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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1화

이건모가 강이주 앞에 앉았다. “강 대표님, 정말 죄송...”“이 대표님이 말씀하시는 사과가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네요. 형식적인 말은 그만하셔도 됩니다.” 이건모의 말이 끝나기 전에 강이주가 차갑게 끊었다.강이주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덧붙였다. “약속 시간 하나 지키지 못하는 분과는 굳이 거래를 이어 갈 필요가 없겠네요.”그 말을 들은 이건모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출발 직전에 갑작스러운 일이 생긴 건 사실이었다.그래도 이렇게 무성의하게 나온 건 강이주가 여자라는 이유로 대충 사과해도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강이주는 이건모의 태도에 분명히 화가 나 있었다.이건모는 어색하게 헛기침하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아닙니다. 제 잘못입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래도 거래 이야기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강 대표님, 화 푸십시오.”그제야 이건모도 자신이 어렵게 강이주와 약속을 잡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더구나 강이주는 다친 다리까지 이끌고 나온 상태였다. 자신의 지각 때문에 협상 자체가 무산된다면 손해가 너무 컸다.태도를 바꾼 이건모를 보면서도 강이주는 차갑게 웃기만 했다.옆에 있던 임설도 봐주지 않았다. “이 대표님이 지금 진심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업하시는 분이 가장 기본적인 약속 시간조차 못 지키시는데 뭘 더 이야기하겠어요?”“늦어 놓고 사과도 무성의하게 하셨잖아요. 설마 이 대표님이 잘못한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임설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속한 시간은 이미 지났고 강 대표님은 병원으로 돌아가 드레싱도 받으셔야 합니다. 식사는 이 대표님 혼자 천천히 하세요.”임설이 강이주의 휠체어를 밀고 나가려 하자 이건모가 급히 일어나 두 사람 앞을 막았다.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저 정말 일부러 늦은 게 아닙니다. 강 대표님도 이렇게까지 깐깐하게 나오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이건모도 오는 길에는 자신의 지각과 무성의한 사과 때문에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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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2화

식사가 한창일 때 강이주에게 이건모의 메시지가 도착했다.처음에는 이건모가 계속 전화를 걸어왔다.강이주는 오는 전화마다 전부 거절했다.방법이 없어진 이건모는 결국 메시지로 사과하기 시작했다.길게 이어진 사과문은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강이주는 긴 글을 읽을 생각도 없이 한 줄만 답했다. [진짜 대표를 데리고 와서 저랑 이야기하세요.]그 한마디에 이건모의 답장은 바로 끊겼다.구기빈이 웃으며 물었다. “뭐래?”강이주는 핸드폰을 구기빈에게 내밀었다. “장문의 사과글을 쓰고 있더라. 한번 봐.”구기빈은 핸드폰을 받아 꽤 진지하게 읽더니 말했다. “이제 와서는 사과가 제법 진심인데? 아까 그쪽 식사비는 빼 줄까?”조금 전 이건모가 있던 룸에서 주문한 음식은 아직 계산하지 않은 상태였다.임설은 강이주를 데리고 나오면서 친절하게도 상대 테이블에 와인 한 병을 더 주문해 줬다.물론 그 비용도 전부 이건모가 계산할 몫이었다.장소를 고른 것도 이건모였고 룸을 예약한 것도 이건모였다.게다가 강이주와 임설은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으니 이건모가 식사비를 내는 게 이상할 것도 없었다.강이주가 한 끼 식사비를 아까워할 형편은 아니었지만 임설이 한 행동을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그런데 구기빈이 갑자기 식사비를 빼 주자고 하자 강이주가 바로 거절했다. “그 사람도 밥값 못 낼 형편은 아니잖아.”어차피 이건모에게는 작은 이득도 챙겨 주고 싶지 않았다.구기빈은 다시 웃음을 터뜨렸지만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핸드폰을 강이주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할아버지 쪽은 이제 동의하셨어.”본가로 돌아간 뒤 구계배는 가문의 사당에 들어가 몇 시간 동안 나오지 않았다.이미수가 몇 번이나 불러도 구계배는 끝내 문을 열지 않았다.구계배가 아무리 말려 봐야 구기빈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결국 손자의 결정을 받아들이기로 했다.강이주는 젓가락을 멈추고 놀란 듯 물었다. “할아버지가 마음을 바꾸셨어?”“응.” 구기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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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3화

