은 편이었다.하지만 이제 와서 주지 않을 수도 없었다.정석주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그럼 자네 말대로 하지.”그는 비서를 돌아보며 계약서를 수정하라고 지시했다.정루아는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꼿꼿이 세우고 있던 등도 점점 구부러졌다.3%든 5%든, 정시연에게는 단 1%도 주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아무것도 없었다.무엇보다 가장 비참한 것은, 자기 심장에 가장 잔인하게 칼을 꽂은 사람이 바로 ‘구태윤’이라는 사실이었다.정루아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문득 이 지긋지긋한 거래를 더는 이어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일분일초라도 빨리 구태윤과 이혼하고 싶을 뿐이었다.그녀는 형용할 수 없는 실망감으로 얼룩진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내일, 법원에서 봐.”말을 마치고는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병원 밖으로 나오자마자,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장옥경의 번호를 눌렀다.“루아야, 왜?”장옥경은 전화를 금방 받았다. 목소리엔 다정함이 듬뿍 묻어났다.정루아는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어머님, 그 거래 더는 안 해요. 태윤이가 정시연이랑 엮이든 말든 관심 없어요. 이제 단 하루도 못 버티겠어요. 태윤이한테 저랑 법원에서 보자고 전해주세요.”장옥경은 순간 멍해지더니, 급하게 되물었다.“루아야, 일단 진정하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정루아는 휴대폰을 꽉 쥐었다.“그냥 제가 더는 참기 싫어서 그래요. 어머님, 전 스스로 떳떳해요. 결혼 생활 내내 아내로서 잘못한 적이 없었고, 어머님과 아버님께도 효도했어요. 이 정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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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화

“그건 좀...”임혜숙의 얼굴에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왜요?”구태윤이 짙은 눈썹을 치켜세웠다.“형수님은 입양된 딸인데도 지분을 챙겨주지 않습니까. 루아라고 안 된다는 법이 있나요? 설마 정말 루아 말대로, 두 분이 대놓고 자식 차별이라도 하시는 겁니까?”사위의 입에서 이런 소리를 들으니, 두 사람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정석주가 어두운 눈빛으로 구태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갑자기 그렇게 큰 지분을 넘겨주면 이사회 쪽에 명분이 안 서네.”“그건 해결하기 쉽습니다.”구태윤이 덤덤하게 받아쳤다.“두 사람 자질을 키워준다는 핑계로 회사 하나씩 맡겨서 경영 수업을 받게 하세요. 그러면 아무도 토를 달지 못할 겁니다.”정루아와 정시연이 실제로 회사를 경영할 줄 아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전문 경영인을 고용해서 맡기면 그만이었으니까.정석주는 침묵에 잠겼다.임혜숙이 복잡미묘한 시선으로 구태윤의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한마디 거들었다.“여보, 듣고 보니 확실히 그게 제일 깔끔한 방법 같네.”정석주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자네 말대로 하지.”그리고 비서를 돌아보며 물었다.“방금 들은 내용, 확실히 정리됐나?”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회장님.”정석주가 지시했다.“그럼 곧바로 진행해.”비서가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정시연은 한쪽에 서서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원래 제 몫이었던 5%의 지분이 3%로 줄어든 것도 모자라, 이제는 정루아까지 정원 그룹의 지분을 챙기게 됐다. 그것도 자기보다 더 많이.구태윤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정녕 그녀에게 은혜를 갚을 생각이 없는 건가?정시연은 치밀어 오르는 불쾌감을 억누르며 그를 바라보았다.“태윤 씨가 루아를 이렇게까지 끔찍이 챙기는 줄은 몰랐네요. 거짓말한 걸 뻔히 알고도 끄떡 안 하다니. 하지만 루아가 단단히 오해하고 가버렸으니 이걸 어째요?”구태윤은 가늘고 긴 눈매로 그녀를 덤덤하게 응시했다.“루아랑은 제가 알아서 해결할 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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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3화

