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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1화

‘괜히 이런 핑계를 댔어.’양은별은 진심으로 후회했다.울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한 채 세상 다 잃은 표정을 지었다.민서호가 말을 이었다. “J시에서 돌아가면 나 따라 주성그룹으로 출근해. 일해서 빚 갚아. 다 갚기 전에는 못 나가.”예전 같았으면 양은별이 가장 좋아했을 말이었다.민서호 곁에 붙어 있을 핑계가 없어서 고민하던 때도 있었다.이제는 대놓고 곁에 있을 수 있게 됐는데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양은별은 기운 없이 대답했다. “네.”돌아간 뒤 정말 주성그룹에 들어갈 수 있을지부터가 문제였다.앞으로 벌어질 일을 떠올리자 도저히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양은별은 입술을 다문 채 굳은 표정을 지었다. 차라리 시간이 더 천천히 흘렀으면 했다.하지만 양은별도 알고 있었다. 올 일은 결국 온다. 피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민서호도 양은별이 평소와 조금 다르다는 걸 느꼈다.다만 크게 마음에 두지는 않았다. 빚 문제 때문에 가족을 어떻게 볼지 걱정하는 거로만 생각했다.민서호가 다시 말했다.“네 아버지께는 내가 가서 말씀드릴게. 그래도 너 이번에는 네 아버지한테 제대로 혼나 봐야 정신 차려.”양은별은 어릴 때부터 크고 작은 사고를 수도 없이 쳤고, 그때마다 아버지 양경민이 뒤처리를 해 왔다.양경민은 외동딸인 양은별을 무척 아끼는 사람이었다.하지만 원칙에 어긋나는 일만큼은 엄격했다.도박에 손댄 데다 액수까지 이 정도라면 민서호도 양경민이 이번에는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렇지 않으면 다음에는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었다.양은별이 기운 없이 대답했다. “됐어. 오빠 말이 맞아. 나도 이번에는 제대로 정신 차려야 해.”말을 마친 뒤에도 얼굴에는 여전히 우울한 기색이 남아 있었다.민서호는 아까 자신이 너무 심하게 말했나 싶어 잠깐 후회했다.양은별을 달래 주려던 민서호는 그제야 병실 안에 대놓고 구경 중인 두 사람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강이주와 구기빈은 병상 머리에 기대 나란히 앉아, 한 손으로 턱을 괸 똑같은 자세로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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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2화

그날 양은별은 눈가가 벌겋게 부은 채 병실로 돌아왔다. 누가 봐도 한바탕 울고 온 얼굴이었다.강이주는 걱정이 되어 말을 걸어 위로할까 잠시 망설였다.하지만 잔뜩 풀이 죽은 양은별의 얼굴을 보고는 나중에 묻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그런데 놀랍게도 양은별은 하룻밤 만에 스스로 마음을 다독였다.다음 날에는 꽃다발까지 품에 안고 밝은 얼굴로 강이주를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어제와 비교하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서호 오빠가 이주 씨는 튤립 좋아한다고 했어요.”양은별은 정성껏 고른 튤립 꽃다발을 강이주에게 내밀었다.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번져 있었다.강이주는 품 안의 싱싱한 꽃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고마워요.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시다니. 정말 마음에 들어요.”양은별이 골라 온 꽃다발이 진심으로 마음에 들었다.강이주가 좋아하는 걸 보자 양은별의 미소도 한층 밝아졌다.강이주는 오전에 CT 검사를 받았고, 상처는 꽤 순조롭게 회복되고 있었다.오후에는 재활 치료 일정이 잡혀 있었다.발의 실밥은 이미 제거했고 며칠째 약을 바르는 중이었다. 매일 한약재를 우린 따뜻한 물로 족욕도 병행했다.이제는 보조 기구를 이용해 천천히 바닥을 디디며 걷는 연습을 시작할 수 있었다.계속 누워 있거나 앉아만 있으면 다치지 않은 쪽 다리에도 부담이 갔다.적절히 움직여 주는 편이 혈액순환과 회복에 도움이 됐다.