“정말 다리를 못 쓰는지 아닌지는 이미 몇 번이나 확인해 보셨잖아요?”강이주는 그들이 몰래 벌인 일을 전혀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태도가 우스웠다.구희도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어쩔 수 없습니다. 저도 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 아버지의 지시대로 움직일 뿐입니다.”자신은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 뜻이었다.강이주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누가 뒤에서 시켰는지는 관심 없습니다. 구희도 씨가 이 지분을 원하시는 거라면 저도 못 드릴 이유는 없어요.”“전에 구호민 회장님께는 시세의 세 배를 요구했는데 거절하셨죠. 오늘은 구희도 씨가 직접 원하신다고 하니 네 배 받겠습니다. 한 푼도 깎을 생각 없어요.”구희도는 오기 전부터 강이주가 높은 가격을 부를 거라고 예상했다.그래도 네 배라는 금액은 예상 범위를 크게 넘어섰다.강이주가 이어 말했다. “구씨 집안 방계 중 한쪽에서는 이미 네 배까지 주겠다고 제안했어요. 그래도 구희도 씨는 기빈 씨 동생이니까 괜히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동의하시면 지금 바로 계약할 수 있어요.”강이주는 준비해 온 지분 양도 계약서를 꺼냈다.눈앞에 놓인 계약서를 본 구희도는 강이주가 처음부터 준비하고 왔다는 걸 알아차렸다.구희도는 강이주를 위아래로 천천히 살폈다.돌아오기 전에도 강이주에 대해서는 따로 조사해 둔 상태였다.자료만 봤을 때는 다소 순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구희도는 처음부터 강이주를 얕볼 생각은 없었다.다만... 직접 상대해 보니 예상과는 다른 면을 보여 주고 있었다.계약서를 내민 뒤 강이주는 더 말하지 않았다. 구희도가 스스로 계산하도록 조용히 기다렸다.구희도는 계약서를 내려다보며 강이주가 이렇게 쉽게 지분을 넘기려는 태도가 구계배의 결정과 관련 있는 건 아닐지 생각했다.구계배는 최종적으로 허락하기 전에 일부러 사람을 보내 구호민을 본가로 불렀다.구씨 집안 방계 가운데 영향력이 있는 원로들도 함께 불러 모았다.구계배는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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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4화

돌아가는 길에 강이주는 구기빈에게서 전화받았다.구기빈은 구희도와의 협상이 어떻게 됐는지 물었다.강이주는 사실대로 답했다. “괜찮았어. 돈 마련할 말미를 사흘 줬어. 그 정도 돈이면 그 사람한테 아예 불가능한 액수는 아니야.”문제는 구희도나 구호민이 그만한 돈을 정말 내놓을 생각이 있느냐였다.구기빈이 낮게 답했다. [큰 문제 없을 거야.]지금 두 사람에게 남은 선택지는 사실상 이것 하나뿐이었다.구호민이든 구희도든 RG그룹의 경영권을 잡으려면 결국 돈을 내고 강이주에게서 지분을 사야 했다.특히 통제욕이 강한 구호민이라면 이 기회를 쉽게 포기할 리 없었다.구기빈이 처음부터 강이주에게 구호민 앞에서 대놓고 조건을 걸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구호민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지분을 사려 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그룹 최대 주주가 되어야 RG그룹 안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다.강이주는 구기빈이 확신 없는 일에 손을 대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이번에는 구기빈의 계획을 그대로 따라가기로 했다.구기빈이 하라는 대로 움직이면 된다고 생각했다.구기빈이 강이주에게 말했다. [돈 들어오면 당신이 다 가지고 있어. 그 사람들이 우리한테 미리 주는 축의금으로 생각해.]그 말에 강이주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그렇다면 정말 터무니없이 큰 축의금이었다.강이주는 더는 그 이야기를 이어 가지 않았다.이제 엘리베이터를 탈 거라고 말하려던 때 멀리서 민서호와 한 여자가 실랑이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강이주는 확신하지 못한 채 말했다. “저 앞에 민서호 씨가 보이는 것 같아. 일단 끊을게. 가서 맞는지 확인해 봐야겠어.”구기빈이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강이주는 전화를 끊었다.민서호와 실랑이하는 여자가 어딘가 낯익었다.강이주는 임설에게 민서호가 있는 쪽으로 휠체어를 밀어 달라고 했다.가까이 가서 보니 그제야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봤다.전에 자신과 부딪쳐 커피를 쏟았던 바로 그 여자였다.그때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맞아,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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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5화