“무슨 말인지, 아주 잘 알아들었을 텐데요.”낮고 부드럽게 울리는 구태윤의 목소리는 지독하리만치 무덤덤했다.“안 돼요.”정시연은 이를 악물고 내뱉었다.“나한테는 하준이밖에 없어요. 내 아들이라고요! 태윤 씨 마음대로 하준이를 뺏어갈 순 없어요.”하지만 구태윤은 그녀를 힐긋 바라보며 무미건조하게 받아쳤다.“하지만 형수님은 이제 그 아이를 돌볼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있어요! 나 하준이 잘 키울 수 있다고요!”정시연이 다급하게 매달렸다.“태윤 씨, 이러면 안 되죠. 하준이는 저랑 승태 사이에 남은 유일한 핏줄이에요. 그 애마저 곁에 없으면 나 진짜 죽어요!”구태윤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구승태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마음을 추스르려고 떠난 유학길.정시연은 거기서 기적처럼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고, 온 세상을 얻은 듯 기뻐했었다.그녀가 구하준에게 모든 감정을 쏟아붓고 있다는 건 구태윤 역시 너무나 잘 아는 사실이었다.구태윤의 눈빛이 한층 더 깊게 가라앉았다.“이제 일도 해야 하고, 아버님이 지분까지 주며 회사 하나 차려주신다니 겉치레로라도 자주 얼굴을 비춰야 할 겁니다. 앞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텐데, 일과 육아 둘 다 완벽하게 해내는 건 불가능해요.”어조는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웠으나, 그 안에는 감히 거절할 수 없는 서슬 퍼런 강압이 서려 있었다.“형수님. 둘 중 하나만 선택하세요.”정시연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태윤 씨,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구태윤은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전 그저 하준이가 다복한 환경에서 자라길 바랄 뿐입니다. 비록 아빠는 없어도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주변에 아주 많다는 걸 알게 해주고 싶거든요. 그 넓은 집에서 혼자 덩그러니 외롭게 자라게 두고 싶진 않아요.”정시연의 마음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구태윤은 지금 정원 그룹의 지분을 포기하라고 협박하고 있는 것이었다.그녀는 비로소 구태윤의 속셈을 알아차렸다.정루아를 위해, 제 아들을 인질로 삼아 위협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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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4화

구태윤의 날카로운 눈매에 한기가 서렸다.그의 목소리는 한층 더 가라앉았다.“전에 루아랑 어떻게 얘기하셨던 건데요?”“그게...”장옥경은 입을 뗐지만, 말이 턱 막혔다.속으로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었는지 차마 아들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그녀는 눈동자를 굴리며 대충 둘러댔다.“그냥 네가 앞으로 정시연이랑 거리 두겠다고 약속했지. 루아도 너한테 아직 감정이 남아 있으니까 내 체면 봐서 한 번만 더 넘어가 준다고 한 거였는데... 에휴, 일이 이렇게 꼬여버렸으니.”장옥경이 무력하게 한숨을 내쉬었다.자기도 이제는 손쓸 방도가 없다는 뜻을 넌지시 내비친 것이다.그러자 구태윤이 무심히 대꾸했다.“그럼 계속 그런 식으로 설득하세요. 나랑 루아, 이혼은 절대 안 합니다.”장옥경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나더러 또 가서 매달리라고? 너 지금 루아 눈에 내 꼴이 얼마나 우습게 보일지 생각은 안 해?”구태윤이 실소를 터뜨렸다.“원래 고부 관계라는 게 늘 좋을 수 없는 법입니다. 엄마도 이제 슬슬 그 환경에 적응하셔야죠.”“이 자식이...!”장옥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결국 거친 말이 튀어 나갔다.“아들이라는 놈이 어쩜 이래? 시어머니랑 며느리 보고 대판 싸우라고 부추기는 꼴 이라니.”구태윤은 덤덤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차갑게 못을 박았다.“어쨌든 이혼은 불가능하니까 그런 줄 아세요.”말을 마치고는 가차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장옥경은 이미 꺼져버린 휴대폰 화면을 노려보며 분통을 터뜨렸다.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했다.그때, 구성무가 다가오더니 넌지시 물었다.“또 태윤이 그 자식 때문이야?”장옥경이 관자놀이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그냥 따로 살아요. 이참에 분가해요. 조만간 그 쳐 죽일 놈 때문에 화병 나서 쓰러질 것 같아요.”구성무는 소파에 앉으며 말을 건넸다.“그나저나 당신이 태윤이한테 여자 소개해 주겠다던 자리는 어떻게 됐어? 진전이 좀 있나?”“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줄 알아요?”장옥경이 앓는 소리를 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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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5화