옆에서 유예준이 재활 시에 주의할 점을 설명하는 걸 듣던 양은별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이주 씨,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제가 옆에서 챙겨 드릴 수도 있고요.” 양은별은 부탁하는 눈빛으로 강이주를 바라봤다.강이주는 양은별이 저렇게 애처로운 눈을 하면 좀처럼 거절하기 어렵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결국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구기빈은 당연히 강이주의 재활에 동행할 수 없었다. 아직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사람인 척해야 했다.임설도 양은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강이주의 재활 준비를 돕던 임설은 양은별까지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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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3화

구호민이 이렇게까지 움직이는 이유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능한 한 빨리 손에 넣기 위해서였다.그 목적에 가장 쓰기 좋은 사람이 구희도였다.구호민에게 뒤틀린 방식으로 길들여진 구희도가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았다.구희도는 구호민이 필요할 때 꺼내 쓰려고 마련한 예비 꼭두각시에 불과했다.그런 구희도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별도의 세력을 키우는 걸 구호민이 허락할 리 없었다.애초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강이주는 그중 한 가지를 정확히 내다본 셈이었다.강이주가 임설을 바라봤다. “구희도 쪽은?”임설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거의 다 됐어요. 애가 타는 쪽은 저희가 아니잖아요.”구희도는 사흘의 기한을 입에 올리고 돌아간 뒤 미친 듯이 돈을 구하고 있었다.강이주가 가진 RG그룹 지분을 자신이 반드시 사들일 수 있다고 확신했다. 강이주가 결국 자신에게 팔 수밖에 없다고 믿고 있었다.구희도에게는 그만큼의 자신감이 있었다.하지만 정작 강이주는 그 지분을 오직 그들 쪽에 ‘팔’ 생각이었다.과정이 아주 깔끔하지는 않아도 원하는 결과만 얻으면 됐다. 방법이 세련됐든 거칠었든 효과가 있으면 충분했다.강이주는 주변을 한번 살핀 뒤 목소리를 낮춰 임설에게 말했다. “구희도가 전화해서 지분 이야기를 꺼내면 적당히 받아 줘.”왠지 구희도가 내일까지 기다렸다가 약속한 시각에 나타나지는 않을 것 같았다.‘어쩌면 직접 찾아올지도 몰라.’강이주의 예상대로 구희도는 정말 먼저 연락해 왔다.그날 재활을 마친 직후, 구희도에게서 시간이 되느냐고 묻는 전화가 걸려 왔다.강이주는 살짝 눈썹을 들어 올렸다. “병원 제 병실로 오세요.”말투와 태도에는 일부러 거만한 기색을 섞었다.전화 너머의 구희도를 자극하려는 의도였다.“미안하네요. 지금 저도 기빈 씨도 둘 다 걷지 못하는 상태라 구희도 씨가 직접 와 주셔야겠어요.” 강이주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강이주가 임설에게 말했다. “가자.”임설은 고개를 끄덕인 뒤 앞서 걷는 양은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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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4화

“일이 생겼어.”배진호는 문을 닫자마자 급한 걸음으로 구기빈과 강이주 앞까지 다가왔다.“기빈아, 네 어머니 사고 났어.”유만정은 어디서 들었는지 구희도가 강이주와 이야기를 끝내고 병원에서 지분 양도 계약을 체결할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아냈고, 그대로 이성을 잃었다.구씨 본가 고용인들이 말리는 것도 뿌리치고 구희도를 붙잡아 험한 말을 퍼부었다.모욕적인 말이 이어지자 구희도는 얼굴을 굳힌 채 유만정을 밀쳐 내고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유만정은 곧바로 차를 몰아 구희도의 뒤를 쫓았다.마침내 과속으로 따라붙은 뒤 속도를 더 올려 구희도의 차를 그대로 들이받았다.구희도가 알아차리고 핸들을 돌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두 차량은 그대로 충돌했다.