민서호의 눈에는 의문이 가득했다.“양은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민서호의 추궁을 듣고서야 강이주는 뒤늦게 상황을 이해했다.‘그러니까 나한테 알려준 그 ‘양한별’은 가명이었지.’‘진짜 이름은 양은별...’‘양은별?’그런데 어째서인지 그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그 순간, 강이주의 머릿속을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양은별을 바라봤다.“혹시 양수은 여사님이 고모세요?”이제야 생각났다.양은별은 양씨 집안의 딸이었다. 게다가 민서호와 혼담이 오간 적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어쩐지 민서호가 변장하고 있는데도 단번에 알아보더라니.강이주의 시선이 민서호와 양은별 사이를 천천히 오갔다.위아래로 몇 번이나 훑어볼수록 묘한 생각이 들었다.‘두 사람, 생각보다 꽤 잘 어울리는데?’‘왜 보면 볼수록 그런 생각이 드는 거지?’양은별이 멋쩍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죄송해요. 일부러 속이려던 건 아니었어요. 사실 저... 고모 몰래 따라온 거거든요.”“네?”강이주의 표정에 의문이 더욱 짙어졌다.그 반응을 본 양은별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양은별은 결국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사실 고모가 강이주 씨 칭찬을 정말 많이 하셨어요. 이번에도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일부러 일정을 바꿔서 강이주 씨를 보러 오셨고요.”“저는 그냥 너무 궁금했어요. 대체 어떤 분이시길래 그 원칙주의자인 우리 고모가 그렇게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나 해서요. 그것도 만사를 제쳐 두고 직접 찾아올 정도로요.”양수은이 어떤 사람인가?말 그대로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그녀에게는 언제나 일이 최우선이었다.강이주가 원단을 구하기 위해 G시를 찾았던 이후부터, 양수은의 입에서 ‘강이주’라는 이름이 부쩍 자주 나오기 시작했다.그러니 양은별이 강이주에게 호기심을 갖게 된 것도 당연했다.급기야 인터넷으로 강이주에 관한 기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찾아보기까지 했다.덕분에 대강 어떤 사람인지도 알게 됐다.특히 처음 심원후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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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6화

강이주가 먼저 자리를 옮기자고 제안한 데다, 이곳은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당한 장소도 아니었다.민서호도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민서호는 강이주와 함께 양은별을 병실로 데려갔다.올라오는 동안 강이주는 이미 구기빈에게 메시지를 보내 상황을 알려 둔 상태였다.구기빈은 하반신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환자 역할에 충실하게 행동했다.강이주의 뒤를 따라 통통 튀듯 들어오는 양은별을 본 구기빈이 짓궂게 웃었다. “어느 집 예비 신부가 여기까지 쫓아왔나?”말을 마친 구기빈은 민서호에게 의미심장하게 눈썹까지 까딱였다.양은별이 민서호를 좋아한다는 건 이미 그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사실이었다.워낙 대놓고 쫓아다녔고, 민서호에게 몇 번이나 거절당하고도 포기할 기색이 없었기 때문이다.양은별은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민서호를 향한 마음이 농담이 아니라는 걸.민서호는 참지 못하고 친구에게 대놓고 눈을 흘겼다.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도 않은 채 코웃음을 쳤다. “입 좀 다물어. 그 입으로 사람 마음 후벼 파는 소리만 하지 말고.”그 말에 구기빈은 물론 강이주까지 웃음을 터뜨렸다.양은별의 시선이 병상에 누운 구기빈에게 향했다.곧장 이불 아래 가려진 두 다리에 눈길이 머물렀다.구기빈이 처한 상황을 떠올리자 안쓰러운 마음이 묻어났다. “저기... 제가 아는 실력 좋은 의사들이 꽤 있어요. 이주 씨, 조금 있다가 연락처 보내 드릴게요.”“구 대표님도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힘내세요. 기적 같은 일이 생길 수도 있잖아요.”누구라도 이런 일을 겪으면 짧은 시간 안에 마음을 추스르기 어려웠다.지금은 구기빈이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속으로는 분명 절망스럽고 괴로울 거라고 양은별은 생각했다.그 생각만 해도 구기빈이 너무 안쓰러웠다.다시 설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혹시 정말 방법이 없다면... 앞으로 남은 인생이 송두리째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강이주는 양은별이 진심으로 구기빈을 안타까워한다는 걸 알아차렸다.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저렇게 마음을 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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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7화