하지만 정루아는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문득 장옥경이 했던 말이 떠올라, 구태윤이 이혼 얘기하러 온 줄로 알았다.이내 그에게 다가가 맑고 투명한 눈동자로 싸늘하게 노려보았다.“굳이 여기까지 올 필요 없었어. 내일 바로 법원에서 보면 되잖아.”구태윤의 그윽한 시선이 그녀를 집요하게 옭아맸다.“루아야, 우리 이혼 안 해. 절대.”정루아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구태윤, 상황 파악 좀 똑바로 해. 처음부터 끝까지 나한테 상처 준 사람이 누군데? 그래 놓고 무슨 자격으로 이혼을 안 해주겠다고 버텨?”구태윤이 덤덤하게 받아쳤다.“내가 너한테 잘못했으니까 보상해 주면 되잖아. 이혼은 꿈도 꾸지 마.”정루아는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혔다.‘진짜 뻔뻔하기 짝이 없네!’그녀는 고개를 돌려 저만치서 보온병을 들고 서 있는 정호를 바라보았다.“감독님, 앞으로 이 사람 오면 절대 들여보내지 마세요.”정호는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구기자를 후후 불며 말했다.“그건 곤란해요. 이분이 우리 대주주라서.”정루아는 어이가 없었다.구태윤은 시종일관 그녀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네가 걱정하는 일,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야.”하지만 정루아는 더 이상 그와 쓸데없는 말씨름을 하기 싫었다.그녀는 몸을 돌려 다시 녹음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하지만 구태윤을 마주친 탓에 마음이 심란해져 이어진 녹음은 도무지 집중되지 않았다.결국 오늘의 작업을 아예 접고 대본에만 매달리며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혔다.구태윤은 오래 머물지 않고 곧바로 떠났다.정루아는 휴대폰을 꺼내 장옥경에게 전화를 걸었다.신호음이 세 번쯤 울렸을 때 통화가 연결되었다.“루아야.”장옥경의 목소리는 냉담했다.“우리 거래를 이런 식으로 흐지부지 넘길 수는 없다. 네가 일단 수락했으면 약속을 지켜야지, 안 그래?”정루아가 말했다.“구태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세요? 우리 부모님이랑 한패가 되어 정원 그룹 지분을 정시연한테 넘겨줬어요.”장옥경의 안색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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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6화

한 장의 사진이 눈길을 사로잡았다.구태윤의 잘생긴 눈썹이 한껏 찌푸려졌고, 안색도 눈에 띄게 굳어졌다.이내 그는 거칠게 핸들을 꺾어 정시연이 사는 아파트로 향했다.집에서는 도우미가 구하준과 한창 놀아주고 있었다.구태윤을 보자마자 아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작은아빠!”조그만 몸집이 날아들 듯 품으로 들이닥쳤고, 구태윤은 한 손으로 구하준을 번쩍 안아 올렸다.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작은아빠랑 놀러 갈까?”“네, 좋아요!”잔뜩 신이 난 구하준은 구태윤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눈부시게 빛났다.구태윤은 아이를 안아 든 채 발걸음을 옮겼다.그 모습을 본 도우미가 무의식적으로 뒤를 쫓으며 물었다.“대표님, 도련님 데리고 어디 가시는 건가요?”구태윤이 시큰둥하게 말했다.“내가 뭐 자기 조카를 어디다 팔아넘기기라도 하겠어요?”도우미가 멋쩍은 듯 말꼬리를 흐렸다.“아, 아니요...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구태윤은 차가운 시선을 거두고 그대로 문을 나섰다.우두커니 남겨진 도우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정시연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차는 구명 그룹으로 직행했다.구태윤은 구하준을 품에 안고 대표실이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이동하는 내내 녀석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거리기 바빴다.“여기가 마음에 들어?”구태윤의 질문에 구하준이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러더니 구태윤을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었다.“하지만 작은아빠랑 같이 있어서 더 좋아요.”구태윤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그는 한민혁에게 간식과 장난감을 사 오라고 지시한 뒤, 구하준을 데리고 사무실로 들어갔다....한편, 도우미의 연락을 받은 정시연은 안색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결국 하던 일도 내팽개치고 구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몇 번을 연이어 걸어도 연결이 되지 않았다.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다가 조퇴를 신청했다.하지만 팀장의 반응은 냉담했다.“오늘 지각까지 해놓고선 남은 업무며 녹음 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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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화