유만정의 차는 현장에서 폭발했다.현재 유만정과 구희도 모두 가까운 병원으로 이송돼 응급 처치를 받고 있었다.둘 다 중상을 입었다고 했다.배진호의 설명을 다 들은 강이주와 구기빈은 서로를 바라봤다.유만정이 이런 식으로 끼어들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더구나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도 몰랐다.구기빈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깊게 가라앉은 눈에는 어둡고 날 선 기색이 어렸다.강이주는 손을 뻗어 구기빈의 손을 잡았다. 손바닥이 얼음처럼 차가워 가슴이 철렁했다.겉으로 내색하지 않을 뿐, 어머니인 유만정을 걱정하지 않을 리 없었다.강이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가서 보자.”구기빈에게 유만정을 보러 가자고 말하려던 참이었다.강이주가 말을 끝내기 전에 배진호의 핸드폰이 울렸다. 유만정과 구희도가 이송된 병원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배진호가 급히 구기빈을 바라봤다. “병원에서 연락 왔어. 네 어머니 상태가 위독하시대. 마지막으로 널 보고 싶다고 하셔.”유만정은 병원에 실려 올 때부터 계속 피를 토했고, 여러 장기가 심하게 손상돼 있었다.갈비뼈도 여러 개 부러졌다.그중 두 개는 폐를 찔러 출혈이 멎지 않았다.응급 처치가 이어지는 동안 유만정은 몇 번이나 쇼크가 오면서도 계속 구기빈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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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5화

구호민은 곁눈질로 구기빈이 다가오는 걸 확인했다.강이주와 구기빈은 구호민에게 가까이 가서야 두 사람은 처치실 밖에 경호원들이 여럿 배치돼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강이주는 의문이 들었다. ‘구 회장이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답은 오래 걸리지 않아 드러났다.구호민이 구기빈을 바라보며 웃었다. “왔구나. 네가 끝까지 모르는 척하면서 네 엄마가 죽든 말든 안 올 줄 알았다.”구호민의 시선이 구기빈의 다리에 고정됐다. “그만 연기해. 네 다리 멀쩡한 거 알아. 해외에 있는 사람도 네가 아니었고.”그 사실을 언제 알아챘는지는 조금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구호민은 처음 한동안 집요하게 시험을 거듭한 끝에 실제로 의심을 거뒀었다.워낙 의심이 많은 성격이라 완전히 손을 놓지는 않았지만, 계속된 확인 끝에 거의 믿은 상태였다.어제까지만 해도 구호민은 구기빈의 상태를 본격적으로 의심하지 않았다.이미 구기빈의 두 다리가 망가졌다고 믿고 있었다.오히려 조급해한 쪽은 유만정이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구기빈의 최근 검사 기록을 찾아내 이 분야에서 이름난 전문가들에게 다리를 봐 달라고 연락하려 했다.그런데 검사 기록 한 장에 적힌 수치 하나가 구호민의 의심을 되살렸다.구호민은 서류 가운데서 구기빈이 해외에서 돌아온 뒤 구씨 본가에서 받았다는 검사 결과지를 꺼냈다.“반월상연골 기능의 영구적 상실.” 구호민이 한 부분을 짚었다. “네 정기검진 결과는 매년 제일 먼저 내 손에 들어와. 그런데 네가 언제 반월상연골을 다쳤지?”이 결과지의 대상자가 구기빈일 수 없다는 뜻이었다.구호민은 곧바로 당시 검사를 담당했던 의사를 찾아 강제로 데려오게 했다.의사는 검사 결과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거듭 주장했다.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겠다며 검사 당일의 모든 CCTV까지 확인하라고 했다.강이주의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듯 긴장했다.옆에 있는 구기빈을 불안하게 바라봤다.구기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구호민의 시선을 그대로 받아냈다.구호민이 말을 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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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6화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강이주의 등에는 식은땀이 배었다.