강이주의 표정을 알아챈 양은별은 얼른 정신을 차렸다.강이주와 눈이 마주치자 양은별은 어색하게 웃어 보인 뒤 민망한 듯 시선을 피했다.양은별은 괜히 병실 안을 둘러보며 가구와 소품을 하나씩 훑었다.정작 본인은 모르고 있었지만,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시선을 돌려 방 안을 살피는 모습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강이주는 양은별이 곤란해하는 걸 알아채고 더는 캐묻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시선을 거뒀다.계속 쳐다봤다가는 양은별이 정말 부담스러워할 것 같았다.민서호가 헛기침한 뒤 양은별이 자신을 보자 물었다. “네가 여기 온 거, 양 대표님은 모르지? 언제 돌아갈 거야?”양은별은 고개를 저었다. “당분간은 안 돌아갈래.”처음에는 그저 고모가 왜 강이주에게 그렇게 마음을 빼앗겼는지 직접 확인해 보려고 온 것이었다.‘아니, 잠깐. 마음을 빼앗긴 건 좀 이상하고.’‘계속 마음에 두고 있는 이유를 보러 온 거지.’그런데 여기서 어렵게 민서호까지 만났으니, 양은별이 일찍 G시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지금 양은별이 J시에 남겠다는 의지는 어느 때보다 강했다.민서호가 무심하게 흘겨봤다. “네가 여기 남아서 뭐 하게?”말이 끝나기도 전에 팔에 무언가가 감겼다.고개를 내리자 양은별이 두 손으로 민서호의 팔을 꼭 붙잡고 진지하게 말했다. “서호 오빠, 나 여기 남아서 오빠랑 같이 있을래. 나 보내지 마. 나 안 가고 싶어.”양은별은 민서호의 팔을 살살 흔들며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한층 부드럽게 낮췄다.평소처럼 민서호에게 붙어 애교를 부렸다.예전에는 이런 방법이 민서호에게 어느 정도 통하곤 했다. 당시에는 급한 일이 없었고, 민서호에게도 양은별을 달래 줄 만큼의 여유가 조금은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은 구기빈을 도와야 했고, 민서호의 정체 역시 당분간 드러나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양은별이 곁에 남는 건 위험 부담이 컸다.민서호는 양은별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 내며 표정을 굳혔다. “나 지금 아주 중요한 일을 하고 있어.”민서호는 짧은 설명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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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8화

“그럼...”강이주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은별 씨가 그냥 남아 계시면 안 될까요?”민서호의 의사를 묻는 말이었다.사실 강이주는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꽤 마음에 들었다. 너무 재미있었다.말이 끝나자마자 양은별이 존경스럽다는 눈빛으로 강이주를 바라봤다. “저도 그게 좋을 것 같아요.”양은별은 금세 신이 났다. 보면 볼수록 강이주가 마음에 들었다.민서호는 양은별이 일을 망칠까 걱정하고 있었다.하지만 강이주의 생각은 달랐다.이미 양은별이 민서호를 알아본 이상 계속 숨기는 것은 오히려 부자연스러울 것이다.양은별이 남는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생길 것 같지도 않았다.구기빈은 강이주의 생각을 알아채고 민서호에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도 별문제 없을 것 같은데.”부부가 나란히 그렇게 말하니 민서호도 더는 무작정 내보내기 어려웠다.민서호는 양은별을 똑바로 바라봤다. “남아도 돼. 대신 세 가지는 꼭 지켜.”“첫째, 넌 처음부터 나를 몰랐던 사람이야. 나는 민서호가 아니라 여기서는 ‘조일’이고, 구기빈이 고용한 경호원이야.”“둘째, 나랑 거리를 둬. 내 신분이 드러나면 안 돼. 반드시 지켜.”민서호가 잠깐 말을 멈췄다가 이어 갔다. “마지막으로, 무슨 일이 생겨도 끼어들지 마. 양은별, 만약에 이중 하나라도 어기면 바로 떠나.”양은별은 민서호가 이렇게까지 진지한 모습을 보이는 걸 좀처럼 본 적이 없었다.평소에도 차갑게 구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양은별에게는 꽤 너그러운 사람이었다.양은별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할게. 오빠가 하는 일 절대 방해하지 않을게. 나도 선은 알아.”민서호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몰라도, 양은별은 그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느낄 수 있었다.민서호가 다시 말했다. “지금부터 나랑 거리를 둬. 넌 나를 모르는 사람이야.”말이 끝나기도 전에 양은별은 민서호 곁에서 폴짝 떨어져 몇 미터나 거리를 벌렸다.양은별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저기 차가워 보이는 아저씨, 이 정도면 괜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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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9화