정시연은 누군가 구태윤에게 이상한 말을 흘렸고, 자신을 경고할 목적으로 움직인 것이라 착각했다.물론 이 모든 게 정루아 때문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문제의 사진은 애초에 딱 한 사람에게만 공개된 게시물이었으니까.덕분에 그녀는 겉으로나마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구태윤의 칠흑처럼 어두운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이내 싸늘한 눈빛으로 쏘아보며 무심하게 물었다.“정말 우리 형을 사랑하긴 해요?”정시연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 난 오직 승태뿐이에요. 사랑하지도 않은 사람의 아이를 왜 낳겠어요?”구태윤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알겠습니다. 하준이 데리고 가요.”정시연은 그제야 십 년 감수한 듯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이내 뒤돌아서 구하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몸을 숙여 아이를 품에 꼭 안고 다정한 어조로 물었다.“하준아, 엄마 안 보고 싶었어?”구하준은 정시연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보고 싶었어요.”정시연은 아이의 뺨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그럼 엄마랑 집으로 갈까?”“좋아요.”구하준은 평소보다 얌전해진 태도로 대답했다.정시연은 아이를 품에 안은 채 곧장 밖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바로 그때, 한민혁이 노크하며 들어왔다.그는 정시연을 보고 멈칫하더니, 곧장 구태윤에게 시선을 돌렸다.“대표님, 지시하신 조사 결과 나왔습니다.”구태윤은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덤덤하게 내뱉었다.“얘기해 봐.”그러나 한민혁은 선뜻 입을 떼지 못했다.정시연이 눈치껏 양해를 구했다.“태윤 씨, 그럼 난 이만 가볼게요.”“그냥 있어요.”구태윤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그러고는 한민혁을 올려다보았다.“얼른 얘기해.”한민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보고를 이어갔다.“당시 지진 현장에 큰사모님이 계셨던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사모님이 대표님을 구조하는 모습을 목격했다는 증인도 확보했습니다.”정시연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커졌다.구태윤이 기어코 과거의 행적까지 들춰낼 줄은 몰랐다.그나마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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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화

정시연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지만, 눈빛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일렁거렸다.“참 기가 막히죠? 태윤 씨, 난 그때 그냥 사람 한 명 구했던 것뿐이에요. 진짜 꿍꿍이가 있었다면 8년이라는 시간 동안 말 한마디 안 하고 버텼을 리가 없잖아요. 나 먼저 하준이 데리고 갈 테니까 볼일 봐요.”말을 마치고는 미련 없이 사무실을 나섰다.구태윤의 길고 곧은 손가락이 만년필을 꼭 쥐고 있었다.칠흑처럼 어두운 눈동자는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었다.옆에 서 있던 한민혁이 그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대표님, 조사를 계속 진행할까요?”그러자 구태윤이 명령했다.“지진이 일어났을 때, 정루아가 어디에서 뭐 하고 있었는지 알아봐.”한민혁이 대답했다.“네, 알겠습니다.”...정루아는 이연희와 밥을 먹기로 약속했다.고깃집 안은 맛있는 냄새로 가득했고, 불판 위에서 고기가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리가 사람의 기분까지 들뜨게 했다.어두운 안색의 친구를 보자 이연희는 미간을 찌푸리며 걱정스럽게 물었다.“루아야, 너 어제 잠 못 잤어?”정루아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눈동자에도 생기가 전혀 없었다.“우리 부모님이 정원 그룹 주식을 정시연한테 넘기는 걸 어떻게 해야 막을 수 있을까?”그녀가 깊은 시름에 잠긴 채 말했다.“뭐라고?”이연희는 기겁하며 펄쩍 뛰었다.“둘 다 미친 거 아냐? 가업을 입양 딸한테 물려준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네. 정시연 그년이 도대체 무슨 수를 썼길래 이 정도로 유난을 떠시는 건데?”정루아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너도 너무 과하다고 생각하지?”“당연하지!”이연희가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우리 부모님이 만약 이러시면 난 진짜 목숨 걸고 싸웠을 거야.”정루아는 턱을 괸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중얼거렸다.“부모님은 정시연한테 유독 쩔쩔맨단 말이지. 편애도 그런 편애가 없고, 끔찍이 아끼다 못해 이제 그룹까지 주려고 하잖아. 그게 꼭... 무슨 죗값을 치르거나 보상해 주려는 것 같다니까? 너는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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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화