강이주는 자신이 구호민을 너무 얕봤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구호민은 검사 결과지 단 한 장으로 구기빈의 속을 꿰뚫었다.구호민의 말이 이어질수록 두 사람 사이의 싸움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 단계 더 위험해졌다.강이주는 처치실 밖을 지키는 경호원들이 단순히 경비를 위해 서 있는 게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속은 긴장으로 굳어 있었지만 겉으로는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했다.거짓이 들통났는데도 구기빈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주변을 차갑게 훑은 뒤 구호민에게 물었다. “원하는 게 뭡니까?”구호민이 굳이 사람을 보내 자신을 이곳까지 부른 데에는 분명 목적이 있었다.단지 거짓말을 폭로하려고 이렇게까지 판을 벌일 이유는 없었다.실제로 구호민은 오늘 구기빈을 일부러 이곳으로 불러들였다.여전히 휠체어에 앉아 있는 아들을 내려다보며 구호민이 코웃음을 쳤다. “네 엄마가 안에서 치료받을 수 있을지는 네 선택에 달렸어.”그는 피에 젖은 서류 봉투를 뜯더니 안에 있던 문서를 꺼내 찢어 구기빈 앞에 던졌다.지분 양도 계약서였다.강이주가 구희도에게 건넸고, 오늘 서명하기로 했던 바로 그 계약서.그 문서가 눈앞에서 갈기갈기 찢겨 바닥에 떨어졌다.구호민의 앞선 말을 떠올린 강이주의 마음은 차갑게 가라앉았다.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 눈에 그대로 드러났다.유만정은 엄연히 구호민과 혼인한 아내였다.그런데 구호민은 지금 유만정의 목숨을 인질로 구기빈을 협박하고 있었다.‘어떻게 남편이자 아버지라는 사람이 이럴 수 있어?’강이주는 충격을 감추기 어려웠다.반면 구기빈은 이미 익숙하다는 듯 무덤덤했다.구호민이 자신의 연기를 폭로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했다.이게 바로 구호민다운 방식이었다.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오랫동안 곁에서 길들여진 아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밖을 지키는 경호원들도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 유만정을 빼내지 못하게 하려는 장치였다.구호민은 새 계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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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7화

이제 남은 건 아들인 구기빈이 아버지의 냉혹함을 아주 조금이라도 닮아 친어머니의 목숨을 외면할 수 있느냐는 문제였다.강이주는 부자가 대치하는 틈에 구기빈 손에 있던 계약서를 가져와 읽었다.아래로 내려갈수록 얼굴이 굳었다.일방적인 독소조항뿐이었다. 어느 조항 하나 구기빈에게 유리한 게 없었다.끝까지 읽은 강이주는 어이가 없어 웃음조차 나올 뻔했다.강이주는 구기빈을 돌아봤다.구기빈이 진정하라는 눈빛을 보내자 계약서를 다시 그의 손에 돌려줬다.강이주는 구기빈이 이 일을 처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그래서 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구호민은 명백히 준비하고 온 사람이었다.아내에게조차 저렇게 냉혹한데 아들에게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강이주는 구기빈이 오랜 세월 구씨 집안에서 통제받으며 살아온 시간을 떠올리자 가슴 한쪽이 욱신거렸다.구호민은 태연하게 말했다. “살릴지 말지는 네 양심에 달렸지.”겉으로만 보면 선택권을 구기빈에게 넘긴 말이었다.실제로는 선택지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구기빈은 차갑게 굳은 얼굴로 계약서를 쥔 손에 힘을 줬다.겉으론 철저하게 억누르고 있었지만 강이주는 그가 폭발 직전의 감정을 누르고 있다는 걸 민감하게 느꼈다.여기에 서명하면 사실상 패배를 인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구기빈과 구호민은 차가운 얼굴로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강이주는 구기빈의 손을 잡았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자 조용히 말했다. “돈이야 다시 벌면 돼. 