양은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핸드폰을 쥔 손이 심하게 떨렸다.양은별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전화받았다. “고모.”입을 열고 나서야 자신의 목소리가 잔뜩 잠겨 있다는 걸 깨달았다.양은별은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고 평소와 다름없는 척했다.수화기 너머로 양수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별아, 지금 어디야? 어디에 있든 바로 G시로 돌아와. 집에서 너한테 꼭 할 말이 있어.]양은별이 대답했다. “고모, 무슨 일인데요? 중요한 일이면 엄마나 아빠가 직접 전화하셨을 텐데요. 저 지금은 못 가요. 아윤이 실연해서 같이 바람 쐬러 다니고 있어요.”양수은도 허아윤을 알고 있었다. 양씨 집안 운전기사 허성규의 딸로, 어릴 때부터 양은별과 함께 자라 둘은 줄곧 친하게 지냈다.실제로 허아윤은 며칠째 양씨 집안에 없었고, 양수은도 허성규에게서 딸이 실연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다만 양은별이 허아윤과 함께 있을 줄은 몰랐다.양수은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윤이 실연해서 바람 쐬러 간 건 상관없어. 하지만 집에 정말 중요한 일이 생겼어. 넌 반드시 돌아와야 해. 지금 어디야?]양수은은 양은별의 위치를 거듭 물었다.양은별은 고모의 진지한 목소리를 듣자 금세 당황했다.“저 아윤이랑 북쪽에 있어요. 아윤이 어젯밤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다가 병원에 실려 왔어요. 제가 지금 곁에 있어야 해요. 이런 상황에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잖아요.” 양은별은 여기에 남기 위해 결국 거짓말을 했다. 당장은 양씨 집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이유가 무엇이든 지금 돌아가라는 말만큼은 받아들이기 싫었다.그 말을 들은 양수은은 무언가 떠올린 듯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알았어. 그럼 언제쯤 올 수 있어? 아주 급한 건 아니니까 네가 돌아오면 이야기하자.]아무래도 양은별이 직접 있어야만 꺼낼 수 있는 이야기인 모양이었다.양수은의 눈에는 복잡한 빛이 스쳤다.양은별은 입술을 깨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윤이 좀 진정되면 데리고 돌아갈게요. 오래 안 걸릴 거예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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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0화

양은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나 도박해서 큰돈 잃었어. 갚을 돈이 없어서 사채까지 알아보려 했고... 아마 그쪽에서 아빠한테 연락했나 봐.”“나도 내가 미친 짓 한 거 알아. 잘못한 것도 알아. 그런데 아빠 지금 엄청 화났을 거야. 지금 돌아가면 진짜 다리 부러질 만큼 맞을지도 몰라.”양씨 집안은 가정교육이 엄격했다. 어릴 때부터 가족 모두에게 범죄나 도박, 마약 같은 일에는 절대 손대지 말라고 단단히 가르쳤다.몸을 잔뜩 웅크린 양은별을 바라보던 민서호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네가 도박을 했다고? 양은별, 너 뇌가 없냐? 그 머리로 도박을 할 생각을 했어?”“차라리 머리까지 걸고 잃지 그랬어.” 민서호가 사납게 쏘아붙였다.양은별은 자조 섞인 농담을 했다. “머리까지 잃으면 목 없는 시체잖아. 그럼 진작 죽었지.”말이 끝나자마자 민서호의 차가운 눈초리가 날아왔다.양은별은 겁에 질려 목을 움츠리고 입을 꼭 다문 채 얌전히 침묵했다.민서호의 눈빛은 당장이라도 양은별을 잡아먹을 듯했다.한참 뒤에야 민서호가 차갑게 물었다. “얼마나 잃었어?”민서호의 압박 어린 시선에 양은별은 조심스럽게 손가락 하나를 펼쳤다.“1억 원?” 민서호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비서한테 보내라고 할 테니까 바로 갚아.”“양은별, 잘 들어. 또 도박 같은 데 빠지면 네 아버지가 네 다리를 부러뜨리기 전에 내가 네 손부터 묶어 놓을 거야.”민서호가 노려보며 말했다. “가끔은 네 머리를 열어서 대체 뭐가 들어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다.”“오빠가 들어 있지.” 양은별은 생각할 틈도 없이 반사적으로 대답했다.말을 해 놓고는 평소처럼 민서호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민서호는 할 말을 잃었다.양은별은 웃음을 거두고 조용히 덧붙였다. “근데... 1억 원 아니고 100억 원이야.”“100... 100억?” 민서호의 혈압이 다시 치솟았다.겨우 가라앉던 화가 그대로 폭발 직전까지 올라왔다.양은별은 시선을 마주치지도 못한 채 그의 살벌한 눈빛을 묵묵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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