정루아의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내가 언제 기다려 달라고 했어?”구태윤이 그녀의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지진 났을 때 말이야, 무슨 일 있었는지 제대로 얘기 좀 해줘.”정루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이내 구태윤을 매섭게 쏘아보며 따졌다.“무슨 뜻이야? 지금 나 못 믿겠다는 거야?”구태윤이 옆에 있던 관리소장을 힐긋 쳐다보았다.“그만 가보셔도 됩니다.”관리소장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아, 네.”관리소장이 가고 난 뒤, 다시 정루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들어가서 얘기할까?”정루아는 입술을 꾹 깨물고 마지못해 도어락을 열었다. 가슴 한구석에서 배신감이 울컥 치밀었다.그러다 실소를 터뜨렸다.이 남자의 마음속에서 정시연이 차지하는 비중이 어마어마하긴 한가 보다. 고작 몇 마디 징징거렸다고 철석같이 믿고 여기까지 쫓아오다니.‘하, 기가 막혀서 진짜.’문을 열고 들어간 정루아는 싸늘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남자를 차갑게 쏘아보았다.구태윤은 휴대폰을 켜서 영상 하나를 보여주었다.한민혁이 조사를 진행하면서 목격자를 찾아가 찍은 인터뷰 영상이었다.영상 속 목격자는 당시 지진이 일어났던 현장을 회상하고 있었고, 한민혁에게서 건네받은 두 장의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목격자는 사색에 잠기다가 기억을 더듬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확신이 안 서는 듯 정시연의 사진을 가리켰다.“그때 워낙 정신이 없긴 했는데, 어떤 여자애가 다시 뛰어 들어가더니 돌무더기에 깔린 남자애를 부축해서 나오더라고요. 진짜 위험한 상황이라 무서워 죽겠는데도 그 장면만큼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요.”“말도 안 돼!”정루아는 휴대폰을 꽉 쥔 채 하얗게 질린 얼굴로 부인했다.이내 구태윤을 노려보며 말했다.“이 사람, 정시연이 위증하라고 매수한 게 틀림없어. 그 계집애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고도 남을 애라니까?”맞은편에 앉은 구태윤은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사람 시켜서 확인해 봤어. 형수님하고 아는 사이도 아니고, 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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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화

강압적인 힘에 짓눌려 버둥거려 보았지만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다. 무자비하게 내리누르는 악력 때문에 숨이 턱 막혀왔다.하지만 구태윤은 얼굴을 더 바짝 밀착하더니, 그녀의 입술 끝에 스치듯 키스했다.“루아야, 어떻게 날 속일 수가 있어?”가벼운 말투는 화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말이 끝나기 무섭게 또다시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읍...!”정루아는 어떻게든 피해 보려고 발버둥 쳤다.그때, 구태윤이 몸을 틀어 그녀를 소파 위로 눕히더니 긴 다리로 눌러 꼼짝 못 하게 결박했다. 이내 두 손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린 채 거칠게 입을 맞춰왔다.여유만만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마침내 드러난 본성은 그녀를 통째로 집어삼킬 듯, 활활 타오르는 불길처럼 뜨거웠다.이건 결코 원하던 상황이 아니었다.구태윤은 그녀에게 속았다며 확신하고 있었지만, 맹세코 단 한 번도 거짓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잘못 기억할 리도 없었다. 그때, 죽어 가던 그를 살려낸 사람은 분명 자신이었으니까.그런데 이제 와서 그녀를 의심하는 것도 모자라 복수까지 다짐하다니.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함께한 지 어언 8년, 무려 8년이라는 세월이었다.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설마 그동안 느끼지도 보지도 못했단 말인가?이제 와서 고작 이런 오해 때문에 복수하겠다니?정루아는 심장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것만 같았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통증에 작은 스침에도 온몸이 덜덜 떨렸다.그는 고통 속에서도 잔인하게 희열을 강요했다.하지만 그녀에게는 고문이자 형벌에 불과했다.호흡은 갈수록 거칠어졌고, 옷가지들이 널브러진 바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구태윤의 숨결은 점점 뜨거워졌다.그러다 문득 그녀를 안고 욕실로 향하더니 쏟아지는 뜨거운 물줄기 속에서 차가운 벽으로 밀어붙였다.극단적인 감각의 충돌에 그녀는 쉴 새 없이 떨었다.시종일관 저항해 보았지만, 이미 힘이 다 빠져버린 몸부림은 애달픈 유혹처럼 보일 뿐이었다.이성을 잃은 구태윤은 미친 사람처럼 몇 번이고 그녀를 탐했다.밤은 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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