지금은 사람 목숨이 먼저야.”구기빈이 친어머니의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외면할 수 있을 리 없었다.누구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게다가... 강이주도 지분을 다시 구희도 쪽에 넘기는 것 자체는 원래 두 사람의 계획 범위 안에 있었다.다만 원래는 구호민에게서 상당한 대가를 받아 낼 생각이었다.그런데 구호민이 한 수 앞서 유만정의 목숨을 이용해 지분 전부를 공짜로 빼앗으려 했다.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구기빈은 사실상 빈손으로 집안에서 쫓겨나는 조건이었다.그래도 최종 방향만 보면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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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8화

구기빈은 처치실 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굳게 긴장한 얼굴과 달리 눈에는 걱정이 감추지 못한 채 번져 나왔다.유만정의 상태는 좋았다가 나빠지기를 반복했고, 대부분의 시간은 구호민의 통제 아래 있었다.그래도 유만정이 옳게 말한 것이 하나는 있었다.자신이 구호민에게 오랫동안 정신적으로 지배당하면서도, 유만정은 흐트러진 정신 상태를 핑계 삼아 구기빈에게 절대로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끊임없이 주입했다.상처투성이가 되고 몇 번이나 목숨이 위태로웠을 때조차 유만정은 미친 사람처럼 매달려 그 말을 반드시 기억하라고 구기빈에게 말했다.어린 구기빈은 그 나이에 감당할 이유가 없던 고통과 절망을 견뎌야 했다.구호민과 유만정 양쪽에서 몰아붙이는 환경 속에서도 정신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일 정도였다.그럼에도 구기빈은 어머니로서 유만정이 완전히 무책임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유만정의 불안정한 상태 역시 언제나 본인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몇 번은 자기 손으로 구기빈이나 구희라를 해칠까 두려워 스스로 거리를 두려고 했고, 구호민은 그걸 빌미로 유만정을 정신의료기관에 입원시키기도 했다.유만정이 구기빈과 구희라를 보호하려 했던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구기빈도 유만정에게 정말 큰일이 생기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두 손이 자신도 모르게 단단히 맞물렸다.그때 손등 위로 따뜻한 손이 조심스럽게 포개졌다.강이주가 구기빈의 손을 잡았다. “괜찮을 거야. 당신도 너무...”너무 나쁜 생각부터 하지 말고 치료 결과를 기다려 보자고 위로하려 했다.하지만 강이주가 말을 끝내기 전에 처치실 문이 열렸다.담당 의사가 무거운 표정으로 두 사람 앞에 섰다. “죄송합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환자를 살리지 못했습니다.”사고가 너무 심각했다.유만정은 병원에 실려 올 당시 겉으로 보기에는 큰 외상이 많지 않아 보였다.문제는 대부분 몸 안에 있었다.폐를 찌른 두 개의 갈비뼈뿐 아니라 여러 장기가 심각하게 파열돼 있었다.의사의 말을 다 들은 뒤에도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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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9화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모든 것은 끝난다. 이제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게다가 유만정은 구기빈의 어머니였다.구기빈은 눈을 내리깔아 강이주를 바라봤다.마침 강이주도 고개를 들어 그를 보고 있었다.눈이 마주치자 강이주는 차갑게 떨리는 구기빈의 손을 꼭 잡았다. 말없이도 자신이 곁에 있다는 뜻을 전했다.구기빈은 천천히 시선을 거둔 뒤 그 자리에 서서 유만정을 오래 바라봤다.마침내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손을 들어 유만정의 눈 위에 올린 뒤 조심스럽게 감겨 주었다.구기빈의 손이 심하게 떨리지 않았다면 구기빈의 속이 얼마나 무너지고 있는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표정만 보면 너무 냉정하다며 누군가는 또 함부로 말했을지도 몰랐다.구기빈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잠시 뒤 강이주의 휠체어를 밀고 밖으로 나왔다.민서호는 복도 벽에 기대서 있었다.구기빈이 강이주를 데리고 나오자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기빈아...” 민서호가 입을 열었다가 구기빈의 벌겋게 충혈된 눈을 보고 말을 삼켰다.구기빈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이주 좀 병원으로 데려다줘. 부탁할게.”“나 안 갈 거야.” 강이주는 고개를 저었다.이런 때에 구기빈 곁을 떠날 생각은 없었다.민서호도 반대했다. “희라도 아직 오는 중이고 네가 처리할 일도 많잖아. 사람 손이 필요할 테니까 우리도 남을게.”말이 끝나자 흰 천으로 덮인 유만정이 처치실 밖으로 옮겨져 나왔다.사망 시각을 확인한 뒤 구기빈은 병원에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 달라고 해 유만정을 그쪽으로 옮겼다.구희라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볼 권리가 있었다.구기빈은 장례 절차도 준비해야 했다.유만정은 구호민과 결혼한 뒤 그의 통제 아래 친정과 거의 모든 연락을 끊고 살았다.부모님까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유씨 집안과 사실상 완전히 단절됐다.그래도 친정 쪽 가족들에게 부고는 전해야 했다.구기빈과 강이주는 유만정이 있는 방에 남았다.구기빈은 물을 받아 와서 유만정의 얼굴에 말라붙은 피를 닦기 시작했다.유만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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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10화

구희라가 J시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저녁이었다.유만정은 그때 영안실로 옮겨진 뒤였다.구희라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은 심하게 울어 퉁퉁 부어 있었다.오는 내내 얼마나 울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뒤에는 간승제가 따라오고 있었다.유만정이 영안실로 옮겨진 뒤부터 구기빈은 줄곧 그 앞을 지키고 있었다.강이주도 곁에 남아 있었다.구희라는 제대로 걷지도 못할 만큼 비틀거리며 달려왔다.구기빈을 발견하자마자 품으로 뛰어들어 서럽게 울었다. “오빠, 엄마가 어떻게...”그 뒤의 말은 끝내 잇지 못했다.구희라는 구기빈을 끌어안은 채 심하게 떨었다.어머니의 죽음에 정신이 완전히 쏠려 있어 구기빈이 두 발로 서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구기빈은 짧은 오후 동안 억지로라도 감정을 추슬러 놓은 상태였다.구희라가 마음껏 울도록 내버려두고 등을 천천히 두드렸다. “울어. 괜찮아.”구호민은 장남인 구기빈의 교육에 유난히 엄격했다.유만정도 어머니라고 해서 구기빈의 교육에 함부로 끼어들 수 없었다.하지만 구희라는 달랐다.막내이자 딸이었던 구희라에게 구호민은 구기빈이나 구희도만큼 가혹하지 않았다.구기빈과 구희도는 태어난 지 한 달가량 지나자 유만정 곁을 떠나 별도로 양육됐다.전담 보육 인력과 영양 관리까지 따로 붙었다.반면 구희라는 유만정이 직접 곁에 두고 키웠다.그래서 구희라가 어머니에게 품은 애정은 두 오빠보다 더 깊고 진했다.구기빈에게서 유만정이 교통사고로 응급 처치를 받고 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구희라는 완전히 무너졌다.간승제에게 곧장 J시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돌아오던 중 다시 걸려 온 전화에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들었다.구희라는 체면도 잊은 채 소리 내 울었다.운전하던 간승제조차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몇 번이나 울다가 의식을 잃을 듯했고, 달래면 달랠수록 더 서럽게 울었다.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얼굴이 창백했고 두 눈은 심하게 부어 있었다.그래도 버티며 구기빈에게 달려든 구희라는 품 안에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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